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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7하 -안정복(安鼎福) -

천하한량 2007. 6. 12. 19:03

동사강목 제17   

 

 

기사년 고려 공양왕(恭讓王) 원년(() 태조(太祖) 홍무(洪武) 22, 1389)

 

 

○ 정비(定妃)를 높여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어머니 왕씨(王氏)를 복녕 궁주(福寧宮主), () 노씨(盧氏)를 순비(順妃), 장자(長子) ()을 세자(世子)로 삼고 대사(大赦)하였다.

○ 이색(李穡)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심덕부(沈德符)를 시중(侍中)으로, 우리 태조[我太祖 이성계를 말한다]를 수시중(守侍中)으로, 정몽주(鄭夢周)ㆍ지용기(池湧奇)를 찬성사(贊成事), 조준(趙浚)을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삼았다.

 

이색은 사직하고 장단(長湍)의 별장(別莊)에 돌아가 있은 지 한 달 남짓 되었었는데 이때 예궐하여 하례하니, 왕이 불러들이고 용상(龍床)에서 내려와 맞으며,

“평생 한가롭게 놀다가 오늘에 이러한 지위를 얻을 줄은 뜻밖이오. 바라건대 경은 나를 도와 주오.

하고, 또 우리 태조와 심덕부에게 이르기를,

“나는 원래 덕이 없는 사람으로 대위(大位)를 얻었으니, 경들이 잘 헤아려 주오.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조준은 그대로 대사헌(大司憲)을 겸하고 있으면서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부병을 8()에 영속(領屬)되어 있고 8위 군부사(軍簿司)에서 통할합니다. 42도부(都府)의 병사가 12만이나 되지만 대()에는 정()이 있고, ()에는 위()가 있어, 상장군(上將軍)에 이르기까지 통속(統屬)되어 있기 때문에 금위(禁衛)를 엄히 하고 외침(外侵)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을 섬긴 이래로, 태평이 오래 계속되어 금위에 적당한 인물이 없고 8위의 제도도 유명무실해져 42도부의 5() 10()과 정()ㆍ위()의 녹(祿)을 먹는 자가 유약한 자제(子第)가 아니면 공상(工商)과 천예(?)라 그 녹은 먹으면서도 직책을 수행하지 않거나 국사(國事)에 부지런하였어도 녹을 얻어 먹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니, 어찌 충신(忠信)한 자에게 녹을 중하게 주는 뜻이겠습니까? 바라옵건대 근시(近侍)ㆍ사문(司門) 등과 각 성중애마(成衆愛馬)를 각 위()에 병합하고, 번갈아가며 숙직(宿直)하게 하되, 그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고적(考績)하여 품급(品級)에 따라 채용한다면 사람들이 자기의 직무에 충실하게 되어 무비(武備)가 신장(伸張)될 것입니다.

하고,

“재상(宰相)이라도 군공(軍功)이 없으면 봉군(封君)하지 말 것이며, 환관(宦官)이 조관(朝官)에 제수됨을 허락하지 말 것이며, 경기(京畿) 8()에는 예에 따라 관원을 두되 개성부(開城府)로 하여금 고적하게 해서 부역(賦役)을 고르게 해야 합니다.

하고, ,

5() 42도부는 곧 한() 때의 남북군(南北軍)이며 당() 때의 부위병(府衛兵)인데, 근래에 병제(兵制)가 크게 무너졌으니 앞으로는 한산(閑散) 4() 이상을 3군에 소속시키고, 군에는 장()과 좌()를 둘 것이며, 5품 이하는 부위(府衛)에 소속시키되 군부사(軍簿司)가 통할하게 하여 상하가 서로 유지되어 군정이 한곳으로부터 나오게 된다면 몸이 팔을 부리고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하고, ,

“먹는 것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이며, 곡식은 우마(牛馬)를 이용하여 생산되기 때문에 금살도감(禁殺都監)을 둔 것이니, 이는 농사를 중히 여기는 소치입니다. 마땅히 금령을 거듭 내려 범하는 자는 살인한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주군(州郡)에서는 삭선(朔膳)과 사객(使客)을 지공하는 등의 일 때문에 농사철을 당해서도 사냥을 하게 하니, 바라옵건대 경기에 계돈장(鷄豚場) 2개 소를 짓되 한 곳은 전구서(典廐署)가 주관하여 제사에 쓰게 하고, 한 곳은 사재감(司宰監)에서 주관하여 어용(御用)과 빈객(賓客)의 수요(需要)에 충당하도록 하며, 주와 군의 각역(各驛)에서까지도 모두 기르도록 한다면 사냥하느라 농사를 그르치는 폐단은 없을 것입니다.

하고, ,

“육형(肉刑)은 대부(大夫)에게까지는 적용되지 않은 것이니, 바라옵건대 양부(兩府) 대신은 비록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대역죄(大逆罪) 이외에는 현륙(顯戮)을 가하지 말 것입니다. () 임금은 곤(?)에게 형벌을 가했으나 우()를 재상으로 삼았고,, 무왕(武王)은 주()를 목베었으나 무경(武庚)을 봉한 것은 곧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어진 마음인 것입니다. 근세에는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이 하여 일족을 다 죽이고도 오히려 그 후손이 있을까 걱정하니 매우 불인(不仁)합니다. 바라옵건대 삼대(三代)의 법을 본받아 죄가 있는 자라도 처자가 연좌(連坐)되는 일이 없게 하여 인명을 아끼는 정사를 보이소서.

하고, ,

“앞으로 소송(訴訟)할 자는 각기 소관 관아에 제소(提訴)하게 하고, 대내(大內)나 도당(都堂)에 직접 상달(上達)하는 일은 일체 금지하여 관()을 넘보는 행위를 경계하도록 하소서.

하고, ,

“요즈음 과거에 급제한 자들은 다시는 학업에 힘쓰지 않으니, 바라옵건대 각 연()의 급제자 중 4품 이하인 자를 모아 전정(殿庭)에서 대책(對策)을 시험보여 합격자는 제교(製敎)를 맡도록 하고, 불합격자는 좌천시켜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키소서.

하였다. 조준이 전후에 거론한 것은 모두 당시의 병폐를 적절하게 지적한 것이어서 피폐한 정사를 일신(一新)하였다.

○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하였다.

 

즉위를 고한 것이다. 예를 마치고 환궁한 뒤에도 남면(南面)하지 않자 이색이 아뢰기를,

“상()께서 이미 즉위를 고했는데 지금 또 남면하지 않으신다면 신민(臣民)의 여망(輿望)에 보답하지 않은 일입니다.

하자, 왕이 비로소 윤허하였다. 유사(有司)가 우모(禑母 우왕(禑王)의 어머니 반야(般若)를 말한다)의 신주(神主)를 철폐하자고 청하자 이색이 아뢰기를,

“이 일은 아직 전말(顚末)이 확실하지 않으니 천천히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안】 목은(牧隱)은 아직도 이 일에 여망(餘望)을 갖고 있었다.

○ 밀직(密直) 조반(?) 등을 명()에 보내어 고하도록 하였다.

 

제지(帝旨)를 받들어 이성(異姓)을 제거하고 다시 왕씨(王氏)를 세운 이유를 표()로 아뢴 것이다.

12월 조민수(曹敏修)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이색 등을 유배하였다.

 

좌사의(左司議) 오사충(吳思忠), 사인(舍人) 조박(趙璞) 등이 상소하기를,

“이색은 대대로 왕씨를 섬기다가 이인임(李仁任)에게 붙어 신우(辛禑)를 세웠으며, 여러 장수들이 왕씨를 세우자고 건의하였으나 조민수에게 붙어 창()을 세웠고,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왕씨의 왕통을 회복하려 하자 변안열(邊安烈)에게 붙어서 창을 축출하고 우를 맞아들이 다시 왕씨의 제사를 끊으려 하였습니다.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세상에 아첨하고, 거짓을 꾸며 명예를 구하였으니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음에도 그 아들 종학(種學)은 떠들대기를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을 말한다)이 이미 우를 강녕군(江寧君)으로 봉하여 부()를 세웠고 천자가 봉작(封爵)을 명하였는데 이() 태조(太祖)의 구휘(舊諱) 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현릉의 명을 어기고 우리 여흥왕(驪興王 당시 우왕(禑王)이 여흥에 유배되어 있었다)을 폐하였는가.’ 하였습니다. 이제 우() 부자의 죄를 바루지 않고 민심을 안정시키려 하며, 이색 부자의 죄를 바루지 않고 뭇 소인들의 음모를 끊으려 한다면 전하께서 단 하루라도 왕위에 편안히 계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이숭인(李崇仁)ㆍ하륜(河崙)은 전날에는 이인임(李仁任)의 심복이었고 뒤에 와서는 이색의 간계를 좇아 창()의 친조(親朝)를 독려하고 신우를 세우고자 하였으며, 권근(權近)이 성지(聖旨)를 사사로이 뜯어 보고 먼저 이림(李琳)에게 보였으니 모두 소관 사()로 하여금 논죄(論罪)하도록 하소서.

하니, 이에 이색 부자와 이숭인ㆍ하륜ㆍ권근 등을 유배하였고, 조민수는 삼척(三陟)으로 귀양보냈다.

○ 우리 태조(太祖)와 심덕부(沈德符)에게 공신호(功臣號)를 내렸다.

 

조준(趙浚)이 청하였기 때문이다. 태조를 화령군 개국백(和寧君開國伯)으로 삼고, 그 나머지는 봉작(封爵)을 차등있게 하였는데 일컫기를 9공신(功臣) 이라 하였다.

○ 관제를 고쳤다.

 

전리사(典理司)를 이조(吏曹), 군부사(軍簿司)를 병조(兵曹), 판도사(版圖司)를 호조(戶曹), 전법사(典法司)를 형조(刑曹), 예의사(禮儀司)는 예조(禮曹), 전공사(典工司)를 공조(工曹)로 고쳤으며, 그 나머지도 줄이고 병합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 당시 관제가 문란하여 낭사(郞舍) 구성우(具成祐)가 상소하기를,

“관직과 작록(爵祿)은 어진이를 기르고 선비를 대우하기 위한 것이라, 관직에는 일정한 제도가 있는 것이고, 전선(銓選)은 마련된 법이 있는 것입니다. 관직으로 사람을 택하면 관직은 남아 돌고 사람은 부족하게 되는 것이라 옛날에는 적격자가 없으면 그 자리를 비워두었습니다. 바라옵건대 친소(親疎)와 신구(新舊)의 차별을 두지 마시고 오직 훌륭한 사랑인가 용렬한 사람인가만 살피소서.

하였다.

10()의 교수관(敎授官)을 두었다.

 

예학(禮學)은 성균관(成均館), 악학(樂學)은 전의시(典儀寺), 병학(兵學)은 군후소(軍候所), 율학(律學)은 전법시(典法寺), 자학(字學)은 전교시(典敎寺), 의학(醫學)은 전의시(與醫寺), 풍수음양학(風水陰陽學)은 서운관(書雲館), 이학(吏學)은 사역원(司譯院)에 분속시켰다.

 

[C-001]기사년 고려 공양왕(恭讓王) 원년 : 이 항목은 원문(原文)에는 없는 것이나 편집체재상 넣은 것이다.

[D-001]() 임금은 …… 삼았고 : 순 임금은 9년 홍수 때 황하(黃河)의 치수(治水)에 실패한 곤(?)을 우산(羽山)으로 귀양보내어 죽이고, 곤의 아들인 우()를 재상으로 삼아 황하를 다스리게 하니 우가 이를 성공시켰다. 이 뒤 우는 순 임금의 선위(禪位)를 받아 왕위에 올라하()의 시조가 되었다.

[D-002]무왕(武王)은 …… 봉한 것 : 주 무왕(周武王)은 포악한 은()의 주()를 쳐서 천하를 통일하고는 주의 아들인 무경으로 하여금 은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D-003]태조(太祖)의 구휘(舊諱) : 태조(太祖)의 이름인 성계(成桂)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D-004]성지(聖旨)를 …… 보였으니 : 권근이 창왕(昌王) 1(1389)에 왕의 친조(親朝)를 청하러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로 명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왕씨가 아닌 자로 임금을 세웠다.’고 책망한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사사로 뜯어 보고 그 내용을 창왕(昌王)의 외조부인 이림(李琳)에게 먼저 보인 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제출한 것을 말한다. 《高麗史 卷一百七 列傳二十》

[D-005]9공신(功臣) : 이성계(李成桂) 등 일파가 창왕(昌王)을 내쫓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울 때에 공신호를 받은 아홉 사람. 곧 이성계ㆍ심덕부(沈德符)ㆍ정몽주(鄭夢周)ㆍ설장수(?長壽)ㆍ성석린(成石璘)ㆍ지용기(池湧奇)ㆍ조준(趙俊)ㆍ박위(?)ㆍ정도전(鄭道傳)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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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7   

 

 

경오년 공양왕 2(명 태조 홍무 23, 1390)

 

 

춘정월 적경원(積慶園)을 창건하였다.

 

예조가 헌의(獻議)하여, 한 광무(漢光武)와 송 영종(宋英宗)의 고사(故事)에 따라 4대의 고비(?)를 추봉(追封)하고, ()을 세워 사관(祠官)을 두도록 청하자, 이에 적경원을 세우고 4대를 추봉하였다.

정원군(定原君)을 삼한국 대공(三韓國大公)으로, 순화후(淳化侯)를 마한국공(馬韓國公)으로, 익양후(益陽侯)를 진한국공(辰韓國公)으로, 서원후(西原侯)를 변한국공(卞韓國公)으로, ()는 모두 국비(國妃)로 삼고, 동모제(同母弟) ()에게 제사를 주관하여 초하루ㆍ보름과 4맹월(孟月 음력 1월ㆍ4월ㆍ7월ㆍ10월을 말한다)에 제사하도록 하였다.

○ 처음으로 경연(經筵)을 열었다.

 

왕인 경우를 경연, 세자인 경우를 서연(書筵)으로 부르게 된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심덕부(沈德符)와 우리 태조를 영경연사(領經筵事)로 정몽주(鄭夢周)ㆍ정도전(鄭道傳)을 지경연사(知經筵專)로 삼고, 조준ㆍ서균형(徐均衡)ㆍ지(李至)ㆍ강회백(姜淮伯)을 세자사부(世子師傅), 삼아 서연을 열었다. 유신(儒臣)을 네 번()으로 나누어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지경연 정몽주가 아뢰기를,

“유자(儒者)의 도()는 모두 일상생활 속에 있으니, 음식이나 남녀 관계는 사람이 다 같이 하는바 지극한 이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순(堯舜)의 도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아 언동(言動)이 그 정도(正道)를 얻는다면 곧 요순의 도요, 애초부터 매우 고원(高遠)하여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씨(佛氏)와 가르침은 그렇지 못하니, 친척을 버리고 남녀관계도 끊고 암혈(巖穴)에 홀로 앉아 초목(草木)으로 의식(衣食)을 삼으며, 관공(觀空)ㆍ적멸(寂滅)을 종지(宗旨)로 받드니 어찌 이것이 평범한 도()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중 찬영(粲英)이 우왕(禑王)ㆍ창왕(昌王) 때부터 왕사(王師)로 있었는데, 왕이 또 그를 왕사로 삼으려 하였으므로 정몽주의 말이 이와 같았다. 하루는 왕이 시강관(侍講官)에게 이르기를,

“내 이미 늙었으니 비록 성인의 경전을 읽더라도 무슨 유익됨이 있을지 의심스럽다.

하자, 밀직(密直) 박의중(朴宜中)이 아뢰기를,

‘옛날 진 평공(晉平公)이 사광(師曠)에게 이르기를 ‘내가 77세나 되었으니 학문을 하고자 해도 나이가 너무 많아 걱정이다.’ 하자, 사광이 말하기를 ‘어려서 학문을 좋아함은 막 떠오르는 태양같이 찬란하고, 장년이 되어 학문을 좋아함은 중천의 태양처럼 빛나고, 늙어서 학문을 좋아함은 한 자루의 촛불같이 밝으니 어찌 캄캄한 밤에 다니는 것과 같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자 공이 그렇게 여겼습니다. 지금 전하의 춘추(春秋)는 바야흐로 한창때이시니 학문하기에 늦은 것이 아닙니다.

하니, 왕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 우리 태조에게 8도의 군마(軍馬)를 거느리게 하고, 군영을 설치하였다.

 

()을 나누어 교대로 숙직(宿直)하게 하고, 군자(軍資)로 늠료(?)를 지급하였다.

○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 변안열(邊安烈)을 유배지에서 죽였다.

 

앞서 우()가 강릉(江陵)으로 귀양갈 때에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를 그르친 자는 변안열이다.

하였는데, 김저(金佇)의 옥사가 발생하게 되어서 저()에게 그 사실을 물었으나 불복(不服)하므로 칼로 발바닥을 두어 촌()쯤 째고 불로 지지자 묻는 대로 다 자복하여 드디어 옥사(獄詞)가 이루어졌다. 낭사(郞舍) 윤소종(尹紹宗)ㆍ이첨(李詹)ㆍ오사충(吳思忠) 등이 상소하여 변안열이 신우(辛禑)를 영립(迎立)하려 했다는 죄로 논박하고 전형(典刑)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관작만 삭탈하여 한양(漢陽)으로 유배하였었다.

이때에 강도가 도성(都城) 밖에서 어떤 사람을 겁탈한 사건이 발생하자, 소종 등은 오원제(吳元濟)가 사람을 보내어 무원형(武元衡)을 죽인 사건을 인용하여, 강도의 겁탈 사건은 사실상 변안열의 무리들이 일으킨 것이라고 왕의 면전에서 아뢰고, 물러가 또 상소하여 극언(極言)으로 안열을 주살(誅殺)하도록 청하자 왕은 그 소()를 헌사(憲司)에 내려, 유배지에 가서 더는 국문하지 말고 죽이라고 하였다. 헌사가 이를 한양부윤(漢陽府尹) 김백흥(金伯興)에게 이첩하여 안열을 죽였는데, 안열이 처형될 때에 탄식하기를,

“신우(辛禑)를 영립하려고 모의한 것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겠느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였으나, 백흥은 캐묻지도 않고 목을 베었다.

이에 윤소종 등은 또 백흥이 캐묻지 않고 죽인 사실을 논박하고, 악인과 당여(黨與)가 되어 덮어 준 죄를 징계해야 된다고 청하였다. 이에 대관(臺官)을 나누어 보내 안열의 당여인 이을진(李乙珍)ㆍ이림(李琳) 및 그 아들 귀생(貴生), 이경도(李庚道)ㆍ정지(鄭地)ㆍ원상(元庠) 등을 경외(京外)에서 국문하였는데, 고문이 매우 혹독하여 백흥은 옥중에서 죽었다. 소종 등은 또 홍영통(洪永通)ㆍ우현보(禹玄寶)ㆍ왕안덕(王安德)ㆍ우인열(禹仁烈)ㆍ정희계(鄭熙啓) 등이 안열과 더불어 역모를 꾀했다고 아뢰고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 첨설직(添設職)을 혁파하고 궁성숙위소(宮城宿衛所)를 설치하였다.

 

국가가 다사(多事)한 이래 첨설직으로 군공(軍功)을 포상하니, ()와 창() 때에 이르러서는 쓸데없는 관직이 지나치게 많았다. 왕이 정도전에게 이르기를,

“첨설직을 혁파하려 하는데 그 방법이 무엇인가?

하니, 아뢰기를,

“옛날의 사람 쓰는 법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문학(文學)ㆍ무과(武科)ㆍ이과(吏科)ㆍ문음(門蔭 문벌이나 조상의 덕으로 벼슬하는 것)입니다. 이 네 과()로써 등용한다면 그 누가 원망하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관질(官秩)이 높은 자는 어떻게 처우하면 좋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옛날 송() 때에는 산관(散官)을 위하여 여러 궁관(宮觀)의 제조(提調)ㆍ제거(提擧)를 두었으니, 이를 본따서 궁성숙위부(宮城宿衛府)를 설치하고 위계(位階)가 밀직(密直)이나 봉익(奉翊)인 자는 제조로 삼고 34품인 자는 제거로 삼는다면 정사가 마땅함을 얻어 체통이 엄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 인왕불(仁王佛)을 내전(內殿)에 안치하였다.

 

행신(幸臣) 신원필(申元弼)의 말에 따른 것이다. 왕이 불교를 숭봉하여 아침저녁으로 예배하였다.

○ 판삼사(判三司) 이색(李穡)의 관직을 삭탈하고 장단(長湍)에서 국문(鞫問)하였다.

 

규정(?) 전시(田時)를 창녕(昌寧)에 보내어 조민수(趙敏修)를 국문하게 했는데, 조민수의 창을 세운 모계가 이색에게서 나왔다는 공사(供辭)를 받고자 하여 핍박하니 결국 자복하였다. 이에 대간(臺諫)에서 국문을 가하고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여 논란이 거듭되니, 왕이 오사충(吳思忠)ㆍ전시를 장단에 보내어 이색을 국문하게 하였다. 오사충은 고문을 가하여 심문할 것을 청하고, 옥졸로 하여금 곤장(棍杖)을 쥐고 좌우에 늘어서게 한 뒤 온종일 밤새도록 다그치며, 또 조민수의 창녕 옥사(獄詞)를 보였는데, 이색의 공사(供辭),

“회군(回軍)하여 임금 세우는 문제를 의론할 때에 조민수가 주장(主將)이었으므로 색()은 감히 그 뜻을 어길 수가 없었고, ()가 선 지 이미 오래었으므로 그 아들 창()을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대답하였을 뿐이지 앞장서서 권하거나 독단으로 세우자고 한 말은 없었습니다. 지난해 경사(京師)에 조회하러 갔다가 예부(禮部)에 들어가니, 상서(尙書) 이원명(李原明)이 이르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아비를 내쫓고 그 아들을 세웠는데,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으며, 왕과 최영(崔瑩)이 모두 구금을 당했다고 하니 이는 어떠한 의리(義理)인가?’ 하기에, 내가 답하기를 ‘최영이 왕을 교사(敎唆)하여 요양(遼陽)을 범하려 하므로 장군 조민수와 이() 태조의 구휘(舊諱) 가 불가하다고 하여 군대를 돌려 최영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왕이 노하여 여러 장수들을 해하려 하므로 태후(太后)가 폐하여 구도(舊都) 강화(江華)에 안치하고 성정(性情)을 이양(怡養)하게 하며 모시고 받들기를 전일과 다름없이 하고 있는데 어떻게 방축(放逐)이란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고 돌아와서 이시중(李侍中 이 성계를 말한다)에게 말하기를 ‘이원명의 말은 귀로는 들을 수 있으나 차마 입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흥(驪興 이때에 우왕이 여흥에 방축되어 있었다)은 지역이 머니 맞이하여 가까운 곳에 안치하면 임금을 방축하였다는 비난은 면할 수 있을 것입기다.’ 하였습니다. 단지 이 말뿐이며 진실로 영립하자는 의론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오사충 등이 이 공사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색이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옛날 진 원제(晋元帝)가 대통(大統)을 이었는데 치당(致堂 호인(胡寅)의 호) 호씨(胡氏)가 ‘원제의 성은 우씨(牛氏)인데 외람되이 〈사마씨(司馬氏)인〉 진의 종실(宗室)에 붙었으니 동진(東晋)의 군신들이 어떻게 이를 그대로 두고 개혁시키지 않았는가 하면 이는 필시 호갈(?)이 번갈아 침입하여 강좌(江左 양자강(揚子江) 남쪽을 말한다)가 미약하므로 만약 구래(舊來)의 왕업에 의지하지 않으면 인심을 안정시킬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두었으니 어렵고 쉬운 것도 없다. 이 또한 형세를 따라 일을 성취할 적에 부득이해서 한 것이다.’ 하였는데, ()이 신씨(辛氏)를 세울 때에 감히 다른 의견을 내지 않은 것도 이러한 뜻에서이다.

하였다.

【안】《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국초(國初)의 신우(辛禑) 일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의심나는 점이 있다. 목은(牧隱)의 말이 비록 비중이 크다 하더라도 만약에 신씨(辛氏)라고 해서 폐했다면 어찌 목은의 뜻에 따라 그 아들을 다시 세웠을 것이며 우를 폐할 때도 조민수가 참여하고 창을 세울 때도 민수가 참여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 생각으로는 폐한 것은 북벌(北伐) 때문이다. 그때에 비록 신씨라는 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사사로이 주고받을 정도의 말이지 공명정대한 의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을 세웠으나 모두 조용했던 것임을 역사에 의거해서 증명할 수 있다. 사세(事勢)가 한번 기울어지자 구설(口舌)이 더욱 번거롭게 되면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깨뜨릴 수 없는 정론(定論)으로 되고 사가(史家)들도 여기에 의거해서 필삭(筆削)하여 후세에 전하게 됨으로써 다시는 식별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폐출할 때를 당하여 유씨(劉氏)가 아니라는 사실로 대의(大義)를 부르짖고 사방에 명백히 고하지 않았으리요. 그리고 만약 그것이 사실이었다면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의론을 목은 또한 감히 발설하지 못했을 것이다. 창왕 때에 와서야 〈신씨라는 설을〉 구실삼아 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은이 우씨(牛氏)로 사마씨(司馬氏 진()의 국성(國姓)이 사마씨이다)를 이었다는 설로 살기를 도모한 것 또한 구차한 것이다. 대개 당시 강좌(江左)의 제공(諸公)들이 반드시 이를 알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만약 그가 타성(他姓)임을 확실히 알았다면 무슨 옛 왕업에 의지하는 것이 있었겠으며, 당시에 어찌 사마씨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편안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단지 형세의 이로움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지 그 의리의 한쪽은 접어둔 것이었다.

어떤 자가 당시의 사정을 명확히 말할 수 없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이 설에 가탁한 것일까? 전겸익(錢謙益)이 《명시주(明詩注)》에서 또 호씨의 설을 인용하면서 끝에 가서 단언하기를,

“유구한 천년에 누가 우씨 마씨의 시비를 분별하랴!

하였다. ()의 정공(定公)ㆍ애공(哀公) 시대에는 은미(隱微)한 말이 많은데 우리 나라 역사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

○ 유학교수(儒學敎授)를 두었다.

 

몽고란(蒙古亂) 이래 학교가 피폐하고 해이해져서 〈향원(鄕愿)으로 유명(儒名)을 가탁하고〉 군역(軍役)을 피하는 자들이 56월 사이에 동자(童子)들을 모아 놓고 당송(唐宋) 시대의 절구(絶句)를 읽히다가 50일이 되면 파하니 이를 하과(夏課)라 하였다. 조준(趙浚)이 청하기를,

“외방(外方)에서 유학을 업()으로 하며 한가히 사는 자들을 그 고을의 교도(敎導)로 삼아 자제들로 하여금 항상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읽히도록 하고, 교수관(敎授官) 5도에 각 1인씩 나누어보내 군현(郡縣)을 두루 돌며 교과 과정을 엄격히 세우고 그 통달(通達) 여부를 상고해서 서적(書籍)에 이름을 올리고 이끌어 주고 권장하여 쓸 만한 인재를 양성하되, 인재를 많이 얻은 자는 차서(次序)에 관계 없이 발탁해 쓰고, 성과가 없는 자는 벌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이에 서울의 5()로부터 시작해서 각도(各道)의 목()ㆍ부()에 이르기까지 유학교수관을 두었다. 김첨(金瞻) 등이 상소하여, 원자(元子) 및 종실(宗室) 자제의 입학을 청하였다.

○ 대부(大夫)ㆍ사()ㆍ서인(庶人)의 제례(祭禮)를 정하였다.

 

우리 나라 가묘(家廟)의 법이 오랫동안 폐지되어 왔다. 무릇 집이 있는 자는 반드시 신사(神祠)를 세우니 이것을 위호(衛護)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판대부(判大夫) 이상은 3()를 제사지내고, 6품 이상은 2세를, 7품 이하 및 서인은 부모만 제사지내게 하고 모두 가묘를 세우게 하였으며, 삼령절(三令節 정조(正朝)ㆍ추석(秋夕)ㆍ한식을 말한다)인 한식(寒食)에는 상분(上賁 조상의 묘소를 참배하고 돌보는 것)하되 구속(舊俗)에 따르도록 허락하였다. 행례(行禮)의 의식(儀式)은 한결같이 주 문공(朱文公 문공은 주자(朱子)의 시호)의 《가례(家禮)》에 준하도록 하되 편의에 따라 가감하게 하였다.

당시 전() 판사(判事) 윤귀생(尹龜生)은 찬성(贊成) ()의 아들인데, 금주(錦州) 지금의 금산(錦山) 에 은퇴하여 살면서 사당을 세우고 제례(祭禮)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하니, 관찰사 노숭(盧嵩)이 금주에 이첩(移牒)하기를,

“지금 국가에서 영을 내려 가묘를 세우라고 하였으나 한 사람도 시행하는 자가 없는데, 윤귀생은 국가의 영이 있기 전에 스스로 가묘를 세우고 제사를 닦아 조고(祖考)를 공경히 섬기므로, 선왕(先王 주 강왕(周康王)을 말한다)의 정사가 ‘착한 이를 표창하고 악한 자를 구별하여 풍조(風潮)와 명성을 그곳에 세우라.’ 하였으니 마땅히 정려(旌閭)하고 효자비(孝子碑)를 세울 것이며 그 집을 복호(復戶 조세(租稅) 이외의 잡부금을 면제하는 일)하여 여러 사람들을 권면(勸勉)하라.” 하였다.

3월 홍영통(洪永通)을 영삼사사(領三司事), 우현보(禹玄寶)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았다.

 

영통은 탐욕이 많고 불법을 자행하는 자로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의 화를 면하였는데, 왕이 즉위한 뒤에 간관(諫官)들이 그가 변안열(邊安烈)의 옥사에 관련된 사실을 들어 소장을 번갈아 올려 극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지만 왕이 윤허하지 않고 이 직을 제수(除授)한 것이다. 우현보도 김저(金佇)의 옥사에 관련되었으나, 그 손자 우성범(禹成範)이 왕의 부마(駙馬)인 까닭에 왕이 법을 굽혀 비호하였다.

○ 윤소종(尹紹宗)을 금주(錦州)로 방축(放逐)하였다.

 

오사충(吳思忠)과 윤소종은 남을 탄핵하고 논박하기를 즐겨하였으므로 왕이 이들을 매우 미워하여 언관직(言官職)을 모두 갈아 버렸다. 소종이 예의판서(禮儀判書)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시중(李侍中)은 군자를 진출시키고 소인을 물리칠 줄 모른다. 만약 하루아침에 소인의 간계에 빠진다면 후회막급할 일이다.

하였는데, 심덕부(沈德符)가 이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자 왕이 노하여 윤소종을 죄주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조정 신하 중에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오직 윤소종뿐이니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왕은 이르기를,

“이시중은 사직(社稷)에 공을 세웠는데 소종이 감히 욕을 하니 그를 죄주지 않을 수 있겠소?

하고, 드디어 그를 방축하였다.

【안】 윤소종의 뜻은 오로지 우리 태조를 위한 것이었으나 왕이 태조를 욕한다고 핑계하고 내친 것은 대개 태조의 우익(羽翼)을 제거하려는 뜻이었다.

○ 우리 태조가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교서(敎書)를 내려 9공신(功臣)을 포상(褒賞)하였다.

○ 문하주서(門下注書) 길재(吉再)가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길재는 해평인(海平人)으로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청렴하기가 그지없었으며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ㆍ권근(權近)의 문하에 유학하면서 비로소 이학(理學)의 이론을 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어머니가 늙었다는 것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것이다. 귀향 도중 장단(長湍)에 들러 이색을 찾아보고 거취를 물으니 색이 말하기를,

“나는 대신이니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할 것이지만 그대 같은 사람은 마땅히 가야 한다.

하였다. 길재가 돌아가겠다고 고하자 이색이 시를 지어 주었는데, 그 끝구절에 이르기를,

 

 

귀한 벼슬이 주어져도 서둘러 받지 않고 / 軒冕?來非所急

나는 기러기 한 마리 명명 중에 있도다 / 飛鴻一箇在冥冥

 

 

하였다.

물러가 봉계(鳳溪)의 옛집에 살면서 관직을 제수하여도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모친의 나이가 60이었는데 혼정신성(昏定晨省)하며 봉양을 극진히 하였고, 도학(道學)을 강구하되 정주(程朱)의 논지(論旨)에 부합되도록 힘썼으며, 말마다 반드시 충효를 으뜸으로 삼고 이단(異端)을 배척하여 중들 중에도 감오(感悟)하여 근본을 되찾은 이가 수십인이었고, 마을의 부녀자들까지도 그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예()로써 자기 몸을 지킬 줄 알았으며,

세상에 전해 오는 이야기에, 야은(治隱 길재의 호)이 사는 이웃에 먼 변방으로 수자리간 한 병졸의 집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겁탈로 몸을 더럽힐까 걱정하여 가시울타리를 쳐놓고 정절을 지키며 살았다. 거의 10년이나 지난 어느날 밤, 그 병졸이 수자리에서 돌아와 문을 열라고 소리쳤으나 아내가 응하지 않자 병졸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군역(軍役)을 치르고 이제야 돌아왔는데, 어찌하여 환영은커녕 문도 열어주지 않는가?

하자, 그 아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비록 제 남편인 줄을 알지만, 늦은 밤중에 몰래 들어온다면 어찌 반평생 수절(守節)한 뜻이리요. 길 선생(吉先生)께서 들으신다면 무어라고 하시겠소?

하였다. 병졸을 울타리 아래서 밤을 지새우게 하고, 이튿날 아침 이웃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맞아들여 부부가 되니, 그들의 사이는 다시금 전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원근의 학도가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우리 태종(太宗)이 잠저시(潛邸時) 입학했을 때 길재도 한 마을에 살아 같이 다니며 학문을 닦았으므로 공정(恭靖 정종(定宗)을 말한다)에게 천거하여 태상박사(太常博士)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자, 주관(州官)이 서울에 올라가도록 독촉하므로 길재는 글을 올려 두 성()을 섬길 수 없는 의리를 스스로 진술하니, ()도 그 절의를 아름답게 여겨 우악(優渥)한 예로 대접하였다. 길재가 일찍이 박분(朴賁)ㆍ이색(李穡)ㆍ권근(權近)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으므로 이들 세 사람의 죽음에 당하여는 모두 심상(心喪 스승의 상에는 복()이 없으므로 마음속으로 상을 당한 것처럼 하는 것) 3년을 지냈다. 학자들이 이를 종사(宗師)로 삼아 야은 선생(冶隱先生)이라 일컬었고, 우리 세종(世宗) 기해년(1419)에 졸하니 향년이 67이었다. 권근이 일찍이 길 재를 논하기를,

“고려 5백 년에 교화를 배양하여 선비의 기풍을 장려한 효과가 모두 선생의 일신(一身)에 모여 거두어졌고, 조선(朝鮮) 억만년에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여 신절(臣節)의 근본을 밝힌 것은 선생 일신으로부터 시작하여 기틀을 잡았으니 그가 명교(名敎)에 끼친 공이 크다.

하였다.

4월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다.

○ 왕모(王母) 복녕 궁주(福寧宮主)를 높여 삼한국 대비(三韓國大妃)로 삼았다.

 

(殿)을 정명(貞明)이라 하였다. 이때에 대사성(大司成) 김자수(金子粹)가 상언하기를,

“전하께서 국대비전(國大妃殿)에는 친행(親幸)이 잦으시며 봉양 또한 지극하시나 왕대비전(王大妃殿)에는 일찍이 나아가 뵌 일이 한번도 없으시니 이는 낳아 길러 주신 은혜에는 친압(親押)하면서 승조(? 대통(大統)을 잇는 것)의 중함에는 소홀한 것이니 옳은 일입니까? 앞으로는 세시(歲時) 명절이나 복일(伏日)ㆍ납일(臘日)에 반드시 왕대비전에 배알하여 한훤(寒暄 추위와 더위, 즉 문안을 말한다)을 살핀 뒤에야 국대비전에 배알하심으로써 대의(大義)를 밝히소서.

하였다.

○ 이색 등을 옮겨 다시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

 

이색은 함창(咸昌), 정지(鄭地)는 횡천(橫川), 이림(李琳)은 철원(鐵原), 이귀생(李貴生)은 고성(固城), 우인열(禹仁烈)은 청풍(淸風)에 유배하고, 이을진(李乙珍)ㆍ이경도(李庚道)는 곤장을 쳐서 유배하고, 왕안덕(王安德)은 풍주(豊州), 우홍수(禹洪壽)는 인주(仁州), 원상(元庠)은 광주(光州)에 유배하였다.

○ 회군공(回軍功)을 녹()하였다.

 

우리 태조를 으뜸으로, 그 다음으로 조민수ㆍ왕안덕(王安德)ㆍ지용기(池涌奇) 45인에게 모두 공신호를 내렸다.

○ 덕녕 공주(德寧公主 충혜왕(忠惠王)의 비())와 노국 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공민왕(恭愍王)의 비)를 태묘(太廟)에 부(?)하였다.

4월 처음으로 무과를 설치하였다.

 

도당(都堂)에서 아뢰기를,

“문과 무는 어느 한쪽도 폐지할 수 없는 것인데, 본조(本朝)에서는 문과만 뽑고 무과는 뽑지 않았기 때문에 무예(武藝)에 뛰어난 인재가 드뭅니다. 마땅히 인()ㆍ신()ㆍ사()ㆍ해()가 되는 해에 무과를 실시하여 시험해 뽑고 합격자에게는 패()를 주어 한결같이 문과의 예에 따르되, 제가(諸家)의 병서(兵書)에 모두 통하고 또 문예에 익숙한 자를 1등으로 3명 뽑고, 무예를 대강 익히고 병서에 통한 자를 2등으로 7명 뽑고, 병서에 통하거나 한 가지 무예에 인숙한 자를 3등으로 23명 뽑는 것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법식(法式)으로 삼으십시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안】 이것이 우리 나라 무과의 시초이다.

○ 지신사(知申事) 이행(李行)을 청주(淸州)에 유배하였다.

 

대간이 이색 등의 죄를 논핵하므로 왕이 재상과 의논하고자 하니, 이행이 아뢰기를,

“대간의 뜻이 공신들의 뜻입니다.

하니, 우리 태조와 여러 공신들이 상서(上書)하기를,

“대간이 논거(論擧)하는 일을 신등은 모르는 것인데 사람들이 이 말을 인연하여 신등에게 허물을 돌리고 우()ㆍ창()의 당()이 말을 날조하여 비방을 일으키니, 바라건대 신등은 사직하여 성명(性命)을 보전코자 합니다.

하고, 모두 두문불출(杜門不出)하니, 왕이 이에 시무(視務)하도록 명하고 이행을 청주에 유배하였다.

○ 적전(籍田) 증지(甑池)의 물이 솟구쳤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 정도전(鄭道傳)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삼았다.

 

정도전이 일찍이 왕에게 아뢰기를,

“당()에서는 사람을 쓰는 법에 5가지 조목이 있었으니, 교양(敎養)은 재덕(才德)을 성취시키는 것이고, 선거(選擧)는 우수한 자를 뽑는 것이고, 전주(銓注)는 그 직임에 마땅하게 하는 것이고, 고과(考課)는 그 공과(功過)를 살피는 것이고, 출척(黜陟)은 권면과 징계를 보이는 것입니다.

조목 중에 또 각기 조목이 있으니,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고 율령(律令)에 밝으며 사어(射御)에 익숙한 이 3가지는 교양의 조목이요, 〈문학(文學)ㆍ재간(才幹)ㆍ무예(武藝)ㆍ문음(門蔭) 4가지는 선거의 조목이요,〉 덕망과 식견과 도량이 있는 자는 재상을 삼고, 지략(智略)과 위엄과 용맹이 있는 자는 장수로 삼고, 직언(直言)하기를 꺼리지 않는 자는 대간(臺諫)을 삼고, 명찰(明察)하여 공평하게 용서하는 자는 형관(刑官)을 삼고, 산수(算數)에 인숙한 자는 전곡(?)을 주관하게 하고, 정교하고 민첩한 자는 공장(工匠)을 주관하게 하는, 6가지는 전주의 조목이요, 사사로움을 잊고 공()만 알아 맡은 직책에 부지런한 것이 공()이고, 사욕(私慾)을 채우면서 공사(公事)를 소홀히 하고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을 과()라 하니, 2가지는 고과(考課)의 조목이요, 관직과 품계를 올리고 녹봉을 더해 주는 것이 척()이며, 관직을 삭탈하고 귀양보내는 것을 출()이라 하는데, 2가지는 출척의 조목입니다. 본조(本朝)는 사람 쓰는 법이 크게 무너져 교양하고자 하면 사도(師道)가 밝지 못하고, 선거하고자 하면 사()로써 공을 폐하고, 전주하고자 하면 현명한 자와 우매한 자가 뒤섞여 진출하고, 고과하고자 하면 청탁이 성행하고, 출척하고자 하면 뇌물이 공공연히 행하여져 5가지가 모두 폐해졌으니 무슨 방법으로 인재를 구하겠습니까? 최근에 5()에 출척사(黜陟使)를 나누어보내기는 하였으나 이것은 근본은 헤아리지 않고 말단만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니, 왕이 매우 옳게 여겨, 검토관(檢討官) 한상경(韓尙敬)에게 그 말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 우리 태종(太宗)을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삼았다.

 

태종은 우리 태조의 다섯째아들로, 영특하고 지혜가 뛰어났다. 이때에 정사는 어지럽고 백성은 이산하여 국세가 위태하니, 개탄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었다. 변계량(卞季良)의 헌릉비(獻陵碑)에서 보충

5월 진눈깨비가 내렸다.

○ 이색ㆍ우현보 등을 하옥(下獄)하였다가 곧 석방하였다.

 

조반(?) 등이 경사(京師)에 갔더니, 예부(禮部)에서 조반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 사람인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彛)란 자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란 자가 와서 황제께 일러바치기를 ‘고려 이시중(李侍中 이성계를 말한다)이 자기의 인척(姻戚)인 왕요(王瑤 공양왕(恭讓王)의 성명이다)를 왕으로 세우고 장차 군대를 동원하여 상국(上國)을 범하려 하므로 재상 이색 등이 불가하다고 하니, 곧바로 이색ㆍ조민수(曹敏修)ㆍ이림(李琳)ㆍ변안열(邊安烈)ㆍ권중화(權仲和)ㆍ장하(張夏)ㆍ이숭인(李崇仁)ㆍ권근(權近)ㆍ이종학(李種學)ㆍ이귀생(李貴生) 등을 죽이려 하고, 우현보(禹玄寶)ㆍ우인열(禹仁烈)ㆍ정지(鄭地)ㆍ김종연(金宗衍)ㆍ윤유린(尹有麟)ㆍ홍인계(洪仁桂)ㆍ진을서(陳乙瑞)ㆍ경보(慶補)ㆍ이인민(李仁敏) 등을 먼 곳으로 유배하려 하므로, 유배되어 있는 재상들이 우리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천자에게 고하고 이어 친왕(親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토벌해 주도록 청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하고, 이어 이(?)ㆍ초()가 기록한 이색 등의 이름을 내어 보이므로, (?)과 이() 등이 대면하여 쟁론(爭論)하기를,

“너의 지위가 봉군(封君)함에 이르렀다 하니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이가 깜짝 놀라면서 얼굴빛을 변하였다. 그러자 예부의 관원이 말하기를,

“천자의 성명(聖明)으로 그것이 무고(誣告)임을 이미 안다.

하였다. 조반 등이 환국하여 이를 아뢰니, 이에 대간이 이ㆍ초의 당을 국문하자고 청하였지만 소()를 머물러두고 내리지 않았는데, 때마침 김종연이 도망을 쳤으므로 이 때문에 큰 옥사가 갑자기 일어난 것이다.

드디어 우현보ㆍ권중화ㆍ경보ㆍ장하ㆍ홍인계ㆍ윤유린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다. 유린은 윤이의 사촌형인데, 이어서 옥관(獄官)이 먼저 유린을 엄하게 국문하니 공사(供辭)에 최공철(崔公哲)ㆍ최칠석(崔七夕) 등이 관련되어 아울러 하옥하였고, 유린은 괴롭고 통분하여 굶어 죽으니 그 머리를 베어 효수(梟首)하고 그 집을 적몰하였다. 그리고 이색ㆍ이임ㆍ우인열ㆍ이인민ㆍ정지ㆍ이숭인ㆍ권근ㆍ이종학ㆍ이귀생 등을 체포하여 청주옥(淸州獄)에 가두고 평리(評理) 윤호(尹虎) 등을 보내어 국문하려 하자 홀연히 천둥이 치고 큰 비가 쏟아져 앞 내가 갑자기 넣쳐서 성 남문을 허물어뜨리니 성중의 수심(水深)이 한 길이나 넘어 관사가 물에 잠기므로 옥관(獄官)은 창황중에 객사(客舍) 앞에 있는 압각수(鴨脚樹 은행 나무를 말한다)에 기어올라가 목숨을 건졌다.

왕이 수재(水災)를 이유로 심덕부(沈德符) 및 우리 태조를 불러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풀어 줄 것을 의논하여 마침내 이색ㆍ우현보 등이 모두 석방되자 국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대성(臺省)과 헌부(憲府)에서 번갈아 소장(疏章)을 올려 이색 등을 추론(追論)함으로써 연달아 유배되었고, 김종연을 체포하여 사지를 갈라 조리돌리고, 사신을 보내어 이ㆍ초의 무고를 상주(上奏)하니, 그때는 황제가 이미 두 사람을 표수현(漂水縣)에 유배한 뒤였다. 이ㆍ초의 옥사가 일어나자 좌사의(左司議) 김진양(金震陽)은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이ㆍ초의 일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그것이 무고임을 알 것인데, 헌사가 가벼이 대역(大逆)으로 몰아 탄핵함으로써 정론(正論)을 크게 해쳤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연좌되어 파면당하였다.

【안】 이 일은 성지(聖旨)로 자문(咨文)을 보낸 것이 아니고, 다만 예부가 구두로 일러준 데서 나온 것이며, 조반 등도 구두로 전하였으므로 징험할 만한 근거가 없으니 진실로 의심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뒤에 와서 조반이 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의 옥사를 일으켜 결국 개국공신의 훈록(勳祿)에 참여하였으니 김진양이 의심한 것도 실로 당연하다 하겠다.

○ 왕강(王康)을 삼도 수군도체찰사(三道水軍都體蔡使)로 삼았다.

 

왕강은 종실의 먼 친척이다. 이때에 왜구가 제멋대로 날뛰어 조운(漕運)이 통하지 못하자, 도당(都堂)에서 강()이 재능이 있다고 추천하여 해도(海道)를 맡기니 왕강은 국가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삼고 어염(魚鹽)의 이()에 힘을 기울여 몇 해가 안 되어 거만(鉅萬)으로 헤아리기에 이르니 국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왕강이 해도(海島) 백성을 침탈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많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취렴(聚斂)하는 신하라 하였고, 유안(劉晏)으로 지목하였다.

○ 일본 원요준(源了俊)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쳤다.

6월 예성강(禮成江) 물이 붉은 색으로 변하여 3일 동안 끓어올랐다.

 

왕이 근심하는 기색이 있자 검토관(檢討官) 신원필(申元弼)이 아뢰기를,

“그것이 어찌 상서(祥瑞)가 아닌지 알겠습니까?

하였다. 신원필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왔는데도 매양 아첨하는 말을 아뢰고 궁중에 드나들며 환관과 어울리니 사림(士林)들이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 태백(太白)이 경천(經天)하였다.

○ 왜적이 양광도(楊廣道)에 침구하였다.

7월 대사(大赦)하였다.

 

이때에 대관(臺官)이 이ㆍ초의 당을 힘써 논핵하였는데, 적경원(積慶園)에서 추숭례(追崇禮)를 거행하자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아뢰기를,

“추숭례를 거행하는 기회에 큰 은혜를 내리소서.

하니 그대로 따른 것이다. 형조에서 정몽주가 이ㆍ초의 당을 두둔한다고 탄핵하자, 정몽주는 두 번 상소하여 사면을 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 한양(漢陽)의 궁궐을 수축(修築)하였다.

 

서운관(書雲觀)에서 《도선비기(道銑秘記)》의, 지리(地理)에는 쇠운(衰運)과 왕운(旺運)이 있다는 설()로 한양에 행행하여 송도(松都)의 지덕(地德)을 쉬게 하도록 청하자, 왕이 이것을 박의중(朴宜中)에게 물으니 아뢰기를,

“도참설(圖讖說)의 술수로써 그 나라를 보전하였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백성들을 괴롭히고 인력 물자를 공급해야 하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신(臺臣)이 또 간쟁(諫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8월 왜적이 서해도(西海道)를 노략질하고 또 전라도도 노략질하였다.

○ 김윤후(金允厚) 등이 유구(琉球)로부터 돌아왔다.

 

김윤후가 돌아올 때 중산왕(中山王)은 또 옥지(玉之) 등을 보내어 신하로 칭하며 표문(表文)을 올렸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으며 토산물을 바쳤다. 이때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왔으며, 그 세자 무령(武寧) 역시 방물(方物)을 바쳤다.

9월 초하루(경인)에 개기일식(皆旣日蝕)이 있었다.

○ 태백이 경천하였다.

○ 공사(公私)의 전적(田籍)을 불태웠다.

 

그 불이 며칠 동안 그치지 않고 탔다. 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조종(祖宗) 대대로 내려온 사전법(私田法)이 과인에 이르러 갑자기 혁파되니 애석하도다.

하였다.

○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11월 우현보ㆍ이색 등을 사유(赦宥)하였다.

 

우현보ㆍ이색ㆍ권중화(權仲和) 등에게는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마음대로 살게 하고, 우인열(禹仁烈)ㆍ정지(鄭地)ㆍ권근ㆍ이숭인ㆍ이림(李琳) 등에게는 지방의 어디에서나 마음대로 살게 하였다. 권근은 적소(謫所)에 있으면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짓고, 이듬해에 충주(忠州) 양촌으로 돌아가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지었다. 권근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이색ㆍ정몽주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문장과 학술이 당세에 으뜸이었으나 혁명 후에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청론(淸論)에서 버림을 받았다.

신씨(申氏)는 이렇게 적었다.

권근이 죄를 받은 것은 하나는 목은(牧隱) 때문이고, 하나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호)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당시의 유배 생활에 안주(安住)할 수 있었다면 그의 문장과 명론(名論)이 어찌 목은과 도은만 못하였겠는가? 그러나 계룡시(鷄龍詩)를 한 번 읊자 갑자기 개국총신(開國寵臣)이 되었으니 애석하다. 그가 절개를 굽힌 뒤에도 지위가 삼사(三司)를 넘지 못하였고, 나이는 육순(六旬)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소득도 보잘것이 없었다. 그 당시 권근을 기롱(譏弄)한 시에,

 

 

청천 백일에 양촌은 의리를 말하였는데 / 白日陽村談義理

어느 세대인들 현인이 없겠는가 / 世間何代更無賢

 

 

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오직 그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끊이지 않고 계속 융성했으므로 사람마다 양촌 양촌 하여 마치 덕행이라도 있는 사람 같지만 그가 명예를 훔친 짓은 너무 심하다고 하겠다.

○ 우리 태조를 영삼사사(領三司事), 정몽주를 수시중(守侍中)으로, 배극렴(裵克廉)ㆍ설장순(?長壽)를 찬성사(贊成事)로 삼았다.

○ 심덕부(沈德符)를 파직시키고 우리 태조를 다시 시중으로 삼았다.

○ 판삼사사(判三司事) 지용기(池湧奇) 등을 유배하였다.

 

서경(西京) 사람 윤귀택(尹龜澤)이 우리 태조에게 고하기를,

“김종연(金宗衍)이 심덕부ㆍ지용기 등과 더불어 공()을 해치려고 꾀한다.

하므로 태조가 이 사실을 심덕부에게 알리니, 덕부가 크게 놀라 그 말의 근원을 끝까지 캐본 결과 바로 덕부의 족질(族姪) 조유(趙裕)가 한 말이었다. 덕부는 자청해서 옥에 들어가 옥정(獄庭)에서 변론하였고, 조유는 곧 자복하고 교살(絞殺)되었다. 이에 언관(言官)이 심덕부를 탄핵하여 파직시켰고, 지용기 및 공사(供辭)에 연루된 박위(?)ㆍ정희계(鄭熙啓)ㆍ윤사덕(尹師德)ㆍ이빈(李彬) 등을 외방(外方)에 유배하였다. 얼마 안 있어 심덕부는 토산(兎山)으로 유배되었고, 김종연은 옥중에서 죽자 사지를 찢어 제도(諸道)에 조리돌렸다.

12월 조민수(曹敏修)가 창녕(昌寧)에서 졸하였다.

○ 조준(趙浚)을 찬성사로 삼았다.

 

조준은 이미 태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지위가 현달하게 되자, 당시 정사가 혼란함을 보고 마음속으로 쇄신할 생각을 하였다. 오랫동안 헌관직(憲官職)에 있으면서 글을 올려 폐단을 고치고 백성을 교화하며 풍속을 바로잡아 당시의 정사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인심을 결속시켜 인망을 모으려 하였으므로 태조의 위덕(威德)이 백성들에게 날로 미덥게 된 것도 조준 등의 이러한 보좌 때문이었다.

 

[D-001]김저(金佇)의 옥사 : 창왕(昌王) 1(1389)에 김저 등이 이성계를 암살하려던 사건. 김저는 최영(崔瑩)의 생질로 정득후(鄭得厚)와 함께, 당시 폐출되어 있던 우왕(禑王)으로부터 이성계를 암살하라는 밀지(密旨)를 받고 곽충보(郭忠輔)와 접선, 팔관회(八關會) 날 이성계를 암살할 계획을 꾸몄으나, 곽충보가 이성계에게 밀고함으로써 계획이 실패하고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이 옥사로 많은 사람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高麗史 卷一百三十七 列傳五十》

[D-002]오원제(吳元濟)가 …… 사건 : 도적을 철저히 다스려야 한다는 뜻. 당 헌종(唐憲宗) 때에 오 원제가 채주(蔡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승상(丞相) 무원형(武元衡)과 중승(中丞) 배도(裵度)가 이를 토벌하라고 청하였다. 이때 이사도(李師道)는 번진(藩鎭)에서 오원제와 성세(聲勢)를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원제가 패할까 두려워 도적을 보내어 무원형을 죽이고, 배도에게는 상처를 입혔다. 이렇게 되자 여러 신하들은 오원제를 사()하여 번진을 편안히 하게 하라고 청하였으나 헌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배도를 정승으로 삼아 오원제를 쳐서 도적을 섬멸하였다. 《高麗史 卷一百二十六 列傳四十一》

[D-003]유씨(劉氏)가 …… 사실 : 한 고조(漢高祖)가 죽은 뒤 여러 외척들의 세력이 강성해져 유씨의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자, 왕능(王陵)이 백마를 잡아 놓고 하늘에 제사하면서 “고조가 ‘유씨가 아닌 자는 왕 노릇 할 수 없다.’ 했다.” 하고 대의를 부르짖어 국권을 부호(扶護)한 사실을 말한다.

[D-004]적전(籍田) : 종묘(宗廟)에 쓰는 자성(? : 제사에 쓰는 곡식)을 재배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의 시범을 보이기 위하여 왕이 직접 나아가 경작하는 전지이다.

[D-005]조반이 …… 일으켜 : 임견미와 염흥방이 한창 세도를 부릴 때, 염흥방의 가노(家奴) 이광(李光)이 조반의 전지를 빼앗은 일이 일어났다. 이에 조반이 분격하여 이광을 죽이니 염은 조반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무고(誣告)하고 조반을 순군윽(巡軍獄)에 가두었다. 그러나 조반은 끝까지 불복하고, 우왕(禑王)도 조반의 무죄를 알아 석방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임ㆍ염의 횡포를 미워하던 최영(崔瑩)ㆍ이성계(李成桂) 등이 임ㆍ염을 제거하였다.

[D-006]유안(劉晏)으로 지목하였다 : 경제(經濟)에 능하다는 말. 유안은 당()의 현종(玄宗)ㆍ덕종(德宗) 때 명신으로 염철(鹽鐵) 업무를 맡아 국가 재정을 튼튼히 했는데, 특히 안사(安史)의 난리 중 극도로 고갈된 재정을 유안이 모두 주선했다. 그는 나라의 이재(理財)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이를 앞세웠으므로 다스리는 곳마다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D-007]계룡시(鷄龍詩) …… 되었으니 : 계룡시란 《양촌집(陽村集)》 첫머리에 있는 풍요(風謠)를 말하는데 내용은 새 왕조의 개국을 칭송하는 것으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크게 등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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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7   

 

 

신미년 공양왕 3(명 태조 홍무 24, 1391)

 

 

춘정월 우리 태조를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 삼았다.

 

배극렴을 중군총제사로, 조준을 좌군총제사로, 정도전을 우군총제사로 삼았다. 대사헌 김사형(金士衡)이 중외(中外)의 군사에 관한 일은 이() 태조의 구휘 가 이이 총괄하니 여러 원수(元帥)의 인장을 모두 거두어들이기를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2월 왕이 환도(還都)하였다.

 

조정 신하들의 대부분이 천도(遷都)의 불편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 심덕부를 소환하여 청성백(靑成伯)으로 삼았다.

○ 중랑장(中郞將) 왕익부(王益富)를 목베었다.

 

왕익부는 지용기(池湧奇)의 처족인데 지용기의 집에 드나들면서, 스스로 충선왕(忠宣王)의 서증손(庶曾孫)이라고 말하므로 왕의 동생 우()가 이를 고발함으로써, 그 자손 13인과 함께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3월 초하루(무자)에 일식이 있었다.

○ 우리 태조가 전()을 올려 사직하였다.

 

태조가 병으로 사직하고, 드디어 평주(平州)의 온정(溫井)으로 내려갔다.

올린 전에 이르기를,

“군신(君臣)이 서로 만나기 어려운 것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습니다. 신은 장량(張良)이나 엄자릉(嚴子陵)을 본받기 원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광무(光武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를 말한다)와 같게 되소서. 신은 병신년(공민왕 5 1356) 6월 선신(先臣) (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을 말한다)가 현릉(玄陵)의 명을 받아 쌍성(雙城)을 평정하고 옛 강토를 회복하는 데 배종(陪從)하였더니 현릉께서 신을 차서를 뛰어넘어 탁용(擢用)하여 나이 30이 못 되어 지위가 재보(宰補)에 이르렀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여 자나깨나 두려워하고 조심하였는데, 무진년(우와 14 1388)에 이르러서는 가성(假姓 우왕이 왕씨가 아니고 신돈(辛頓)의 아들이라는 데서 일컫는 말이다)이 중국을 범하려 하므로 신이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주창하여 다시 종사(宗社)를 안정시켰으되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병권(兵權)을 천단(擅斷)한 것이라 하였으며, 이듬해 기사년(1389) 11월에 교지를 받들어 위성(僞姓)을 멸하고 왕씨를 다시 일으켜 종사를 바로잡았으되 이번에는 사람들이 집권(執權)이라 하였습니다. 이번에 제군사(諸軍事)가 되어 군사를 기르고 조용히 지키면서 간웅(奸雄)을 진압하고 외적의 침구(侵寇)를 지식(止息)시켰더니 이번에는 또 군자(軍資)를 소모하였다고 하는 등 물의(物議)가 분분(紛紛)하여 변명할 길이 없습니다.

신에게는 3가지의 불행한 일이 있습니다. 공은 보잘것이 없는데 상이 과다하여 다른 사람들의 시기를 받으니 이것이 첫번째 불행한 일이요, 사직을 보존하고 정통(正統)을 회복하고 도적을 그치게 한 일들에 일찍이 티끌만한 도움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것으로 말미암아 총신(寵臣)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 두번째 불행한 일이요, 공과 허물은 서로 상쇄될 수 없는 것인데도 미혹(迷惑)에 사로잡혀 용퇴(勇退)하지 못한 것이 세번째 불행한 일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매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은 인자하시와 공신을 보전한다는 성예(聲譽)가 광무에게만 있지 않도록 하여 주소서.

하니, 왕이 좌대언(左代言) 이첨(李詹)을 보내어 궁중 술을 내려 위로하고 비답(批答)하였다.

4월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 황제가 사람을 보내어 말을 사고 환자(宦者)를 구해 오게 하였다.

 

황제가 환자 한룡(韓龍)ㆍ황독만(黃禿蠻) 등을 보내어 전지(傳旨)하기를,

“관직에 있는 자나 부잣집에 있는 말 1만여 필을 무역하여 요동(遼東)에서 교역하게 할 것이요, 또 환자 2백 명이 필요하다.

하였다. 한룡 등은 우리 나라 사람인데 왕에게 축수(祝壽)하는 술을 드림에 있어 왕은 앉아서 받게 하고 꿇어앉아 잔을 올렸다. 공양왕 재위 기간에 말을 사서 다섯 차례로 나누어 바쳤는데 모두 8천 필이었다.

○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였다.

 

이때에 가뭄이 심하여 한재(旱災)가 들고, 괴이한 일들이 빈번이 일어나므로 왕이 교서를 내려 구언하였다.여덟 가지 일[八事]을 들어 자책(自責) 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이에 상소한 자들이 매우 많아, 왕은 그 글들을 도당(都堂)에 내려 채택하여 아뢰라 하였으나 끝내 시행된 것이 없었다.

○ 원통한 옥사(獄事)를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 급전법(給田法)을 정하였다.

 

도평의사사(都平議使司)가 글을 올려 과전(科田) 지급법을 제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랐다. 문종(文宗) 때 정한 대로 경기(京畿)의 주군(州郡)에 좌도(左道)ㆍ우도(右道)를 두고, 1()으로부터 9품 산직(散職)에 이르기까지 18()로 나누었다. 경기와 6()의 전지를 한결같이 실지 답사하여 측량하니, 경기의 실전(實田) 13 1 7 55()이고 황원전(荒遠田) 8 3 87결이었으며, 6도 실전은 49 1 3 42결이고 황원전이 16 6 6 42결이었다. 수를 헤아려 정()을 정하고 정마다 각각 자호(字號)를 붙여 대장(臺帳)에 올리고, 공사(公私)의 옛 전적(田籍)을 모아서 모두 조사한 뒤에 그 진위(眞僞)를 가려내고, 옛날의 손익(損益)에 따라 능침전(陵寢田)ㆍ창고전ㆍ궁사전(宮司田)ㆍ군자시전(軍資寺田)ㆍ사원전(寺院田)ㆍ외관직전(外官職田)ㆍ늠급전(?結田)ㆍ향리전(鄕吏田)ㆍ진전(津田)ㆍ역리전(驛吏田)ㆍ군전(軍田)ㆍ장인전(匠人田)ㆍ잡색전(雜色田)을 정하였다.

경기는 사방의 근본이라 과전을 두어 사대부를 우대해야 하기 때문에 무릇 경성(京城)에 거주하면서 왕실을 호위하는 자는 현직이나 산직(散職)을 막론하고 각각 과등(科等)에 따라 과전을 주었다. 1과는 종실의 대군(大君)으로부터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로 하여 1 50결을 주고, 체감(遞減)하여 17과인 9품에 이르러서는 15결을, 18과인 권무(權務)ㆍ산직(散職)에게는 10결을 주었다. 지방은 왕실의 번병(藩屛)이므로 마땅히 군전을 두어 군사를 양성해야 하고, 동서 양계(東西兩界 동북면계(東北面界)와 서북면계를 말한다)는 전과 같이 군수(軍需)에 충당하게 하여, 6도의 한량(閑良)과 관리에게는 자품(資品)의 고하를 불문하고 이미 소유하고 있는 전지의 다소에 따라 각각 군전 10결 혹은 5결을 주었다. 공사천(公私賤)이나 공인(工人)ㆍ상인ㆍ점장이ㆍ장님ㆍ무당ㆍ창기(倡妓)ㆍ승니(僧尼) 등에게는 수전(受田)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지를 받은 모든 사람은 자신이 죽은 뒤에 아내가 아들이 있으면서 수절(守節)할 경우에는 그대로 전해 받게 하고, 아들이 없이 수절할 경우에는 그 절반만 받게 하며, 수절하지 않는 경우에는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모든 공사전(公私田)의 전조(田租)는 논 1결에 벼 30()이며 밭 1결에 잡곡 30두였다. 이외에 횡렴(橫斂)하는 자가 있으면 탐장죄(貪贓罪)로 다스리고, 능침전ㆍ창고전ㆍ궁사전ㆍ공해전(?)ㆍ공신전을 제외하고는 전지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모두 세()를 바치게 하였는데 세는 논 1결에 백미 2, 1결에는 황두(黃豆) 2두었다.

○ 복제(服制)를 개정하고 삼년상을 허락하였다.

 

복제는 한결같이 《대명률(大明律)》을 따르되, 외조부ㆍ외조모ㆍ장인ㆍ장모의 복만은 친백부(親伯父)ㆍ친숙부와 같게 하토록 하고, 삼년상 입는 것을 허락하되 군관만은 오직 백일상(百日喪)만을 치르도록 허락하였다. 기복(起服)시킬 자는 계문(啓聞)한 뒤에 기복시키되, 부모상일 경우에는 매달 삭망제(朔望祭)를 지내고, 13개월째를 초기(初忌)로 하여 소상(小祥)을 지내고, 25개월째를 2()로 하여 대상(大祥)을 지내고, 27개월째 그믐에 담재(?)를 지내고, 28개월째 초하루에 비로소 길복(吉服)을 입게 하였다.

○ 안노생(安魯生)을 서북면 찰방별감(西北面察訪別監)으로 삼았다.

 

요동(遼東)에서 말을 무역해 가는 길이 트이자, 우마(牛馬)ㆍ금은(金銀)ㆍ저마포(苧麻布)를 가지고 몰래 요동ㆍ심양으로 가서 매매하는 상고(商賈)들이 매우 많았다. 국가에서 비록 금하기는 하였으나 금령이 잘 시행되지 않았고 변방의 관리들도 엄중히 금하지 않아 오가며 장사하는 자들이 줄을 이었다. 안노생이 가서 그 우두머리 10여 인을 참수(斬首)하고 나머지는 모두 곤장을 쳐서 수군(水軍)으로 배속(配屬)시키며 그들의 물품(物品)을 모두 몰수하였고, 또 그 주군(州郡)의 관리로서 금지하지 못한 자는 곤장을 치니, 이에 기강(紀綱)이 확립되고 변경이 숙연(肅然)해졌으며 다시는 금령을 범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 이색(李穡) 등에게 명하여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을 편수하게 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왕이 경연관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사람들이 중국의 일은 알면서도 우리 나라의 일은 잘 모르니 되겠는가?

하니, 정몽주가 아뢰기를,

“근대의 역사는 모두 편찬되지 않았고 선대의 실록 또한 상실(詳實)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편수관(編修官)을 두어 《통감강목(通鑑綱目)》의 예에 따라 편찬하여 살펴볼 수 있도록 갖추소서.

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이색ㆍ이숭인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 중앙과 지방 관리의 해유(解由) 규정을 반포하였다.

6월 성균박사(成均博士) 김초(金貂) 등에게 태형(笞刑)을 내렸다.

 

왕이 즉위한 이래 불교를 혹신(惑信)하여 허비하는 비용이 매우 많았는데 부정(副正) 김전(金琠)과 판서 정사주(鄭士綢)가 마땅히 숭봉(崇奉)해야 한다고 아뢰어 기꺼이 받아들였으므로 김초는 글을 올려 힘써 배척하기를,

“청컨대 집을 나가 중이 된 자들을 모아다가 본업(本業)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오교 양종(五敎兩宗)을 폐지하여 군영(軍營)에 보충하고, 중외(中外)의 사사(寺社)는 모두 소재지(所在地) 관아(官衙)에 소속시키고, 노비와 재산 역시 다 분속(分屬)시킬 것이며 무당과 박수는 먼 곳으로 추방하여 개경에 살지 못하게 하고, 집집마다 가묘(家廟)를 세워 부모의 신주(神主)를 모시게 하고 음사(淫祀)를 근절하여 명목 없이 낭비함을 막되, 금령(禁令)을 엄하게 세워 체발(剃髮)한 자와 음사(淫祀)하는 자는 모두 죽여야 합니다. 만약 이를 개혁할 수 있다면 요순(堯舜)의 정치에도 미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생원(生員) 박초(朴礎) 등도 상소하여 숭불(崇佛)의 그릇됨을 말하고 김전 등에게 차열형(車裂刑)을 가함으로써 사설(邪說)에 혹()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자, 왕이 크게 노하여 김초 등을 죽이려 하였지만 적당한 죄명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좌대언 이첨(李詹)이 아뢰기를,

“우리 태조 때부터 대대로 불교를 숭봉하여 왔는데, 지금 김초 등이 이를 배척하니 이것은 선왕께서 만든 법을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이로써 죄를 준다면 구실이 없음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왕이 그렇게 하였다.

【안】 이첨은 명색이 유자(儒者)로서 임금의 잘못에 영합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부처를 독신(篤信)하게 한 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정몽주가 상소하기를,

“신의(信義)란 임금의 큰 보배이니 나라는 백성에 의해 유지되고 백성은 신의에 의해 보존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전하께서 구언(求言)하시면서 ‘말하는 자에게 죄를 주지 않겠다.’ 하시어 조정 관원이나 한량(閑良)들이 서로가 소장을 올려 정사(政事)의 잘잘못과 백성의 기쁨과 슬픔을 항론(抗論)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거리낌없이 직언(直言)할 수 있는 조정이라고 할 만합니다. 부처를 배척하는 것은 유자들의 떳떳한 일로 예부터 임금은 버려 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하찮은 미치광이 같은 서생(書生)이야 너그럽게 용납하시기에 달렸으니 바라건대 넓으신 은혜로 한결같이 모두 용서하여 국인(國人)에게 신의를 보이소서.

하자, 이에 김초 등에게 태형(笞刑) 40() 만을 내렸다.

○ 이색ㆍ우현보 등을 다시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

 

정도전(鄭道傳)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이색ㆍ우현보 등을 주살(誅殺)하여, ()을 세우고 우()를 맞아들이려 한 죄를 정할 것을 청하고, 또 면대해서도 극론하였으며, 대사헌 김사형(金士衡)도 다시 논박하니 왕이 어쩔 수 없어 그대로 좇아 이색을 함창(咸昌)에 유배하고, 이종학(李種學)ㆍ이을진(李乙珍)ㆍ이경도(李庚道) 등을 모두 먼 곳에 유배하였는데, 대간에서 또 번갈아 소장을 올리므로 우현보를 철원(鐵原)에 유배하였다.

○ 우리 태조가 글을 올려 사직(辭職)하였다.

 

대간에서 우현보를 논핵하였을 때에 왕이 우리 태종(太宗)을 태조의 집에 보내어 대간의 논핵을 금지시켜 달라고 청하자, 태조가 글을 올려 사직하면서 이뢰기를,

“신은 폐위입진(廢僞立眞)으로 사람들의 시기를 받았고, 또 창을 세우고 우를 맞아들인 일에 이()ㆍ초()와 함께 모의한 자들이 공사(供辭)에서 명백히 증명되어 대간이 스스로 상소하여 죄주기를 청했을 따름으로 신이 어찌 감히 사주(使嗾)하였겠습니까? 이제 신에게 명하여 대간의 논핵을 금지하게 하라 하시니 이는 신이 사주하였다고 의심하시는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 글을 읽고 태종에게 이르기를,

“나는 시중(侍中 이성계를 말한다)을 부모와 같이 우러러보는데, 시중은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는가? 만약 시중이 사직한다면 나 역시 어찌 감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을 두고 맹세하노니 즉시 취직(就職)하도록 하라.

하였으나 태조가 굳이 사양하자 또 태종에게 이르기를,

“그대 또한 어찌하여 나를 위해 청하지 않는가?

하였다. 얼마 안 되어 태조가 예궐하여 사은(謝恩)하니, 왕도 태조의 사저(私邸)에 행행하여 주안을 베풀고 풍악을 잡히며 놀다가 한밤중에야 파하였다.

당시 태조의 공명이 높고 중망(衆望)을 얻고 있어, 왕이 이를 시기하여 밤낮으로 좌우에 모시는 사람들과 비밀히 제거하기를 도모하였다. 태조가 정도전ㆍ남은(南誾)ㆍ조인옥(趙仁沃) 등에게 말하기를,

“나는 마땅히 동쪽(이성계의 고향인 함흥(咸興)을 말한다)으로 돌아가 피신하리라.

하니, 정도전 등이 말하기를,

“공이 어찌 거취를 가벼이 할 수 있습니까? 머물러 있으면서 왕실을 보좌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지금 만약 한구석에 물러가 있게 되면 그 화를 또한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자, 태조가 말하기를,

“옛날에 자방(子房 자방은 장량(張良)의 호)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갔으나 고조(高祖)는 죄주지 않았소. 나의 마음도 다른 뜻이 없으니 왕이 어찌 나를 죄주겠소?

하니, 정도전 등이 이해 관계를 역설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 십이도(十二徒)를 파하였다.

 

사학(私學)이다.

7월 지진이 있었다.

○ 섬라곡국(暹羅斛國)에서 사신을 보내와 빙문(聘問)하였다.

 

이 나라는 중국 남쪽의 바다 가운데 있는데 일찍이 우리 나라와는 교통한 적이 없었다. 이때에 와서 그 나라 왕이 나공(奈工) 8인을 보내어 글을 올리고 토산물을 바쳤는데, 성명과 봉인(封印)이 없고 다만 작고 둥근 도장이 찍혀 있었으나, 역시 상고할 수가 없었다. 나라에서 거짓일까 의심하여 의론하기를,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 법이니 후한 예로 대우하되, 그 글은 받지 말아서 미혹(迷惑)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 옳다.

하였다. 왕이 인견(引見)하고 위로하니 아뢰기를,

“무진년(우왕 14 1388)에 왕명을 받고 배로 출발하여 일본에 이르러 1년간 머물다가 이제야 귀국(貴國)에 당도하여 전하(殿下)를 뵙게 되니 행역(行役)의 괴로움이 모두 가셨습니다.

하였다. 왕이 뱃길의 원근(遠近)을 물으니 아뢰기를,

“북풍을 받고 40여 일 가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들 중에는 어깨를 드러내놓은 자도 있고, 맨발인 자도 있었으며 높은 사람은 백포(白布)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종복(從僕)들이 존장자를 뵐 때는 옷을 벗고 몸을 드러내었는데, 세 번을 통역해서야 그 뜻이 무엇인가 알았다.

○ 시중 정몽주가 당인(黨人)에 대한 다섯 가지 죄목의 경중(輕重)을 정할 것을 청하자 그대로 따랐다.

 

정몽주와 재상들이 상소하기를,

“상벌(賞罰)은 나라의 대전(大典)으로 한 사람을 상주어 천만 사람을 권면(勸勉)하고 한 사람을 벌하여 천만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이니, 공명정대하지 못하면 족히 중정(中正)함을 얻어 인심을 습복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성헌(省憲)과 법사(法司)가 번갈아 소장을 올려 탄핵하기를 ‘누구는 왕씨(王氏)가 서는 것을 방해하고 아들 창()을 옹립한 사람이고, 누구는 역적 김종연(金宗衍)의 역모에 내응한 사람이며, 누구는 신우(辛禑)를 영립하여 영원히 왕씨의 대를 끊으려 한 사람이며, 누구는 이()ㆍ초()를 상국(上國)에 보낸 자이며, 누구는 선왕(先王)의 얼손(?)을 몰래 돌보아 반역을 꾀한 사람이다.’ 하여, 소장들이 여러 번 올라갔으나 명백한 처결을 보지 못하여, 그 가운데는 반드시 죄있는 자가 부당하게 용서를 받은 자도 있을 것이며 무고한 자가 누명을 씻지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니, 양쪽이 다 공도(公道)를 잃은 셈입니다. 이 때문에 논의가 분분하여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신등은 생각건대, 성헌과 법사로 하여금 같이 의논하여 검토해서, 누구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있으니 마땅히 법에 따라 조치하고 누구는 정상이 의심스러운 데가 있으니 마땅히 가벼운 법을 좇게 하고, 누구는 죄없이 무고(誣告)되었으니 명백히 분별하여 석방해야 하니 전하께서 재상(宰相)들을 소집하고 친림(親臨)한 자리에서 죄안(罪案)을 심리(審理)하여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게 한 연후에 죄를 주어 내치거나 용서하고 풀어준다면 인심이 습복되고 공도(公道)가 행해질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이에 정몽주는 판삼사(判三司) 배극렴(裵克廉), 겸대헌(兼大憲) 김주(金湊) 및 성부(省府)의 많은 관리들과 더불어 열거한 5가지 죄목을 의론하였는데, 김주가 말하기를,

“조민수(曹敏修)가 이색의 말을 좇아 창()을 세웠다면, 이색의 죄가 명백합니다.

하였다. 왕과 정몽주는 이색의 죄를 관대히 처리하려 하였으나 김주가 그 불가함을 고집하자 여러 낭사(郞舍)들도 모두 동의하였는데, 정언(正言) 김여지(金汝知)만이 홀로,

“이색은 무죄하니 말감(末減) 함이 마땅합니다.

아뢰므로 왕이 옳다고 하여, 명하여 조민수ㆍ변안열(邊安烈)ㆍ지용기(池湧奇)ㆍ박가흥(朴可興) 등은 적몰(籍沒)하고 전과 같이 한 곳을 지정하여 머물게 하였으며, 우인열(禹仁烈)ㆍ왕안덕(王安德)ㆍ박위(?)는 지방의 어느 곳에서나 살게 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서울이나 지방 어느 곳에서나 마음대로 살게 하였다. 정몽주가 이어 왕에게 아뢰기를,

“이후에 다시 논핵(論劾)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죄(誣告罪)로 다스리소서.

하였다.

○ 순령군(順寧君) (?)과 성균사예(成均司藝) 유백순(柳伯淳)을 외방에 유배하였다.

 

당초에 유백순과 담이 말하기를,

“무진년(우왕 14 1388)에 여러 장수가 머뭇거리다가 군사를 되돌렸으니 마땅히 공이 없는데도 지금 도리어 포상(褒賞)을 받았고, 아들 창()을 세운 이들도 사세가 그랬기 때문인데도 대신들이 이 일로써 옥에 갇혔으니, 옛날 의종조(毅宗朝)의 난리를 마땅히 거울삼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유자(儒者) 정도전 등이 국권을 농단(弄斷)하려 꾀하니 혹시 전날의 난리 같은 것이라도 있게 된다면 우리들도 그 화를 입을까 두렵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간과 형조가 자은사(慈恩寺)에서 회동하여 담과 유백순을 잡아다 심문하고, 드디어 담을 견주(見州)에 유배하고 종친(宗親)의 적()에서 삭제하였으며, 유백순은 기주(基州)에 장류(杖流)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평의사사(都平議使司)가 상서하기를,

“무릇 국가의 이해를 논하되 말을 꾸며서 정사를 어지럽히는 자는 헌부(憲府)와 법사(法司)로 하여금 종친이나 귀척(貴戚)을 불문하고 계문(啓聞)을 기다리지 말고 바로 직첩(職牒)을 거두고 국문(鞫問)하여 논죄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왕이 오랫동안 보류했다가 윤허하였다. 간관(諫官) 허응(許應) 등이 또 아뢰기를,

“앞으로는 종친 및 잠저(潛邸) 때의 친구들을 인견(引見)하실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연(經筵)과 같은 공석에서 하여, 내외(內外)를 구별하고 사설(邪說)을 멀리하소서. 그리고 대간에게 날마다 교대하여 경연에 입시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안】 종친이나 귀척은 비록 죄가 있더라도 모두 《주례(周禮)》 팔의(八議) 중에 있는데, 계문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국문할 순 있는 것인가? 이때 인심이 모두 우리 태조에게 돌아갔으나, 오직 종친이나 귀척 및 잠저 시절의 친구들은 오히려 왕의 심복(心服)이라 외부의 사정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조준(趙浚)의 무리가 정부(政府)에 들어가 이 법을 만들어서 왕의 이목을 가리고 수족을 묶어 두려 한 것이었으니, 말세의 임금들은 이것을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다.

○ 왕이 우리 태조의 사저(私邸)에 행행하였다.

 

우리 태조가 예궐하여 배사(拜辭)하자 매우 은근하게 위로하였다. 이튿날 왕이 우리 태조의 사저에 행행하여 주연을 베풀었다. 그 뒤 5일 만에 태조가 신덕왕후(神德王后 이태조의 계비(繼妃) 강씨(康氏))와 더불어 왕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밤이 되자 유만수(柳曼殊)가 문을 잠그므로 우리 태종이 태조에게 비밀히 퇴출할 것을 아뢰고 김직(金直)에게 문을 열게 하여 돌아왔다. 이튿낱 왕이 노하여 김직을 가두므로 태조가 왕에게 나아가 사죄하자, 왕은 김직을 용서해 주었다.

○ 수륙군(水陸軍)에게 호패(號牌)를 휴대하도록 하였다.

○ 저폐(楮幣)를 만들었다.

 

도평의사사(都平議使司)가 상언(上言)하기를,

“우리 동방의 돈은 삼한중보(三韓重寶)ㆍ동국통보(東國通寶)ㆍ동국중보(東國重寶)ㆍ해동중보(海東重寶)ㆍ해동통보(海東通寶)가 중국의 전적(典籍)에 실려 있어 대개 상고할 수가 있었습니다. 근고(近古)에는 또 은병(銀甁)을 만들어 화폐로 삼아 포필(布匹)과 자모(子母)가 되어 함께 쓰이더니, 법령이 해이해져 동전(銅錢)과 은전이 다 폐지되어 유통되지 않게 되고 드디어는 오로지 오종포(五綜布)만이 화폐로 쓰이게 되었는데, 근래포의 올이 점점 거칠어져서 여자들이 길쌈하기만 수고로울 뿐 백성이 쓰기에는 불편합니다. 운반하려면 짐바리에 실어야 하고 쌓아 두면 쥐가 쏠아 장사치가 사용하지를 않으니 미곡 값이 등귀(騰貴)하는 이유도 대개 이 때문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은과 구리가 모두 우리 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니 동전이나 은병 같은 화폐는 갑자기 다시 통용시키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유사(有司)에 명하여 고금 제도를 참작하고 회자(會子)ㆍ보초(?)의 법을 모방하여 고려에서 통행할 저화를 제정해서 인쇄유포하여 오종포와 같이 유통하도록 하되, 백성들에게 모든 물화 및 부경(赴京) 창고에 절납(折納)할 제색(諸色) 미곡과 공납(貢納)하는 물화를 모두 이것으로 매매하도록 하고, 그 중 거친 포는 일체 거래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이에 따랐다.

○ 다시 순제(蓴堤)에 있는 물길을 팠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왕강(王康)이 의논드리기를,

“태안(泰安)의 순제성 옛자취가 지금도 군치(郡治)의 동쪽 14리 지점에 있다 아래에 예부터 물길을 냈던 곳이 있는데, 깊이 판 것이 10여 리이고 파지 못한 것은 불과 7리밖에 안 되니, 만약 파서 바닷물과 통하기만 한다면 조운(漕運)이 안흥량(安興梁) 4백 리의 험로를 건너지 않아도 됩니다.

하므로 인정(人丁)을 징발하여 팠으나 돌이 밑바닥에 깔려 있고, 또 조수가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파는 대로 메워져 공사가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 양근군(楊根郡) 대탄(大灘)에도 바위가 물 속에 가로누워 있어 파도가 몰아치면 조운선이 자주 침몰하므로 왕강이 그 바위를 뚫었으나 일을 끝내지 못하고 말았으므로 그 뒤부터는 수세가 더욱 험해졌다.

【안】 심씨(沈氏)의 《악부(樂府)》에, 왕강은 결국 혁명 후에 왕씨와 같이 멸족되었다고 하였다.

8월 원요준(源了俊)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되돌려보냈다.

○ 지진이 있었다.

○ 경도(京都 개경(開京)을 말한다)의 내성(內城)을 쌓았다.

9월 우리 태조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심덕부(沈德符)를 시중으로 삼았다.

○ 세자 석()을 보내어 명()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게 하였다.

10월 원요준에게 사신을 보내어 보빙(報聘)하였다.

○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정지(鄭地)가 졸하였다.

 

정지는 외모가 우람하며 성품이 관후(寬厚)하였다.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어 책읽기를 좋아하고 대의(大義)를 통하였으며, 집에서나 밖에서나 항상 서책을 가까이하였다. ()ㆍ초()의 옥사가 일어나 청주옥(淸州獄)에 갇혔을 때 고문을 해도 불복하고 말마다 하늘에 맹세하였는데 말뜻이 매우 강개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광주(光州)의 별장(別莊)에서 살다가 졸하니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 조반(?)의 관작을 삭탈하고 유배하였다.

 

성헌(省憲)에서 논핵하기를,

“개성윤(開城尹) 조반은 간악하고 탐욕스런 행위를 자행하여 공전(公田) 수십 결()을 임의로 빼앗았으니, 청컨대 죄를 다스리고 가산을 적몰하여 탐악(貪惡)한 무리를 징계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반이 이ㆍ초의 옥사를 일으켰기 때문에 이ㆍ초의 무리가 헌사(憲司)를 부추겨 조반을 중상(中傷)한 것이다.

○ 정도전을 나주(羅州)에 유배하였다.

 

성헌과 형조에서 상소하여 정도전을 탄핵하기를,

“정도전은 속으로는 간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충직한 체하며 국정을 더럽히니 대죄(大罪)로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왕이 공신이라고 하여 용서해 주고 그의 고향인 봉화현(奉化縣)으로 방축(放逐)하였다. 다시 논핵하기를,

“정도전은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명백하지 못한데도 외람되이 중한 관직을 받아 조정을 혼란시켰으니, 고신(告身) 및 공신녹권(功臣錄券)을 거두글 그의 죄를 밝히소서.

하였으므로 드디어 나주로 이배(移配)하였는데, 김주(金湊) 등이 또 그 아들 전농정(典農正) ()과 종부부령(宗簿副令) ()을 논박하자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남은(南誾)이 힘을 다했으나 구할 수 없자 병을 핑계하고 면직하였고, 도전은 얼마 있다가 봉화로 양이(量移)되었다.

○ 명에 사신을 보내어 화자(火者 고자(鼓子))를 바쳤다.

 

화자는 모두 20인이다. 뒤에 황제가, 왕명으로 일부러 거세당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게 하였다.

11월 권중화(權仲和)를 삼사좌사(三司左使), 성석린(成石璘)을 삼사우사(三司右使)로 삼았다.

 

권중화는 정지(鄭地)와 같이 이ㆍ초의 사건에 연좌되어 죄를 얻었었는데 이때에 와서 복직시키니, 이는 대개 우씨(禹氏 우현보를 말한다)를 복관(復官)시키려는 조짐이었다.

○ 이색ㆍ이숭인(李崇仁)ㆍ이종학(李種學)을 소환하였다.

 

왕은 평소부터 이색이 다른 혐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 여러 차례 소환하였으나 그때마다 참소하는 자들에 의해 탄핵을 받고 내쫓겼다. 이에 이르러 사람들은 이색이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 왕래하는 것을 기롱하기도 하고 또 이색을 위해 걱정하기도 하였다. 이색이 함창(咸昌)에서 돌아오는 길에 충주(忠州)에 들리자 문인(門人) 권근(權近)이 소문을 알려 주니, 이색이 말하기를,

“그것은 거짓이다. 남의 신하 된 도리는 임금의 명이 있다면 죽더라도 피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가고 오는 것을 걱정할 것인가?

하였다. 얼마 있다가 이색을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으로, 우현보(禹玄寶)를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강회백(姜淮伯)을 정당문학 겸대사헌(政堂文學兼大司憲)으로 삼았다. 이에 이색 등이 다시 등용된 것이다.

12월 명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황제가 환자(宦者) 완자독(完者篤) 등을 보내어 조서(詔書)하기를,

“삼한(三韓)에 군신의 패란이 이제 2()에 이르렀는데, 지난해에 왕씨의 후손이 임금이 되었다고 고하므르 이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고 서정(署政)을 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였다.

 

별도로 종묘 악가(宗廟樂歌)를 연습시켰다.

○ 이해에 인정(人丁)을 모집하여 수군을 만들었다.

 

도당(都堂)이 아뢰기를,

“바닷가의 인민을 불러모아 3() 1()로 삼아 수군을 만들고 제도(諸道) 바닷가의 토지에서 조세를 거두어 수군의 처자를 부양(扶養)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안】 우리 나라는 예부터 수전(水戰)이니 수군이니 하는 명칭이 없었으니 아마 이때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D-001]()은 …… 되소서 : 부귀를 누린 신하는 물러날 줄 알아야 되고 제왕은 공신을 잘 보존해야 된다는 말. 장량(張良)의 자는 자방(子房)으로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나, 천하 통일의 대업이 이루어지자 부귀 영화를 버리고 표연히 적 송자(赤松子)를 따라 떠났으므로 뒷날 한신(韓信)이나 주발(周勃)과 같은 화를 당하지 않았다. 자릉은 후한(後漢) 엄광(嚴光)의 자로, 본성은 장()이었으나 명제(明帝)의 휘()를 피하여 엄씨라 하였다. 엄자릉은 광무제 잠저시의 옛 친구로 광무가 즉위한 뒤 부름을 받고 오기는 했으나 도와 달라는 광무의 청을 뿌리치고 하룻밤을 자고 고향인 부춘산(富春山)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살다가 죽었다. 뒷날 사가들이 한 고조가 공신을 죽인 일을 폄()하고 광무가 이들을 보존한 일을 찬()하였다.

[D-002]여덟 가지 일[八事] : 공양왕이 한재가 나자 성탕(成湯)의 육사(六事)에 비겨 자책한 여덟 가지. 일관(日官)이 성변(星變)을 아뢰니 구언(求言)하는 교서에 “박덕(薄德)한 내가 덕을 닦지 않아서 상제(上帝)에게 신임을 얻지 못해서인가, 정령(政令)에 궐함이 있어서인가, 형벌과 상이 공정하지 못해서인가, 등용한 사람이 혹 사()를 따름인가, 하정(下情)이 통달되지 못하여 원통하고 억울함이 펴지지 않아서인가, 민폐가 다 제거되지 않아서인가, 재용(財用)에 낭비가 있음인가, 기이한 재주가 있으면서도 등용되지 못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배척되지 않아서인가.”의 여덟 가지이다. 《高麗史 卷四十六 世家 恭讓王二年》

[D-003]문종(文宗) 때 정한 대로 : 문종 23(1069) 정월에 행정 구역을 개편한 일. 즉 양광도(楊廣道) 소속의 한양(漢陽)ㆍ교하(交河) 등 수십 고을과, 교주도(交州道) 소속의 영흥(永興)ㆍ토산(兎山) 7개 고을과 서해도(西海道) 소속의 연안(延安)ㆍ배천(白川) 10개 고을을 떼어 경기에 소속시켰다. 《高麗史 卷五十六 志十 地理一》

[D-004]기복(起服) : 관리는 부모상을 당하면 상중에는 관직에서 물러나야 하는데, 국가에 사변이 있거나 그 사람이 아니면 처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상중일지라도 왕명에 의해 출사(出仕)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經國大典 吏典》

[D-005]해유(解由) : 관리의 물품 관리에 대한 책임을 해제하는 것. 관리가 갈려갈 때에 소관 사무의 인수 인계상 결손이 없으면 전직(前職)에 대한 재산상의 책임을 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D-006]오교 양종(五敎兩宗) : 고려 시대에 있던 불교 종파의 총칭. 신라 시대의 불교 종파로 오교 구산(九山)이 있었는데 오교는 법성(法性)ㆍ법상(法相)ㆍ화엄(華嚴)ㆍ계율(戒律)ㆍ열반(涅槃)의 교종 5파를 말하고, 구산은 선교(禪敎) 중심의 9개 절을 말한다. 그런데 고려 숙종때에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니, 이상의 오교에 1개 선종(뒤에 조계종(曹溪宗)으로 고침)을 합하여 오교 양종으로 불렀다. 이것은 조선이 건국하자 억불 정책에 의해 선()ㆍ교() 양종으로 통합되었다.

[D-007]폐위입진(廢僞立眞) : ()ㆍ창()을 신씨(辛氏)라 하여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것을 합리화시킨 말이다.

[D-008]말감(?) : 죄인을 다스릴 때 정상을 참작하여 가장 가벼운 죄를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D-009]의종조(毅宗朝)의 …… 것이다 : 의종 24(1170) 8월에 정중부(鄭仲夫)ㆍ이의방(李義方) 등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문신을 죽이고 왕을 폐한 뒤 명종(明宗)을 세운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성계 일파가 우왕 14(1388)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왕과 최영(崔瑩)을 축출한 일을 무신의 난에 비한 것이다.

[D-010]《주례(周禮)》 팔의(八議) : 종친이나 귀척은 함부로 죄줄 수 없다는 뜻. 《주례》 추관 소사구(秋官小司寇)에 “죄를 따질 때는 왕의 친척인가, 친구인가, 어진이인가, 유능한 사람인가, 공이 있는가, 귀한 이인가, 일에 부지런한 사람인가, 빈객(賓客)인가를 따져서 이러한 이들의 죄는 감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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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이색(李穡)을 명()에 보내 하정(賀正)하다 창왕(昌王) 무진(1388) 10 

 

 

 

《고려사(高麗史)》 이색전(李穡傳),

“색은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변이 있을까 두려워 태조(太祖)에게 한 아들을 데리고 가기를 청하니, 태조는 우리 태종(太宗)으로 서장관(書狀官)을 삼아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하고, 《양촌집(陽村集)》 건원릉비(健元陵碑)에 이 사실을 쓰기를,

“색()이 태조에게 ‘이제 공()이 의로운 일을 하여 중국을 높이지만, 집정(執政 태조를 가리킨다)이 친히 입조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하고 날을 택하여 경사(京師)로 가려 하니, 태조가 우리 태종을 색과 함께 입조하게 하였다.

하고, 또 제릉비(齊陵碑),

“색이 태상왕(太上王 태조를 가리킨다)에게 고하기를 ‘지금 중국과 틈이 생긴 뒤를 당하여 집정이 친히 입조하지 않으면 공의 충성이 천하에 드러나지 못할 것이다.’ 하고 날을 택하여 떠나려 하는데, 태조가 ‘내가 공과 동행하면 국사(國事)를 누구에게 맡기랴. 내가 한 아들을 골라 공을 따르게 하면 내가 가는 것과 같으리라.’ 하고 곧 우리 전하(태종을 가리킨다)를 서장관으로 충당하였다.

하였다. 만약 사책과 같다면 태조가 의심을 품지 않았겠는가? 두 비문의 말이 당시의 사정을 바로 안 것 같기에 이제 그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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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부록 하권   

 

 

태백산고(太伯山考)

 

 

 

《삼국유사(三國遺事)》에,

“태백산(太伯山)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 지금의 영변부(寧邊府)에 있다. 이다.

하였는데, 《고려사》 지리지와 《여지승람(輿地勝覽)》은 모두 그 설을 따랐다. 태백산이 묘향으로 변한 것은 그 어느 시대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 모든 산 이름은 대부분 중들이 지었으니 묘향이란 이름 또한 불가의 문자이리라.

이목은(李牧隱 목은은 이색(李穡)의 호)의 묘향산기(妙香山記),

“산은 압록강(鴨緣江) 남쪽에 있는데, 요지(遼地)와 경계가 되고 장백산(長白山)의 분맥(?)이다. 그 산에는 향나무가 많다.

하였다. 그렇다면 묘향산이란 이름은 향나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리라.

단군이 태백산 단목(檀木) 아래에 하강하였고 단()은 바로 향나무인 까닭에 후인이 그 임금을 단군이라 칭하고, 그 산을 묘향이라 부른 것이 아닐까? 《삼국사기》 최치원전(崔致遠傳)에 있는 태사(太師)에게 올린 장(),

“고구려의 잔민(殘民)이 북쪽 태백산 아래에 의거하고 국호를 발해(渤海)라 했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태백산은 지금의 백두산(白頭山)을 가리킨 것이요, 위에 말한 장백산이 바로 그것인데 단군이 하강하였던 지역이다.

【안】《여지승람》에는, 강동현(江東縣)에 대박산(大朴山)이 있고 그 아래에 큰 고총(古塚)이 있는데 세속에는 단군묘(檀君墓)라 전한다고 기록되고, 지금 그 지방 사람들이 대박산을 태백산이라고 하나, 또한 믿을 수 없다.

 

[D-001]지금의 영변부(寧邊府)에 있다 : 순암(順庵)이 주()한 것이다. 이하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