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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5상 -안정복(安鼎福) -

천하한량 2007. 6. 12. 18:53

동사강목 제15상갑진 고려 공민왕 13년부터, 갑인 공민왕 23년까지 11년간   

 

 

정미년 공민왕 16(원 순제 지정 27, 1367)

 

 

춘정월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세 왕의 시호를 내렸다.

 

영릉(永陵)은 충혜(忠惠), 명릉(明陵)은 충목(忠穆), 총릉(聰陵)은 충정(忠定)이라 하였다. 아울러 공신호(功臣號)도 내렸다.

○ 원에서 덕녕 공주(德寧公主)를 정순 숙의공주(貞順淑儀公主)로 봉하였다.

○ 혜성이 땅에까지 드리워졌다.

 

이때 밤인데도 밝고, 붉고 검은 기운이 서리는 변괴가 일시에 아울러 일어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 원에서 신돈을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 삼았다.

 

돈이 원의 선사(宣賜)를 집에서 받아서는 자리 곁에 밀쳐 놓으며 말하기를,

“어찌 이 따위를 쓰리요. 다만 저들이 준 것이니 버리지는 못할 뿐이다.

하였다. 그 교만하기가 이와 같았다.

2월 환자(宦者) 신소봉(申小鳳)으로 정릉(正陵 노국 공주의 능)을 지키게 하였다.

 

【안】이것이 후세 수릉관(守陵官)의 시초이다.

○ 원의 사신 고대비(高大悲)가 제주(濟州)에서 왔다.

 

당시 원주(元主)는 제주에 피난(避亂)하려는 생각으로 어부(御府)의 금백(金帛)을 실어오고 이에 명을 내려 제주를 다시 본국(本國 고려)에 소속시켰다. 당시 목호(牧胡 제주에서 목마(牧馬)를 담당한 호인(胡人))가 자주 목사(牧使)와 만호(萬戶)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므로 전라도순문사(全羅都巡問使) 김유(金庾)를 보내어 1백 척의 배를 모집하여 토벌케 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목호가 이 사실을 원에 호소하고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은 원에 대해 김유가 제주를 토벌하려 한 것이 아니고 왜구를 잡으려 추격해 제주 지경에 이르니 목호가 망령되이 의혹을 내서 서로 싸우게 되었을 뿐이라고 아뢰고, 본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사와 만호를 파견하여 목호가 기를 말을 가려 바치기를 이전처럼 하도록 청하여 원에서 이를 따랐다.

3월 왕이 현릉(顯陵)을 배알하고 드디어 정릉(正陵)으로 갔다.

 

왕이 현릉(顯陵 태조 능)ㆍ의릉(毅陵)ㆍ선릉(善陵)에 나아가 별제(別祭)를 지냈다.

 

 

【안】선릉은 사서에 전하는 바가 없으니 충숙왕 제비(諸妃)의 능이 아닌가 한다.

음악을 연주하며 세 번 헌작(獻酌)했는데 매번 헌작할 때마다 3()를 하고 백관도 모두 절을 하였다. 정릉(正陵)에 이르러서도 똑같이 했는데, 제수의 풍성하고 정결함이 앞 세 능에서보다 배나 되었다.

○ 왜()가 강화부를 노략질하였다.

○ 왕이 연복사(演福寺)에 행행하여 크게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다.

 

왕이 돈의 말에 미혹되어 아들 낳기를 바라서 연복사에서 크게 문수회를 베풀었다. 불전(佛殿)에다 채색 명주를 얽어 수미산(須彌山)으로 삼고 산을 둘러 큰 촛불을 밝혔는데, 초의 굵기가 기둥만하고 높이가 1() 남짓했다. 진귀한 음식과 사화(絲花)며 채봉(彩鳳)을 갖추어 진열하여 사람의 눈을 현란케 하였다. 3백 명을 뽑아 수미산을 돌며 의식을 행했는데 중들의 범패(梵唄)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였으며 집사자(執事者)만도 8천 명이나 되었다. 왕은 손수 향로(香爐)를 받들고 중을 따르며 행향(行香)하였는데 조금도 권태로운 기색이 없었다. 이 문수회의 한번 경비는 거만(鉅萬)이었다. 이날 폭풍이 불고 누런 먼지가 하늘을 가렸다. 문수회는 7일이 걸렸는데, 폭풍이 사흘을 불었고 서리가 사흘을 크게 내렸다. 그리고 연기 같은 기운이 불전에서 사흘 동안이나 나왔다. 그것을 신돈은 왕에게 부처의 방광(放光 부처의 두 눈썹 사이에서 나오는 빛)이라고 아뢰었다.

4월 신돈에게 명하여 평양(平壤)에 대궐터를 잡게 하였다. 크게 우박이 내렸다.

 

돈이 또 도선(道詵), 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진해진다는 설을 가지고 왕에게 천도할 것을 권하여 드디어 평양에 궁궐터를 보았다. 당시 우박이 크게 내렸는데 평양 지방이 더욱 심하여 밭머리에 두었던 들밥 그릇들이 모두 박살이 났다. 당시 사람들이 이런 재해가 이르게 된 것은 이 평양천도의 계획 때문이라고 하였다.

○ 전교령(典校令) 임박(林樸)을 보내어 제주를 선무(宣撫)하였다.

 

박이 제주에 이르러 성주(星主)ㆍ왕자(王子) 등 및 군민(軍民)을 타일렀는데 모두 엎드려 명을 들었다. 이보다 앞서 선무하러 온 자는 모두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목호(牧胡)가 이를 인해 백성을 꾀어 반란을 일으켰다. 박은 제주로 가는 길에 나주(羅州)에 이르러 물을 항아리에 담아가서 차 끓인 것조차도 입에 넣지 않으니 그곳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며 서로 이르기를,

“성인이 오셨다. 왕의 관원들이 모두 임선무(林宣撫)만 하다면 우리들이 어찌 반란하기에까지 이르렀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제주 사람 중에는 그가 물까지 실어간 점을 기롱하는 사람도 있었다.

5월 왕이 태후전(太后殿)에 나아가 헌수(獻壽)하였다.

○ 이현(泥峴)에 피비가 내렸다.

○ 국학(國學)을 중건하였다.

 

성균좨주(成均祭酒) 임박이 건의하여 성균관을 개조하여 국학을 중건하도록 하고, 중외의 유관(儒官)에게 품계에 따라 포()를 내어 비용을 돕도록 하며, 생원(生員)을 증치(增置)하여 항상 1백 명을 양성하되 오경 사서재(五經四書齋)로 나누며, 과거는 한결같이 중국의 수검통고법(搜檢通考法)에 의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받아들이고 신돈과 이색에게 국학의 옛터에 모이게 했는데 돈은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려 선성(先聖)에 맹세하기를,

“정성을 다해 중건하겠나이다.

하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문선왕(文宣王 공자)은 천하 만세의 스승이다. 비용 얼마를 아껴서 이전의 규모를 이지러지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징파도(澄波渡) 지금의 연천현(漣川縣) 서쪽 15리에 있다. 의 물이 사흘 동안 붉었다.

7월 이강(李岡)을 밀직부사(密直府使)로 삼았다.

 

강이 앞서 이부 낭중(吏部郞中)으로 있었는데 천직(遷職)하기에 이르러 강이 아뢰기를,

“신()이 붓을 잡고 신의 이름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감히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왕이 더욱 중하게 여겼다. 그러다 원 송수(元松壽)가 물러나며 강을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당시 한창 변방의 경보(警報)가 잇달았는데 상하가 유지된 것은 강의 공이 많았다. 그러나 오직 왕의 뜻을 받들어 영합하기만 힘써 식자들이 기롱하였다. 이듬해에 졸하니 36세였다. 왕은 몹시 슬퍼하며 특별히 문경(文敬)이라 시호하였다.

○ 지진이 있었다.

○ 전() 도첨의정승 계림부원군(都僉議政丞?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이 졸하였다.

 

제현은 타고난 바탕이 중후한데다 학문으로 도와 그 의논으로 나타내고 사업으로 베푼 것이 볼만하였다. 남에게 조그마한 선()이 있어도 오직 듣지 못할까 애썼으며 평생토록 일찍이 말을 빨리 하고 얼굴색이 갑자기 변하는 일과 더러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만년에는 한가로이 지내며 손님을 맞아 술을 놓고 고금의 일을 헤아려 논정함에 얘기가 끊임없이 잇달아 권태로운 기색이 없었다. 최해(崔瀣)가 일찍이 탄복하기를,

“선비는 헤어진 지 사흘만 되어도 눈을 닦고 서로 보게 된다고 하더니 이런 경우를 나는 익재(益齊)에게서 본다.

하였다. 옛법을 따르기를 힘쓰고 경장(更張)을 좋아하지 않아 말하기를,

“나의 뜻이 어찌 고인(古人)만 못하리요마는 다만 나의 재주가 지금 사람을 미치지 못할 뿐이다.

하였다. 익재라 스스로 호하였는데 사람들이 귀천없이 모두 익재라고 불렀으니, 그가 세상에 소중하게 받아들여진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성리학(性理學)을 즐겨하지 않아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아주 이치에 합당하지는 못해서 식자들이 단점으로 여기는 바 있었다. 신돈이 그를 기어코 중상하려 했으나 그가 늙었기 때문에 해를 가하지 못하였다. 향년 81, 시호는 문충(文忠)이니 저서 《익재난고(益齊亂藁) 10권이 세상에 전한다.

【안】 제현이 서번(西番)으로 가 왕을 배알하려 할 때 측천 무후(則天武后)의 능을 지나면서 시를 짓기를,

 

구공은 참으로 명유이긴 하지만 / 歐公信名儒

역사 기술에 실수를 면치 못하였네 / 筆削未免失

어찌 주의 여분을 가져다가 / 那將周餘分

우리 당나라의 일월을 잇단말가 / 續我唐日月

 

한 시를 짓고 그 서(),

“구공(歐公)이 무후(武后)를 《당서(唐書)》 본기(本紀) 중에 끼워 넣고 당()을 바꾸어 주()라고 일컬었으니 옳게 한 일인가? 중종(中宗)이 폐위되어 방릉(房陵)에 쫓겨가 있었던 것은> 노 소공(魯昭公)이 건후(乾侯)에서 지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

“ 급총서(?) 는 육경(六經)과 일치하지 않아서 순()ㆍ우()ㆍ문왕(文王)이 모두 대악(大惡)으로 간주되고 있으니 이것은 더욱 해괴한 일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조조(曹操) 같은 자가 스스로 자신의 악이 극도에 달했음을 알고, 대성(大聖)들을 무함하여 그 비방을 분산시키고자 땅을 파고 책을 묻어 두어 만에 하나라도 발굴이 되어서 사람들이 속기를 바랐던 것일 것이다.

하였다.

○ 위의 언급들은 공이 자득(自得)한 견해이기 때문에 여기에 부기(附記)해 둔다.

8월 중 천희(千禧)를 국사(國師)로 삼고, 선현(禪顯)을 왕사(王師)로 삼았다.

 

두 중은 모두 신돈이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다. 왕은 아홉 번 절을 했는데 선현은 선 채로 받았다. 백관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반열(班列)에 나아갔으나 돈은 홀로 융복(戎服)을 입고 전상(殿上)에 서 있었다. 왕이 절을 한번 할 때마다 돈은 문득 입에 침이 마를세라 칭찬해 마지않으며 혼자 중얼거리듯,

“주상(主上)은 예의에 맞고 거동은 천하에 드물거든.

하였다. 그 몰래 아첨하고 총애를 구함이 이와 같았다. 사관(史官) 윤소종(尹紹宗)이 곁에 있으니 돈이 돌아보며 이르기를,

“국사(國史)를 함부로 쓰지 말아라. 내가 장차 보리라.

하였다. 당시 원의 사신 걸철(乞徹)이 이르러 묻기를,

“너희 나라에 권왕(權王)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에 있느냐?

하였다. 당시 중국에서는 돈을 권왕이라고 일렀다.

10월 왕이 미복(微服)으로 신돈의 집에 거둥하여 술을 차려 낙성(落成)하였다.

 

왕궁이 있는 둔덕[王宮岡] 서남쪽에 빈 땅이 있었다. 돈이 여기에 작은 집을 지어 궁중에 나아가고 물러나기에 편의하도록 해주기를 청해 왕이 허락하였다. 돈은 일을 독촉하여 며칠 되지 않아 집을 이루었다. 그리고 북쪽 정원에 별실을 아늑하게 지어 밝은 창, 정결한 궤안(?)에 향을 피우며 홀로 앉아 있으니 소연(蕭然)히 아무런 욕심도 없는 자 같았다. 여기에는 오직 기현(奇顯)의 아내 및 두 여종만 출입하도록 허락하였다. 무릇 죄에 빠져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나 관직을 구하려는 자는 반드시 처첩(妻妾)을 보내어 먼저 기현의 아내에게 (신돈을) 배알하게 해주도록 뇌물을 쓰면 현의 아내는,

“별실은 몹시 좁아서 겉옷을 입을 수 없고 종자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

하고, 문득 짧은 속옷차림으로 뇌물만 가지고 홀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돈이 홀로 상대하여 종적이 비밀스러운 가운데 추()한 소문이 자자하였다.

○ 납합출(納哈出)이 사자를 보내어 말을 바쳤다.

○ 전()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 지첨의(知僉議) 오인택(吳仁澤), 삼사우사(三司右使) 안우경(安遇慶) 등을 곤장 쳐 남쪽 변방으로 유배하였다.

 

오인택이 경천흥ㆍ목인길(睦仁吉)ㆍ김원명(金元命)ㆍ조희고(趙希古)ㆍ이순(李珣)ㆍ한휘(韓輝)ㆍ조인(趙璘)ㆍ윤승순(尹承順) 등과 비밀히 모의하기를,

“신돈은 사특하고 망령되며 음흉하고 교활하며 당여(黨與)가 날로 성해가니, 도선(道詵)의 비기(秘記)에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것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말이 있는데 필시 이 사람일 것이다. 마땅히 왕에게 아뢰어 일찍 제거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판서(判書) 신귀(辛貴)가 이 사실을 듣고 돈에게 알리니, 돈은 그 무리를 시켜 만일에 대비하도록 호위케 하여 궁에 들어가 왕에게 고하기를,

“돈은 산수간의 한 중이온대 상께서 억지로 이에 이르게 하시므로 감히 명을 어기지 못하여 간악을 제거하고 현량을 써서 삼한의 백성으로 하여금 조금 편함을 얻게 한 연후에 장차 한 벌 옷과 한 개 바릿대로 산림(山林)으로 돌아가려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국인(國人)이 장차 돈을 죽이려 하니 원컨대 상께서는 불쌍히 여기소서.

하였다. 왕이 놀라 사유를 물으니 돈은 신귀의 말로 자세히 대답하였다. 이에 인택 등을 구속하여 국문하고 곤장을 쳐 남쪽 변방으로 유배보내어 관노(官奴)로 삼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김원명은 처음에는 돈에게 붙었다가 나중에 돈을 제거하려 도모했는데 돈은 끝내 제 무리를 보내어 장살(杖殺)하고 말았다.

11월 지진이 있었다.

12월 초하루(계묘)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하늘에 구름이 끼어 보이지 않았다.

○ 임박(林樸)을 차자방 지인(箚子房知印)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성석린(成石璘)이 지인(知印)으로 있었는데 신돈에게 아부하지 않으므로 돈이 왕에게 참소하여 임박으로 대체했다. 박은 궤이를 좋아하고 활달하며 말을 대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름내기를 좋아하였다.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단지 공무를 받들 줄만 알 뿐 일찍이 청탁을 들인 적은 없다.

했으나, 밤마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걸어서 돈의 집에 출입하며 돈을 위해 일을 꾀해 주어 종적이 궤이(詭異)하고 비밀스러웠다. 그리고 돈을 성덕(盛德)이라고 칭예하더니 지인이 되기에 이르자, 왕의 의도를 잘 엿보고 또 돈의 좋아함과 싫어함을 헤아려 오직 영합하기에 힘써 대우받음이 날로 친밀해졌다.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박은 명사이다. 홍건적을 깨뜨릴 때에는 그 작전을 계획해 내었고, 덕흥군(德興君)의 변란이 있었을 때에는 죽기를 맹세하고 따르지 않았으며, 탐라(耽羅)에 사신으로 가서는 추호도 재물을 범하지 않았으며, 여러 차례 항소(抗疏)하여 과거(科擧)의 법을 정하고 시정(時政)의 폐단을 개진하였다. 당시 여론이 누군들 박을 어질다 않겠으며 능하다 않겠는가? 가령 박이 덕흥군의 변란에 죽었다면 그 일생의 종시(終始)를 천년 아래 누가 알 수 있으랴.

○ 국학생(國學生)을 증원하고, 이색(李穡)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정몽주(鄭夢周)를 박사(博士)로 삼았다.

 

또 경술(經術)에 밝은 유사(儒士)인 김구용(金九容)ㆍ박상충(朴尙衷)ㆍ박의중(朴宜中)ㆍ이숭인(李崇仁) 등을 뽑아 모두 학관(學官)을 겸하도록 하였다. 이에 앞서는 관생(館生)이 수십 명에 불과하였는데 이색이 학식(學式)을 다시 정하고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앉아 경()을 나누어 수업하고 강의가 끝나고 나서도 끊임없이 〈학문에 대한〉 논란을 하니 이에 학생이 몰려들어 정주(程朱)의 성리학(性理學)이 비로소 일어났다.

몽주는 연일(延日) 사람 습명(襲明)의 후손이다. 당시 경서(經書)로서 우리 나라에 이른 것은 오직 주자집주(朱子集註)뿐이었다. 그런데 몽주의 강설(講說)이 뛰어나 범인의 생각을 초월하니 듣는 사람들이 자못 의심을 했었으나, 호 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을 얻어 보기에 이르자 여기에 일치되지 않는 것이 없어 여러 유자(儒者)들이 더욱 탄복하였다. 이색은 곧잘,

“몽주가 이치를 논함에는, 이렇게 말하나 저렇게 말하나 이치에 타당하지 않는 것이 없다.

칭찬하며, 우리 나라 이학(理學)의 비조(鼻祖)로 올려 세웠다. 구용은 제안(齊顔)의 형이다.

○ 환자(宦者) 신소봉(申小鳳)을 도첨의 평리(都僉議評理)로 삼고 공신호(功臣號)를 하사하였다.

 

정릉(正陵)을 지키어 노국 공주의 상()을 마쳤다고 해서 그 공로로 상준 것인데 백관에게 명하여 그를 영빈관(迎賓館)에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이날 송악(松岳)이 무너졌다. 당시의 여론이 구법(舊法)을 허물어 환자(宦者)를 조정[巖廊]에 앉혔으니 나라의 진산(鎭山)이 무너진 것은 이 때문이라고들 했다.

○ 곽의(郭儀)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곽의는 현풍(玄風) 사람이다. 매양 세속의 절일(節日)이 되면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영산(靈山)에 가서 신돈의 아비 무덤에 전()을 드렸는데 돈이 뛸 듯이 기뻐하며 그를 불러서는 얼마 안 있다가 정언을 제수하였다.

 

[D-001]구공(歐公) …… 면치 못하였네 : 구공은 《당서(唐書)》를 지은 구양수(歐陽脩). 측천 무후(則天武后)는 당 고종(唐高宗)의 황후로 중종(中宗)?예종(睿宗)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신성 황제(神聖皇帝)라 칭하고 국호를 주()라 하였다. 이는 《춘추(春秋)》의 필법으로 보면 정통(正統)이 아니므로 본기(本紀)에 넣어서는 안 되는데 구양수가 《당서》를 지으면서 측천 무후기를 넣은 것을 말한다.

[D-002]노 소공(魯昭公) …… 무엇이 다르겠는가 : 노 소공이 계씨(季氏)에게 쫓겨 건후로 갔으나 《춘추(春秋)》에서는 소공의 연대를 그대로 쓰고 “공이 건후에 있었다[公在乾侯].” 하는 식으로 기술하여 정통을 나타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 중종(唐中宗)이 방릉(房陵)에 가 있더라도 마땅히 중종의 연대를 써야지 측천 무후기를 넣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D-003]급총서(?) : ()나라 때 급군(汲郡) 사람 부준(不準)이 발굴(發掘)한 선진(先秦) 시대의 고문서. 죽간(竹簡)에 과두 문자(??文字)로 수만 언()이 쓰여 있는데 내용에 있어서 육경(六經)과 상치되는 부분이 많다. 그 발견 연대에 있어서도 함녕(咸寧) 5(279), 태강(太康) 원년(280), 태강 2(281) 3설이 있는데 염약거(閻若?)는 함녕 5년을 정설(定說)로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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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5상갑진 고려 공민왕 13년부터, 갑인 공민왕 23년까지 11년간   

 

 

무신년 공민왕 17(() 태조(太祖) 홍무(洪武) 원년, 1368)

 

 

춘정월 왕이 걸어서 신돈의 집에 거둥하였다.

○ 일본(日本)이 중을 보내와 보빙(報聘)하였다.

 

일본이 중 범탕(?)과 범류(?)를 보내어 김일(金逸)과 함께 왔다. 신돈이 예로 대하지도 않고 관()에서의 대접도 몹시 박하여 범탕 등이 성이 나서 가버렸다.

2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폐지하였다.

 

왕이 삼품관(三品官)으로 경서(經書)에 통달한 자를 뽑아 시관으로 삼으려 하니 신돈은 손용(孫湧)을 천거하고, 환자(宦者) 이강달(李剛達)은 이무방(李茂方)ㆍ권사복(權思復)을 천거하였다. 왕은 그 경쟁을 미워하여 이어,

“감시(監試)에서 선취하는 것이란 으레 모두 동몽(童蒙)이고 경서에 밝고 행지가 닦여진 선비가 아니니 국가에 아무 이익도 없다.

하고는 폐지해 버렸다.

○ 붉은 기운이 뻗쳤는데 불과 같았다.

○ 혜성이 서방에 나타났다.

 

혜성이 서방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1() 남짓이었다. 얼마 안 있어 혜성이 대릉(大陵 별 이름)ㆍ적시(積屍 별 이름)ㆍ권설(卷舌 별 이름) 사이에 나타나 태미(太微 별 이름)에 이르기까지 무릇 넉 달이었다.

3월 크게 눈이 내렸다.

 

얼음이 굳게 얼어 시냇물이 모두 끊겼다.

4월 왕이 구제(九齋)에 행행하여 친히 선비들을 시험하였다.

 

이에 앞서 신돈이 이제현(李齊賢)을 미워하여 왕에게 이르기를,

“유자(儒者)들이 좌주(座主)다 문생(門生)이다 일컬으며 중외(中外)에 포열(布列)하여 서로 청탁을 들이니, 이를테면 제현의 문생 같은 것은 나라에 가득찬 도둑들입니다. 유자의 해가 이와 같습니다.

하였다. 당시 예문관(藝文館)이 두 차례나 삼관원(三館員)의 수가 부족된다 하여 과거를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돈의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 허락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친시(親試)를 행하여 경의(經義)를 써서 이첨(李詹) 7인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

5월 공주(公主)의 영전(影殿)을 마암(馬巖)에 고쳐 지었다.

 

왕이 왕륜사(王輪寺)의 영전은 불우(佛宇)가 협소하여 군중 3천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없다고 하여 즉시 철거하여 마암(馬巖) 지금의 개성부 성균관 앞에 있다. 에 옮겨 지었다. 때가 바야흐로 농사철이어서 원망이 크게 일어났다.

이첨(李詹)은 이렇게 적었다.

당시 토목(土木)의 역()이 바야흐로 일어나며 간관(諫官)이 소()를 갖추어 올렸더니 왕은 그 소 내용이 필시 영전에 관한 것이라고 억단하고 노기가 대단하였다가 소를 뜯어 보니 다른 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제야 도리어 ‘나는 철없는 유자(儒者)들의 천근(淺近)한 말인줄 알았다.’고 하였다. 비록 애써 청종(聽從)하기는 하였다 하더라도 물정(物情)을 지레 짐작하고 착한 말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는 교만하고 인색한 마음 때문이었다.

6월 날이 크게 가물어 사유(赦宥)하였다.

7월 일본이 사신을 보내와 빙문하였다.

○ 대마도(對馬島)의 만호(萬戶) 종경(宗慶)이 사자를 보내와 조공을 바쳤다.

 

겨울에 이르러서도 또 사자를 보내어 조알(朝謁)해 왔기에 종 경에게 쌀 1천 석을 하사하였다. 동래(東萊)의 부산포(釜山浦)에서 동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섬의 선월포(船越浦)에 이르기까지는 물길 6 70리이다. 섬 안은 8개 군()으로 나뉘어 있고 인호(人戶)는 모두 섬의 개[海浦]를 연해 있다. 남북이 삼일정(三日程), 동서는 일일정 혹은 반일정(半日程)으로 사면이 모두 돌산으로 되어 있어, 토지가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소금굽기ㆍ고기잡이ㆍ장사로 살아간다. 종씨(宗氏)가 대대로 도주(島主)가 되어 왔다. 섬은 해동(海東) 여러 섬의 요충에 위치해 있다. 본국에서 이전부터 금주(金州 김해)에다 호시(互市)를 허가하여 때로 들어와 조공을 바쳤는데 동정(東征) 이후로 수신사(修信使)가 서로 끊어졌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다시 조알해 왔기에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8월 시중(侍中) 유탁(柳濯), 밀직(密直) 정사도(鄭思道), 대사성(大司成) 이색(李穡)을 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 내놓았다.

 

유탁이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과 정사도에게 이르기를,

“지금 마암의 역사[馬巖之役 노국 공주 영전(影殿) 개축 공사]는 단지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술가(術家)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 집을 지으면 다른 성이 왕이 된다고 하니, 우리들이 임금의 녹을 먹으며 어찌 뱃속으로 그르다고 여기면서 임금의 과실이 이루어지게 해서 후세에 기롱을 받겠는가? 죽을지언정 마땅히 극언으로 간해야 한다.

하니, 극인 등이 따랐다. 그래서 글 올리기를,

“올해에는 크게 가물고 오곡이 익지 않았으니 중외(中外)의 토목 역사를 정지하기를 빕니다.

하니, 왕이 크게 노하여,

“이것은 나의 영전(影殿)을 저지시키자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유탁과 정사도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안극인은 정비(定妃)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강제로 사제(私第)로 돌려보냈다. 태후(太后)가 사람을 시켜 왕에게 타이르기를,

“지금 유탁 등을 가둠은 단지 임금의 허물을 드러내고 재상의 어짊을 나타내기만 할 뿐이니 유탁 등을 놓아 주시오.

했으나, 듣지 않고 즉시 이춘부(李春富)로 탁을 대임시키고, 삼사 좌사(三司左使)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국문케 하였다. 색에게 명하여 백성을 설유하는 글을 지으라 하므로 색이 유탁의 죄명을 청하니, 왕은,

“오랫동안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하늘이 큰 가뭄을 가져오게 한 것이 첫째요, 연복사(演福寺)의 전토를 탈취한 것이 둘째요, 공주(公主)의 초상에 사흘 동안이나 제사를 궐한 것이 셋째요, 그 장례를 영화 공주(永和公主)의 예()로 강등시켜 치룬 것이 넷째다. 불충하고 불의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였다. 색이,

“이 일들은 지난 일입니다. 비록 이 일들로 그에게 죄를 돌린다 해도 나라 사람들은 모두 영전 개축을 정지하기를 비는 글을 올린 까닭이라고 할 터이니 원컨대 다시 생각하십시오.

하니, 왕은 더욱 노하여 급하게 독촉하였다. 색이,

“신이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어찌 감히 문서를 만들어 그 죄를 구성하겠습니까? 그리고 글을 올린 일은 도첨의(都僉議 신돈)도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하니, 신돈이 이때 왕의 곁에 있다가 부득이 말하기를,

“노부(老夫)도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만 상()께서 워낙 노하셔서 감히 고하지 못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왕은 시중 이춘부에게 명하여 국인(國印 어보(御寶))을 봉하라 하였다. 춘부가 엎드려 있고 감히 나아가지를 못하니 이에 색에게 명하였다. 색은 왕이 더욱 노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국인을 봉하고 ‘신() 색은 삼가 봉함’이라 썼다. 왕은 말하기를,

“경은 이것을 가지고 가서 유덕한 자를 구하여 왕으로 받들라. 우리 태조께서도 당초에야 어찌 왕손(王孫)이었겠는가. 내 왕위를 사양하겠노라.

하고는 이에 정비(定妃)의 궁()으로 옮겨가서 음식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돈은 왕의 노기를 풀고자 왕에게 아뢰어 색을 옥에 가두었다. 색은 진술하여 밝힘이 명확하고 간절하였으며, 또 울며 말하기를,

“신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우는 것이 아니라 왕이 무고히 대신을 죽일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하였다. 왕은 드디어 감동되어 깨닫고 모두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9월 명()의 군대가 연경(燕京)을 함락하자 원의 황제는 상도(上都)로 달아났다.

 

왕은 원의 황제가 상도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백관을 모아 명과 사신을 통하느냐의 가부를 의논하였다.

【안】《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고려와 원과는 충렬왕(忠烈王) 때부터 대대로 장인 사위의 관계가 되어 왔으니 비록 권간(權奸)이 국권을 잡았어도 끝내 종사(宗社)가 바뀌지 않은 것은 원의 힘 때문이다. 원이 처음 번창할 적에 앞장서서 복종하여 섬긴 이래 고려의 왕들치고 몽고(蒙古)의 외손이 아닌 이가 없었으니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또한 지극했던 것이다.

그런데 경신제(庚申帝 원 순제(元順帝))가 상도(上都)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명() 사신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백관(百官)을 모아 놓고 명과 통하느냐의 가부를 의논했으니 매우 그르다. 그 이듬해에 명의 사신이 과연 오자 즉시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 연호를 정지하였으니 그 화이(華夷)의 구분은 명확했지만 장차 어떻게 천하 후세에 신의(信義)를 보이겠는가? 만약 원이 쇠했다가 다시 일어나 꼬투리를 잡아 죄를 성토했다면 멸망되는 환난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이때 요동(遼東)ㆍ심양(瀋陽) 방면의 길은 아직 막히어 통하지 않아 사명(使命)이 모두 해로(海路)를 통해 금릉(金陵)에 도달되었고, 새 천자(명 태조)의 원대한 계획도 꼭 동방으로 뻗어나올 것도 아니었으며, 북원(北元)은 아직도 국경이 서로 닿아 있는 처지였다. 천자의 조서(詔書)에도,

“짐()도 본래 원의 백성이다. 천하의 혼란이 실상 짐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하였으니, 그 광명 정대함이 이와 같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명에 대해〉 답하기를,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돌아감에는 역수(歷數)가 있으니 사해(四海) 밖에서 누군들 흠앙하지 않으리요. 다만 원씨(元氏)와는 이미 군신의 의리를 정하여 대대로 은고(恩顧)를 받아오며 사신의 왕래가 서로 잇달아 차마 하루아침에 그 곤궁한 처지로 인하여 배척 단절할 수 없으니 이 점도 역시 천리(天理)와 인심의 없애지 못할 바입니다. 저들[]이 만약 귀화(歸化)하거나 자취를 멀리 감추어 조정이 없어지면 또한 원을 섬기던 마음으로 천자를 섬기려 합니다…….

했다면, 천자 또한 반드시 그 배반하지 않는 마음을 허여하여 굳이 새로운 〈사대(事大) 관계를〉 도모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책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고 이름 세우기를 좋아하고 약자를 모멸하여 급급히 그 향배(向背)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자 채빈(蔡斌 명()의 사신)이 와서 광포하고 탐욕을 부리다가 김의(金義)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자, 마침내 조정의 노여움을 불러들였으니 이에 몹시 난처하게 되었다. 수년이 되지 않아 또 북원으로부터 봉()함을 받고 선광(宣光) 연호를 쓰더니 또 수년 만에 폐지해 버렸다. 반복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동방(東方)의 예의는 깡그리 없어지고 말았다.

○ 누런 안개가 사방에 가득 찼다.

○ 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서령군(瑞寧君) 유숙(柳淑)을 죽였다.

 

처음 숙이 치사(致仕)할 적에 전별을 받는 자리에서 시를 짓기를,

 

 

충성이 쇠하고 성의가 없어진 게 아니라 / 不是忠衰誠意薄

큰 이름 아래에 오래 있기 어렵기 때문이네 / 大名之下難久居

 

 

하였는데, 신돈은 유숙이 다시 등용될까 두려워하여 이 시를 외며 왕에게 참소하기를,

“숙이 구천(句踐)으로 상()을 비정하고 범여(?)로 스스로를 비정했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지금 숙이 서주(瑞州) 지금의 서산군(瑞山郡)에 있어 바다가 가깝습니다. 만약 범여를 본받아 배를 타고 떠나간다면 반드시 연도(燕都)로 향해 가 승왕(僧王 덕흥군(德興君)을 가리킨다)을 세울 것이니 일찍 제거하여 후환을 끊음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왕은 돈이 유숙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으나, 돈의 뜻을 어기기 어렵게 여겨 이에 명하여 곤장을 쳐서 홍주(洪州)로 유배시키고 이름을 삭제하고 가산을 몰수하도록 하였는데, 돈이 드디어 사람을 보내어 영광(靈光)에서 목을 매어 죽였다. 숙이 물러가 있을 때에도 나라 일이 평일과 다름을 들으면 눈물을 줄줄 흘렸다. 화가 일어나자 가족이 숙의 평일의 말에 의하여 용뇌(龍腦)를 보내고, ,

“달아남만 같지 못하다.

이르고, 이에 좋은 말까지 보내었으나 숙은,

“군부(君父)는 하늘이다. 하늘을 도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죽고 삶에는 운명이 있으니 진실로 순순히 받아들여야지 도망한들 장차 어디로 가리요.

하고는 죽음에 나아갔는데 안색이 평시와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아들 실()과 후()도 또한 모두 귀양을 갔다. 가족이 〈숙의〉 뼈를 거두어 거적으로 장사지냈다. 신돈이 처형된 뒤에야 왕이 비로소 그러한 일이 있었음을 알고 몹시 슬퍼하여 조지(詔旨)를 내려 그 원통함을 씻어주고 문희(文僖)라 시호하였다. 숙은 충의가 넘치고 천거해 이끌어 주는 바가 있어도 일찍이 〈당자에게〉 말한 적이 없으며, 그 사람이 죄로 쫓겨나가는 경우가 있어도 그 사람을 끊어버리지는 않았으며, 대사(大事)를 만나 대의(大義)를 결단함에 일찍이 유예한 적이 없으니, 대개 정밀 명확함과 인자 관후함 두 가지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유숙의 호는 사암(思菴)이다.

○ 오씨(吳氏)는 이렇게 적었다.

()의 벽란도(碧欄渡) 시에,

 

 

오랫동안 강호의 약속을 저버리고 / 久負江湖約

홍진에서 이십 년 / 紅塵二十年

백구는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 白鷗如欲笑

짐짓 헌함에 가까이 오네 / 故故近檻前

 

 

하였는데, 남추강(南秋江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

“사암(思菴)이 필경은 홍진(紅塵)의 액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그 충성스럽고 청렴한 대절(大節)이 큰 이름[大名] 아래에 끝내 드러나지 못한 채 역적 돈()의 무함을 받아 남모르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하고, 유숙(柳淑)의 시에 화답하기를,

 

 

청운의 길 알지 못한 채 / 未識靑雲路

강호에서 사십 년 / 江湖四十年

 

 

하였다. 그런데 추강 역시 혹독한 화를 면하지 못해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애닯게 하니 어진 이를 해치는 무리가 어느 시대엔들 없으리요. 통탄스럽다.

○ 신돈의 비() 반야(般若)에게 매달 30석씩 쌀을 하사하기 시작하였다.

반야가 실은 모니노(牟尼奴)를 낳았으니, 왕이 말한바 ‘아름다운 여인이 돈의 집에 있어 총애했다.’는 자이다.

10월 문천식(文天式)을 원에 보내었으나 길이 막혀 돌아왔다. 그래서 곤장을 치고 유배하였다.

○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정(金精)과 전교령(典校令) 김제안(金齊顔)을 죽였다.

 

김정 등이 김흥조(金興祖)ㆍ조사공(趙思恭)ㆍ유사의(兪思義) 7인과 신돈을 베어 죽이기로 모의였는데, 사공이 그 모의를 자기와 친한 정휘(鄭暉)에게 누설했고, 휘는 이춘부(李春富)에게 고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왕에게 들어가 고해 곤장을 쳐 유배하였는데 신돈이 사람을 보내어 목을 매어 죽였다. 무릇 돈의 손에 죽임을 당한 자들은 처자(妻子)도 감히 호소하지 못하고 조정의 신하들도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돈이 유배한 사람들을 깡그리 죽이려 들자 홍영통(洪永通)이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인과응보가 가히 두려우니 원컨대 공은 생각하십시오.

하고 말렸다. 그래서 돈은 깨달아 그만두었다.

11월 사신을 보내어 오왕(吳王)을 빙문하였다.

 

원의 제왕(諸王)이다. 예의판서(禮儀判書) 장자온(張子溫)을 보내어 오왕을 빙문하였더니 오왕이 예를 갖추어 접대함이 심히 후하여 어사대(御史臺)로 하여금 연회를 열어 위로하게 하되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대부(大夫 어사대)가 자온에게 이르기를,

“헌사(憲司 어사대)의 연회에는 일찍이 음악을 쓴 적이 없는데 오늘의 음악은 사신을 위한 것입니다.

하니, 자온이 대답하기를,

“음악은 화()로써 주()를 삼는데 여러분께서 이미 화기(和氣)로 접대해 주시니 하필 음악을 쓸 것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이르시기를 ‘예()라 예라 하지만 옥백(玉帛)을 말한 것이겠는가. ()이라 악이라 하지만 종고(鍾鼓)를 말한 것이겠는가?’ 하셨습니다.

하니, 대부는,

“상서(尙書)께서는 이미 예악의 근본을 알고 계시니 음악을 꼭 쓸 것은 없겠습니다.

하고, 음악은 그만두었다. 오왕이 이 사실을 듣고 후한 예를 더하여 보내었다.

사신(史臣)은 이렇게 적었다.

자온은 시정(市井)의 사람인데도 오히려 말 한마디로 다른 나라에서 그토록 소중하게 대접받았으니 사방에 사신으로 갈 자는 사대부로 학문이 있는 자를 뽑아 보냄이 옳다.

○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12월 이춘부(李春富)를 좌시중(左侍中)으로, 이인임(李仁任)을 우시중(右侍中)으로 삼았다.

 

춘부는 본래 재질도 명망도 없는데 오직 부드러움과 알랑거림으로 신돈을 섬기며 또 왕의 마음에 영합되기만을 힘썼기 때문에 수상(首相)이 될 수 있었다.

○ 비로소 순자격(循資格)을 쓰기 시작하였다.

 

사신(史臣) 하륜(河崙)은 이렇게 적었다.

《서경(書經)》에 ‘관()은 꼭 다 갖출 것 없고 오직 그 적임자에 따라 할 것이요, ()은 악덕한 이에게 미쳐서는 안 되고 오직 그 어진이에게만 주어져야 한다.’ 했으니 관작이란 군주가 어진 인재를 대우해서 그들과 함께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순자의 격[循資之格]은 단지 세월의 오램과 오래지 않음, 근무의 많음과 적음을 가지고 서열(序例)을 삼으니, 어질고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웃자리에 있어야 함에도 도리어 아랫자리에 처져 있고, 어리석고 불초한 자는 마땅히 뒤에 있어야 함에도 도리어 앞에 있게 되어, 옥과 돌이 서로 섞이고 향기와 누린내가 분별이 없게 된다. 이것은 조정이 존엄하지 않게 되는 소이이며 뭇 업적이 이뤄지지 않게 되는 소이이니 다스림을 원하는 군주라면 이것을 가지고 사람 쓰는 법식을 삼을 수 있겠는가?

 

[D-001]구천(句踐)으로 …… 비정했으니 : 범여(?) 20년 동안이나 구천(句踐)을 도와 월나라를 패자(覇者)로 만든 인물. 구천이 그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하자, 구천의 사람됨이 환난(患難)은 함께 겪을 수 있지만 나라가 편안할 때는 섬길 인물이 못 된다 하여 벼슬을 내놓으면서 “높은 벼슬에는 오래 있기가 어렵다[大名之下 難以久居].” 하였다. 앞의 유숙(柳淑)의 시에 이 구절이 있기 때문에 이 고사를 들어 참소한 것이다. 《史記卷四十一 越王句踐世家》

[D-002]추강(秋江) 역시 …… 못해 : 추강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남효온의 호. 성종 9(1478)에 문종(文宗)의 비()이며 단종(端宗)의 어머니인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복위(復位)를 상소했으나 임사홍(任士洪)?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실패하자, 이후부터 세상사에 뜻을 잃고 유랑 생활로 일생을 마쳤는데, 연산군 10(1504)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의 복위를 상소하였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중종(中宗) 8(1513) 소릉이 추복(追復)되면서 신원(伸寃)되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D-003]()라 …… 말한 것이겠는가 :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있는 공자(孔子)의 말. 예나 악은 형식보다 본질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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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5   

 

 

신해년 공민왕 20(명 태조 홍무 4, 1371)

 

 

2월 여진(女眞)의 천호(千戶) 이 두란첩목아(李豆蘭帖木兒)가 투부(投附)해 왔다.

 

두란(豆蘭)의 본성은 동(?)으로, 대대로 여진의 천호가 되어 왔는데, 그 백호(百戶) 보개(甫介)를 보내어 1백 호를 데리고 투부해 와서 북청(北靑)에 거주하면서 우리 태조를 섬겨 그 휘하에 속하였다.

○ 왜()가 전라도 나주(羅州)에 침구하여 이()인 정침(鄭沈)이 죽었다.

 

정침은 나주 고을에 벼슬하여 호장(戶長)이 되었는데 말타기ㆍ활쏘기에 능하였다. 안렴사(按廉使)의 명령으로 제주(濟州) 산천에 제사지낼 축문(祝文)과 폐백(幣帛)을 받들고 바다를 항행해 가다가 왜를 만났다. 배에 탄 사람들이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정침은 따르지 않고 뜻을 결단하고 싸워 적을 쏘는 족족 쓰러뜨리자 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정침은 화살이 다하자 일이 성공될 수 없음을 알고 도포를 갖추어 입고 홀()을 잡고 정좌(正座)하자, 적은 놀라 저희들끼리 이르기를,

“관인(官人)이다. 조심하여 죽이지 말라.

하였다. 정침은 물에 투신하여 죽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3월 왜가 해주(海州)에 침구하여 목사(牧使)를 사로잡아 갔다.

○ 왕이 대비전(大妃殿)에 나아가 문병을 하였다.

 

왕이 신돈의 참소가 있는 뒤부터 오랫동안 혼정신성(昏定晨省)을 궐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대비가 병이 났기에 가서 안부를 살핀 것이다.

○ 전() 정언(正言) 김도(金濤)가 명()에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였다.

 

김도는 연안부(延安府) 사람으로 제과 25명 중에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구현(丘縣)의 승()으로 제수되었으나 중국 말을 모른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어버이가 늙어 본국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이에 돌아오자 왕은 좌우에게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으로 제과에 오른 자는 진실로 드물다. 이 사람은 이름이 일시에 드날려 천하로 하여금 우리 나라에 인재가 있음을 알게 하였다.

하고, 손수 김도장원나복산인(金濤長源蘿?山人) 8자를 써서 하사하였다.

3월 요양(遼陽)이 명에 귀부(歸附)하였다.

 

북원(北元) 요양성 평장(遼陽省平章) 유익(劉益) 등이 대명(大明)에 귀부하고자 하였으나 민거(民居)를 옮기게 될까 우려하여, 요양이 본래 우리 땅임을 들어 만약 우리 나라에 귀부하면 민거를 옮기지 않아도 될까 해서 사자를 보내왔다. 그러나 조정에서 이에 대한 아무런 회보가 없자, 유익은 드디어 금주(金州)ㆍ복주(復州)ㆍ개주(蓋州)ㆍ해주(海州) 등지를 가지고 대명에 귀부하였다. 황제는 정료위(定遼衛)를 설치하고 유익을 정료위의 지휘(指揮)로 삼았다.

5월 전() 장사감무(長沙監務) 이존오(李存吾)가 졸하였다.

 

존오는 경주(慶州) 사람으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힘써 공부하였으며 강개(慷慨)한 지절(志節)이 있었다. 나이 10여 세에 십이공도(十二公徒)에 속하여 ‘강물이 넘치다[江漲]’의 제목으로 시를 짓기를,

 

 

큰 들이 모두 잠겼으나 / 大野皆爲沒

높은 산 홀로 의연하네 / 高山獨不降

 

 

하니, 식자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정몽주(鄭夢周)ㆍ이숭인(李崇仁)ㆍ김구용(金九容) 등과 친하게 지냈다. 간관(諫官)이 되어 폄출(貶黜)되기에 미쳐 공주(公州)의 석탄(石灘)에 퇴거하여 있는 동안에 신돈의 세력이 더욱 치성(熾盛)하자 울분으로 병이 났다. 병이 위독하게 되자 좌우에게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묻기를,

“돈이 아직도 치성하냐?

하니, 좌우가 그렇다고 하자, 자리에 도로 누우며 말하기를,

“돈이 죽어야만 내가 죽을 것이다.

하고는 자리에 편안히 눕기도 전에 운명하였는데 그때가 31세였다. 신돈이 베임을 당하고 나서 대사성(大司成)에 추증(追贈)되었다.

○ 춘추관사(春秋館事) 이인복(李仁復)ㆍ이색(李穡)에게 본조(本朝)의 《금경록(金鏡錄)》을 증수(增修)하도록 명하였다.

7월 왜가 예성강(禮成江)에 침구하여 병선(兵船)을 불태웠다.

 

무릇 40척이었다. 우리 태조는 서강 도지휘사(西江都指揮使), 양백연(楊伯淵)을 동강 도지휘사(東江都指揮使)로 삼아 왜를 격퇴하였다.

○ 신돈이 모반하니 수원(水原)으로 유배하고, 그 무리 기현(奇顯)ㆍ최사원(崔思遠) 등을 베었다.

 

신돈이 처음에는 중으로서 왕에게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김란(金蘭)의 딸을 들이고도 또 축첩이 셀 수 없이 많았으며, 경대부(卿大夫)의 아내로 아름다운 자는 반드시 은밀히 불러 사통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은혜를 바라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다투어 노비와 보물을 바쳤다. 그런데도 왕은 오히려 녹을 받지 않고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으며 전원(田園)을 두지 않는다고 해서 신임하고 중히 여겼다. 그래서 신돈은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며 은수(恩讐)를 반드시 갚아 세가 대족(世家大族)이 거의 다 주살당하여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나 이리 보듯이 하였다.

기현과 최사원이 그의 심복이 되고, 이춘부(李春富)와 김난이 그의 우익이 되어 당여(黨與)가 조정에 가득하였다. 왕도 스스로 불안한 마음이 있으되 영상(領相)이라 칭하고 감히 신하로 여기지는 못하였다. 왕의 성품이 본래 시기심이 많아 비록 심복 대신이라 하더라도 그 권력이 성하게 되면 반드시 시기하여 베어죽였다. 그래서 신돈이 스스로 자신의 세력이 너무 심하게 떨침을 알고 왕이 시기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반역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헌릉(憲陵 광종(光宗)의 능)과 경릉(景陵 문종(文宗)의 능)에 배알하는 때를 타서 신돈이 그의 당인(黨人)을 나누어 보내어 길 곁에 잠복해 있다가 대사(大事)를 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당인이 왕 행차의 의장(儀仗)과 호위가 매우 성함을 보고 차마 범하지를 못하였다. 신돈은 성이 나서 그들을 질책하고 다시 거사할 것을 꾀하였다. 신돈의 문객인 의랑(議郞) 이인(李靭)이 그 흉모(凶謀)를 기록하여 익명서(匿名書)를 만들어 한림거사(寒林居士)라 칭해서 밤에 재상 김속명(金續命)의 집에다 던지고 달아났다. 속명이 그 글로써 아뢰니, 기현ㆍ최사원ㆍ정귀한(鄭龜漢)ㆍ진윤검(陳允儉), 그리고 기현의 아들 중수(仲脩) 등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는데, 모두 자복(自服)하는지라 베어 죽이고 신돈을 수원에 유배하였다. 왕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익재(益齋)가 일찍이 돈()은 단인(端人)이 아니라고 하더니 그 선견(先見)에는 미칠 수가 없구나.

하였다.

○ 전()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 등을 소환하였다.

 

이에 무릇 신돈에 의해 폄축(貶逐)된 사람들, 곧 최영(崔瑩)ㆍ이순(李珣)ㆍ안우경(安遇慶) 등을 모두 소환하였다.

○ 신돈이 복주(伏誅)되었다.

 

신돈이 유배되자 성부(省府)와 대간(臺諫)이 글을 올려 죽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찰방사(察訪使) 임박(林樸)을 보내어 신돈을 수원에서 베게 하였는데, 왕은 신돈과 맹약한 글을 임박에게 주며 신돈에게 보이고 죄목을 따지기를,

“네가 항상 여자를 가까이함은 도인(導引)하여 양기(養氣)하기 위함이요 감히 사통하자는 것은 아니라 하였는데, 지금 들이니 낳은 아이가 있다니 이것도 맹약한 글에 있는 것이냐? 성 안에 갑제(甲第)를 지은 것이 일곱 군데에 이르니 이것도 맹약한 글에 있는 것이냐?

하게 하고, 이와 같은 몇 가지 일로 죄를 따져 책망한 뒤에는 이 맹약한 글을 불사르라고 하였다. 임박이 수원에 이르러 신돈을 목베어 사지는 갈라 조리돌리고 머리는 서울의 동문(東門)에 효시(梟示)하였다. 아울러 그의 두 살 난 아이도 베었다. 신돈은 사냥개를 두려워하고 사냥을 싫어하였으며, 또 음행(淫行)을 방자히 하여 항상 오계(烏鷄)ㆍ백마(白馬)를 잡아 먹어 양기(陽氣)를 도우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늙은 여우의 요정(妖精)이라 하였다.

○ 윤환(尹桓)을 시중(侍中)으로, 한방신(韓方信)을 찬성사(贊成事), 이색(李穡)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우리 태조를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삼았다.

 

왕이 근신에게 묻기를,

“문신(文臣) ()과 무신(武臣) 태조의 구휘 이 한날에 문하성(門下省)에 들어왔는데 여론이 어떠한가?

하자, 근신이 아뢰기를,

“모두 국가가 인재를 얻었다고 합니다.

하니, 왕은 웃으며 말하기를,

“문무(文武) 모두 제일류를 기용하여 재상으로 삼았는데 누가 감히 이의를 일으키겠는가?

하였다. 또 왕은 매양 이색과 이인복(李仁復)을 불러 볼 때에는 반드시 좌우에게 깨끗이 소제하고 향을 피우게 하였다. 총애받는 중 신조(神照)가 아뢰기를,

“임금이 신하를 만나 보는데 무엇 때문에 꼭 이렇게 성경(誠敬)을 다합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알겠느냐? 이 두 공()의 도덕(道德)은 범용한 유자(儒者)에게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색의 학문은 살갗을 버리고 골수를 얻어 비록 중국에서라도 비견할 만한 이가 드물 것이니 어찌 감히 만홀(慢忽)히 하겠는가?

하였다.

○ 전 시중(侍中) 유탁(柳濯)을 죽였다.

 

유탁이 신돈의 당여가 되었다고 하여 왕이 장차 그를 죽이려 하니, 태후(太后)가 환자(宦者) 사안불화(沙顔不花)를 시켜 용서해 주도록 청하였다. 왕은 노하여 사안불화를 가두고 드디어 유탁을 죽였다. 사람들이, 유탁이 화를 당한 것은 공주의 영전(影殿) 역사를 그만두도록 간한 데에서 기인했다고들 하였다. 유탁은 무공(武功)으로 진출하였었다. 정중하고 풍채가 아름다워 행동거지가 볼만하였다. 그래서 그가 죽자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도 있었다.

○ 모니노(牟尼奴)를 불러 태후전(太后殿)에 들였다.

 

이에 앞서 신돈이 수원(水原)에 유배되었을 적에 왕이 근신(近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돈의 집에 가서 그의 비()를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경동(驚動)케 하지 말고 잘 보호하라.

하였다. 임박이 신돈을 베러 갔을 적에 사람을 시켜서 왕이 부른다고 거짓 알리니, 신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 나를 소환함은 대개 아기(阿只) 방언(方言)으로 소아(小兒)의 존칭이다. 가 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였으니, 아기는 모니노를 가리킨다. 이때에 이르러 그를 불러들이고서 수시중(守侍中) 이인임(李仁任)에게 부촉(付囑)하기를,

“원자(元子)가 있으니 나는 근심이 없다.

하였다. 처음에 임박이 상장군(上將軍) 이미충(李美?)과 함께 왕을 모시는데 왕이 미충에게 눈짓을 하며 말하기를,

“네가 아기의 일을 알고 있지.

하니, 미충이 아뢰기를

“신이 알고 있습니다.

하므로 임박(林樸)이 괴이하게 여겼다. 나가서 미충에게 물어보니 미충이 말하기를,

“상()이 일찍이 금전(金錢)을 주조하여 신에게 주어 신돈의 집에 가서 아기에게 주게 하였는데 아기가 크게 기뻐하였다. 신돈이 내게 이르기를, ‘상이 자주 우리 집에 행차함은 나 때문이 아니다.’ 하였다. 내가 이 일을 자세히 아는 까닭에 상이 이런 말씀을 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임박이 사관(史官) 민유의(閔由誼)ㆍ지(李至)에게 이르기를,

“돈()을 벤 것은 나라의 큰 경사이다. 그런데 또 큰 경사가 있음을 공들은 아는가? 상이 궁인(宮人)을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지금 7세이다. 돈이 몰래 이를 길러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사실로도 그를 베어야 했다. 사관들은 이를 알고 있어야 한다.

하였다.

○ 신돈의 당()을 다스려 이춘부(李春富)ㆍ김난(金蘭) 등을 베었다.

 

신돈의 당을 다스려 이춘부ㆍ김난ㆍ이백수(李伯修)ㆍ손연(孫演)ㆍ백현(白絢)ㆍ김두달(金斗達)ㆍ김원만(金元萬)ㆍ임희재(林熙載)ㆍ기숙륜(奇叔倫)ㆍ신귀(辛貴)ㆍ이운목(李云牧) 등을 베고, 성여완(成汝完)ㆍ손용(孫湧)ㆍ조사겸(趙思謙)ㆍ유준(柳濬)ㆍ김진(金縝)ㆍ송난(宋蘭)ㆍ손주(孫湊)ㆍ김안(金安)ㆍ김중원(金仲源)ㆍ박천우(朴千祐)ㆍ홍영통(洪永通)ㆍ김굉(?)ㆍ허완(許完)ㆍ오일악(吳一?) 등을 유배하였다.

○ 대사(大赦)하였다.

 

신돈을 베었기 때문이다.

○ 이진수(李進修)를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삼았다.

 

진수는 당시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상소하기를,

“내재추(內宰樞)는 불가불 제거해야 합니다. 재신(宰臣)과 추밀(樞密)이 도당(都堂)에 회의함은 인물을 제품(題品)함이니, 만약 의정(議定)한 일이 있으면 모두 자문(紫門)에 나아가 명()을 품수(稟受)하여 발표하는 것이거늘 어찌 그때가 아닌 때에 들어가 상()을 뵙고 나와서는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여 동렬(同列)에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조야(朝野)가 모두 그 문에 모여드니 참월(僭越)한 마음이 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국제(國制), 지신사(知申事) 1, 승선(承宣) 4인은 위()가 모두 3품을 넘지 않는 것으로 날을 걸러 교대로 입직(入直)하여 왕명을 출납하되 한 마디 말도 감히 자의로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니 이러므로 용후 (龍喉 임금의 후설(喉舌) 구실을 한다는 뜻), 또는 내상(內相 궐내(闕內)의 재상이란 뜻)이라 이르는 것입니다. ()에 이르기를 ‘선왕의 법을 준행하고서 허물을 짓는 자는 없다.’ 하였으니, 군신(君臣)이 서로 편안하게 되는 요체는 내재추를 제거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 ,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는데, 국가의 군무(軍務)는 전혀 통기(統紀)가 없으니 창졸간에 위태로운 때를 만나면 어떻게 조처하겠습니까? 마땅히 4겁설(怯薛) 외에 따로 군수부(軍帥府)를 설치하여 이에 따라 좌우 전후군(左右前後軍)으로 하여금 각기 장수와 요좌(僚佐)가 있게 하여 현관(現官)ㆍ산관(散官)의 문무 품관(文武品官)을 관장하게 하되 도통사(都統使)로부터 규제를 받고 도통사는 겁설관(怯薛官) 겁설(怯薛)은 몽고어로 예전에는 시위(侍衛)라 일컬었다. 으로부터 규제받으며, 겁설관은 일의 크고 작음이 없이 아뢰어 시행하도록 하십시오. 비록 외방(外方)에 있어서도 각기 그 방면(方面)으로써 하여, 동면(東面)은 좌군에 속하게 하고, 남면(南面)은 전군에 속하게 하며, 서해(西海)는 우군에 속하게 하고, 북계(北界)는 후군(後軍)에 속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내외와 상하가 서로 맥락이 통하여 강령(綱領)이 서고 세목(細目)이 펴질 것입니다.

하고, ,

“궁궐에 있어서의 시위(侍衛)는 신체에 있어서의 사지와 같으므로 인의(仁義)롭고 이치를 아는 자가 으뜸이고 용감한 자는 그 다음이 될 것이니 마땅히 4겁설관과 각 나연(那演) 약간 명을 두되 문무 기덕(文武耆德)에 구애되지 말 것이요, 8상장군(上將軍)16대장군(大將軍)42도부(都府)ㆍ홀치(忽赤)ㆍ충용(忠勇) 4()을 고루 나누어 이에 소속시켜 사졸을 훈련시키고 기계(器械)를 엄히 밝혀서 날을 걸러 시위하게 하며 군령(軍令)을 받아 행하게 하고, 또 중외(中外)의 수부(帥府)를 겸하여 관장하게 하면 그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에 있어서 마치 몸이 팔을 부리고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아 몸은 편안해지고 일은 거행될 것입니다.

하고, 또 소()의 끝에, 분경(奔競 엽관운동(獵官運動))하는 풍토를 금단하도록 아뢰었다. 그래서 왕이 가상히 여겨 그를 발탁하여 승진시켰던 것이다.

8월 왜()가 봉주(鳳州)를 침구하였다.

○ 황상(黃裳)ㆍ안우경(安遇慶)ㆍ최영(崔瑩)을 찬성사(贊成事), 이순(李珣)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삼았다.

9월 안우경ㆍ이순 등을 보내어 북원(北元)의 오로산성(五老山城 올랄산성(兀剌山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의 추밀부사(樞密府使) 합랄불화(哈剌不花)가 오로산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안우경을 서경 도만호(西京都萬戶), 이순을 안주 상만호(安州上萬戶)로 삼아 가서 치게 해서 이기고 합랄불화를 사로잡았다. 당시 응창(應昌 원 순제(元順帝)가 머물러 있다 죽은 곳)이 이미 깨뜨려졌기 때문에 원의 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里達臘 순제의 태자)이 도망하여 사막(沙漠)의 북쪽에서 나라를 세웠으니 이것이 북원(北元)이다. 잔원(殘元)의 남은 족속들이 요심(遼瀋) 일대의 곳곳에 몰래 웅거하고 있으면서 사자를 보내어 통신(通信)하기도 하고 혹은 오가며 고려(高麗)의 동북 변방 지역을 침략한 사실은 상세히 다 기록할 수가 없다.

○ 염제신(廉悌臣)을 서북면 도통사(西北面都統使)로 삼았다.

 

신돈이 베어지고 나서 구신(舊臣)으로서 죽음을 면한 자들을 모두 소환하였는데, 제신도 폐출(廢黜)된 자 가운데서 기용(起用)되었다.

10월 친히 태묘(太廟)에 제향(祭享)하고 악장(樂章)을 찬()하였다.

 

왕이 친히 태묘에 행행하여 군신(群臣)의 하례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숭인문(崇仁門) 안에 머물렀는데 성균학관(成均學官)이 생원(生員)과 십이도(十二徒) 생도를 거느리고 가요(歌謠)를 올리고 송사(頌詞)를 바쳤다. 교방(敎坊)도 가요를 올렸다.

11월 다시 응방(鷹坊)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혁파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매를 기르는 것은 사냥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용맹하고 날쌘 것을 사랑하기 때문일 뿐이다.

하였다. 매를 사육하는 자를 시파치(時波赤)라 하였다.

이부(吏部)가 상언(上言)하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준마를 물리친 일과 당 태종(唐太宗)이 새매를 소매 속에 감춘 일은 지금까지도 칭송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응방을 두어 중외가 소요하자 선왕께서 그 폐단을 깊이 우려하시어 혁파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지금 변경에는 걱정거리가 많고 군사(軍事)가 바야흐로 성한데 이것을 도모하지 않고 다시 응방을 설치하시니, 윗사람이 행하면 아랫사람이 본뜸이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 빨라 군하(群下)가 따르게 되어 사냥에 탐닉하여 직무에 태만하고 곡식을 짓밟아 우리 생민을 병들게 할까 두렵습니다. 이것은 전날의 폐단이 되살아나는 것이오니 청컨대 혁파(革罷)하소서.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 사신을 보내어 명()에 입조하였다.

 

당시 사신이 수로(水路)로 입조하게 되었는데, 하정사(賀正使) 정사도(鄭思道)가 교동(喬桐)에 이르러 배가 얕은 데에 걸려 구멍이 뚫려서 물이 새어들므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다시 한방언(韓邦彦)을 보내어 배를 출발시켰으나 풍파를 만나 침몰하고 말았다. 그래서 명의 중서성(中書省)에 이자(移咨)하여, 금주(金州)ㆍ복주(復州) 등지로 길을 취해서 뱃길을 단축하여 요동을 경유하기를 청하였다.

○ 염씨(廉氏)를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곡성백(曲城伯) 염제신의 딸로 이가 신비(愼妃)이다.

12월 현릉(顯陵 태조의 능)에 삭망제(朔望祭)를 다시 행하기 시작하였다.

○ 법령(法令)을 다시 일으키도록 하교(下敎)하였다.

 

교서는 다음과 같다.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신민(臣民)의 위에 의탁한 지 이제 21년째나 된다. 전번에 역신(逆臣)이 난을 도모하였으나 즉시 평정되고 종사(宗社)가 다시 안정되었으니 마땅히 선왕(先王)ㆍ선후(先后)께 시호(諡號)를 더해야 하며, 태후(太后)께 존호(尊號)를 올려야 한다. 또 정사에 미거(未擧)한 바가 있는가, 민생에 편치 못한 바가 있는가를 염려하니 널리 여러 사람의 말을 채택하여 중외에 포고하노라.

1. 의부(義夫)ㆍ절부(節婦)ㆍ효자(孝子)ㆍ순손(順孫)은 풍속에 관계되는 것이니 모두 정표(旌表)하도록 하라.

1. 교사(郊社)ㆍ종묘(宗廟)는 큰 제사(祭祀)이니 힘써 성대하고 청결하게 하라.

1. 단정(單丁)이 역()에 종사하는 것은 이미 금지해 온 것인데 관리(官吏)가 전과 같이 사역(使役)하니 모름지기 조역(助役)을 주어 실업(失業)이 되지 않게 하고 나이 60세가 되면 역()을 면제하도록 하라.

1. 흉황(凶荒)을 구제하고 기근을 진휼함은 왕정(王政)의 선무(先務), 충선왕(忠宣王)께서 일찍이 유비창(有備倉)을 두고 또 연호미법(煙戶米法)을 제정하셨으니 그 염려하신 바가 심원(深遠)하였으나 근래에 이르러 명목만 있고 실질이 없어졌다. 충선왕의 상평창(常平倉)ㆍ의창(義倉)의 제도를 회복하도록 하라.

1. 동서 대비원(東西大悲院)은 선왕이 본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설치하였는데 근래에는 맡은 자가 마음을 쓰지 않아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유리(流離)하여도 지급받는 바가 없으니, 원래 소속되어 있는 전민(田民)을 취감(取勘)하여 의약(醫藥)과 죽반(粥飯)을 풍부하게 하도록 하라. 국초에 의사(醫師)를 두어 백성이 요사(夭死)하는 일이 없어졌으니 이제부터 수령은 의인(醫人)을 찾아 약물(藥物)을 정비하고 모아서 백성의 목숨을 구제하도록 하라.

1. 근래 왜구(倭寇) 때문에 조운(漕運)이 모두 육로를 경유하고 있으니 주군(州郡)에게 원관(院館)을 수리하게 하여 땔나무와 꼴을 비축해 두어 행려(行旅)에 편의하도록 하라.

1. 선군(選軍)에게 전토를 지급하는 것은 이미 제정된 법이 있지만 근래에 전제(田制)가 문란해져서 부병(府兵)이 전토를 받지 못하니 모군(募軍)의 뜻이 아주 상실되었다. 이전의 제도를 회복하도록 하라.

1. 백료(百僚)의 서무(庶務)는 도당(都堂)에서 결단하게 되어 있는데, 요즈음 제사(諸司)가 직접 주현(州縣)에 통첩(通牒)하여 백성을 병들게 함이 사실로 많다. 이제부터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논하여 구처하도록 하라.

1. 까닭없는 도살(屠殺)은 관사(官司)와 주군(州郡)이 철저히 금단하도록 하라.

1. ()을 설치한 것은 본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함인데 근년에는 제사(諸司)가 수송할 것이 있으면 모두 역호(驛戶)에 맡기고 있으니 엄중히 금하도록 하라.

1. 문무(文武)의 도는 어느 한쪽을 폐할 수가 없다. 안으로는 성균관(成均館)에서부터 밖으로는 향교(鄕校)에 이르기까지 문무 2(二學)을 개설하여 인재를 양성해서 탁용(擢用)에 대비하도록 하라.

1. 군국(軍國)의 일이 번다하여 차발(差發)이 더욱 많아졌으니 홍무(洪武) 3년 이전의 각도(各道)의 포흠(逋欠)을 면제하도록 하라.

1. 도첩(度牒)을 받지 않았으면 출가(出家)를 허락하지 말라. 진정(陳情)하여 중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정전(丁錢) 50()을 납입해야 허락해 주도록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죄를 주라.

1. 부채(負債)로서 이자가 본전을 넘도록 계속 이식(利息)을 취하는 자는 본전은 관()에서 몰수하고 이전(利錢)은 빌린 자에게 돌려주도록 하라.

1. 제도(諸道)의 뽕나무를 심고 전토를 개간한 것은 수령(守令)이 보고하도록 하라.

【안】 고려 시대의 법제(法制) 가운데 채택할 만한 것이 진실로 많았으나 뒤에 모두 해이하게 되어 사문화(死文化)되었다. 충숙(忠肅)과 공민(恭愍)은 폐단이 쌓인 뒤를 계승하여 조교(條敎)와 법령으로 모두 나라를 위하고 백성에 편의로운 정치를 하려 하였으나 전날에 명했던 것을 뒤에 다시 되풀이해서 말해야만 했으니, 당시 실제로 행해지지 못했던 그 정사를 알 만하다. 왕의 말이 한번 나오면 반드시 행해져야 하는데 인순(因循)하고 게을러서 또다시 이전과 같아졌으니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말세의 정령(政令)이 흔히 한갓 말로만 그치니 백성이 어떻게 실제로 혜택을 입겠는가?

 

[D-001]한 문제(漢文帝)가 …… 물리친 일 : 문제 원년에 어떤 사람이 천리마(千里馬)를 헌상(獻上)하자 황제가 말하기를 “난기(鸞旗)가 앞에 있고 속거(屬車)가 뒤에 있으며, 순수(巡狩)할 때는 하루 50, 정벌갈 때는 30리를 가는데 내가 천리마를 타고 혼자 앞서 가서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물리쳤다. 《通鑑節要 漢紀 太宗孝文皇帝上》

[D-002]당 태종(唐太宗)이 …… 감춘 일 : 당 태종이 언젠가 좋은 매를 구해 어깨에 얹고 있다가 위징(魏徵)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소매 속에 감추었는데, 위징의 아뢰는 말이 오래 계속되어 결국 매가 죽고 말았다는 고사. 《通鑑節要唐紀 太宗皇帝上》

[D-003]연호미법(煙戶米法) : 고려시대 구황(救荒)과 기근을 진휼할 목적으로 평소에 호별(戶別)로 미곡을 출렴(出斂)하여 비축하였다가 비상시에 구급용으로 쓰던 제도인 듯하나, 그 설치 연대와 구체적인 내용이 《고려사》에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