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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5하 -안정복(安鼎福) -

천하한량 2007. 6. 12. 18:56

동사강목 제15   

 

 

계축년 공민왕 22(명 태조 홍무 6, 1373)

 

 

춘정월 초하루에 태백(太白)이 주현(晝見)하였다.

2월 북원(北元)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응창(應昌)이 무너진 뒤로는 조정이 북원의 소식을 다시는 알지 못하였다.

【안】 원 순제(元順帝)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혜종(惠宗)이라 시호하고, 태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이 서니 이가 소종(昭宗)이다.

그런데 3(을해)에 북원이 파도첩목아(波都帖木兒)ㆍ어산불화(於山不花) 등을 보내왔는데 조서에 이르기를,

“앞서 병란 때문에 북쪽으로 파천(播遷)하였으나 지금 곽확첩목아(廓擴帖木兒)를 재상으로 삼아 중흥을 하려 하는데 왕(王 공민왕)도 세조(世祖)의 손자이니 마땅히 힘을 도와 다시 천하를 진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 원의 사신이 입경(入境)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죽여버리려고 하였으나 군신이 모두 불가함을 고집하였다. 이에 그를 구류(拘留)할 것인가, 방환(放還)시킬 것인가, 체포하여 명의 서울로 보낼 것인가의 세 가지 방책을 놓고 물어 보았더니 군신이 모두 방환시키는 것이 무난하다고 하였다. 사신이 이르자 왕은 눈병이 나서 햇빛을 볼 수 없다고 핑계대고 밤에 그를 만나보고 돌려보냈으니, 대명(大明)을 매우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원의 사신이 돌아간 뒤에 저포(苧布)를 부쳐 바쳤다.

○ 왜가 귀산현(龜山縣) 지금의 칠원현(柒原縣)에 속하는데 현치(縣治)의 남쪽 41리에 있다. 을 침구하여 경상도 순문사(慶尙道巡問使) 홍사우(洪師禹)가 쳐서 깨뜨렸다.

 

왜가 귀산의 삼일포(三日浦) 지금의 마전포(麻田浦)인 듯하다. 를 침구하므로 사우가 재빨리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적이 산으로 오르자 사우는 군사를 지휘하여 사면에서 공격하여 2백여 급()을 베고 물에 빠져 죽은 자도 천()으로 헤아리게 되었으며 기계 병장(器械兵仗)의 노획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사우는 홍언박(洪彦博)의 아들이다.

3월 초하루(계묘)에 일식이 있었다.

○ 문묘(文廟)의 삭망제(朔望祭)를 다시 행하였다.

○ 왕이 대비전(大妃殿)에 나아갔다.

 

태후가 왕에게 이르기를,

“영전(影殿)의 장려함은 천하에 비할 데가 없는데,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하게 하여 홍수와 가뭄이 모두 이 때문에 난 것이니 그 역사를 파하도록 하시오. 또 김흥경(金興慶) 등 여러 자제(子弟)들은 밤낮으로 궁()에만 있고 집에 돌아가지 못하니 마땅히 윤번으로 숙위(宿衛)하게 해야 할 것이오. 그리고 만기(萬機)가 지극히 번다한데 왕이 한낮이 되어서야 기침을 하니 군국(軍國)의 사무에 어찌 지체가 없겠오? 마땅히 일찍 일어나고 밤들어 자면서 친히 국정을 청단(聽斷)하여 이 늙은 어미에게 효도를 하시오. 왕이 일찍이 적신 신돈만을 전적으로 믿고 나의 말을 듣지 않아 거의 나라를 망칠 뻔하였는데 지금 또 이러는 것이오?

하니, 왕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태후는 또, 비빈(妃嬪)들을 왜 가까이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왕이 말하기를,

“공주만한 여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는 눈물을 흘렸다. 태후는 웃으며 말하기를,

“한 번 죽음은 왕도 면하지 못하는데 어찌 그리 애통해 하시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조심하여 다시는 그러지 마시오.

하였다.

○ 이무방(李茂芳)을 계림윤(鷄林尹)으로 삼았다.

 

무방은 청백하고 강직하였다. 처음 순창군(淳昌郡)을 맡았을 적에 토산물을 요구하는 자가 있어, 무방이 차고 있던 붓집[?]과 띠를 끌러 아전에게 주며 말하기를,

“친구의 사사로운 소청이라 공물(公物)로 응해줄 수 없으니 이것을 가지고 구하는 물건을 바꾸어다 주도록 하라.

하니, 청을 했던 자가 부끄러워하며 떠나갔다.

계림윤이 되어서는, 이에 앞서 계림부가 크게 기근이 들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마침 풍년이 들었기에 무방이 백성의 편의를 위해 어염(魚鹽)을 팔아 의창(義倉)을 설치해서 진대(賑貸)를 마련하였다. 뒤에 최영(崔瑩) 6()를 순찰함에 법이 심히 준엄하여 수령 가운데 폄출(貶黜)된 자가 많았는데, 계림에 이르니 지경 안이 정숙하므로 최영이 크게 기뻐하였다.

4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 백모(白毛)가 내렸다.

 

6(정축) 밤에 하늘에서 백모가 내렸는데 길이가 두 치 또는 서너 치가 되고 가늘기는 말갈기만 하였다. 전후 6차례나 내렸다.

○ 가물었다.

○ 경성(京城)에 있는 우물이 붉게 끓어올랐다.

○ 전라도ㆍ경상도에 기근이 들어 사자를 보내어 진휼하였다.

5월 사유(赦宥)하였다.

 

왕의 탄신 때문이었다.

○ 평주(平州)에 비가 얼음이 되어 내렸다.

6월 왜가 한양부(漢陽府)를 불질렀다.

 

왜선이 동강ㆍ서강에 모여들어 양천(陽川)을 침구하고, 드디어 한양부에 이르러 집을 불태우며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므로 수백 리가 소란하게 되니 경성이 크게 진동하였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도성 안의 모든 호()들을 검열해서 10호를 1()으로 하여 1인씩 내어 방어에 나가도록 하되 5일마다 한 번씩 교대하게 하였다. 왜는 또 교동(喬桐)을 함락하고 해주(海州)로 들어가 목사 엄익겸(嚴益謙)을 죽였다.

○ 이현(泥峴)에 화원(花園)을 만들고 2층으로 된 팔각전(八角殿)을 지었다.

 

주위에 빙 둘러 화훼(花卉)를 심어 연회하고 노는 곳으로 삼았다.

7월 모니노(牟尼奴)의 이름을 고쳐 우()라 하고 강녕 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으로 봉하였다.

 

왕이 모니노를 후사(後嗣)로 삼고자 하여 직강(直講) 이숭인(李崇仁)에게 글을 가르치도록 해 왔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색(李穡)에게 물어 이름을 고치고 작()을 봉하니, 백관이 하례하였다. 정당문학(政堂文學) 백문보(白文寶)ㆍ전녹생(田祿生), 대사성(大司成) 정추(鄭樞) 등을 명하여 사부(師傅)로 삼았다.

○ 하청사(賀請使) 서장관(書狀官) 정몽주(鄭夢周)가 명에서 돌아왔다.

 

홍사범(洪師範) 등이 돌아오는 길에 바다 가운데의 허산(許山)에 이르러 태풍을 만나 배가 파선되어 익사하였다. 《명사고(明史藁)》에 이르기를 “공사(貢使) 홍사범 등 150여 인이 왔다가 사범 등 39인이 바람에 휩쓸려 물에 빠져 죽었다.” 하였다. 서장관 정몽주는 죽을 뻔하였다가 다시 살아나 말다래를 베어 먹으며 연명한 지 13일 만에 사고가 보고되어, 황제가 배를 갖추어 도로 데리고 와 후하게 위무하여 보내었다. 몽주가 옴에 중서성(中書省)이 이자(移咨)하였는데 이르기를,

“삼가 성지(聖旨)를 받든다. 중국의 제후(諸侯)들은 천자에게 매년 한 번의 소빙(小聘)을 하고 3년에 한 번의 대빙(大聘)을 하나 구주(九州) 밖에 있는 번방(藩邦)과 먼 나라들은 단지 매세(每世)에 한 번 조현(朝見)하고 공물(貢物)도 약간의 예물을 바쳐서 성의를 표할 따름이다. 이제 고려는 중국에서 좀 가깝고 문물(文物)과 예악(禮樂)이 중국과 비슷하여 다른 번방과 같이 하기는 곤란하니 3년에 한 번 조빙(朝聘)하는 예()에 의거하도록 하라. 혹은 매세에 한 번 조현하고자 한다면 그것도 또한 가()하다. 방물(方物)은 단지 토산의 포() 35()를 넘지 않는 정도로 하라.

하고, ,

“현재 천하의 각 아문(衙門)은 무릇 나의 생일과 정조(正朝)ㆍ동지(冬至)를 맞게 되면 모두 표문(表文)을 올려온다. 동지에는, 옛날에는 하례(賀禮)가 없었으니 금후에는 표문을 바칠 필요가 없다. 표문을 분류해서 올리도록 하라.

【안】 후세의 제반 하례는 모두 신하의 아첨에서 나왔으며 군주된 자도 또한 오연(傲然)하게 스스로 존대하고 그것이 그른 줄을 알지 못하였다. 명 태조(明太祖)가 동지(冬至)ㆍ생일(生日)의 하례를 없애도록 명한 것은 참으로 백세의 탁월한 조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여러 신하들의 아첨에 미혹되어 시작은 있었으나 종결을 잘 짓지 못하고 말았다.

하고, 또 자제의 입학(入學)을 청한 데 대해 답하기를,

“본국(本國 고려)이 멀리 해동(海東)에 처하여 고향과 동떨어져 있어 부모된 이는 반드시 아들 생각에 잠길 것이요, 아들된 자는 반드시 그 어버이를 그리워할 것이니, 부모가 입학시키기를 원하고 자제가 그 부모의 명을 즐거이 받아 공부하러 오려는 자는 보내도록 하라.

하고, 또 손내시(孫內侍)가 죽은 정상(情狀)에 대해서도 물었다.

8월 의용 좌우군(義勇左右軍)을 설치하였다.

9월 체복사(體覆使) 이걸생(李傑生)을 죽였다.

 

이에 앞서 강하 만호(江河萬戶) 하을지(河乙沚) 등이 왜를 방어하지 못해 걸생이 장배(杖配)하여 봉졸(烽卒)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은 걸생이 경솔하게 그 죄를 결정했다 하여 죽였다. 걸생은 형()에 임하여 담소(談笑)하며 태연자약하였다. 당시 행신(幸臣) 김흥경(金興慶)이 권세를 전행(專行)하여 생살(生殺)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사람들이, 걸생이 강직하고 말을 거리낌없이 하여 일찍이 흥경의 비위에 거슬렸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하였다.

10월 최영(崔瑩)을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로 삼았다.

 

왕이 최영에게 군호(軍戶)를 편적(編籍)하고 전함(戰艦)을 만들고 장수와 수령을 출척(黜陟)하게 하며 죄있는 자는 전단(專斷)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영이 본디 조사(朝士)의 현부(賢否)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출척이 정확하지 못하고 호령이 엄급(嚴急)하다고들 하였다. 또 나이 70세 이상인 자에게서 쌀을 차등 있게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충하게 하였는데, 백성들이 많이들 도망하고 원망이 크게 일어났다. 최영이 지나가는 번진(藩鎭)에는 수령들이 숨이 차고 넋을 잃어버릴 정도로 두려워했으나 용담현령(龍潭縣令) 김봉린(金鳳麟)만은 논설하여 응대함이 자약해서 전 도()가 일제히 칭찬하였다. 당시 외임(外任)이 한 해 동안에도 두세 번 바뀌었으나 봉린은 4년 동안 바뀌지 않아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다.

○ 왕이 화원(花園)에서 연회를 열었다.

 

판사(判事) 윤호(尹虎)가 글씨를 잘 썼는데, 왕이 윤호와 바둑을 두면서 이기지 못한 사람이 고시(古詩) 한 수를 써서 바치기로 약속하였다. 윤호가 이기지 못하자, 풍월(風月)에 관한 시는 왕 앞에 진달할 바가 아니라 생각하여 이에 쓰기를,

 

 

남 모르는 것을 속임도 안 되는데 / 欺暗尙不然

세상 다 아는 일 속임은 죽음을 자초하나니 / 欺明當自戮

한 사람의 손으로 / 難將一人手

만인의 눈을 가리기는 어렵네 / 掩得天下目

 

 

하였다. 이를 바치자 왕은 휼간(譎諫)하는 것이라 하여 그를 소원하게 대하였다.

11월 사신을 보내어 명에 입조(入朝)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 주영찬(周英贊)은 하정사(賀正使), 판선공(判繕工) 우인열(禹仁烈)은 말 24필과 노새 2필을 바치기 위해 갔는데 거자(擧子) 김잠(金潛)ㆍ송문중(宋文中)ㆍ조신(曹信)이 따라갔으며, 또 손내시(孫內侍)가 죽은 정상에 대해서도 표변(表辨)하려 하였다. 그런데 영광(靈光)의 자은도(慈恩島) 지금의 나주(羅州)에 속해 있는데, 주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다. 에 이르러 배가 파선하여 영찬ㆍ김잠ㆍ조신은 익사하고 인열과 문중은 되돌아왔다. 그래서 다시 장자온(張子溫)을 영찬 대신에 보내었다. 문중은 회시(會試)에 응시하러 갔으나 시기(試期)에 미치지 못해 되돌려보내며 본국에 탁용(擢用)하도록 명하였다. 영찬의 딸이 일찍이 원에 들어가 있다가 대명(大明)의 군대에 포로가 되었는데, 뽑혀서 궁인(宮人)이 되어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영찬이 자주 사명(使命)에 충당되었다.

12월 평양윤(平壤尹) 전녹생(田祿生)이 중 석기(釋器)를 잡아서 죽였다.

 

충혜왕(忠惠王)의 서자(庶子)라 칭하는 석기(釋器)라는 사람이 있어, 평양윤 전녹생이 김유(金庾)를 시켜 잡아다 목베어서는 머리를 서울로 보내고 아울러 그 외조(外祖) 임신(林信) 등을 베었다. 왕은 하교(下敎)하고 대사(大赦)하였다.

석기는 그 죄과가 아직 뚜렷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느닷없이 죽이니 사람들이 의심하였다. 당시 태후는 석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모르는 척하고는 거짓으로 말하기를,

“어젯밤 꿈에 죽은 시체를 보아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다.

하고 선부(膳夫)에게 소선(素膳)을 올리도록 하였다.

녹생이 석기를 엄습해 잡을 적에 함께 동행하던 중을 대신 잡았기에 석기는 기실 죽지 않고 안협(安峽)의 백성 백언린(白彦麟)의 집에 달아나 숨어 있었다. 23년 뒤에 이인임(李仁任)이 목인길(睦仁吉)을 보내어 잡았는데 생김새가 기위(奇偉)하고 말하는 품이 범상치 않아 보는 이들이 모두 참으로 왕자(王子)답다고들 하였다. 인임은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석기는 이미 평양(平壤)에서 죽었는데 지금 어찌 망령되이 사칭(詐稱)하는가?

선언(宣言)해 두고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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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6상을묘 고려 전폐왕 우(前廢王禑) 원년부터, 무진 14 6월까지 14년간   

 

 

무오년 전폐왕 우 4(명 태조 홍무 11, 1378)

 

 

춘정월 왜가 연안부(延安府)를 침구하였다.

2월 지진이 있었다.

○ 오부(五部)의 방리군(坊里軍)을 점고하여 배를 타고 가서 왜를 포획(捕獲)하게 하였다.

 

이때에 왜가 안산(安山)ㆍ인주(仁州)ㆍ부평(富平)ㆍ금천(衿川)을 침구하였으며, 강화부(江華府)도 자주 노략질당하였다. 또 태안군(泰安郡)을 침구하여 남양(南陽)에 이르러 수원부(水原府)를 노략하니, 원수 왕빈(王賓)이 패배하고서 원병(援兵)을 청하므로 밀직(密直) 박수경(朴修敬)을 명하여 구원하게 하였다.

3월 사신을 명()에 보내어 사례하였다.

 

()가 본국인(本國人) 정언(丁彦) 3 58인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유번(柳藩)을 보내어 사은(謝恩)하는 예의(禮儀)를 행하게 하고, 판서(判書) 주의(周誼)를 보내어 시호(諡號)와 승습(承襲)을 청하게 하였다.

유번 등이 돌아올 적에 예부(禮部 명 나라 예부이다)가 제의 뜻을 기록하여 보였는데 이러하다.

()은 한미한 출신으로 중국의 군주가 되었다. 처음 즉위하여 사방(四方)의 오랑캐에게 비보(飛報)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중국에 임금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통화(通和)하게 하는 데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뜻밖에도 고려왕(高麗王) 왕전(?)이 신하라 칭하면서 조공(朝貢)을 바쳐왔으니, 이는 힘 때문이 아니요 마음으로 열복(悅服)한 때문이다.

그 왕이 정성을 바친 여러 해 만에, 신하에 의하여 시해(弑害)되었고 시해된 지 또 여러 해 되었다. 그런데 저들이 와서 왕전의 시호를 청하니, 짐의 생각으로는 산과 바다가 멀리 가로막혀 성교(聲敎)로 제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마땅히 저들이 하자는 대로 들어 줄 것이요, 명작(名爵)에 간여할 것이 아니다.

전에 자기들 임금을 시해하고 행인(行人)을 죽였는데, 이제 어찌 법률을 따르고 헌장(憲章)을 지키겠는가? 저들의 일에 간여하지 말라. 조칙(詔勅)대로 시행할지어다.

4월 우리 태조와 최영ㆍ양백연(楊伯淵)이 승천부(昇天府)에서 왜적을 크게 깨뜨렸다.

 

왜적이 임주(林州)ㆍ한주(韓州)를 침구하여 덕풍(德豊)ㆍ합덕(合德) 지금은 홍주(洪州)에 속해 있다. 등 지방에까지 이르러, 도순문사(都巡問使)의 영()을 불지르고 착량(窄梁)에 크게 모여 승천부로 들어가니, 중외(中外)가 크게 진동하였다.

우왕은 제군(諸軍)을 나누어 동강(東江)ㆍ서강(西江)에 보내어 주둔시키고, 군사를 배치하여 궁문(宮門)을 호위하는 한편, 방리병(坊里兵)을 징발하여 성 위로 올라가 관망하게 하였으며, 최영을 제군의 도독(都督)으로 삼아 해풍(海豊)에 주둔하게 하고 양백연을 부도독으로 삼았다. 왜적이 이 사실을 염탐하여 알고서 말하기를,

“최영을 격파하면 서울을 도모할 수 있다.

하고, 곧 해풍(海豊)으로 달려가 곧바로 중군(中軍)을 향하니, 최영은,

“사직(社稷)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달렸다.

하고, 백연(伯淵)과 함께 진격하였는데, 적이 최영을 급박하게 추격하자 최영이 달아났다. 그때 우리 태조가 정기(精氣)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백연과 합세,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싸우려 할 적에 제장(諸將)이 후퇴하여 다리를 건너려 하였는데, 조전원수(助戰元帥) 성석린(成石璘)이 말하기를,

“만약 건너가면 인심이 변할 것이니, 다리를 등지고 싸우는 것만 못하다.

하므로, 제장이 따랐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니 과연 적이 패주하였다.

최영은 적이 무너지는 것을 보자 휘하 군사를 이끌고 옆을 공격하여, 적을 거의 다 섬멸시켰으며, 남은 무리는 밤을 타고 도망쳐 달아났다.

이때에 성중(城中)에서는 최영이 쫓겨 달아났다는 소문이 들리자 인심이 술렁거렸고, 우왕도 성을 벗어나 피하려 하였었는데, 조금 있다가 첩보(捷報)가 이르렀으므로 경성의 계엄(戒嚴)을 풀었다.

6월 왜적이 청주(靑州)를 침구하였다.

 

이때에 왜적이 서주(西州) 지금의 서천(舒川) ㆍ비인(庇仁)ㆍ수원(水原)ㆍ용구(龍駒) 지금의 용인(龍仁) 등의 지방을 침략하고 또 청주를 침략하였는데, 적의 기세가 매우 날카로워서 아군(我軍)은 소문만 듣고도 달아났다. 그리하여 적이 사방에서 출동하여 노략질을 하였는데 영주(寧州)ㆍ목주(木州)ㆍ온수현(溫水縣)을 침구(侵寇)하였다.

○ 왜승(倭僧) 신홍(信弘)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적왜(賊倭)를 체포(逮捕)하였다.

 

원요준(源了俊)이 신홍을 보내어 69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적왜를 체포하였다. 조양포(兆陽浦) 지금의 보성군(寶城郡) 동쪽 28리에 있다. 에서 싸워 1척을 노획하여 모두 베었고, 또 고성군(固城郡) 적전포(赤田浦)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자 드디어 돌아갔다.

○ 제()가 최원(崔源)을 돌려보냈다.

 

【안】《명사(明史)》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주의(周誼)가 경사(京師)에 와서 시호(諡號)와 승습(承襲)하게 해 주기를 청하니, 제가 이르기를,

“왕전(?)이 시해(弑害)당한 지 이미 오랜데 이제 시호를 청하니, 이는 우리 조정의 힘을 빌어 백성을 진무(鎭撫)하고 또 시역(弑逆)의 자취를 감추려는 것이라 허락할 수 없다. 전에 억류(抑留)시켰던 사신(使臣)은 돌려보내라.

하였으므로, 이에 최원 등을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 우인열(禹仁烈)을 경상(慶尙)ㆍ양광(楊廣)ㆍ전라(全羅) 3도의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았다.

7월 정몽주(鄭夢周)가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원 요준이 사신을 보내었으므로 함께 왔다.

 

원 요준이 주맹인(周孟仁)을 보내었으므로 몽주와 함께 왔다. 몽주가 돌아올 적에 포로되었던 사람 윤명(尹明)ㆍ안세우(安世遇) 등 수백 명을 쇄환(刷還)하고, 또 삼도(三島)의 침략을 금하게 하였다.

왜인이 오래도록 칭송하고 사모하여 마지않았는데, 뒤에 몽주가 졸()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절에 가 재()를 올리면서 명복을 비는 자까지 있었다.

몽주는 돌아와서 여러 재상(宰相)과 재물을 내어 포로된 백성의 몸값으로 주고 데려오기를 모의하고 편지를 써서 윤명에게 주어 보냈는데, 적의 괴수(魁首)가 편지의 내용이 매우 간측(懇惻)함을 보고서는 포로 1백여 인을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윤명이 갈 때마다 반드시 포로된 백성을 데리고 돌아왔다.

【안】《통신일기(通信日記)》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축전주(竺前州)의 박다진(博多津)은 일본의 음()으로는 화가대(和家臺)이고 우리 나라의 음으로는 패가대(覇家臺)인데, 곧 포은(圃隱)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유람하던 곳이다.

○ 북원(北元)의 사신(使臣)이 왔다.

 

사신이 와서 자기들의 임금 두질구첩목아(豆叱仇帖木兒)가 즉위하였다고 하니, 우가 병을 핑계하고 맞이하지 않자 사신이 강요하므로, 드디어 행성(行省)으로 나아가 맞았다.

8

 

원수(元帥) 배극렴(裵克廉)이 욕지도(欲知島)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에서 왜적을 패배시켰다.

○ 호랑이가 서울로 들어왔다.

 

인물(人物)을 많이 해쳤으므로 우리 태조가 쏘아 죽였다.

○ 왜적이 연안부(延安府)ㆍ해주(海州)를 침구하였다.

○ 나세(羅世)ㆍ심덕부(沈德符)를 보내어 전함(戰艦)을 거느리고 여러 섬에 있는 왜적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였다.

9월 자미성(紫微星) 자리에 패성(?)이 나타났다.

○ 홍무(洪武) 연호(年號)를 다시 썼다.

10월 왜적이 전주(全州)를 침구하였다.

○ 판서(判書) 이자용(李子庸)을 일본에 보내어 해적을 금지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원 요준(源了俊)이 신홍(信弘)을 보내고 또 사신(使臣)을 보내어 답례하여 왔으나, 왜적의 노략은 점점 치열하여졌으므로 다시 이자용ㆍ한 국주(韓國主) 등을 보내어, 요준(了俊)에게 금은(金銀)ㆍ주기(酒器)ㆍ인삼(人蔘)ㆍ호피(虎皮) 등의 물품을 주면서 해적을 금지해 줄 것을 청하였다.

○ 도순문사(都巡問使) 지용기(池湧奇)와 병마사(兵馬使) 정지(鄭地)가 옥과(玉果)에서 왜적을 패배시켰다.

○ 완산군(完山君) 최재(崔宰)가 졸()하였다.

 

()는 강직하고도 침착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의 중히 여김을 받았다. 시호는 문진(文眞)이다.

11월 좌소조성도감(左蘇造成都監)을 설치하였다.

 

()가 일찍이 좌사(左使) 홍중선(洪仲宣)과 정당(政堂) 권중화(權仲和) 등을 불러 이르기를,

“경성이 바다와 가까워 불의의 변이라도 있을까 염려되고, 또 지기(地氣)는 쇠왕(衰旺)이 있는데, 도읍을 정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지역을 가려 도읍을 옮겨야겠다. 도선(道詵)의 서()를 상고하여 아뢰라.

하매, 권중화ㆍ이색(李穡) 등이 모여 의논하고, 전 총랑(摠郞) 민중리(閔中理)가 상언(上言)하기를,

“도선의 밀기(密記)에 실린 북소기달(北蘇箕達) 산 이름이니, 지금의 신계현(新溪縣) 동쪽 31리에 있다. 이란 곳은 곧 협계(峽溪) 폐현(廢縣)으로 지금의 신계현 남쪽 30리에 있다. 로 천도(遷都)할 만합니다.

하니, 권중화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여 북소 궁궐 옛터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조정 의론이 산골짜기에 치우쳐 있어 조운선(漕運船)이 통할 수 없다 하여 드디어 중지되었다. 얼마 후에 국사(國史),

“좌소(左蘇)는 백악산(白岳山)이요, 우소는 백마산(白馬山)이며, 북소는 기달산(箕達山)인데 삼소(三蘇)에 궁궐을 창건하였다.

한 글이 있었으므로 드디어 백악산에 역사를 벌였으나, 뒤에 흉년이 들어 간관이 논란하여 파하였다.

○ 지진이 있었다.

○ 고가노(高家奴)가 와서 투항(投降)하였다.

 

고가노는 원()의 평장(平章)으로 요동(遼東)과 심양(瀋陽) 사이에 있으면서 명()에 붙기도 하고, 원에 귀부(歸附)하기도 하다가 이때에 와서 군사 4만을 이끌고 강계(江界)에 와서 투항하였다.

5()에 좌우익군(左右翼軍)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파하였다.

 

왜구가 잠잠해질 때까지를 기한하여, 각 도에 계점호구사(計點戶口使)를 파견하였다. 서북면(西北面)의 예에 따라 5도에 좌우익군을 두었는데, 직품(職品)이 있는 자로 하여금 천호(千戶)ㆍ백호(百戶)ㆍ통주(統主)를 삼아 통주는 10명을, 백호는 1백 명을, 천호는 1천 명을 통솔하게 하여 각 익(各翼)에 분속(分屬)시켜 스스로 군장(軍裝)을 갖추게 하였다. 양반ㆍ백성ㆍ재인(才人)ㆍ화척(禾尺)은 군인으로 만들고, 이서(吏胥)ㆍ역졸(驛卒)ㆍ공사노비는 연호군(烟戶軍)을 만들어, 무사할 때는 돌아가 농사를 짓다가 사변이 있으면 출정하게 하였다. 얼마 뒤에 헌부(憲府)가 그 폐해를 논하기를,

“용병(用兵)의 도는 식량 넉넉하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식량을 넉넉하게 하려면 농사를 권장하는 것이 근본인데, 지금 원수(元帥)를 나누어 보내어 인구를 헤아려 징발하고, 수령도 각박하게 해서 단정(單丁)이나 과부의 자손, 끼어 사는 자 및 죽은 지 오랜 사람이나 벼슬 사는 사람, 멀리 유배당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병적(兵籍)에 붙여 액수를 채우니, 한창 농사철인데도 옥에 갇힌 자가 수만이나 됩니다. 각 익의 두목(頭目)은 반드시 차등에 따라 직()이 있으므로 거리의 원근을 막론하고 양식을 싸가지고 가고 오는 폐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사한 때일지라도 농사를 짓도록 돌려보내지 않고, 항상 거느리고 다니면서 사냥을 하는 등종처럼 부리며, 하루를 빠지면 34필의 포()를 거두고 포가 없는 자에게서는 대신 가산을 징발하므로 많은 백성이 도망하여 이산되니 탄식할 일이라 하겠습니다.

서북면인 경우에는 완전히 군무만 맡겨 공부(貢賦)는 일체 면제하고 특별히 각각 익()을 설치하여 전조(田租)를 거두어 모두 군량(軍糧)에 충당하기 때문에 군정(軍政)에 결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도는 그렇지 못하여 대소의 공부와 차역(差役)이 모두 백성에게서 나오는데 여기에다 익군(翼軍)을 더 보태니 농민이 본업을 잃어 군량이 부족하게 되므로 국세가 날로 궁핍해집니다. 원컨대 각 익을 파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얼음이 얼지 않았다.

○ 이해에 기근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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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6   

 

 

임술년 전폐왕 우 8(명 태조 홍무 15, 1382)

 

 

2월 궁인(宮人) 노씨(盧氏)를 책봉하여 의비(毅妃)로 삼았다.

 

노씨는 본디 근비(謹妃)의 궁인이었던 석비(釋妃)인데, 총애가 후궁(後宮)에서 으뜸이어서 의복이나 거마의 사치하기 근비보다 더하였다. ()를 세워 덕창(德昌)이라 하고, ()을 주어 의순고(義順庫)를 비의 개인 곳집으로 하며, 비의 아버지 노영수(盧英壽)를 밀직사(密直使)로 삼으니 기세가 등등하였다.

○ 하늘에서 곡식이 내렸다.

 

13(계해)에 하늘에서 곡식이 내렸는데, 흑기장ㆍ팥ㆍ메밀 같은 것들이 있었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흉년이 겹쳐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을 징조이다.

하였다.

○ 패성(?)이 북방에 나타났다.

○ 반전색(盤纏色)을 설치하였다.

 

이때에 명()에서 세공(歲貢) 바치기를 독촉하므로 시중 윤환(尹桓) 등이 의논하기를,

“재상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차등 있게 포()를 내어 세공에 충당시키자.

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지금 사민(士民)의 생업도 제대로 이어갈 수 없는데 포를 또 내도록 한다면 그 폐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고, 또 징구(徵求)가 만족할 줄을 모르니 어찌 요구하는 대로 다 좇을 수 있겠는가? 먼저 사신을 보내어 세공의 액수(額數)를 감면시켜 주도록 청해 보고 부득이하거든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해에 흑자(黑子)가 있었다.

4월 왜적이 임주(林州)에 침구하였다. 우가 동교(東郊)에서 사냥하였다.

 

우가 동교에서 사냥하면서 이르기를,

“사관(史官)이 내 과실을 기록하는 것을 보기만 하면 내가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하였다. 이 때문에 사관이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였다.

이때 우의 유렵(遊獵)은 날로 심하여가고, 때로는 혼자 환관이나 군소배들과 어울려 여염(閭閻)으로 말을 달리면서 닭이나 개를 쳐죽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빼앗기도 하니, 간관(諫官) 정이(鄭釐) 등이 상소하기를,

“옛날의 임금은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아니하여, 행행(行幸)할 때에는 반드시 의장(儀仗)과 호위를 갖추었으며, 정문(正門)으로만 출입하고 황도(黃道 제왕이 다니는 큰 길, 즉 대로(大路)를 말한다)로만 다녔습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한두 노복만 거느리고 밤낮없이 말을 타고 달리시니, 함궐지변(?之變 말이 성을 내어 재갈이 벗겨지고 굴레가 부러져 수레가 전복하는 변고)이라도 당하실까 두려우며, 더구나 지금은 왜적이 국내 깊숙이 들어오고 초적(草賊)이 횡행하니 어찌 간인이나 자객(刺客)의 변이라도 있을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우는 듣지 않았다.

○ 왜적이 평해군(平海郡)에 침구하였다.

3월 왜적이 안동(安東) 등지에 침구하였다.

○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이 졸하였다.

 

제신은 늙은 뒤에도 나라에 크게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의논에 참여하여 심중에 있는 말을 숨김없이 진언(進言)하였으며, 총재(?)로 있은 것이 29년이었다. 병이 들자, ()가 중관(中官)을 보내어 약과 음식을 하사하니, 제신이 의관을 갖추고 받으면서,

“상께서 노신(老臣) 같은 자에게까지 염려하시는 것은 신이 일찍이 선군(先君)을 좌우에서 모셨다고 해서일 것입니다. 신은 이제 거의 죽게 되었으니, 원컨대 상께서는 날마다 하루하루를 삼가시어 오래도록 이것을 잊지 마소서.

하였다. 졸하니, 시호(諡號)를 충경(忠敬)이라 하였다. 유명(遺命)에 의해 죽은 지 3일 만에 장사하였다.

4월 사신을 보내어 명에 입공(入貢)하게 했으나 요동(遼東)에 이르러 받아들이지 않아 되돌아왔다.

 

김유(金庾)ㆍ홍상재(洪尙載)ㆍ김보생(金寶生)ㆍ정몽주(鄭夢周)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세공(歲貢)으로 금 1백 근, 1만 냥, 1만 필, 1천 필을 바쳤다.

○ 화척(禾尺)을 여러 주에 분치(分置)하였다.

 

화척이 떼를 지어 왜적이라 사칭(詐稱)하고 영해군(寧海郡)에 침입하여 공해(? 관가건물)를 불지르니, 판밀직(判密直) 임성미(林成味) 등을 보내어 추격해서 잡게 하고, 제도(諸道)의 안렴사(按廉使)로 하여금 화척 중 주모자는 잡아 참()하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여러 주에 나누어 두고 평민과 같이 역()을 차등 있게 하되,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참하게 하였다. 화척은 곧 양수척(楊水尺)을 말한다.

○ 왜적이 단양(丹陽)에 침구하니 원수(元帥) 변안열(邊安烈)이 쳐서 패주시켰다.

5월 요민(妖民) 이금(伊金)이 복주(伏誅)되었다.

 

고성(固城)의 요민 이금이 자칭 미륵불(彌勒佛)이라 하며 대중을 현혹시키니 어리석은 백성이 쌀ㆍ비단ㆍ금은을 시주(施主)하고 고기를 먹지 않으며, 무격(巫覡 무()는 여자 무당, ()은 남자 무당 즉 박수를 말한다)은 자기들의 신()을 철거하고 이금을 부처처럼 공경하였다. 이금이 이르면 그곳 수령들까지도 혹 출영(出迎)하는 자가 있었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권화(權和)가 그들을 꾀어 괴수 5인을 참하니 이때 난민이 많이 궐기하였다. 사노(私奴) 무적(無敵)이란 자 역시 미륵불의 화신(化身)이라 칭하고, 합주(陜州)의 어떤 사노도 검대장군(劒大將軍)이라고 칭하다가 모두 복주되었다.

이때 정도전(鄭道傳)이 회진(會津)에서 돌아와 삼각산(三角山) 아래에다 초려(草廬)를 짓고 살았는데 중 찬영(粲英)이 지나다가 들러보고 하는 말이,

“이금의 말에 ‘만약 내 말을 믿지 않으면 3월에 가서는 해와 달이 빛이 없어질 것이다.’ 한다 하니, 이 말이 어찌 가소롭지 않는가? 국인(國人)들이 어찌하여 이와 같이 믿는가?

하니, 도전이,

“이금과 석가(釋迦)는 그 말이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석가는 멀리 저승의 일을 말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망령됨을 알지 못하고, 이금은 가까운 3월의 일을 말하여 그 말이 망령되다는 것을 당장에 볼 수 있을 뿐이다.

하니, 찬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도전은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겨 염락(濂洛 염은 주돈이(周敦?)가 살던 염계(濂溪), 낙은 정자(程子) 형제가 살던 낙양(洛陽)을 말한다)의 성리설(性理說)을 듣고서 후생(後生)을 가르치고 이단(異端) 배척하기를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배우는 자들이 많이 따랐다.

6월 조준(趙浚)을 경상도 체복사(慶尙道體覆使)로 삼았다.

 

이때 왜적의 침구가 매우 치성(熾盛)해서 주군(州郡)이 소연(騷然)하여 백성이 모두 산곡(山谷)으로 숨어 버려도, 장수들은 구경만 하면서 싸우지 않아 왜적의 형세는 날로 성해가므로 최영(崔瑩)이 조준을 천거하여 체복사로 삼았다. 조준이 임지에 이르러 도순문사(都巡問使) 이거인(李居仁)을 불러 싸우지 않고 머뭇거린 죄를 따지고, 병마사(兵馬使) 유익환(兪益桓)을 참()하니 여러 장수들이 벌벌 떨었다. 〈조준이〉 싸움마다 승첩을 고하니, 거기에 힘 입어 온 도가 편안하게 되었다. 조준은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왜적에게 죽은 효자와 열녀ㆍ열부(烈婦)를 정표(旌表)하게 하였다.

○ 이인임(李仁任)을 영문하사(領門下事), 최영을 영삼사사(領三司事), 홍영통(洪永通)을 시중(侍中)으로, 이자송(李子松)을 수시중으로 삼았다.

7월 경성(京城)에 큰 기근이 들었다.

 

1필 값이 쌀 34()이었다.

○ 사자를 보내어 각 도의 산성(山城)을 순심(巡審)하였다.

○ 우리 태조를 문하찬성사 동북면 도지휘사(門下贊成事東北面都指揮使)로 삼았다.

 

여진(女眞)의 호발도(胡拔都)가 요동에 있으면서 동북면의 백성들을 노략하였는데, 태조의 집안이 대대로 그 도()를 다스려 위엄과 신의가 알려졌기 때문에 진()에 나가 위무(慰撫)하게 한 것이다.

○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추(鄭樞)가 졸하였다.

 

추는 자()가 공권(公權)인데 자로 행세하였다. 성품이 공검 근후(恭儉謹厚)하며 정직함으로 관직 생활을 하였다. 이때 가묘(家廟)의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공권만은 제기(祭器)를 별실(別室)에 보관해 두었다가 제사 때면 친히 닦고 씻어 깨끗이 사용하였다. 권간(權奸)들이 정사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여 분개한 나머지 등창이 나서 죽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원재집(圓齋集)》이 세상에 전한다.

○ 명()이 운남(雲南)을 평정하고 양왕(梁王)의 가속(家屬)을 보내어 제주(濟州)에 안치하였다.

○ 밀직사(密直使) 유번(柳潘)을 명에 보내어 하례(賀禮)하였다.

8월 혜성(彗星)이 태미원(太微垣)에 나타났다.

9월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겼다.

 

이보다 앞서 서운관(書雲觀)에서 괴변이 자주 나타나고, 야수가 도성 안에 들어오며, 우물물이 끓고, 물고기들이 싸우며, 까마귀떼가 궁중으로 날아든다 해서 도읍을 옮겨 재이(災異)를 피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인임(李仁任)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최영(崔瑩)이 천도(遷都)할 계획을 의정(議定)하자, 대간(臺諫)이 간쟁(諫爭)하였으나 듣지 않고 27(계유)에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개성(開城)은 이자송(李子松)에게 명하여 유수(留守)하게 하고, 궁녀에게 이장포(理裝布) 5천 필을 내렸다.

10월 왜()가 진포(鎭浦)의 해도(海道)를 침구하였는데, 원수 정지(鄭地)가 격퇴하였다.

11월 명에 하정사(賀正使)를 보냈는데 요동에 이르렀다가 받아들이지 않아 그냥 돌아왔다.

 

밀직 정몽주(鄭夢周)와 판서 조반(?)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정조를 하례하고, 시호 및 승습(承襲)을 청하게 하였다. 사신이 요동에 이르자, 요동 도사(遼東都司)가 칙명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칙명에,

“수년 동안 바치지 않은 하찮은 공물을 합산하여 공물의 액수를 만들어 은근히 모욕을 주려는 것이다. 내가 중국의 책을 보니 그들이 은혜를 모르고 화()를 꾸미기를 좋아하니, 잠시 신하가 된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전례대로 국경에 들이지 말고 스스로 교화(敎化)되도록 하라.

하였다.

○ 제도(諸道)에 시여장(施與場)을 설치하였다.

 

경상(慶尙)ㆍ강릉(江陵)ㆍ전라(全羅) 3도가 왜의 침구로 말미암아 생업을 잃어 백성들이 많이 굶어 죽었다. 최영이 제도에 시여장을 설치하고 인자하고 어진 사람으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여, 관청의 쌀로 미음을 쑤어 진휼하되 보리가 익은 뒤에야 그만두도록 하였다.

○ 전함(戰艦)을 건조하였다.

 

앞서 최영이 육도도통사(六道都統使)가 되었을 때 전함 8백 척을 만들어 해구(海寇)를 소탕하려고 하였었다. 공민왕이 이해(李海)로 하여금 나누어 배를 거느리게 하였는데 마침내 실패하였으며, 손광유(孫光裕)가 강구(江口)의 선박을 거느리고 있다가 왜적을 만나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때에 와서 최영이 배를 개조(改造)하려고 제도의 군사를 징발하고 또 승도(僧徒)들을 모집하면서 말하기를,

“지금은 바야흐로 농사철이어서 백성들을 부릴 수 없으니, 승도들을 역사시키려고 한다. 당 태종(唐太宗)이 우리 나라를 쳐들어올 때 우리 나라에서는 승군(僧軍) 3만 명을 징발하여 격파하였다. 이제 만약 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막는다면 그 공이 어찌 작겠는가?

하였으며, 정지(鄭地)도 제도에서 전함 건조할 것을 청하였더니 그대로 좇았다.

사재령(司宰令) 이광보(李光甫)에게 배 만드는 일을 독려하게 하였는데, 매우 급히 서둘러서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1년이 못되어 큰 배 30여 척을 만들어 요해처에 나누어 지키니, 이때부터 왜의 침구가 조금 뜸해져서 백성들이 도리어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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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6   

 

 

을축년 전폐왕 우 11(명 태조 홍무 18, 1385)

 

 

2월 판서(判書) 왕흥(王興)의 딸을 맞아들여 선비(善妃)로 삼았다.

 

왕흥이 딸을 변안열(邊安烈)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우가 빼앗으려 하였다. 조민수(曺敏修)가 말하기를,

“안열은 나라의 명장(名將)인데, 이제 그의 며느리를 빼앗는다면 장수된 자들이 누가 맥이 풀리지 않겠습니까?

하였으나, 듣지 않고 왕흥의 집에 가서 위협하여 비로 삼았다.

○ 도적이 북청 만호(北靑萬戶) 김득경(金得卿)을 살해하였다.

 

앞서 득경이 여진 군사를 참할 때 도당(都堂)의 첩서(帖書)를 받아서 하였는데, 이때 요동에서 와서 힐책하고 득경을 잡아갔다. 임견미가 사실이 탄로날까 두려워 걱정하고 있는데, 제학(提學) 하륜(河崙)이 견미에게 비밀히 말하기를,

“일이란 권도(權道)를 따르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이제 서북(西北)에는 왜구가 가득하니, 어찌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자가 없겠는가?

하니, 견미가 크게 기뻐하여 도적을 시켜 득경이 철주(鐵州)에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밤중에 죽이고는, 왜적이 죽였다고 보고하였다.

3월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우가 해주에 이르러 여러 폐행(嬖幸)들과 유희하면서 사슴을 쏘다가 말에서 떨어져 졸도(卒倒)하였다 다시 살아났다. 이때 경성에서부터 해상(海上)까지 물품을 공급하는 수레가 끊이지 않았고, 시인(侍人)과 내수(內竪)들이 임금의 굄을 믿고 횡포를 부려 안렴사(按廉使)와 수령(守令)을 욕보이니, 서해 지방의 이민(吏民)이 그 해독(害毒)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흩어져 도망하였다. 그러나 우는 즐거워하면서 돌아올 줄을 모르다가, 최영이 간한 다음에야 돌아오는데 연안부(延安府)에 이르니, 큰 우박(雨雹)이 와서 따르는 자들이 심한 고생을 하였고, 소와 말이 길에서 연달아 죽었다. 밤에 왕흥(王興)의 집에 이르렀다. 강인유(姜仁裕)가 그의 처와 함께 송악(松岳)에 제사하다가, 왕이 친히 피리를 불고 풍악을 울리자 상춘정(賞春亭)에서 맞았다. 술이 몹시 취하여 밤에 돌아오다가 전 낭장(郞將) 김성길(金成吉)을 길에서 만나자 때려 죽였다.

○ 징파도(澄陂渡) 3일 동안 누렇게 흐렸다.

○ 성균시(成均試)를 보여 취사(取士)하였다.

 

앞서 덕종(德宗)이 국자시(國子試)를 설치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이 폐지하였다. 이때 와서 다시 성균시를 설치하여 대언(代言) 윤취(尹就)가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세력 있는 집안의 젓내 나는 어린 아이들을 뽑으니, 당시 사람들이 ‘분홍방(粉紅榜)’이라 비웃었다. 이는 아이들이 분홍색 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후에 동당시(東堂試)는 염국보(廉國寶)와 정몽주가 시관이 되었다. 노비(盧妃)의 동생 귀산(龜山)은 어리석은 아이여서 어()자와 노()자도 분별하지 못하였고, 환관 이광(李匡)의 종자(從者) 문윤경(文胤敬)은 그의 친구 책문(策文)을 훔쳐 응시했는데 모두 뽑았으니, ()의 뜻을 따른 것이다. 최영이 남에게 희롱하여 말하기를,

“지난달 감시(監試) 때는 한사(寒士)는 뽑지 않고 어리석은 아이들만 뽑아 하늘이 큰 우박을 내려 삼[]을 죽이게 하였는데, 이번 동당학사(東堂學士)는 다시 무슨 천변(天變)을 가져올 것인가?

하였다.

4월 큰 우박(雨雹)이 내렸다.

 

크기가 주먹만 하였는데, 수일 후에야 녹았다.

○ 제()가 김유(金庾) 등을 방환(放還)하였다.

 

제는 일찍이 고려가 북원(北元)과 통해 두 마음을 가진 것으로 의심하였는데, 우연히 제주(濟州)에서 표류(漂流)한 사람의 주머니에서 나온 글에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란 연호(年號)가 쓰인 것을 보고는, 고려에서 명()의 정삭(正朔)을 봉행(奉行)하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정몽주가 진주(陳奏)한 이후 칙명으로 전후에 구류(拘留)한 사신 김유ㆍ홍상재(洪尙載)ㆍ이자용(李子庸)ㆍ주겸(周謙)ㆍ황도(黃陶)ㆍ배중륜(裵仲倫) 등을 돌려보내고, 조빙(朝聘)을 허락하였는데, 이자용은 돌아오는 길에서 죽었다.

○ 왜가 교주도(交州道)를 침구하였다.

5월 축산도(丑山道)에 병선(兵船)을 배치하였다.

 

왜적이 항상 축산도 지금의 영해부(寧海府) 동쪽 10리에 있다. 를 거쳐 침구하므로, 경상도 순문사(慶尙道巡問使) 윤가관(尹可觀)이 조정에 아뢰어 선박과 병졸(兵卒)을 두니 이후부터는 왜구의 걱정이 조금 뜸하였다. 그래서 못쓸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 둔전(屯田)을 개간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였다.

가관은 성품이 청렴하여 털끝만큼도 취렴하지 않고,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돌아올 때 안장과 굴레가 닳아서 끊어져서 삼끈으로 보수하였다.

6월 태백(太白)이 경천(經天)하였다.

7월 지진이 있었다.

 

지진하는 소리가 진중(陣中)의 말이 달리는 듯하였고, 담장과 집이 무너지고, 송악산(松岳山) 서쪽 고개에 있는 돌이 굴러내렸다.

우가 말하기를,

“이 지진은 하늘이 요동을 함몰(陷沒)시키려고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였다.

○ 간관(諫官)들이 병을 핑계하고 일을 보지 않았다.

 

이때에 우의 사냥이 더욱 심하였다. 좌사의(左司議) 이지(李至)가 상소하여 간하니, 우가 크게 노하여,

“때가 바야흐로 소란한데, 이들이 내가 말타기 연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보다 심한 불충(不忠)이 있겠는가?

하고는, ()를 올린 간관들의 이름을 다 적어 간직하면서,

“이들은 왜적을 막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 때문에 간관들이 대부분 병을 핑계하였다.

8월 계림군(鷄林君) 이달충(李達衷)이 졸하였다.

 

달충은 성품이 강직하고 감식(鑑識)이 있었다. 일찍이 우리 태조를 보고는 환조(桓祖)에게 말하기를,

“이 아들은 참으로 이인(異人)이어서 공()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는 자기 자손들을 부탁하였다. 태조가 나라를 세운 후, 달충의 아들이 죽을 죄를 범하였는데, 태조는 그 아버지의 부탁을 생각하여 특별히 용서하였다. 그의 시문(詩文)은 이제현(李齊賢)이 크게 칭송하였다. 《제정집(霽亭集)》이 세상에 전한다.

9월 제()가 국자감 학록(國子監學錄) 장보(張溥)와 전부(典簿) 주탁(周倬) 등을 보내어 선왕(先王)의 시호를 내리고 우()를 왕으로 책봉하였다.

 

경효왕(敬孝王)에게 공민(恭愍)이란 시호를 내리고 우를 왕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우리 태조와 최영의 위명(威名)이 상국(上國)까지 알려졌었는데, 장보 등이 국경에 들어오면서 태조의 안부를 물었기 때문에 태조는 동북면(東北面)으로 나가고, 최영은 교외에 나가 둔쳐서 그들로 하여금 보이지 않게 하였다.

우가 오로지 말달리기를 일삼고 예절을 몰라 사신이 올 때 나라 사람들이 걱정하였는데, 우의 행동이 예절에 맞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장보 등 사신들도 말하기를,

“말로만 듣던 것이 실제로 본 것과 다르다.

하고는, 장보가 서사호(徐師昊)가 세운 비()를 묻고는, 그 비를 세우게 하였다.

우가 책봉을 받고는 태묘에 분황(焚黃) 하고 장보에게 번육(?)을 보내니, 장보는 몸소 맞아 받았다. 밀직(密直) 구홍(具鴻)이 번육을 주탁에게 가지고 가니, 주탁이 밥을 먹고 있으므로 부엌에다 두고 돌아왔다. 그러자 주탁이 크게 노하여,

“구홍의 죄가 세 가지이다. 왕이 천자의 명()을 태묘에 고한 것은 예이며, 번육을 사신에게 보내는 것 역시 예이다. 번육이 이르면 비록 천자의 존귀함으로도 옷을 갖추어 입고 몸소 맞는 법인데, 더군다나 기타의 사람이겠는가? 이제 나에게 알리지 않고 부엌에다 두고 갔으니, 예에 어떻겠는가? 마땅히 베어야 한다.

하였는데, 장자온(張子溫),

“구홍은 무인(武人)이어서 예를 모른다.

하니, 주탁은 그제야 그만두었다.

장보 등이 문묘(文廟)를 배알하고, 생원(生員) 맹사성(孟思誠)을 불러 《시경(詩經)》을 강하였다. 주탁이 사전(社典 제사지내는 예전(禮典))을 보고자 하므로 사직(社稷) ㆍ 적전(籍田) ㆍ풍운(風雲)을 써서 보이니, 주탁은 충신(忠臣)ㆍ열사(烈士)ㆍ효자(孝子)ㆍ순손(順孫)ㆍ의부(義夫)ㆍ열부(烈婦)도 아울러 제사지내게 하였다.

사직단(社稷壇)을 가서 보고는 재사(齋舍)를 짓지 않음을 나무랐다. 성황(城隍)을 보고자 하므로, 조정의 의론이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국도(國都)를 두루 엿보게 해서는 안 된다 하여, 거짓으로 정사색(淨事色)을 성황이라고 속여 보여주었는데, 정사색은 별에 초례(醮禮)를 지내는 곳이다. 주탁이 하륜(河崙)에게 말하기를,

“천하에 조칙(詔勅)을 내려 황태자에게 올리는 전문(箋文)에 신()을 칭하라 하였으니 그대 나라도 마땅히 따르시오.

하므로 이 뒤로는 전문에 신이라 칭하였다.

장보 등이 돌아갈 때 우가 서보통원(西普通院)에서 전송하면서 잔을 들어 주탁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동번(東藩)을 임시로 맡아 다스린 지 10여 년에 천자의 명을 받지 못하여 항상 마음에 간절하였는데, 이번에 황은(皇恩)을 입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하고는 눈물을 흘리니, 주탁이 탄복하면서 극도로 즐거워하다가 파하였다. 우가 물건을 주자, 모두 받지 않고 다만 조신(朝臣)들의 증행시(贈行詩)만을 받고는 감탄하기를,

“동방에 사람들이 있구나!

하였다.

○ 조민수(曺敏修) 등을 명에 보내어 사례하고, 책력(冊曆)과………(원문 2자 빠졌음)……팔도(八道)의 부험(符驗)을 청하니, 모두 허락하였다.

○ 우리 태조가 함주(咸州)에서 왜적(倭賊)을 크게 격파하여 섬멸시켰다.

 

왜적의 배 1 50척이 함주ㆍ홍원(洪原)ㆍ북청(北靑)ㆍ합란북(哈蘭北) 등을 침구하여 살인과 노략질을 하여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원수(元帥) 심덕부(沈德符)ㆍ홍징(洪徵)ㆍ안주(安柱) 등이 홍원의 대문령(大門嶺) 지금의 홍원현(洪原縣) 동쪽 30리에 있다. 북쪽에서 싸워 크게 패하니, 태조가 가서 격퇴시키기를 청하였다. 함주에 이르러 곧장 적이 둔치고 있는 토아동(兎兒洞) 지금의 함흥부(咸興府) 북쪽 90리에 있다. 으로 가서 동의 좌우에 군사를 매복(埋伏)시켰다. 적이 멀리서 나팔소리를 듣고 크게 놀라,

“이는 이() 태조(太祖)의 구휘(舊諱) 의 차거(?? 조개 이름) 나팔 소리이다.

하였다.

태조가 이두란(李豆蘭)ㆍ고려(高呂)ㆍ조영규(趙英珪)ㆍ안종검(安宗儉)ㆍ한나해(韓那海) 1백여 기를 거느리고 고삐를 잡고 천천히 그 사이로 지나가니, 적이 군사가 적고 행군이 느린 것을 보고 헤아리지 못한 일이 있을까 하여 감히 덤비지 못하였다.

태조가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불러 외치게 하기를,

“오늘의 주장(主將)은 이만호(李萬戶 이성계를 가리킨다). 너희는 빨리 항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적의 대장이 대답하기를,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고는 바로 부하들과 항복할 것을 의논하고 있는데, 태조가,

“적이 방심하고 있을 때 쳐야 한다.

하고는, 두란 등을 시켜 군사를 잠복시켜 놓은 가운데로 끌어들여 함께 무찔렀다. 태조는 솔선하여 사졸들보다 먼저 적과 맞부딪쳐 싸우니, 가는 곳마다 흩어지고 쓰러져 궤멸하였다.

관군이 그 틈을 타 고함을 지르니, 천지가 진동하였으며,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시체로 개울이 막혀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지 못하였다. 이때 여진(女眞)의 군사가 이긴 기세를 타고 마구 죽이니, 태조가 명령하기를,

“궁지에 빠진 적이 불쌍하니, 죽이지 말라.

하여 그 나머지는 모두 생포(生捕)하였다. ()가 태조에게 정원십자공신(定遠十字功臣)의 호를 내렸다.

○ 명에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10월 지문하사(知門下事) 김사혁(金斯革)이 졸하였다.

 

사혁은 왜적과 여러 차례 싸워 공이 있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12월 강씨(姜氏)를 안비(安妃)로 삼고, 종 봉가이(鳳加伊)와 기생 칠점선(七點仙)을 아울러 옹주(翁主)로 삼았다.

 

강씨는 판사(判事) 인유(仁裕)의 딸이며, 봉가이는 이인임의 여종인데 인임이 바쳤다. 봉가이는 우가 심히 총애하여 숙녕 옹주(肅寧翁主)로 봉하고, 그의 아비 조영길(趙英吉)은 전농부정(典農副正)을 삼았으며, 칠점선은 영선 옹주(寧善翁主)로 삼으니 나라 사람들이 놀라고 해괴하게 여겼다.

○ 이색(李穡)을 검교시중(檢校侍中)으로 삼았다.

 

 

[D-001]분황(焚黃) : 관직이나 시호를 추증(追贈)할 때 그 자손이 관고(官誥)의 부본(副本)을 쓴 황지(黃紙)를 분묘(墳墓)로 가지고 가서 고유(告由)하고 불사르는 예식.

[D-002]사직(社稷) : ()는 토지신(土地神), ()은 곡신(穀神)인데, 토지와 곡식은 백성의 근본이 된다 하여 제사하였다.

[D-003]적전(籍田) : 임금이 농사를 장려하기 위하여 종묘(宗廟) 제사에 쓸 곡식을 친히 경작하는 친경전(親耕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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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6   

 

 

정묘년 전폐왕 우 13(명 태조 홍무 20, 1387)

 

 

춘정월 백관의 봉급(俸給)을 감하였다.

○ 왜가 강화도(江華島)에 침구하니 최영(崔瑩)이 해풍(海豊 풍덕(豊德))에 나아가 진을 쳤다.

3월 해에 흑자가 있었다.

○ 명의 사신 서질(徐質)이 와서 진헌마(進獻馬)를 독촉하였다.

 

명이 말을 산 이후 5천 필을 다섯 번으로 나누어 요동에 압송하였는데, 그 중 늙고 병들거나 작은 것은 되돌려보내고, 또한 말은 3등으로 나누어 상등 말은 비단 2필과 베 8, 중ㆍ하등은 차례로 낮추었다.

6월 백관의 관복(冠服)을 정하였는데, 중국 제도를 썼다.

 

이보다 먼저 본국에서 여러 번 의관(衣冠)의 제도를 청하였었는데, 이때 이르러 사신으로 들어간 설장수가 황제가 내린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입고 와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관복의 제도를 알게 되었다. 이때 정몽주(鄭夢周)ㆍ하륜(河崙)ㆍ염정수(廉庭秀)ㆍ강회백(姜淮伯)ㆍ이숭인(李崇仁) 등이 백관의 관복을 정하기를 청하여, 1()에서 9()까지 모두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을 착용하고 띠도 품계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서질이 보고 감탄하기를,

“고려가 다시 중국의 관대(冠帶)를 습용(襲用)하니, 천자가 들으면 어찌 가상히 여기지 않으랴?

하였다. ()와 환자(宦者), 그리고 행신(倖臣)들만 그렇게 입지 않았다.

6월 황제가 사은사(謝恩使) 장자온(張子溫)을 금의위(錦衣衛)에 가두었다.

 

장자온이 경사(京師 명 나라 서울)에 가서 관복 바꾸는 것을 허락한 데 대하여 사례하였으나 황제가, 진헌한 말이 노마(駑馬)라고 하여 가두어, 결국 옥사하였다.

8월 이인임(李仁任)을 파직하고 이성림(李成林)을 좌시중(左侍中)으로 삼고, 반익순(潘益淳)을 우시중(右侍中)으로 삼았다. 반복해(潘福海)가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노구산(盧龜山)이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다.

 

반복해는 항상 우를 따라 서해도에 사냥을 갔는데, 돼지가 우의 말에 부딪쳐 우가 놀라 떨어지자, 반복해가 활로 돼지를 쏘아 죽였다. 그후 우의 총애를 받아 우가 왕씨(王氏)로 성을 내리고 아들로 삼았다.

그의 아버지는 반익순(潘益淳)이다. 그 밖에 신아(申雅)ㆍ최천검(崔天儉)ㆍ노구산(盧龜山) 등은 모두 여자를 바친 것으로 우의 총애를 받아 벼슬에 나아갔는데, 노구산은 나이 20세가 못되었다. 또한 환수(宦竪)ㆍ상고(商賈)ㆍ어렵(漁獵)의 무리도 관에 등용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 이색(李穡)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고 말하기를,

“이성림이 가난한 집에서 생장하였는데, 재상이 되어서는 일시에 집 세 채를 짓고, 염흥방(廉興邦)도 오로지 취렴(取斂)을 일삼으니, 국가를 그르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이다.

하였다.

○ 우()가 육도(六道)의 창우(倡優)를 불러 동강(東江)에서 온갖 유희를 베풀었다.

 

()가 일찍이 호관(壺串)에서 놀았는데, 매를 부르고 개를 몰며, ()을 불고 각()을 불었으며, 장가(長歌)와 만무(慢舞)로 전후 시종(侍從)이 길에 연이었었다. 친히 기대(妓隊)를 점검하고, 점검한 뒤에 온 자 60여 인은 속포(贖布) 1 50필을 바치게 하였다.

이때 내탕금을 탕갈시켜 비용에 대었는데, 재집(宰執)과 대간(臺諫)이 바로잡아 구하지 못하였고, 기이한 기예(技藝)를 하여 영합하는 자까지 있었다. 우는 물 속에서 옷을 벗고 기녀들과 희롱하였다.

9월 요동에서 사람이 와 둔전우(屯田牛)를 사갔다.

 

그전에 요동에서 사람을 보내어 농우(農牛)를 사므로 점우색(點牛色)을 두었는데, 서북민이 서로 소를 매매한다는 말을 듣고 도장을 찍어 보냈더니 요동인은 그것을 대인우(帶印牛)라고 불렀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둔전우 5 7백 두를 두었다.

○ 사신을 명에 보내어 하례하게 하였는데, 요동에 이르러 들여보내지 않아 되돌아왔다.

 

이때 납합출(納哈出)이 명에 항복하여 금산(金山) 등지가 모두 평정되었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장방평(張方平)을 보내어 하례(賀禮)하였는데, 첨수참(甛水站)에 이르니, 도사(都司)가 사람을 시켜 황제의 뜻을 적어 보이기를,

“금후로 고려의 사신을 경사(京師)에 부송(赴送)하기를 허락하지 말며, 그 나라 집정(執政)의 모든 약속은 지나치지 않으면 못 미치어 성의(誠意)로써 서로 믿은 적이 없으니, 절교함이 옳고 더불어 왕래해서는 안 된다.

하여, 장방평 등이 마침내 돌아왔다.

이에 영원군(永原君) 정몽주를 보내어 조빙(朝聘)할 것을 청하였으나, 요동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때 어떤 이가 요동에서 와서 말하기를,

“황제가 장차 처녀ㆍ환자(宦者), 그리고 우마(牛馬) 1천 필씩을 구하려 한다.

하므로, 도당(都堂)이 우려하자, 최영이 말하기를,

“그러면 군대를 일으켜 치는 것이 좋다.

하였다.

○ 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이집(李集)이 졸하였다.

 

이집의 초명(初名)은 원령(元齡)이고, 성품은 강직하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충효(忠孝)의 대절(大節)이 있었다. 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ㆍ정몽주(鄭夢周) 등과 더불어 좋은 벗이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신돈(辛旽)의 객()인 채성(蔡姓)을 가진 사람이 신돈에 의지하여 권세를 함부로 부리므로, 이집이 매우 꾸짖고 또 신돈의 악행을 말하였는데, ()가 신돈에게 참소하여 화가 장차 예측할 수 없었다. 이집은 아버지 이당(李唐)과 영천(永川) 사는 그의 벗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숨어 화를 피하였는데, 최원도는 접대를 심히 후하게 하였다. 숨어산 지 3년 만에 이당이 죽자, 최원도는 자기 어머니 묘 곁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그때 사람들이 그의 신의를 칭송하였다.

신돈이 주살(誅殺)됨에 이르러 돌아왔는데, 이름을 집()이라고 고쳤다. 후에 여주(驪州)에 퇴거하여 몸소 농사짓고 독서(讀書)하였으며, 호를 둔촌(遁村)이라 하였다. 죽은 뒤 정몽주가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안】 최원도는 본조(本朝)에 벼슬하지 않았으며, 사간(司諫)으로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10월 왜가 임주(林州 임천(林川))ㆍ한주(韓州 한산(韓山))ㆍ서주(西州 서천(舒川))에 침구하였다.

○ 사전(私田)의 조세(租稅) 반을 거두어 군량(軍糧)에 대비할 것을 명하였다.

12월 사유(赦宥)하였다.

 

숙비(淑妃)가 아프기 때문이었다.

○ 희생(犧牲)이 저절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