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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79권 (오관산 성등암 중창기(五冠山聖燈庵重創記)

천하한량 2007. 6. 12. 19:13

동문선 제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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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관산 성등암 중창기(五冠山聖燈庵重創記)

 

 

건문(建文) 원년 기묘년 겨울 11월 신미일에, 도승지 신 문화(文和)가 왕명으로써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 ()을 불러서 전지(傳旨)하기를, “관산 성등암은 고려 태조 왕씨가 처음 설치한 것이다. 내가 잠저(?)에 있을 때에 이 집을 신축할 것을 도모하여 이제야 완성하고 전지(田地)와 노비를 시주하였으니, 너는 이 사실을 글로 지어 영원히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 권근이 엎드려 영을 받고 물러가 삼가 암자의 옛 문헌을 상고하였다. 오관산 서쪽 봉우리에 창같이 날카롭게 우뚝하게 선 돌이 있는데 사람들이 창바위라 한다. 그 산등성이는 이리 꾸불 저리 꾸불하다가 서쪽으로 꺾여서 남쪽으로 송악산과 닿았다. 왕씨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왕도를 송악산 남쪽에 건설하였는데, 술사(術士)가 진언하기를, “창바위가 우뚝 선 곳은 지맥이 둘째 번 순룡(順龍)의 폐간에 해당되는데, 하늘을 찌르듯이 서 있으니 이것은 삼재(三災)가 일어날 곳으로, 만약 삼재를 없애려면 마땅히 석당(石憧 돌로 만된 깃대)을 세워야 한다.”고 하자, 양지쪽 벼랑의 큰 돌 위에다가 돌기둥을 사방에 벌여 세워 집모양 같이 하고,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여 창바위의 재앙을 누르고, 또 명군(明君)이 계승하고 충신이 끊임없기를 발원하였던 까닭에, 왕씨는 대대로 태부시(太府寺)에게 그 등유(燈油)를 공급하게 하였다.

치화(致和) 무진년에 시중 윤석(尹碩)은 충숙왕 당시의 정승이었고, 지순(至順) 경오년에 시중 한악(韓渥)은 충혜왕 당시의 정승이었는데, 모두 양부(兩府 문하부〈門下府〉와 밀직부〈密直府〉)의 제공(諸公)과 함게 그 기름값을 보탠 것이 시주판(施主板)에 열명(列名)하였다. 홍무(洪武) 계해년에 시중 조민수(曺敏修) 등이 또 양부(兩府)와 함께 쌀 또는 베를 내어서 그 비용을 대었는데 한산 이색(李穡)이 글을 지어 기록하였고, 첨서(簽書) 유순(柳珣) 등은 성등(聖燈)을 위해서 집을 지었다. 성등(聖燈)을 왕씨 대대로 이처럼 소중하게 취급하였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는 원량(元良)의 덕과 용지(勇智)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오직 충성과 효도로 태상왕(太上王)을 보좌하여 어려움이 많았던 나라를 널리 구제하였고, 천명에 순응하여 조선 억만 년의 왕업을 열어놓았다. 일찍이 잠저에 있을 적에 어질면서도 형장(兄長 정종)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는데, 인심이 모두 돌아왔지만 더욱 겸손한 덕을 숭상하여 실행하는 데 법도를 넘지 아니하였다. 오직 국가에 이로움이 있으면 이것을 도모하고 힘쓰셨다. 이에 무인년 초봄에 이 암자를 신축하기 시작하였다. 가을 8월에 이르러 드디어 태상왕(정종)의 명을 받들어 보위(寶位)에 나아갔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 정사와 교화를 다시 새롭게 하여 모든 치적이 다 빛나고 사방에 근심이 없었으니, 이 성등의 공효가 있었다는 것도 대개 거짓은 아니었다.

새로 지은 불당 세 칸에 새로 그린 석가 삼존(釋迦三尊)16나한(羅漢)ㆍ십대 제자(十大弟子)ㆍ오백 성중(五百聖衆)이 모여드는 화상(?)을 걸었고, 동쪽에 붙은 익랑(翼廊) 3칸은 중들이 우거(寓居)하고, 서쪽에 붙은 3칸은 부엌으로 사용한 곳이며, 5백 결()과 노비 19명을 바친 것은 성등을 계속하여 영원토록 식륜(食輪)하게 하기 위함이다. , 유신(維新)하는 조정을 만나 무릇 법사(法事)를 빛나게 하는 일이 더욱 원만하게 갖추어질 것이니, 그 국가에 이익됨은 더욱 크고 영구할 것이며, 성수(聖壽)의 장원함과 국운의 영구함이, 이 산과 이 성등과 함께 한없이 전해지고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신 권근은 공경히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아룁니다. 이달 기해일

 

동문선 제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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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사 서문[高麗國史序]

 

 

정총(鄭摠)

 

옛날 열국(列國)에는 제각기 사관(史官)을 두고 그때 일을 맡아 기록하는데 잘하고 잘못한 것을 자세히 드러내어 권장하고 징계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 나라의 승()과 초() 나라의 도올(??)과 노() 나라의 춘추(春秋)가 바로 이것이다. 고려씨(高麗氏)가 그 시조 때부터 역대로 모두 실록(實錄)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글이 전쟁을 거친 뒤에 나와 없어지고 잘못된 곳이 많았다. 공민왕 때에 와서 시중(侍中)으로 치사(致仕)한 이제현(李齊賢)이 사략(史略)을 짓는데 숙왕(肅王)에서 끝냈고, 흥안군(興安君) 이인복(李仁復)과 한산군(韓山君) 이색(李穡)이 《금경록(金鏡錄)》을 짓는데 정왕(靖王)에서 끝냈으니, 모두 너무 소략하였고 그 외에는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없다. 우리 국왕 전하가 즉위하신 처음에 판삼사사(判三司事) () 정도전(鄭道傳)과 신() 정총(鄭摠) 등에게 명령하여 고려국사를 찬술하라고 하였다. 신 등이 이 명령을 받고 몹시 걱정이 되어서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본래 자질이 용렬하고 못났으며 재주도 삼장(三長) 삼장(三長)이 없는데다가 기록되어 있는 것도 완전하지 않으니, 아무리 연구하여 잘 절충하려하나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이치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 다를 것이 없으니, 다 없어지지 않고 다행히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의리(義理)로 따져서 이끌어 펴고 비슷한 일을 확충시키면 그 시비득실을 대부분 다 알 수 있으니, 이 때문에 재주도 없고 학문도 변변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곧 착수한 것이다. 삼가 살펴보건대, 원왕(元王) 이상은 참람한 기록이 많으니 지금 그전에 종()이라 했던 것은 왕()으로 하고, 절일(節日)이라 했던 것은 생일(生日)로 하고, ()는 교()로 하고, ()은 여()로 한 것은 명분을 바르게 한 것이요, 조회와 제사는 보통 일이기 때문에 조회에 연고가 있으면 기록하고 임금이 친히 제사지내는 것을 기록하는 것은 예()에서 삼가는 것이요, 재상의 제배(除拜)를 기록한 것은 그 책임을 중하게 여긴 것이요,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 뽑은 것을 기록한 것은 어진 사람을 찾는 것을 중하게 여긴 것이요, 대간(臺諫)이 복합(伏閤)한 것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이 빠졌어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충신을 나타낸 것이요, 상국(上國)의 사신이 왕래한 것은 아무리 자주 있어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천왕(天王)을 높인 것이요, 천재지변과 수해와 한해(旱害)는 아무리 피해가 작아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하늘의 꾸짖음을 근신한 것이요, 사냥하고 잔치한 것은 아무리 자주 있어도 반드시 기록한 것은 멋대로 노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삼가 생각해 보건대, 국왕 전하는 성스럽고 슬기로운 자질과 높고 밝은 학식으로 옛 전적을 강구하고 연마하여 행동이 예전 명철한 제왕을 본받으시는데 이 책이 유실되고 소략한 속에서 뽑아낸 것이니, 임금과 신하의 어질고 어질지 못한 것과, 정치 교화의 득실과 예악의 연혁과 풍속의 좋고 나쁜 것을 구비하여 기록하지는 못하였으나, 《시경(詩經)》에 ‘은나라의 거울이 멀지 않다. 하후(夏后) 시대에 있다.’ 하였으니, 대개 귀와 눈으로 듣고 본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중요한 정무를 보시는 여가에 보시면 선악취사의 단서와 정사를 하며 백성 다스리는 도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있을까 합니다.

 

 

[D-001]삼장(三長) : 역사가가 되는데 필요한 세 가지 장점. 재지, 학문, 식견을 말함.

동문선 제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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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교고려사서(?校高麗史序)

 

 

사법(史法)이 생긴 지 오래되었다. 당우(唐虞) 시대부터 벌써 그러하였으니, 여러 책을 상고하면 알 수 있다. 여러 나라 사관들이 각각 그 시대의 일을 기록해 놓으면, 뒤에 찬술하는 사람이 상고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를테면 한 태조(漢太祖)가 관중(關中)에 들어가서 소하(蕭何)를 시켜 진 나라 서적을 거둬들이게 하고, 당 태종(唐太宗)이 즉위하면서 위징(魏徵)에게 명령하여 《수서(隨書)》를 짓게 하였다. 이는 전대(前代)의 흥망성쇠한 연유를 거울삼아 후세의 임금에게 선악의 본보기가 되게 한 것이니, 이른바 나라는 없애도 역사는 없앨 수 없다는 것이 어찌 미덥지 않은가.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가 개국하던 시초에 바로 봉화백(奉化伯) () 정도전(鄭道傳)과 서원군(西原君) 신 정총(鄭摠)에게 명하여 고려국사를 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각 조정의 실록과, 검교시중(檢校侍中) 문인공(文仁公) 민지(閔漬)의 《강목(綱目)》과, 시중(侍中)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과, 시중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에서 뽑아내어, 좌씨(左氏)의 편년하는 법을 모방하여 3년 만에 끝마쳤는데, 37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글에 잘못된 대목이 많고 범례(凡例)의 경우 원종(元宗) 이상은 참람되게 해 놓은 일이 많다 하여 군데군데 고친 것이 있다. 우리 주상 전하는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전적(典籍)에 깊은 관심을 두시어 지금 의정부 우의정 신 유관(柳觀)과 예문관 대제학 신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다시 더 대조해서 그 잘못된 곳을 교정하게 하였다. 영락(永樂) 21 11 28일에, 신 유관은 아뢰기를, “전조(前朝)에서 태조 이하는 모두 종()이라 하였으니 참람한 것입니다. 그러나 혜종(惠宗)ㆍ정종(定宗)은 모두 묘호인데, 지금 새로 만든 역사서에서 혜왕(惠王)ㆍ정왕(定王)이라 고쳐 묘호를 시호로 만든 것은 그 진의(眞意)와 틀린 듯하오니, 실록(實錄)에 의거하여 태조는 신성왕(神聖王)이라 하고 혜종은 의공왕(義恭王)이라 하며, 정종 이하는 모두 본래 시호대로 쓰면 거의 사실에 거짓이 없을까 하옵니다.” 하였다. 이날 신 윤회가 경연에 모시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주상의 말씀을 받들었는데, 이르기를, “공자의 《춘추》는 임금의 권위를 가탁하여 일왕(一王)의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 나라ㆍ초() 나라가 참람되게 왕이라 칭한 것은 깎아내려 자()라 기록하고, ()에 모(? 상사(喪事)에 부의하는 물건)를 보내는 것이 풍습이 되고, 왕을 천왕(天王)이라 하지 않았기에 고칠 것은 고치고 없앨 것은 없애며 줄 것은 주며 빼앗을 것은 빼앗은 것이, 성인의 마음으로 결정한 것이다. 지금 붓을 잡는 사람은 성인이 고치고 없앤 뜻은 알지도 못하고, 다만 사실에 의거하여 바로 써서 포폄이 저절로 나타나면, 넉넉히 후세에서 믿게 될 것이니, 반드시 전대의 임금을 위하여 그 실상을 숨겨 주려 하지 않으며, 경솔히 개정하여 진면목을 상실한 것이 있다. 그 종()을 고쳐 왕이라 한 것은 실록에 있는 대로 따르고, 묘호나 시호에 있어서도 그 사실을 없애지 말 것이며, 범례를 고치는 것도 여기에 의거하라.” 하였다. 신 등이 삼가 밝은 명을 받들고 곧 원종 이상의 실록을 가져다가 새로 만든 역사서와 비교하여 종()을 고쳐 왕으로 하고, 절일(節日)을 생일(生日)로 하며, ()를 교()로 하고, ()을 여()로 하고, ()를 유()로 하고, 태후(太后)를 태비(太妃)로 하며, 태자를 세자로 한 것 같은 따위는 당시 실록에 있는 옛글에 따라서 다시 편찬을 마치니, 사적이 대략 완전하게 되어 환하니, 권장하고 중계하는 것은 이 책을 펴면 여기서 볼 수 있다. 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사마자장(司馬子長)은 세상에 뛰어난 문장을 가지고, 석실(石室)의 글을 주워 모아서 《사기》 1 30편을 지었는데, 그 억누르고 찬양하고 버리고 취한 것이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나, 반드시 저소손(?少孫)이 그 빠진 것을 보충하고, 사마정(司馬貞)이 그 틀린 것을 바로잡은 뒤에야 그 글이 비로소 완비되었으니, 사마자장(司馬子長)으로서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라면 어찌 잘못된 곳을 고치고 틀린 대목을 바로잡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으랴. 사기란 짓기도 어렵고 대조해 교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이러하다. 전하의 장래를 위하는 생각이 깊어, 직접 명하시는 말씀이 성스러운 마음으로 홀로 판단한 데서 나왔으니, 그 명백하고 정대한 것은 보통 사람의 얕은 소견으로써는 그 원대한 의사를 측량할 수 없다.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글로 써서 책 위에 붙이고 뒷날의 군자에게 알리노니, 이 글을 보는 사람은 더욱 자세히 보아야 한다.

 

동문선 제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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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 사자 명자 설(韓氏四子名字說)

 

 

한첨서(韓簽書) 공이 그 네 아들의 이름을 짓고 또 자()를 지었다. 옛사람은 아들을 서로 바꾸어서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친구인 한산(韓山)의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그 의의를 설명하라 하였다. ()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상환(尙桓)에 대하여 서경에 이르기를, “씩씩함〔桓桓〕을 숭상한다.” 하였으니, 용기를 내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이다.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용기가 앞서는 것이다. 《중용(中庸)》에서는 지()ㆍ인()ㆍ용()을 세 가지의 통용할 수 있는 덕이라하여 용기를 그 끝에 두었으나, 지혜와 인을 극치에 도달하게 하며,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유지하며 모든 물건을 육성시키게 하는 힘은 용기이다. 지혜는 용기가 아니고서는 선택하지 못할 것이고, 인도 용기가 아니면 지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굳세도다, 씩씩함이여.” 라는 말로 이를 찬미하였다. 상환(尙桓)에게 백환(伯桓)이라고 자를 지은 것에 대하여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상질(尙質)에 대하여는 그 근본을 알아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논어》에 이르기를, “문채가 바탕을 이기면 너무 화려하고, 바탕이 문채를 이기면 너무 속되다.” 하였다. 바탕은 꾸밈새의 근본이다. 그런데 꾸밈새가 너무 지나친 지가 오래되었다. 온화한 미와 충신한 독실함이 없어지고 드러나지 않아, 비록 좋은 바탕이 있을지라도 다같이 타락하여 유행하는 세속에서 헤어나는 사람이 없으니, 꾸밈새의 폐해가 극단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오직 꾸밈새만을 숭상하여 혹은 그 근본은 잃어버리고 그 지엽적인 것만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바로잡는 방법은, 비록 한쪽으로 치운친 듯 하더라도 바탕을 중히 여기는 것이 낫다. 상질의 자를 중질(仲質)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상경(尙敬)에 대하여는 그 마음속에 주장하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여, 3백 가지의 예의(禮儀) 3천 가지의 예모(禮貌)에 대하여 공경이라는 말을 첫머리에 두었으니, 곧 요전(堯典)에서 ‘공경한다’는 말을 먼저 쓴 것과 같은 뜻이다. ()를 배우는 사람은 공경함에서 출발하여 뜻을 진실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에 이르며, 정치하는 사람은 공경함에서 출발하여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것이다. 부부간에 서로 공경한 사실을 역사에서 또 이를 기록하였으니, 농사를 짓는 들판에서도 공경이 없어서는 안될 터인데, 하물며 조정과 향당에서이겠으며 하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이겠는가. 하늘을 섬기며 천제께 제사를 지내 사방의 신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상경의 자를 중경(仲敬)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상덕(尙德)에 대하여는 마음으로 힘써 잃지 않기를 강조하였다. 《서경》에 이르기를, “능히 덕()을 밝힌다.” 하였다. 사람이 하늘에서 타고나서 모든 이치를 갖추고 모든 일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본래부터 타고난 선()이다. 기질이 이를 구속하기도 하며 물욕이 이를 가리우기도 하니, 여기에서 그것을 잃게 된다. 이것을 하늘에서 타고나서 이것을 자기에게서 잃어버리니, 그러므로 이를 허위(虛位)라 한다. 그러나 그 본연의 자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순간적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굳게 지키며 이것을 확충시키는 것은 곧 나에게 있는 것이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낳을 때부터 갖추어있는 것이 덕이고, 잃었다가도 다시 찾는 것이 덕이다. 상덕(尙德)의 자를 계덕(季德)이라 하였으니 그 의의를 생각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으로 그 본뜻을 전일하게하며, ()로 근본을 삼으며, ()으로 주장을 삼으며, ()으로 그 하늘에서 타고난 것을 지키면, 한씨(韓氏)의 형제는 곧 그 선조에 대하여 욕됨이 없을 것이다. 부디 노력할지어다. 부디 노력할지어다.

 

 

[D-001]한첨서(韓簽書) : 첨서는 벼슬 이름. 곧 한 수(韓脩). 자는 맹운(孟雲), 호는 유항(柳巷)이며 벼슬이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에 이르렀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으로 상당군(相當君)에 봉하였고 특히 글씨에 뛰어 났음.

[D-002]공경한 사실 : 춘추시대 희공(僖公) 33년에 진()의 각결(?)이 들에서 밭을 매는데 그 아내가 점심을 가져왔다. 각결은 그 아내를 대하기를 손님처럼 공경하였으므로 지나다가 이것을 본 구계(臼季)라는 사람이 그를 진문공(晋文公)에 추천하여 대부(大夫)를 삼았다.《좌전》

[D-003]허위(虛位) :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도와 덕은 빈 자리이다〔道與德爲虛位〕.”라 한 것을 가리킴.

동문선 제110   

 

 

 제문(祭文)

 

 

양촌 선생 권공을 조상하는 글[祭陽村先生權公文]

 

 

하륜(河崙)

 

()에는 고금의 구별이 없어 사람으로 말미암아 밝혀지는데, 도를 밝히는 사람은 시대마다 항상 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같은 큰 나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 나라 같은 작은 한 지방이겠습니까. , 오직 양촌은 하늘이 특히 내신 어진 이로서, 타고난 자질은 순수하고 학문은 일찍 성취하였습니다. 온화하고, 공순하고,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오직 덕스러운 행실뿐이었습니다. ()ㆍ맹()의 가르침의 미세한 뜻과, ()ㆍ주()의 격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노력을 포개어 쌓게 하여, 그 근원을 궁구(窮究)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입학도설(入學圖說)과 변례의 논[辨禮之論]은 심오한 뜻을 개발하여 성문(聖門)에 공이 있었으며, 사업에 베풀어 강상(綱常)을 잘 비익(稗益)하였고, 문자로 저술하여 전장(典章)을 빛나게 하였습니다. 행실을 바르게 하여 평온한 때나 위태로운 때나 다르지 않았으며, 지조를 확고하게 지켜서 처음이나 끝이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면, 기유년에 나는 처음으로 그대를 알게 되었습니다. 초ㆍ목(樵牧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과 목은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함께 장차 이름 있는 인물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경오년을 만나 같이 남쪽의 변방으로 귀양살이를 갔더니, 상당(上黨 청주(淸州))의 비와 홍수는 하늘의 뜻을 크게 드러냈습니다. 을해년이 되어서, 우리가 함께 명() 나라의 고황제(高皇帝)를 가 뵈었을 때는 고황제는 우리 나라의 차서를 올려 입대(入對)를 허락하였습니다. 휘황한 황제의 지척에서 그대의 말은 곧고 사리는 순정(順正)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명 나라의 오해를 풀어서 우리 나라의 국세가 창성하게 되었습니다. 경진년에 이르러 함께 금상 전하(태종(太宗))를 추대하였습니다. 훈맹(勳盟)에 참여하고, 묘당(廟堂)에 출입하게 되었으니, 일생 동안 벼슬하고 물러남이 대개 서로 같았습니다. 벗으로서 절차(切磋)의 유익함을 얻는 것을 매양 충심으로 다행하게 여겨 왔습니다. 그대의 나이는 나보다 6년이 적었으나 그대의 아는 것은 실로 나의 선배였습니다. 나의 머리털은 이미 희어졌으나, 그대의 머리털은 아직 검기에 마땅히 장차 크게 일하여 나라를 태평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더니,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세상을 버리시다니. 임금이 슬퍼하고 나라 사람들이 슬퍼하는 바는, “장차 국가의 의심나는 일을 누구에게 물으며, 나라의 병폐는 누가 고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고루한 내가 허물이 있을 때 누가 바로잡아 주겠습니까. 가득한 술잔이 보잘 것 없으나, ()은 가이 없습니다. 슬프다, 흠향하소서.

 

동문선 제120   

 

 

 비명(碑銘) 권근

 

 

유명 시 강헌 조선국태조 지인계운 성문신무대왕 건원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諡康獻朝鮮國太祖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建元陵神道碑銘幷序)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봐 다스리는 운수를 열어 주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특이한 징조를 나타내어 그 임금이 될 징조를 보이는 것이니, () 나라에서는 현규(玄圭) 를 준 일이 있었고, () 나라에는 협복지몽(協卜之夢)이 있었다. () 나라를 거쳐서 그 이후로 어느 왕조에서나 각각 다 이러한 징조가 있었으니, 다 하늘이 준 것이고 사람의 모책에서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공훈과 덕이 이미 높았으며 부명(符命) 또한 현저하였다.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 금으로 만든 자)을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며 말하기를, “공은 마땅히 이것을 가지고 나라를 바로잡으리라.”고 한 일이 있다. 하 나라의 현규(玄圭)와 주 나라의 꿈과 더불어 같은 부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인(異人)이 문에 와서 편지를 올리며 말하기를, “지리산의 바윗사이에서 얻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글에는 ‘나무 아들이 삼한(三韓)을 고쳐 바로잡는다.[木子更正三韓]’라고 써 있었다. 사람을 시켜 나가 맞으려하니, 이미 가벼렸다. 그리고 서운관(書雲觀)에 예전부터 비장하여 오는 비기(秘記)의 구변진단지도(九變震檀之圖),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라는 말이 있다. 조선을 진단(震檀)이라고 하는 설이 수천 년 동안 떠돌았는데 이제야 특별히 증험되었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 돕는다는 것이 진실로 징험이 있는 것이다.

신이 삼가 선원계보(璿源系譜)를 상고하여 보니, 이씨는 전주(全州)의 망족(望族)이다. 사공(司空)은 휘가 한()인데 신라에 벼슬하였고,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6대 손 긍휴(兢休)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고, 13대에 이르러 태조 임금의 고조(高祖)인 목왕(穆王)은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四代)에 걸쳐 습작하여 모두 다 능히 잘하였다. 원 나라의 정치가 쇠퇴하게 되니, 황고(皇考)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 공민왕을 섬기었다. 지정(至正) 신축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침략하여 왕경(王京)을 함락시키니, 공민왕이 남쪽으로 옮겨 가 군사를 보내어 싸워 이겨서 수복하였는데, 우리 태조께서 맨 먼저 승첩의 보고를 올리었다. 다음해 임인년에는 오랑캐 납합출(納合出)을 쳐서 달아나게 하였고, 또 그 다음해인 계묘년에는 위왕(僞王) 탑첩목(塔帖木)을 물리쳐 쫓으니, 공민왕이 믿고 의지함이 더욱 두터워졌다. 여러 번 벼슬이 승진되어 장()ㆍ상()에 이르게 되어 안팎을 드나들었다. 《경서》와 《사기(史記)》를 보고 힘써 노력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세상을 구제할 도량과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지성(至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민왕이 훙()하고 다른 성()이 왕위를 절취하니, 권력 있는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 나라의 정치를 탁란하게 하고, 바다의 도적이 나라 안에 깊이 들어와 군()ㆍ현()에 불지르고 약탈하곤 하였다. 홍무(洪武) 경신년에 우리 태조가 운봉(雲峰)에서 싸워 이기니, 동남쪽이 편안하게 되었다.

무진년에 시중 최영(崔瑩)이 권간들을 베고 무찌를 때,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우리 태조에게 의뢰하여 삶을 보전한 자가 자못 많았다. 최영이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 우군도통(右軍都統)의 절월(節鉞)을 주어서, 억지로 요동(遼東)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威化島)에 머무를 때, 앞장서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바른 도리를 지켜 깃발을 되돌리었다. 군사들이 이미 언덕에 올라갔을 때, 큰 물이 섬을 삼켜 버리니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최영을 잡아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그 대신 이름난 유학자(儒學者) 이색(李穡)을 좌시중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간들은 국정을 탁란하게 하고, 미치고 패려한 자들이 서로 모함하여서 위망(危亡)의 형세가 급급하니, 화란을 예측할 수 없었다. 우리 태조의 전이(轉移)하는 힘이 아니었다면, 온 나라가 위태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색이 말하기를, “이제 공이 의로운 일을 거사하여 중국을 높였으니, 집정대신(執政大臣)이 친히 입조(入朝)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날을 정하여 명 나라 서울에 가게 하였다. 태조는 여러 아들 중에서 지금의 우리 주상전하를 골라서 색()과 함께 가서 조현(朝見)하게 하니, 고황제(高皇帝)가 칭찬하고 돌려보냈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가 우리 나라에서 다른 성()의 사람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문책하여 왔으므로, 태조가 여러 장군과 재상들과 함께 왕씨(王氏)의 종친인 정창군(定昌君) ()를 세우고 정성을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였다. 사전(私田)의 제도를 폐지하고 쓸데없는 관원을 도태하니, 민중의 마음이 서로 즐거워하였다. 공이 높아지니 시기하는 자가 생겨서 참소와 간악한 모함이 번갈아 모함하게 되어, 정창이 자못 이에 의혹되었다. 태조는 벼슬이 성대하므로,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사퇴함을 얻지 못하였다. 그때 마침 서행(西行)으로 인하여 병을 얻어 돌아오니, 모함하는 자들의 음모가 더욱 급격하게 되었다. 전하(태종을 가리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변고를 억제하니, 여러 가지 모함이 와해되었다.

홍무(洪武) 임신년 가을 7 16일에, 전하가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ㆍ조준(趙浚) 52명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태조를 추대하니, 신료와 부로들도 모의함이 없이 모두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태조가 정변(政變)을 듣고 놀라 일어나 두 번 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어쩔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마루의 섬돌을 내려 오지 않은 채 한 국가가 저절로 이루어졌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계도하여 도움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 신 조반(?)을 보내어 알리니, 중국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삼한의 백성들이 이미 이씨를 높였으며, 백성들에게는 병화가 없고 사람마다 제각기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상제의 명이라고 하겠다.” 하였다. 이어서 또 칙명이 있어 이르기를, “나라 이름은 무엇이라고 고치려 하는가.” 하였다. 즉시 예문관 학사 신 한상질(韓尙質)을 보내서 주청하니, 황제가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에 근본하여 이름 지음이 좋겠다. 하늘에 본받아 백성을 길러서 길이 후세 자손에 이르도록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우리 태조의 위엄이 명성과 의로움과 열렬함이 위에 들려 황제의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청명(請命)하면 문득 윤허를 얻게 된 것이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3년이 지난 갑술년 여름에, 우리 나라를 황제에게 무함한 자가 있어서, 황제가 임금의 친 아들을 입조(入朝)시키라는 명령이 있었다. 태조는 지금의 우리 전하가 경서에 능통하고 사리에 통달하여 여러 아들들 중에서 제일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도착하여서 진술하는 의견이 황제의 뜻에 맞으니, 예로써 우대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그 해 겨울 11월 한양에 수도를 정하였다. 궁궐을 짓고 종묘를 세웠으며, 일찍이 사대(四代)를 추존하여, 황고조(皇高祖)를 목왕(穆王), 배위(配位) 이씨(李氏)를 효비(孝妃)라 하고 황증조(皇曾祖)를 익왕(翼王), 배위 최씨를 정비(貞妃)라고 하였으며, 황조를 도왕(度王), 배위 박씨를 경비(敬妃)라 하고, 황고(皇考)를 환왕(桓王), 배위 최씨를 의비(懿妃)라고 하였다. 예악을 닦고 제사를 삼가며, 관복의 제도를 정하여 위의(威儀)의 등차를 구분하고, 학교를 일으켜서 재주 있는 자를 육성하며, 봉록을 후하게 하여 선비들을 권장하였다. 소송을 밝게 분별하여 바르게 판결하며 수령들을 뽑는 데 신중하게 하였다. 좋지 못한 정치는 모두 고치니, 여러 가지 공적은 밝게 빛났다. 바다의 왜구들이 와서 복종하고, 온 나라 안은 편안하게 되었다. 우리 태조의 높고 큰 성덕(盛德)은 정말 하늘이 주신 용기와 지혜이니, 총명하고 신무(神武)하고 영웅스럽고 위대한 임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이 표전(表箋) 때문에 황제의 조정에 견책을 받게 되자,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려고 음모하여 무인년 가을 8월에, 우리 태조가 병중인 틈을 타서 어린 얼자(?)를 끼고 제 뜻을 제멋대로 펴보려고 하였다. 전하가 그 기미를 밝게 살피어 남김없이 제거하고, 적장자(嫡長子)인 지금의 상왕(上王)을 세자로 세울 것을 청하였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아니하므로 지금의 상왕(정종〈定宗〉)에게 선위(禪位)하였다. 상왕은 후사가 없고, 또 나라를 열고 사직을 정한 것은 다 우리 전하의 공적이므로 전하를 세자로 책립하였다. 경진년 7월 기사일에, 태조에게 계운신무태상왕(啓運神武太上王)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겨울 11월 계유일에는 상왕 또한 병 때문에 우리 전하에게 선위하였다.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명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황제의 인이 찍힌 조서를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으로 책봉하고, 이어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룡포와 면류관 아홉 벌을 하사하니, 품수가 친왕(親王)과 비등하였다. 우리 전하가 양궁(兩宮)을 봉양함에 정성과 공경함을 지극하게 갖추었다.

영락(永樂) 무자년 5 24일 임신년에 태조가 승하하시니, 춘추가 74세이며 재위 7년이고, 늙어서 정사를 보지 아니한 것이 11년이었다. 활과 칼을 갑자기 버리니,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는 애모함이 망극하였으며, 거상의 예를 극진히 하였다.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조에게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이 해 9 9일 갑인일에, 도성의 동쪽 양주(楊州)의 치소소재지(治所所在地)의 검암산(儉巖山)에 장사하였다. ()을 건원릉(健元陵)이라고 하였다. 부고를 듣고 명 나라의 황제는 매우 슬퍼하여 정무를 보지 아니하였다. 즉시 예부 낭중(禮部郎中) 임관(林觀) 등을 파견하여 태뢰(太牢 나라의 제사에 소를 통째로 바치는 제물)를 써서 사제(賜祭)하니, 그 제문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은 밝고 통달하며 선을 좋아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왔으며, 공경히 천도에 순종하고, 근신한 마음으로 사대(事大)하였으며 한 나라의 백성들을 보휼하니, 우리 황고(皇考)께서 깊이 충성을 가상하게 여겨 다시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내렸다. 왕의 공덕이 드러남은 비록 고대 조선의 어진 임금일지라도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 하였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강헌(康獻)이라 하였다. 또 전하에게 조칙을 내려 부의(賻儀)를 내림을 특별히 후하게 하였다.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더할 수 없이 갖추어져서 유감됨이 없었다. 대체로 우리 태조가 하늘을 두려워하는 정성과 전하의 그 뜻을 잇는 효도가 전후에 서로 이어져서, 하늘의 마음을 잘 누리었으므로, 국말 국초(國末國初)의 즈음에 크게 하늘과 사람이 위와 아래에서 돕는 일이 이처럼 지극함을 얻은 것이니, , 위대하도다. 운운.

신은 역대의 천명(天命)을 받아 창업한 임금을 보니, 덕과 사업의 성대함과 부명(符命)의 신기함이 사기(史記)에 빛이 나서 광채를 흘려 보냄이 끝이 없다. 이제 우리 조선이 탄생하여 일어나니, 성대한 덕과 큰 부명이 옛보다도 광채가 난다. 이는 마땅히 이미 그 왕위를 얻고 또 그 장수를 얻을 것이며, 넓은 터전을 높게 하여 큰 복조를 흘려 보내니, 하늘과 땅과 더불어 장구하리라. 신 근()이 외람되게 비명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감히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덕을 펴서 기술하여 밝은 빛을 후세에 드리우게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러나 신의 글재주가 비졸하여서 크고 아름다움을 드러내 선양하여서 밝은 뜻을 만족하게 칭송하기에 부족하므로, 다만 삼가 사람들의 귀와 눈에 남아 있는 공훈과 덕택만을 찬술하고, 감히 손으로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명을 드린다. 그 글은 이러하다.

 

하늘이 이 백성 낳으시고 / 天生斯民

사목(임금)을 세워 / 立以司牧

길러서 키우며 다스리게 하실 제 / ??

덕 있는 이는 사랑하시고 돌보시네 / ?眷有德

하늘이 또박 또박 말하지는 않건마는 / 非天諄諄

명령은 혁혁하게 나타나 있나니 / 有命赫赫

우 임금은 현규를 주고 / 禹錫玄圭

주 나라 꿈은 협복일세 / 周夢?

우리 조선은 / 惟我朝鮮

왕업 터전 닦으실 제 / 肇基王迹

신인이 꿈속에서 / 夢有神人

금척을 주셨다 / 授以金尺

부록이 먼저 정하니 / ?前定

하늘 뜻 분명하네 / 天心昭?

고려의 운수 이미 종말이라 / 麗運旣終

임금은 혼암하고 정승은 포학하여 / 君昏相酷

농사철에 출병하여 / 農月興師

큰 나라에 싸움 걸었도다 / 大邦構隙

우리 태조 의를 지켜 가던 깃발 되돌리니 / ?義旋

죄인들 복죄하였네 / 罪人斯得

충성이 위로 들려 / 忠誠上聞

황제가 기뻐하였네 / 帝心載?

천운은 돌아오고 / 歷數有歸

민정은 절박하여 / 輿情斯迫

위대한 왕업 이미 이룩하였으나 / 大業旣成

저자의 상인들도 동요하지 않았도다 / 市肆不易

명 나라 고황제가 찬탄하여 이르기를 / 高皇曰咨

그대가 나라를 이룩하였으되 / 惟爾有國

백성들은 병화가 없고 / 民無兵禍

하늘이 주는 기쁨 즐기네 하시고 / 樂天之樂

이어서 조선이란 / 繼賜國號

옛 국호를 다시 내렸도다 / 朝鮮是復

지리를 살펴 도읍을 정하니 / 相地定都

한강의 북쪽이라 / 于漢之北

범이 웅크린 듯 용이 도사린 듯 / 虎踞龍蟠

왕기가 쌓였도다 / 王氣攸積

궁궐은 높고 높으며 / 宮室崇崇

종묘는 우뚝하네 / 宗廟翼翼

어진 마음 매우 깊어 살리기를 좋아하며 / 仁深好生

정치는 아름답고 생각은 화순하여 / 冶蔚思輯

백 가지 제도가 갖추어 닦아지고 / 百度具修

만 가지 왕화는 흡족하게 되었네 / 萬化斯洽

근정하시기에 지치셔서 / ?倦于勤

맏아들에 전하시니 / 傳付聖嫡

맏아들은 이어 공적이 있는 이에게 사양하여 / ?讓于功

부자와 형제간에 계승하였네 / 惟世惟及

밝고 밝은 우리 임금 / 明明我后

조그마한 조짐도 반드시 살피시어 / 有幾必燭

두 번 화란을 평정하니 / 禍亂再平

그 경사 지극히 돈독하네 / 其慶克篤

개국하고 정사한 것 / 開國定社

모두 우리 전하의 공적이니 / 咸我之績

대명은 사양하기 어렵고 / 大命難辭

신성한 큰 그릇 제대로 의탁되었도다 / 神器有托

두 임금 정성껏 봉양하니 / 祇奉兩宮

공손하고 더욱 정성스러웠도다 / 虔恭愈恪

효도와 우애가 신에게 통하여 / 孝弟通神

상제의 돌보심이 더욱 두터웠네 / 帝眷尤渥

태상왕의 상을 만나 근심에 잠긴 마음 / 遭喪??

슬퍼하고 사모하여 몸부림쳐 울부짖었네 / 哀慕踊?

황제가 부고 듣고 매우 슬퍼하시며 / 帝聞震悼

사자를 보내 조곡하고 / 遣使弔哭

태뢰를 써서 제사하며 / 太牢有祀

부의를 후하게 하라 칙명내리고 / 厚賻有?

시호를 주어 칭찬하니 / 美諡褒嘉

조상하는 예법이 완전하게 갖추었네 / 恤典備飾

하늘의 도우심이 / 自天佑之

시종일관 변함없어 / 終始不?

큰 복조 길이 이어지고 / 景祚??

자손은 천억으로 번창하며 / 子孫千億

종사가 유구하여 / 宗祀悠長

하늘과 더불어 다함이 없으리라 / 與天罔極

 

 

 

[D-001]현규(玄圭) : ()은 하늘 빛이요 규()는 큰 홀()이다. 예전 우임금에게 요임금이 이 현규를 하사하였는데, 그것이 하늘 아래의 모든 것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D-002]협복지몽(協卜之夢) : 문왕(文王)이 사냥 나갈 때에 꿈꾼 것을 점쳐서 강태공(姜太公)을 얻어 그의 힘으로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이 꿈을 말함.

동문선 제120   

 

 

 비명(碑銘) 권근

 

 

유명조선국 승인 순성 신의왕후 제릉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承仁順聖神懿王后齊陵神道碑銘 幷序)

 

 

옛날부터 제왕이 천명을 받고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후비(后妃)의 현명함에 힘입어서 덕()을 같이하고 경사를 길러서 그 서업(緖業)을 길게 하였다. () 나라의 우() 임금은 도산(塗山)의 여자가 있어서 계()가 능히 계승하게 되었고, () 나라에는 태사(? 주문왕(周文王)의 비() 무왕(武王)의 어머니)가 있어서 무왕(武王)이 큰 업을 받들 수 있었으니, 하우씨(夏禹氏)와 주 문왕(周文王)의 하늘과 짝할 만한 종사(宗祀)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거룩하도다.

우리의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타고난 자질이 맑고 의젓하며 부덕(婦德)은 유순하고 정숙하였다. 일찍이 태조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시집가서 태조를 도와 왕업을 이루게 하고, 착하고 어진 아들을 낳아 왕통(王統)을 무궁하게 드리우게 하였으니, 신성한 공과 떳떳한 법이 옛날의 착한 후비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큰 훈업이 금방 이루어지려 할 때에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태상왕이 나라를 창업하였으나 왕비로 높일 수 없었으며 두 착한 아드님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그 영화스러운 봉양을 할 수 없었다. 산릉(山陵)이 빛남을 가리워서 서리와 이슬이 슬픔을 더하게 한다. , 슬프다. 처음의 시호는 절비(節妃)이며 능호는 제릉(齊陵)이다. 신의왕후라는 시호를 더하고 인소전(仁昭殿)을 두어 진용(眞容)을 봉안하였으니, 추후(追後)하여 높이는 예전(禮典)은 이미 갖추어 거행되었다.

우리의 주상전하께서 어머니의 모습이 영원히 사라질 것을 아프게 생각하고 효도를 펼 길이 없어서, 이에 주무관(主務官)에게 명령하여 큰 비석을 새기게 하고, 신 근()에게 명령하여 비문을 지어 길이 뒷세상에 보이게 하도록 하였다. 신 근은 명령을 받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상고하여 보건대, ()의 성은 한씨(韓氏), 안변(安邊)의 세가(世家)이다. 아버지의 휘는 경()이니 충성공 근 적덕육경 보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영문하부사 안천부원군(忠誠恭謹積德毓慶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門下府事安川府院君)을 추증하였고, 조고(祖考)의 휘는 규인(珪仁)이니, 적선육경 동덕찬화 익조공신 특진보국숭록대부 문하좌정승 판도평의사사 겸판이조사 안천부원군(積善毓慶同德贊化翊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判都評議使司兼判吏曹事安川府院君)을 추증하였고, 증조(曾祖)의 휘는 유()이니 증 순성적덕좌 명보리공신 숭정대부 문하시랑 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겸 판호조사 안원군(贈 純誠積德佐命輔理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兼判戶曹事安原君)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신씨(申氏)이니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추봉하였는데, 병의육덕보조 공신숭정대부 문하시랑 찬성사 동판도평의사사 판형조사(秉義毓德輔祚功臣崇政大夫門下侍郞贊成事同判都評議使司判戶曹事) 원려(元麗)의 딸이다. ()께서는 나면서부터 맑고 상냥하며 총명하고 지혜 있음이 비범하였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자 배필을 선택하여 우리 태상왕에게 시집왔다. 태상왕이 그때에 장군이 되고, 정승이 되어 수십 년 동안을 드나들면서 싸우느라고 편안한 해가 없었는데, 후는 능히 힘을 다하여 가사를 경영하여 남편의 성공을 권면(勸勉)하였다. 또 성품이 질투하지 아니하여 첩과 시녀들을 예로써 대우하였다. 많은 아들들을 두었는데, 올바른 도리로써 교육하였다. 지금의 우리 주상전하는 슬기롭고 어질고 영명하고 용기가 있었으며,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나이가 20세도 못 되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에 벼슬하였다.

거짓 임금 신우(辛禑) 무진년에 시중 최영(崔瑩)이 중국을 치려고 꾀하여, 지금의 우리 태상왕이 위엄과 명망이 일찍부터 현저하였으므로, 그에게 절월(節鉞)을 주어 가서 요동을 치게 하였다. 태상왕이 의()를 지켜 군사를 되돌려서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이름난 선비 이색(李穡)으로 대신하게 하니, 나라의 안팎이 무사하여 우리 나라가 길이 그 공적을 힘입게 되었다. 이색이 태상왕에게 아뢰기를, “이번, 중국에 싸움을 도발하려 한 뒤를 당하여, 집정한 이가 친히 가서 황제의 조정에 조현(朝見)하지 아니하면 공의 충성이 천하에 밝혀질 수 없습니다.”하고, 날을 정하여 가려하니 태상왕이 이색에게 말하기를, “나와 공이 일시에 사자(使者)로 가면 나라일은 누구에게 맡기겠소. 내가 아들 한 사람을 골라서 공에게 수행하게 하면 내가 가는 것이나 같지 않겠소.” 하고, 곧 지금의 우리의 전하를 보내어 서장관(書狀官)으로 하였더니, 특별히 고황제(高皇帝)의 우대하는 예를 받고 돌아왔다. 기사년 가을에 황제가 또 칙서를 내려 타성(他姓)으로 왕씨(王氏)의 후사를 삼는 것을 문책하였다. 태상왕이 여러 장군과 재상들과 의논하여 왕씨의 후예인 정창군(定昌君) ()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보다 앞서 권세 있는 간신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휘둘러서 남의 것을 강탈하고 훔치고 속여 빼앗곤 하였다. 태상왕이 그때에 좌상(左相)이 되매, 전지(田地)의 사유를 폐지하여 문란하여진 법을 바로 세우니, 폐단이 없어지고 이로움이 일어나서 온갖 법도가 함께 새로워졌다. 공이 높으면 상주지 아니하고, 덕이 크면 용납하기 어려운 것일까. 참소와 간사한 말이 번갈아 얽어서 모함하니, 점점 번지고 젖어듦을 헤아릴 수 없었다. 정창(定昌)이 자못 나약하고 혼암하여 사리를 판단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망설이기만 하였다. ()가 드디어 근심하고 노심(勞心)하여 병이 났다. 신미년 가을 9 12일에 훙()하니, 향년 55세였다. 예를 갖추어 성남(城南)의 해풍군(海豊郡) 속촌(粟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우리 전하가 분묘에 여막을 짓고 3년을 보내고자 하더니, 다음해 임신년의 봄에 태상왕이 서쪽에 나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왔다. 전하가 와서 시탕(侍湯)하니, 뭇 간사한 무리들이 이 틈을 타서 모함함이 더욱 급하여졌다. 우리 전하가 기틀에 대응하고 계책을 결단하여, 그 괴수를 쳐서 제거하니 흉악한 무리들이 와해되었다. 정창이 더욱 꺼리므로 가을 7 16일에 전하는 2, 3명의 대신들과 앞장서서 대의를 외치니, 신료와 부로들이 모의하지 않았건만 뜻이 일치하여 입을 모아 추대하였다. 태상왕이 여러 사람들의 심정에 못이겨 이에 왕위에 나아가니 저자에서는 상인들이 가게를 바꾸는 일도 없이 나라 안은 하루 아침에 맑고 밝게 되었다. 즉시 사자를 보내어 황제의 조정에 들어가 아뢰고 잇달아 회보(回報)의 칙명을 받았다. 이미 왕작(王爵)을 허가하고 또 국호를 조선이라고 미칭(美稱)으로 고쳐 주었다. 3년이 지난 뒤, 갑술년 여름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와서, 임금의 친아들을 입조하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태상왕이 우리 전하가 경서에 통하고 예절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서 가장 어질다고 하여 중국에서 온 사신을 따라 가라고 명령하였다. 이미 도착하매, 황제가 더불어 말하여 보고 가상하게 여기어 넉넉한 상을 주고 돌려보내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상왕이 병이 드니, 간신 정도전(鄭道傳) 등이 나라의 정권을 제멋대로 휘두를 것을 생각하여, 여러 적계(嫡系)의 왕자를 제거한 뒤에 어린 얼자를 세우려고 음모하여 여러 무리들과 붕당을 만들어서 화란의 발생이 박두하게 되었다. 전하가 그 낌새를 밝게 살피어 그것이 발생하기 전에 앞질러 베어서 제거하여 화란의 불을 꺼버리고, 태상왕에게 청하여 적출(嫡出)의 아들이며 연장(年長)인 상왕(上王)을 맞아들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떳떳한 차례가 이미 바로잡히니, 종묘와 사직이 안정하게 되었다. 9월 정축일에 태상왕이 병이 낫지 아니하므로 상왕에게 전위(傳位)하였다. 경진년 정월에 역신(逆臣) 박포(朴苞) 등이 동기(同氣)가 서로 죽이도록 음모를 꾸미고, 회안군(懷安君)의 부자를 추켜 세워서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향하게 하니, 역적의 기세가 매우 치성하였다. 우리 전하가 장수와 사졸들을 거느리고 격려하여 곧 바로 평정하였다. 박포(朴苞)만을 죽이고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불문에 붙였으며 회안(懷安)은 안치에 처하여 지친(至親)의 의()를 버리지 아니하였다. 상왕이 후사가 없고 또 나라를 세우고 사직을 안정하게 한 것은 다 우리 전하의 공적이라 하고, 세자로 책봉하여 나라의 근본을 안정시키었다. 가을 7월 기사일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어 태상왕에게 계운신무(啓運神武)의 호()를 올리었다. 겨울 11월 계유일에 상왕도 또한 병으로 인하여 우리의 전하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사자(使者)를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에게 청명(請命)하니, 다음해인 신사년에 건문제(建文帝) 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과 문연각 대조(文淵閣待詔) 단목례(端木禮)를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갖고 와서 우리 전하를 왕으로 책봉하였다. 겨울에 홍려시 행인(?寺行人) 번문규(藩文奎)를 보내 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벼슬의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하였다.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여 널리 만방에 알리니, 전하가 즉시 좌정승 신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들어가 등극을 축하하였다. 황제가 우리 전하의 충성으로 사대(事大)하는 것을 칭찬하고,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과 좌통정(左通政) 조거임(趙居任)을 보내어 금년 4월에 와서 전과 같이 봉작하여 왕으로 하였다. 9월에 또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과 행인(行人) 최영(崔榮)을 보내 와서 곤면(袞冕) 구장(九章 아홉벌)과 금단사라(錦段紗羅)와 서적(書籍), 왕비에게 갓과 도포와 금단사라와, 태상왕에게 금단사라를 내렸다. 이처럼 세상에 드문 은전이 전후로 계속하여 이르렀다. 대체로 우리 전하의 성대한 공덕은 실로 하늘이 계시한 바로서, 오로지 우리 나라에 붙이어서 큰 계획과 아름다운 천명을 연장하게 하였으니, 상제의 융숭한 권고를 받아 하늘이 주는 녹의 영구함을 누려야 마땅할 것이다.

기초를 창조한 자취는 비록 조종(祖宗)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자손을 잘 낳은 경사(慶事)는 실로 신의왕후(神懿王后)에서 유래한 것이다. , 성대하도다. ()게서는 여섯 아들을 낳으셨으니, 상왕(上王)이 둘째이고, 우리의 주상전하가 다섯째이다. 맏은 방우(芳雨)이니 진안군(鎭安君)을 봉하였다가 먼저 졸하였고, 셋째는 방의(芳毅)이니 익안대군(益安大君)을 봉하였고, 넷째는 방간(芳幹)이니 회안대군(懷安大君)을 봉하였다. 여섯째는 방연(芳衍)이니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딸은 두 분이 있었으니, 맏은 경신궁주(慶愼宮主)로서 찬성사(贊成事) 이저(李佇)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선궁주(慶善宮主)로서 청원군(淸原君) 심종(沈淙)에게 시집갔다. 상왕의 배필은 김씨(金氏)로서 지금 왕대비(王大妃)를 봉하였으니, 증좌시중(贈左侍中) 천서(天瑞)의 딸이다. 우리 전하의 배필은 정비(靜妃)니 여흥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驪興府院君領藝文春秋館事) 민제(閔霽)의 딸이다. 맏아들은 원자(元子) (?)이고, 차남(次男)과 삼남(三男)은 모두 어리다. 맏딸은 정순궁주(貞順宮主)이니 청평군(淸平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경정궁주(慶貞宮主)이니 평녕군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진안군(鎭安君)은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을 낳았으니 복근(福根)이라고 부르며 봉녕군(奉寧君)을 봉하였다. 딸은 소윤(少尹) 이숙묘(李叔畝)에게 시집갔다. 익안군은 증 찬성사 최인규(崔仁?)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석근(石根)이라고 부르며 원윤(元尹) 벼슬에 있다. 딸은 첨총제(僉摠制) 김한(金閑)에게 시집갔다. 회안(懷安)은 증 찬성사 민선(閔璿)이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을 낳았으니 맹종(孟宗)이며 의령군(義寧君)을 봉하였다. 딸은 종부령(宗簿令) 조신언(趙愼言)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신 근()이 일찍이 살펴보니, 삼대(三代) 성왕의 후비(后妃)의 덕()은 도산(塗山)과 태사(?)보다 더 큰 이가 없다. (), ()에 실려 있어서 천고에 밝게 빛난다.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덕()이 진실로 그들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비견할 만하다. 다만 신 근은 학식이 얕고 문장이 졸렬하여 비록 성덕을 더할 수 없이 형용하더라도, 하늘과 땅을 그림 그리는 것과 같아서 어찌 능히 그것의 만분의 일이나마 비슷하게 할 수 있겠는가. 감히 《시경》에 나오는 주() 나라의 시편(詩篇)인 대아(大雅)의 〈대명(大明)〉과 〈사제(思齊)〉의 뜻을 상고하여 삼가 명()의 사()를 기술하고 손 들어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올리는 바이다. 그 사는 이러하다.

 

상제가 밝고 현저하여 / 上帝赫赫

덕 있는 이를 계도하여 돕나니 / 啓佑有德

사사로움을 위해서가 아니고 / 匪伊私之

백성을 위함이 지극하기 때문이다 / 爲民之極

그 계시는 어떠하던가 / 其啓維何

유순하고 아름다운 부덕을 낳아 / ?生柔嘉

와서 덕 높은 임금의 배필이 되었네 / 來配于德

실가지락 마땅하여 / 允宜室家

임신하고 생육하니 / 載震載育

그 정령이 밝고 밝아 / 厥靈是赫

성스럽고 밝은 이를 낳았으니 / 篤生聖哲

하늘과 사람이 기대하던 바라네 / 天人攸屬

성스러운 아버지를 붙들어 도우시고 / 扶翊聖父

위대하게 백성들의 군주가 되었네 / 誕作民主

몸소 황제의 조정에 가 조견하시어 / 躬朝帝庭

우리 국토를 보전하였네 / 保我邦土

서얼의 화란이 싹틀 때에 / 孼芽之萌

낌새를 밝게 살펴 / 炳幾維明

시원하게 씻어버리니 / 廓爾?

종묘와 사직이 편안하게 되었네 / 宗社載寧

공을 세우고도 능히 사양하여 / 功成克讓

적장을 높이시니 / 以尊嫡長

떳떳한 인륜이 이미 바로잡히어 / 彛倫旣正

나라의 기초 세력 더욱 장성하였네 / 基勢益壯

형제의 담안 싸움 만났으나 / ?遭墻?

차마 그에게 죄주지 못하여 / 不忍致?

그 생명을 보전하게 하시고 / ?獲保全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였네 / 友愛彌篤

덕은 높고 / 維德之隆

공은 크니 / 維功之崇

마땅히 상제의 돌봄이 서리어서 / ?帝眷

명 주심이 많고 무겁네 / 錫命稠重

밝고 밝은 황제의 고명 / 明明帝誥

빛나고 빛나는 황금의 인장을 / 煌煌金寶

우리의 임금님이 받으시니 / 我龍受之

만대에 이르도록 길이 보존하리라 / 萬世永保

왕업의 발자취는 / ?維王迹

조종이 쌓아 왔으나 / 祖宗攸積

우리의 신성하신 임금을 낳으심은 / 誕我聖神

후의 덕에 연유하였네 / ?繇后德

신이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 臣拜稽首

올리는 말씀이 구차한 것 아니니 / 獻辭不苟

만세에 밝게 드리워 / 萬世昭垂

천지와 함께 영원하리라 / 天地永久

 

 

 

[D-001]도산(塗山)의 여자 : 도산은 우임금이 장가를 든 곳으로, 곧 우임금의 비()를 가리킨다. 비가 어진 아들 계()를 낳아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D-002]건문제(建文帝) : 명 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장손으로, 후계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가 그의 숙부인 영락제(永樂帝)에게 쫓겨서 행방불명되었다.

[D-003]〈대명(大明)〉장 : 무왕(武王)과 그 조상이 나라를 세운 사적을 노래한 것.

[D-004]〈사제(思齊)〉장 : 문왕과 후비(后妃)들의 덕을 찬미한 노래.

 

동문선 제121   

 

 

 비명(碑銘)

 

 

유명증시 공정 조선국 태종 성덕 신공문무 광효대왕 헌릉 신도비명 병서 (有明贈諡恭定朝鮮國太宗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獻陵神道碑銘) 幷序 

 

 

하늘이 덕이 있는 이에게 큰 임무를 내려주려 할 때에는 반드시 착한 아들과 뛰어난 손자를 낳게 하여 큰 운수를 열고, 큰 복록을 길게 하는 것이다 우리 조선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일어나매, 우리 태종(太宗)으로써 아들이 되게 하고, 우리 전하로써 손자 되게 하셨다. , 장하다. 어찌 사람의 작위(作爲)로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이 하는 일이로구나. 그것은 상() 나라의 왕실(王室)에 어진 임금과 착한 임금이 이어 일어난 것과, () 나라의 왕가(王家)에서 대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 같은 임금이 서로 계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신은 삼가 선원(璿源)을 상고하여 보오니, 이씨(李氏)는 전주(全州)의 이름난 가문이다. 사공(司空) 벼슬한 휘 한()이 신라에 벼슬하였으며, 신라 종성(宗姓)의 딸에게 장가 들었다. 6대 손인 휘 긍휴(兢休)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벼슬하였고, 13대 만에 태종 임금의 5대조 목왕(穆王)에 이르러서는 원() 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하여 천부장(千夫長)이 되었다. 4대가 내리 습작(襲爵)하여 모두 잘 하였다. 원 나라의 정치가 이미 쇠잔하게 되니, 황조(皇祖) 환왕(桓王)은 돌아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을 섬기었다. 공을 쌓고 어진 덕행을 누적(累積)하였음이 그 유래가 장구하다.

우리 신의 왕태후(神懿王太后)께서 지정(至正) 정미년 5월 신묘일에, 태종(太宗)을 함흥부(咸興府) 후주(厚州)의 사저(私邸)에 낳으니, 우리 태조의 다섯째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기특하였는데 차츰 자라면서 슬기로움이 무리에 뛰어났다.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학문이 날로 진보하여 나이 20도 못 되어서 고려의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때, 정치는 산란하고 백성들은 유리(流離)하여 국가의 형세는 위태로웠다. 강개(慷慨)하여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태조가 여러 아들들 중에서 유달리 사랑하였다.

일찍이 서장관(書狀官)의 자격으로 시중(侍中) 이색(李穡)과 같이 명 나라의 서울에 조회하였으며,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밀직사 대언(密直司代言)에 이르렀다. 홍무(洪武) 신미년 9월에 신의왕태후(神懿王太后)가 훙()하니, 태종이 제릉(齊陵)의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임신년 봄에 태조가 서쪽의 행차에서 병을 얻고 돌아왔으므로 와서 탕약(湯藥)을 돌보며 모시었다. 공양왕의 신하가 그 틈을 타서 태조의 세력을 뒤집어 엎을 것을 꾀하여 사세가 매우 급하게 되었다. 태종이 조짐에 대응하여 변고를 제압하고 그 괴수(魁首)를 쳐서 제거하니, 온갖 음모가 와해되었다. 가을 7월에, 여러 장상(將相) 들과 더불어 앞장서서 대의(大義)를 외치고 태조를 추대하여 집을 바꾸어 나라로 만드니 정안군(靖安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갑술년 여름에, () 나라의 고황제(高皇帝)가 태조에게 친아들을 보내어 들어와 조회하게 하라고 명령하니, 태조가 우리의 태종이 경서에 능통하고 예에 밝아서 여러 아들 중에 가장 현명하다고 하여 즉시 보내어 명령에 응하였다. 명 나라에 이르러서는 진술하는 것이 황제의 뜻에 만족하였으므로, 예를 갖춘 우대를 받고 돌아오게 되었다. 무인년 가을 8월에 태조가 몸이 편찮았는데 권신(權臣)이 붕당(朋黨)을 모아 어린 왕자를 끼고 정권을 잡아 제 마음대로 휘둘러 보고자 하는 자가 있어서 화가 곧 일어날 것 같으므로 태종이 낌새를 밝게 살펴 제거해 버렸다. 그때에 종친들과 장군과 재상들이 다 우리 태종을 세자로 책봉하기를 청하고자 하였으나, 태종이 굳이 사양하고 공정(恭靖 정종(定宗))을 추천하여 높이고, 위로 태조에게 청하여 세자로 책봉하게 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켰다. 9월 정축일에 태조가 병이 낫지 않으므로 공정에게 선위(禪位)하였다.

건문(建文) 경진년 정월에는 역신(逆臣) 박포(朴苞)가 동기(同氣)를 해칠 음모를 꾸미고 몰래 방간(芳幹)의 부자를 유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저지르니, 태종이 군사를 통솔하여 평정하였다. 박포만을 베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주었으며, 방간은 안치(安置)의 벌에 처하였을 뿐 지친(至親)의 정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공정(恭靖)이 후사(後嗣)가 없고, 또 개국(開國) 정사(定社)의 일이 다 우리의 태종의 공적이라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11월에 또한 병으로 우리 태종에게 전위(傳位)하였다. 사신을 명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명을 청하니, 다음해 신사년 6월에 건문제(建文帝)가 통정시 승(通政寺丞) 장근(章謹)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고 와서 우리 태종을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겨울에는 홍려시 행인(?寺行人) 반문규(潘文奎)를 보내와서 면복(冕服)을 내리니, 품질(品秩)이 친왕(親王)과 비등(比等)하였다.

임오년에 지금의 황제가 즉위하자 좌정승 신 하륜(河崙)을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니, 황제가 충성을 칭찬하였다. 다음해 계미년 4월에 고명과 인장을 내리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와서 전대로 봉하여 왕으로 하였다. 가을에는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을 보내와서 곤면(袞冕) 9()과 금단사라(錦段紗羅)ㆍ서적을 주었는데, 태조에게는 금단사라를,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에게는 관포(冠袍)와 금단사라를 내리어서 각각 차등이 있게 하였다. 그때부터 뒤에는 황제의 하사하는 선물이 계속하여 쉬는 해가 없었다.

을유년에, 한양(漢陽)은 태조가 수도로 정한 곳이라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반대 의논을 물리치고 한양으로 돌아왔다. 정해년에 황제가 정조(正朝)의 조하(朝賀)에 간 조선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조선의 국왕은 지성으로 사대(事大)한다.” 하였다. 그 뒤로는 사신이 도착할 때마다 번번히 ‘지성이라.’ 칭찬하였다.

무자년 5월에 태조가 안가(晏駕)하니 태종이 애모함을 그지없이 하였다. 양암(諒闇 임금이 거상(居喪)할 때에 있는 방)에 거처하면서 초상과 장사를 예로써 하였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訃告)를 알리니, 황제가 매우 슬퍼하고 정사 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예부 낭중 임관(林觀) 등을 보내어 대뢰(大牢)를 서서 사제(賜祭)하고 시호를 강헌(康獻)이라고 추증하였다. 또 태종에게 칙서(勅書)를 내려 후한 부의(賻儀)를 주었다.

임진년 겨울에 왕씨(王氏)의 후예로서 민간에 숨은 자가 상언(上言)한 것이 있었다고 하여 담당 관사(官司)에게 사형에 처할 것을 청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본래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다. 왕씨의 후예를 죽이는 것은 우리 태조의 본의가 아니다.” 하고, 곧 하교하기를, “왕씨의 후예로서 생존한 자는 각기 생업에 안정하게 하라.” 하였다. 갑오년 6월에 감로(甘露 달콤한 이슬)가 함흥부 월광구미리(咸興府月光仇未里)와 정평(定平)의 백운산(白雲山)에 내렸다. 다음해 을미년 4월에 감로가 또 함흥부의 덕산동(德山洞)에 내렸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이다. 의정부에서 모두 전문(箋文)을 올리어 진하(進賀)하였으나 임금이 받지 아니하였다. 무술년 6월에 세자 제(?)가 패덕(敗德)하다고 해서 세자의 직위를 해제하여 양녕대군(讓寧大君)에 봉하고, 우리 전하가 총명하고 효도하며 우애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함이 없어서 국민들이 촉망(囑望)한다고 하여, 세자로 책봉하고 중국 조정에 알리니, 황제가 좋다고 윤허하였다.

이해 8월에 임금이 우리 전하에게 선위(禪位)하고 사신을 보내어 황제의 명령을 주청(奏請)하였다. 11월에 우리 전하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부왕(父王)에게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호()를 올렸다. 다음해인 기해년 정월에 황제가 홍려시 승(?寺丞) 유천(劉泉) 등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받들고 우리 전하를 왕으로 하였다. 5월에 대마도(對馬島)의 왜구가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의 군사를 살해하고 약탈하므로 영의정 신() 유정현(柳廷顯)과 찬성(贊成) 신 이종무(李從茂) 등을 명하여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대마도의 왜인들이 예전과 같이 성심으로 섬겼다.

8월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와서 상왕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다. 칙서(勅書)의 사연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의 지성이 돈독하고 두터워서 성심으로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 한결같은 덕과 한결같은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으며, 능히 어진 이를 고르고 덕있는 이에게 명하여 종사(宗祀)로 하여금 의탁함이 있게 하고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였다.” 하였다. 또 우리 전하에게 잔치를 하사하였는데, 칙서는 대략 이러하다. “부왕이 돈후하고 노성하여 천도(天道)를 삼가 공경하였으며 충순(忠順)한 정성은 오래 갈수록 변함이 없었다.” 하였다.

9월에 공정(恭靖)이 죽자, 전하가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역월의 복제[易月之制]를 마쳤다. 사자를 보내어 부고를 알리었더니, 다음해 4월에 황제가 사자를 보내 와서 치제(致祭)하고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리었다. 이해 봄에 우리 전하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리도록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아니하였다. 가을 7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가 훙()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하여 몸을 훼상(毁傷)함이 예()에 지나친다고 하여 거상 기간을 날을 달로 계산하는 역월의 복제를 좇기를 명하였으나 전하가 울며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장사 뒤에 상복을 벗고 흰옷으로 복제(服制)를 마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9월 임오일에 태후(太后)를 광주(廣州) 수읍(首邑)의 대모산(大母山)에 장사 지내고 능()을 현릉(顯陵)이라고 하였다. 신축년 9월에 우리 전하가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받들고 태상왕(太上王)의 호를 올렸다. 10월에 태종(太宗)에게 품의(?)하고 원자(元子) ()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나지 않는 훌륭한 자질로서 성인의 학문에 밝으며, 효도와 우애는 신명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함은 종묘와 사직을 바로잡았다. 사대하는 일은 천자가 그의 지성을 칭찬하였으며,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의 도() 있음에 심복하였다.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제하였다. 덕과 예()를 우선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충직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자를 내쫓았다. 이단을 물리치고, 음사(淫事)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를 정하였으며, 문교(文敎)를 밝히고 무비(武備)를 엄중하게 하였다. 누적된 폐단을 모두 없애버리니, 모든 사적(事績)은 다 빛이 났다. 온 나라 안이 안도하여 백성들은 편안하고 산물은 풍성하였다. 제왕의 도가 아, 성대하도다. 그가 상제(上帝)의 사랑을 얻음이 융숭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하여 두 번이나 감로(甘露)를 내리는 상제의 상서를 얻었던 것이다.

임인년 4월에 처음으로 병환이 있더니, 다음달 5월 병인일에 이궁(離宮)에서 훙하였다. 우리 전하가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3일 동안 수라를 들지 아니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울며 수라 들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3년을 거상(居喪)할 것을 정하고 역월(易月)의 제도를 쓰지 아니하였다.

태종은 춘추가 56세이며 왕위에 있은 것이 19년이었다. 한가롭게 살며 정양한 지 5년 만에 갑자기 승하하시니, 크고 작은 신료들과 아래로 하인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목이 쉬도록 호곡(號哭)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오랠수록 더욱더 슬퍼하기를 부모의 상을 당한 것 같이 하였다. , 슬프다. 이해 9 6일 경자(庚子)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의 능에 합장하였다. 유언의 명령에 좇은 것이다. 부고(訃告)가 가니, 황제가 슬퍼하여 정사보는 것을 정지하였다. 특별히 예부낭중(禮部郞中) 양선(楊善) 등을 보내 와서 사제(賜祭)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은 대략 이러하였다. “왕은 돈후하고 지성스러우며, 총명하고 현달하여 공경히 황제의 조정을 섬기어서 충순(忠順)의 정성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습니다. 부음이 멀리 들려오니 진실로 깊이 슬픔을 느낍니다.” 하였다. 또 고명(誥命)을 내려 시호를 공정(恭定)이라고 하였다. 또 전하께서 부의(賻儀)를 넉넉하고 후하게 내리었다. 대체로 우리 태종(太宗)의 공덕이 성대함과 전하의 효성이 지극함이 앞뒤에서 서로 받들어서 천심을 잘 누렸기 때문에 마지막과 시초의 즈음에 있어서 남달리 총애하는 은전이 이와 같이 갖추어지고 지극하게 된 것이다.

중궁(中宮) 원경왕태후의 성()은 민씨(閔氏), 여흥(驪興)의 세가(世家)이다. 고려의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障事) 문경공(文景公) 휘 영모(令謨)로부터 6대 만에 황고조(皇高祖) 휘 종유(宗儒)에 이르러 의종(毅宗)을 도왔으니, 벼슬은 도첨의시랑 찬성사(都僉議侍郞贊成事)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이 황증조(皇曾祖)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시호 문순(文順) 휘 적(?)을 낳고, 문순은 황조(皇祖) 대광(大匡)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휘 복(?)을 낳았으며, 대광은 황고(皇考) 순충동덕찬화공신(純忠同德贊化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수문전대제학 영예문춘추관사(修文殿大提學領藝文春秋館事) 시호 문도(文度) 휘 제()를 낳았다. 황비(?) 송씨(宋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는데, 고려 중대광(重大匡) 여량군(礪良君) 휘 선()의 딸이다. 선을 쌓음으로써 흘러나오는 경사가 맑고 덕 있는 이를 낳게 되었으니, 총명하고 지혜스러움이 남에게 뛰어났다.

시집갈 나이가 되매 배필을 가려서 우리 태종에게 시집왔다. 태종이 젊었을 때, 세상을 건지려는 뜻이 있어 경서와 사기에 마음을 두고 집안 살림살이를 돌보지 아니하였으나, 태후는 능히 집을 다스리는 데 검소하게 하고, 가정의 공궤(供饋)에는 삼가하여 그의 공부를 힘쓰게 하였으며, 많은 아들들을 가르쳐서 의로운 방법을 따르게 하였다. ()과 시녀들을 예()로 대우하여 부인의 도리를 극진하게 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에 정녕옹주(靖寧翁主)로 봉하여졌다. 무인년에 태종이 사직을 정할 즈음에는 형세가 매우 외롭고 위태하였는데, 태후가 마음을 다해 도와서 큰 일을 성취하게 하였다. 경진년 봄에 정빈(貞嬪)으로 봉하였고, 그해 겨울에 태종이 즉위하여 정비(靜妃)로 봉하였다. 영락(永樂) 계미년에는 명 나라의 황제가 관포(冠袍)를 내려주었으며, 이 해로부터 정유년에 이르는 동안 여러 번 황제의 하사를 받은 것이 모두 다섯 번이나 되었다. 무술년 겨울에 우리 전하가 후덕 왕대비(厚德王大妃)의 호()를 올리었고, 경자년 9월에 원경왕태후(元敬王太后)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춘추는 56세였다.

태후는 차분하고 한아하며 정숙하고 경건한 덕을 타고났으며 태종을 잘 도와서 내치(內治)에 전심하였다. 20년 동안 궁궐 안에서의 용의(容儀)는 엄숙하고도 화목하였으며, 또 착한 아들을 낳아서 종사(宗社)를 맡게 하여 영광스러운 봉양을 누리었다. 흥하자 빈()과 시녀와 첩들이 마음껏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 모()의 거동을 본받음이 지극하였도다. 4 4녀를 낳았으니, 우리 전하는 셋째이다. 장자는 제(?)이며, 다음은 이름을 보()이니 효녕대군(孝寧大君)으로 봉하였다. 그 다음은 종()이니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 봉하였다. 맏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이니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에게 시집갔다. 같은 이씨(李氏)는 아니다. 다음은 경정공주(慶貞公主)이니 평양부원군 조대림(趙大臨)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경안공주(慶安公主)이니 길창군(吉昌君) 권규(?)에게 시집갔으나 또한 먼저 졸하였다. 다음은 정선공주(貞善公主)이니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에게 시집갔다.

의빈(懿嬪) 권씨(權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정혜옹주(貞惠翁主)로서 운성군(雲城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시집갔다. 소혜궁주(昭惠宮主) 노씨(盧氏)가 딸 하나를 낳았으나 아직 어리다. 신녕궁주(信寧宮主) 신씨(辛氏) 3 7녀를 낳았으니, 맏이는 이름을 인(?)이라고 하며 공녕군(恭寧君)으로 봉하였다. 나머지는 어리다. 큰딸은 정신옹주(貞信翁主)이니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정정옹주(貞靜翁主)이니 한원군(漢原君) 조선(趙璿)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숙정옹주(淑貞翁主)이니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궁인(宮人) 안씨(安氏) 1 3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김씨(金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은 비()인데 경녕군(敬寧君)으로 봉하였다. 고씨(高氏)가 아들 하나를 낳았으며, 최씨(崔氏) 1 1녀를 낳았고, 이씨(李氏) 1남을, 김씨(金氏)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우리 중궁(中宮) 공비(恭妃) 심씨(沈氏)는 문하시중 휘 덕부(德符)의 넷째 아들인 온()의 딸이다. 4 2녀를 낳았으니, 첫째는 바로 세자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양녕(讓寧)이 김한로(金漢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3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효녕(孝寧)이 전 판중군도총제부사(前判中軍都摠制府事) 정이(鄭易)의 딸에게 장가들어 4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성녕(誠寧)이 전 전라도 도관찰사 성억(成抑)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다. 정순공주(貞順公主)가 딸 하나를 낳았으니 용양시위사 호군(?侍衛司護軍) 이계린(李季?)에게 시집갔다. 물론 같은 이씨가 아니다. 정경공주(貞慶公主)가 딸 넷을 낳았으니, 첫째는 돈녕 부승(敦寧府丞) 안진(安進)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유학(幼學) 김중엄(金中淹)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경안공주(慶安公主)가 아들 둘을 낳았으니, 첫째는 이름을 담()이라고 하며 한성 소윤(漢城小尹) 정연(鄭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어리다. 정선공주(貞善公主) 2 1녀를 낳았으나, 다 어리다. 경녕(敬寧)이 호조 참의 김관(金灌)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공녕(恭寧)이 병조 참의 최사강(崔士康)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신은 적이 살펴보니, 우리 태종(太宗)의 큰 덕과 높은 공이 본래 이미 모든 임금들의 위에 높이 뛰어났으나, 배필의 어지심과 내조의 공도 또 촉도 신지(蜀塗莘摯)와 더불어 부서(符瑞)를 같이하고 아름다움을 짝할 만한 것이 있다. 모든 신하들이 모두 능()의 신도비(神道碑)에 명()을 새겨 길이 뒷 세상에 밝혀 보이고자 하여, 전하가 신() 계량에게 명하였다. 신 계량은 명령을 받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손으로 읍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을 올린다. 명에 이르기를,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 / 天眷海東

우리 태종을 내려주셨네 / 降我太宗

부지런히 힘쓰는 태종이여 / ??太宗

성대한 덕 몸에 지니셨네 / 盛德在躬

성스러운 아버지를 추대하여 / 推戴聖父

위대한 공 이루게 하고 / 克集大功

황제의 조정에 조근하여 / 乃覲帝庭

조용히 진주하였네 / 敷奏從容

천자의 은총 넉넉히 입게 되어 / 優荷睿恩

우리 나라 백성들 보전하셨네 / 保我黎元

기미를 밝게 살펴 변란을 평정하고 / 炳幾靖亂

적계 형을 높여 세자되게 하였네 / 嫡長是尊

형제간의 싸움을 만났으나 / 雖値?

우애가 오히려 두터웁네 / 友愛猶惇

효제의 지극함은 / 孝悌之至

전고에도 드물었네 / 從古罕聞

그 덕은 후하고 / 維德之厚

그 공은 성대하니 / 惟功之懋

하늘이 매우 밝게 살펴 / 天鑑孔昭

거듭하여 보우하시네 / 式申保佑

휘황한 금보가 / 煌煌金寶

전후에 빛나고 / 輝映前後

황제의 고명이 잇달아 도착하매 / 帝誥?

내 드디어 왕위를 받았네 / 我乃龍受

할아버지 훈계를 지켜 / 祖訓惟服

한성에 환도하고 / 還于漢北

예악을 제작하니 / 制作禮樂

아름답게 문채나네 / 煥乎郁郁

상중에 여막살며 / 遭喪居盧

애모함이 망극하여 / 哀慕罔極

장사와 제사에 / 以葬以祭

옛 법을 따르셨네 / 古典是式

공손히 사대하니 / 抵事朝廷

황제가 지성이라 칭찬하였네 / 帝稱至誠

경건하게 승사하니 / 肅肅承祀

신명이 감응하고 / 感于神明

교린에 도 있으니 / 交隣有道

왜국이 복종하며 / 倭邦來庭

왕씨 후예 돌보아 / ?王裔

편안히 살게 하였네 / ?遂其生

안팎이 태평하기 / 中外又安

20년이 되어가니 / 垂二十齡

윤택한 감로가 / ??甘露

해마다 함부에 내리었네 / 歲降咸府

어두운 아들() 폐하시고 덕 있는 이에 명하여 / 廢昏命德

백성의 주인이 되게 하였네 / 以作民主

길이 천수를 누리며 / 期享永年

이 땅에 군림하시기를 기약하였는데 / 父臨下土

그 어찌 빈천을 재촉하여 / 何促賓天

병이 낫지 않는가 / 一疾莫愈

슬프다, 착하신 아들 / 哀哀聖子

슬퍼함이 가이없어 / 痛悼無比

3일 동안 철선하고 / 徹膳三日

상심을 못이기며 / 不勝?

거상 중의 모든 절차를 / 凡百喪事

예대로 지키었네 / 維禮之履

황제 듣고 슬퍼하며 / 帝聞慟悼

사자 보내 사제하고 / 遣使以祀

높이는 시호 주며 / 贈謚褒崇

후한 부의 내리시니 / 賜賻優隆

조문의 예를 완비함에 / 恤典之備

신하들 기뻐하네 / 喜溢臣工

신의 태후 생각 같아 / 思齊太后

진실로 화순하네 / 允也肅?

가만히 도와 사직을 안정시켜 / 密贊定社

큰 총명에 배필하고 / 克配亶聰

성철한 아들 낳아 / 篤生聖哲

종묘제주 되게 했네 / ?主宗祐

하늘처럼 건전하고 밝으심은 / 乾健?

공정의 덕이요 / 恭定之德

땅처럼 후하고 바르심은 / 坤厚柔貞

원경의 법칙이네 / 元敬之則

살아서는 금슬 같은 벗이요 / 琴瑟以友

죽어서도 같이 장사하였네 / 藏同其域

자손이 번성하니 / 子孫振振

, 기린 같도다 / 于嗟其麟

종묘 제사 / ??宗祀

억만년 이어가리 / 垂萬億春

신은 절하고 글을 올리오니 / 臣拜獻詞

옥 같은 굳은 돌에 이 사연 새기어서 / 刻之貞珉

만대에 마멸 없이 / 萬代不磨

우리 나라 빛나게 하리라 / 昭我東垠

 

하였다.

 

속동문선 제1   

 

 

 ()

 

 

관어대부(觀魚臺賦)

 

 

김종직(金宗直)

 

 

병술년 7월에 이시애(李施愛)가 모반(謀反)하여, 내가 절도사(節度使)의 명을 받고 군사를 검열하려 영해부(寧海府)에 이르렀다. 군병이 아직 안모였기로 교수(敎授) 임유성(林惟性), 진사(進士) 박치강(朴致康)과 함께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옛집을 찾아보고, 인하여 관어대(觀魚臺)에 놀았다. 이날에 바람이 자고 물결이 고요하여 뭇 고기들이 벼랑밑에 헤엄쳐 놂이 역력히 굽어보이기로, 드디어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소부(小賦)를 화운(和韻)하여 이자(二子)에게 주었다.

 

옥장에서 병부를 엄숙히 받자와 / 肅承符于玉帳兮

동녘으로 해변 끝까지 왔네 / 東將窮乎海涯

우격이 한창 빗발치듯 하는 때 / 紛羽檄之交午兮

내 어찌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있으리 / 余安能以恤他

혹시나 큰일에 계교를 그르쳐 / 懼壯事與老謀兮

헛되이 세월만 허비할까 두려워하네 / ?日月以消磨

예주 성에 와 잠깐 쉬다가 / ?禮州之??

전배의 옛집을 찾았더니 / 聊延?於前修之故家

그 옆에 한 대가 우뚝 솟아 / 有臺??于厥傍兮

적성의 새벽 노을 둘렀기로 / ?赤城之晨霞

두 객을 좇아 지점하니 / 從二客以指點兮

이 몸이 호연지기를 타고 이 높은 곳에 올라온 듯 / 恍不知身之憑灝氣而?玆地也

장자가 제 어찌 고기를 안다 자랑하리 / 蒙莊奚?於知魚

맹자가 어찌 감히 물을 본다하리 / 鄒孟敢稱於觀水

가파른 절벽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니 / 倚危?而遐?

아득한 운도는 몇 리가 되는고 / 渺雲濤其幾里

이윽고 회오리바람이 잦아 / 少焉?毋不翔

포구의 연기가 멀리 일어나니 / 鹽煙遙起

해면이 쓴 듯한데 풍경이 금시 달라진다 / 海市如掃光景?

휘파람 길이 불고 밑을 굽어보니 / 劃長嘯以俯窺兮

고기떼들 발랄하게 멋대로 즐기는구나 / 群魚撥刺以悅志

무리를 짓고 떼를 지어 노니는 모양 / 蹇族?而隊游兮

가까운 근친에 비유할 바 아니로세 / 匪膚寸??之可擬

창파에 넘실거리며 입을 벌름대니 / 凌通波以??

그물을 친다 한들 이를 어쩌리 / 縱網?兮奚冀

어떤 놈은 지느러미를 휘두르며 비늘을 날치는 모양 / 或掉?而奮鱗兮

풍뢰에 변화하여 용이나 될 듯 / 吾恐風雷變化以通靈

솔가지를 더위잡고 긴 한숨 쉬노니 / ?枝而太息兮

저 고기들 다 편안히 잘 사는구나 / 感物類之咸寧

옛 성인이 나는 솔개와 아울러 비유한 / 竝鳶飛以取譬兮

그 지극한 이치 뉘라서 분명히 알꼬 / 孰聽瑩於至理

전에 배운 태극의 이 이치를 / 斯大極之參于前兮

마음에 새겨서 버리지 말자 / 矢佩服而勿棄

돌아보니 두 손은 우뚝히 서서 / 眷二客之脩騫兮

발돋우고 멀리 바라보누나 / 忽有得於瞻?

술상을 벌여놓고 잔을 서로 나누며 / 崇羽觴以相屬兮

원리 하나 예 있음을 깨달으면서 / 悟一本之在此

목옹에게 술 한 잔 따르고 이 노래를 읊으니 / ?牧翁而??辭兮

마치 해륙의 진미를 안주로 먹는 듯 / 若飽?於珍旨

서로 비추는 간담이 초월처럼 멀지 않으니 / 肝膽非楚越之遙兮

원컨댄 우리 함께 명성한 군자에게로 돌아가리라 / 願同歸於明誠之君子

 

 

[D-001]장자(莊子)가 …… 안다 :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물가에서 물속에 고기가 노는 것을 보다가 장자가 “물고기가 매우 즐겁구나.” 하니, 혜자는, “자네가 물고기가 아니면서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하였다. 장자는, “자네가 내가 아니면서 어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아는가.” 하였다.

[D-002]옛 성인(聖人)이 …… 비유한 : 《시경》에, “솔개는 날아 하늘에 닿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는 구절이 있는데, 《중용(中庸)》에서 이것을 인용하여 천지의 지극한 이치를 살필 수 있다 하였다.

속동문선 제16   

 

 

 ()

 

 

영가 연괴집서(永嘉連魁集序)

 

 

문장은 작은 기술이다. 그런데 시()와 부()는 더욱 문장에서도 말단이다. 그러나 성정(性情)을 다스리며 교화를 펴서 당세를 울리고[] 무궁한 세대에까지 전하는 데에는 시와 부가 사실상 큰 구실을 한다. 만일 호걸스러운 재주가 아니면 누가 여기에 참여할 수 있으리요. 호걸스러운 재주가 어느 시대이고 없을 적은 없지만, 아버지ㆍ아들ㆍ할아버지ㆍ손자가 대를 계속하여 훌륭한 업적을 받들어 그들의 축적한 공부를 발휘하며, 국가의 찬란한 문화를 장식한 사람은 예와 이제에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우리 나라에서 목은(牧隱 이색(李穡))ㆍ설곡(雪谷 정포(?))ㆍ통정(通亭 강희백(姜淮伯))과 같은 여러분은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문집을 냈는데 이런 것을 헤이자면 정말 수가 많다. 영가권씨(永嘉權氏)의 집안도 그 중의 하나로 참여할 것이니, , 찬란하도다. 다만 문장뿐 아니라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며, 지재(止齋 권제(?))ㆍ소한당(所閑堂 권남(權擥))은 서로 계승하여 대관(大冠)에 합격하니 계림(桂林)의 한 가지[]와 곤산(崑山)의 한 조각 옥()이 예술의 전당에 두각을 드러내고 조정에서 빛을 발휘할 것이며, 그들이 일생동안 조정에서 세운 큰 업적과 위대한 공은 당()의 소(蕭 소정(?)의 잘못인 듯)ㆍ장(張 장열(張說))과 송()의 왕(王 왕단(王旦))과 여 (呂 여이간(呂夷簡))와 겨룰 수 있으니 아, 훌륭하도다. 소한당(所閑堂)의 아들인 숙강(叔强)군이 능희 그 전통을 이어받아, 20세가 되기 전에 높은 과거에 합격하여 예문과[?]을 경유하여 은대(銀臺 승정원)에 들어와서 지금 우승지(右承旨)가 되었으니, 권씨 집안의 문학을 숭상한 영향은 아직도 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숙강군이 그의 할아버지와 어버지의 남긴 글을 수집하여 정리하여 몇 권의 책으로 만들었는데, 달성 서찬성(達城徐贊成)이 그 위에다 영가연괴집(永嘉連魁集)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종직(宗直)은 인하여 이를 얻어서 읽게 되었다. 두 분의 시는 체재와 격조가 실로 양촌(陽村)의 규모에 근거했으나 3()의 작품은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질소(質素)하면서 속되지 아니하며 섬부(贍富)하면서 과장한데 지나치지 아니하여, 어떤 것은 전실(典實)하며 어떤 것은 충담(沖澹)한 점에 있어서 두 분이 서로 낫거나 못한 것이 없다. 장주(莊周)는 말하기를, “아버지가 이를 아들에게 전할 수 없으며, 아들이 이를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다.” 했는데, 어쩌면 두 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전하여 준 듯도 하며 이를 받아들인 듯도 하여, 사색이나 묘사가 뛰어나고 있음이랴. 이것은 그들이 천품이 높으며 학문의 도달한 바가 각각 그 품()이 지극해서 구상과 표현이 은연 중 서로 합치되어서 전하였으며 받은 듯한 것이 있으니, 자못 일반 사람과 말할 수 없는 것이 그 가운데에 존재한 것이다. , 두 분이야말로 정말 이른바 호걸스런 재주라 할 수 있다. 이제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어 문화 정치가 크게 열리어 여러 선배들의 유고(遺稿)가 종종 임금 앞에 올라가고 있으니, 이 문집도 마땅히 고령 신문충(高靈申文忠)ㆍ영성 최문정(寧城崔文靖)ㆍ진산 강문량(晉山姜文良)ㆍ양성 이문간(陽城李文簡)의 작품과 함께 전하며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 의심없다. 천년 이후에라도 누가 감히 이것을 작은 기술이라 하여 가볍게 여길 사람이 있으랴.

 

속동문선 제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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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송도록(遊松都錄)

 

 

채수(蔡壽)

송경(松京)은 고려조의 수도인지라 산수가 기려하여 동방에 으뜸간다. 5백 년의 번화한 승적(勝迹)은 비록 씻은 듯이 없어졌지만, 그 남는 풍속이 오히려 본존된 것이 있으므로, 진작부터 한 번 가서 찾아보려고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마침 인천(仁川) 채기지(蔡耆之) ㆍ 양천(陽川) 허헌지(許獻之) ㆍ 하산(夏山) 조태허(曹太虛)가 휴가를 받아 글을 읽고 있고, 죽계(竹溪) 안자진(安子?)은 관()이 역시 한가하고, 창녕(昌寧) 성경숙(成磬叔)이 장차 파주(坡州)로 소분(掃墳 성묘(省墓))가게 되는데, 파주에서 개성(開城)이 멀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서로 더불어 유람할 것을 약속하였다.

3 14일 신사일에 성경숙 ㆍ 채기지 ㆍ 안자진이 먼저 출발하였다. 장포(長浦)의 냇가에 당도하니, 찰방(察訪) 송위(?)가 천막을 치고 기다리다가 영접하여 들어가 음식을 차렸기로 술 두어 순배를 마시고 파했다. 저물녘에 유수(留守)의 별장에 투숙(投宿)하였다.

임오일에 채기지 ㆍ 안자진은 새벽에 먼저 출발하였다. 적전(籍田)에 당도하니 성경숙이 분묘에 올라가 먼저 전제(奠祭)를 올리고 오후에 따라 왔다. 판관(判官) 정희인(鄭希仁)이 술자리를 마련하였는데, 자라를 삼고 잉어를 회쳐서 술상이 매우 훌륭하였다. 정희인과 더불어 달밤에 나와 말 위에서 연구(聯句)를 입으로 부르고, 보정문(保定門)에 들어오니 이미 종소리가 들렸다.

계미일에 성중을 두루 구경하는데, 성여회(成如晦)가 아우 세원(世源)을 데리고 또한 따라 붙었다. 처음으로 연복사(演福寺)에 도착하여 층각(層閣)에 올라 도성(都城)을 굽어보니, 층각(層閣)의 서쪽에 큰 비()가 서 있는데 권양촌(權陽村 권근(權近))이 글을 짓고, 성독곡(成獨谷)이 글씨를 썼고, 층각의 동쪽에 큰 종이 달렸는데 가정(稼亭)이 명()을 지었다. 화원(花園)에 당도하니 벌써 황폐했고, 오직 팔각전(八角殿)만이 우뚝 홀로 남았는데 해가 묵어서 반이나 퇴락했고, 팔각전 뒤에는 돌을 모아서 가산(假山)을 만들었는데 화초가 아직도 있다. 고려 신우(辛禑)가 일찍이 이 화원에서 날마다 술놀이만 일삼으며, 망녕되이 요동(遼東)을 정벌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회군(回軍)하여 화원을 수백 겹으로 에워싸니 최영(崔塋)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문지기를 죽이고 들어갔다. 이 때를 당하여 안팎이 이반되었는데, 최영은 까마귀 떼와 같은 시정(市井)의 졸개들로서 하늘이 돕고 사람이 순종하는 왕사(王師)를 거역하려고 하였으니 역시 어렵지 않았겠는가. 목청전(穆淸殿)에 이르러 임금의 진영(眞影)을 뵈었다. 목청전은 곧 태조의 구택(舊宅)이다. 성균관에 이르러 알성(謁聖)하니, 오성(五聖) ㆍ 십철(十哲)이 모두 소상(塑像)으로 되었는데, () 나라 사람의 소작이다. 자하동(紫霞洞)을 찾아드니, 시냇물이 촬촬 흐르고 진기한 꽃들이 골짝에 가득하며, 돌섬[?]의 옛터가 많은데, 중화당(中和堂)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왕륜사(王輪寺)에 이르니 옛날에는 대찰(大刹)이었는데 지금은 유독 전(殿) 하나가 있을 뿐이다. 수락석(水落石)에 이르니 돌이 안화동(安和洞) 입구에 있는데, 맑은 샘물 한 가닥이 비탈 구멍으로 쏟아져 나와 작은 방죽을 이루고, 작은 고기 수백 마리가 그 밑바닥에서 헤엄치며 노닌다. 서로 더불어 발을 씻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오후에 소격전(昭格殿)에 도착하니 동구의 수석이 매우 맑고 기이(奇異)하였다. 본궐(本闕)의 옛터에 이르니 터가 송악(松岳)의 남록(南麓)을 인하여 그 지세(地勢)가 매우 높다. 사람들의 말이, “처음 창건할 때에 지맥(地脈)을 상하고 싶지 않아서 돌을 쌓아 올려 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높이가 모두 수십 척이요, 주춧돌이 가로 세로 두어 마장을 이었다. 그 맨 꼭대기 언덕을 점거한 것이 건덕전(乾德殿)인데, 전문(殿門)에 폐급(陛級)이 엄연히 있고, 그 아래는 우봉루(威鳳樓), 그 동쪽에 돌로 제방을 만든 것은 동지(同池)였는데, 지금은 논이 되었다. 그 남쪽의 평탄한 땅은 구정(毬庭)인데, 푸른 소나무 만여 그루가 울울창창하게 하늘을 가려 있다. 이른바 산호(山呼) ㆍ 상춘(賞春) ㆍ 옥촉(玉燭) 등의 정자는 모두 찾을 수 없었다. 서로 더불어 옛일을 돌아보며 멀리 생각하고 감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경력(經歷) 임수경(林秀卿) 군이 술을 들고 찾아왔기로 건덕전(建德殿) 고지(古址)로 올라가 송림(松林) 속에서 마셨는데, 세상에서 여기를 만월대(滿月臺)라 부른다. 풍덕훈도(?德訓導) 구계중(具繼重)이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회합하였다. 해가 저물어 흩어지려 하는데 조태허(曺太虛) ㆍ 허헌지(許獻之)가 서울에서 와서 눌러 두어 순배를 마시고 파하였다.

갑신일에 새벽밥을 먹고 복령사(福靈寺)에 이르니, 불전에 십육 나한(羅漢)이 있는데, 원 나라 사람이 만든 소상(塑像)으로, 정교(精巧)함이 짝이 없다. 천마산(天磨山) 서록(西麓)을 따라 북으로 돌아서 회령(檜嶺)을 넘는데, 노상에서 피곤하고 목말라 견딜 수 없기로, 말에 내려 시냇가에 앉으니, 나무 그늘이 짙고 찬물이 맑고 조촐하여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손을 모아 물을 받아 미숫가루를 타서 마셨다. 이로부터 산길이 험준하여 덩굴을 부여잡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니, 사람이나 말이 모두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박연(朴淵)의 동구에 당도하니, 이 골짜기가 옛날에는 숲이 짙어서 사람이 들어가지 못했는데, 지금은 다 베어내어 드디어 한길이 되었다. 박연은 천마 성거(聖居) 두 산 사이에 있는데, 두 산은 높다랗게 서로 대치하여 칼과 창을 꽂는 듯하여 바라보기에 그림과 같고, 산이 끊어져 형세가 막히자 급한 벽이 동떨어져 깎은 듯이 천 길이나 솟았다. 그 위에 석담(石潭)이 있어 물이 모여 못이 되었는데, 넓이는 수십 자나 되며 형상은 쇠꽹이[?]와 같고, 물빛은 맑고 푸르러서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으나, 그 밑바닥이 보일만한 한 복판에 돌이 우뚝 솟아서 수십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못물이 넘어서 폭포가 되어 절벽에 떨어지는데, 완연히 은하수가 거꾸로 걸린 것 같으며, 구슬을 뿜고 눈을 날리어 바위 골짝을 들썩이니, 소리가 성낸 우fp와 같아서 해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이루 말할 수 없다. 기지(耆之)가 감탄하여 하는 말이, “조물주가 이 지경까지 이를 줄은 몰랐다. 만약 와보지 않았다면 참으로 항아리 속에 해계(?)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였다. 비탈을 인연해서 구부러진 소나무가 거꾸로 드리워 있으므로 종자(從者)가 원숭이마냥 붙어서 내려다보는데 머리칼이 솟고 혼이 떨리어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돌 위에는 구경을 온 사람들의 성명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옛적에 박씨란 성을 가진 선비가 못 위에서 젖대를 불다가 용녀(龍女)에게 끌리어 못 속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아니하니, 그 아내가 부르짖으며 울다가 언덕에 떨어져 죽었다. 그 때문에 위는 박연이라 하고 아래는 고모담(姑母潭)이라 한다.”고 한다. 고려 문종(文宗)이 일찍이 돌 위에 오르니 용이 그 돌을 흔들기로 이영간(李靈幹)이 축법(祝法)으로 용을 쳐서[鞭龍] 못 물이 다 붉어졌다. 그들이 곧 못 한가운데 있는 이 돌이다. 수십보를 올라가니 돌부처 둘이 바위 구멍에 앉아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은 달달박박(??朴朴)이요, 서쪽에 있는 것은 노힐부득(?夫得)이다. 관음사(觀音寺)에 당도하니, 이 절은 곧 우리 태조 잠저(潛邸) 시절의 원찰(願刹)인데 목은(牧隱)이 기()를 지었다. 절 뒤에 굴이 있어 깊고 넓으며, 그 속에 석대사(石大士)가 있는 고로 이름이 된 것이다. 골짜기 속에는 수석이 기절한데 날이 저물어져서 두루 구경을 못했다. 절 앞에는 반석이 있어 앉을 만하고 흐르는 물이 돌아서 돌을 부딪치어 소리가 요란하다. 드디어 술을 가지고 그 위에서 서로 마시며 관솔을 피우고 연구(聯句)를 지어 쓰는데, 이윽고 동산에 달이 올라 빛이 골짝에 퍼지니 대낮과 같이 밝았다. 태허(太虛)는 글귀를 만들어내기에 곤하여 돌 위에 가로 누웠고, 경숙(磬叔)은 관망을 벗고 이마를 내놓고 산보하며 서성대고, 헌지(獻之)는 무릎을 안고 속으로 읊조리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 같으며, 여회(如晦)는 잔을 들고 마시기를 인도하여 망설이지 아니하고, 세원(世源)은 취하지 아니하여 옷자락을 정제하고 앉았다. 구공(具公)은 크게 취하여 거문고를 만지는데 기발한 태도가 드러나고, 기지(耆之)도 또한 잡고 자주 놀리는데 청아하여 들을 만하고, 희인(希仁)은 흥에 겨워 저도 모르게 앞으로 기어들고, 자진(子珍)도 취해서 거문고를 빼앗아 타는데 자못 가락에 맞지 아니하니, 구공(具公)이 말하기를, “예술을 배우는 자는 부끄럼이 없으면 성공할 수 있으니 그대의 거문고가 마침내 대성하겠다.”고 하자 온 좌중이 절도하였다.

을유일에 운거사(雲居寺)에 당도하니 서쪽 방에 달마(達磨)의 상이 있고 송() 나라 맹홍(孟珙)이 상에 대한 찬을 지었는데, 원 나라 지정(至正) 연간에 쓴 것이다. 드디어 산을 끼고 거닐어서 불회사(佛會寺) 동구에 당도하니, 경력(經歷) 임군(林君)이 하마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서 물가 언저리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꿩과 토끼를 사냥하고 작은 생선을 그물질하여 실컷 마시고 돌아왔다. 저물녘에 광명사(廣明寺)를 찾아드니 이 절은 바로 고려 태조의 고기(故基)로 도선(道詵)의 지장을 심던 땅이라고 한다. 절 앞에 우물이 있는데 사람들의 전설에, “용녀(龍女)가 노닐던 곳.”이라고 한다.

병술일에 아침비가 잠깐 개었기에 모두 경장(輕裝)과 단복(短服)으로 탄현문(炭峴門)을 나가서 오관산(五冠山) 동구에 도착하니, 푸른 비탈이 에워싸고 돌샘이 동그랗게 패었는데, 척촉꽃 그림자가 물에 거꾸러진 곳이 화담(花潭)이다. 수십 보를 거닐어보니 굉장한 바위가 있어 옷 주름이 쌓이듯이 쭈그려지고 기괴하여 형언할 수 없는 것이 추암(皺巖)이니, 최 태위(崔太尉)가 눈 속에서 소를 타던 곳이다. 동쪽 봉우리에 돌이 있으니 공중에 떠서 홀로 선 것이 있는데 이름은 고암(鼓岩)이다. 영통사(靈通寺)에 당도하니 절이 오관산(五冠山) 아래 있는데, 동부(洞府)가 심수하고 전우(殿宇)가 굉장하여 묵은 비갈(碑碣)이 있으니, 바로 문종의 아들 석() ()의 공덕비이다. 김부식(金富軾)이 글을 짓고 오언후(吳彦侯)가 썼다. 절 앞에 토교(土橋)의 유지(遺址)가 있는데, “고려 시대에 술가(術家)의 말을 존숭하여 지맥(地脈)을 연결시키고자 하여 시냇물 위로 쌓아 올렸다.” 한다. 서편에 다락이 있는데, 돌을 쌓아올려 기지(基址)를 만들었다. 시냇물이 돌아 얽히고 나무 그늘이 짙게 쌓여 비록 한창 더운 때라도 상쾌한 기분이 사람에게 스며들었다. 벽상에 양촌(陽村) ㆍ 진일(眞逸) ㆍ 석월창(釋月窓) 등의 시가 있다. 돌아와 귀법사(歸法寺) ㆍ 전계사(前溪寺)에 당도하니, 이는 광종(光宗)이 창건한 절이다. 목종(穆宗)이 강조(康肇)에게 핍박을 당하게 되자, 태후(太后)를 데리고 말고삐를 잡고 달려서 이곳에 와 유숙하였다. 중엽(中葉) 이후로는 문사(文士)가 유생(儒生)들을 모아 놓고, 매년 여름에 일과(日課)를 시작하여 시를 비교하여 이름을 붙였고, 또 신우(辛禑)가 많은 기생을 데리고 와 물속에서 노닐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절이 폐 한지 아마 오래라, 부서진 기왓장과 무너진 담장 밖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서로 더불어 개천가 돌 위에 앉아서 희롱삼아 주령(酒令)을 만들어 벌()을 표시한 산가지가 수북하도록 실컷 마시고 돌아왔다. 이날에는 인희(仁希)와 구공(具公)은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정해일에 유수(留守) 상공(相公)을 모시고 용둔평(庸遁坪)으로 사냥을 구경가서, 물가에다 막을 치고 있었다. 오후에 사냥을 마치고 내려와 각기 잡은 것을 쌓으니, 자리 앞에 가득하였다. 저물녘에 태평관(太平館)에 돌아오니, 경력(經歷) ㆍ 도사(都事) ㆍ 찰방(察訪)이 전별(餞別) 잔치를 베풀었다. 마침 악공(樂工) 몇 사람이 서울로부터 왔는데 모두 시의 명수로서 여러 가지 풍악이 맞아 울려, 소리가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듯하였다. 술이 얼근하여 경력(經歷)이 종이를 내놓고 시를 청하여, 몹시 까다롭기로 각기 한 편을 짓고 유숙하였다.

무자일에 승제문(承濟門)을 나와 20여 리를 걸어서 경천사(敬天寺)에 당도하니, 절이 화재를 입어 겨우 방 한 칸만이 남았다. 뜰 가운데 돌탑이 있어 광명한 모습이 옥과 같은데 높이는 13층이요, 12회상(會相)을 조작하였는데, 더할 수 없이 정교(精巧)하여 거의 인력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절은 바로 기황후(奇皇后)의 원찰(願刹)이요, 탑도 중국 사람의 소작인데 바다를 건너와 여기 세웠다. 나라 형세가 불안한 즈음에도 총애하는 여인에게 혹하여, 백성의 힘을 빼서 이와 같이 쓸데없는 짓만 일삼았으니, 국운이 장구하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중이 소장한 보주(寶珠)와 장번(長幡)을 내보이는데, 구슬이 직경(直徑)은 두어 치나 되어 광채가 사람에게 비치고, 휘장[]도 또한 금실로 짜서 만들었다. 모두 당시에 기황후가 시주한 것이다. 또 탈탈(脫脫) 승상(丞相)의 화상을 내놓는데, 하마 발이나 탈락하여 식별할 수 없게 되었다. 병악(餠岳)의 남쪽에 당도하니, 행궁(行宮)의 옛터가 있는데 곧 이른바 장원정(長源亭)이다. 병악의 서쪽 두어 마장 거리에 끊어진 언덕이 나직이 바다를 베고 있는데, 언덕 위는 평탄하여 사초(莎草)가 깨끗하고 작은 봉이 동떨어져 바다를 끼고 있어서, 당두(堂頭)라고 말하는데, 뱃사람이 신()에게 제사하는 곳이다. 벽란강(碧瀾江)이 북으로부터 남으로 와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은 예성강(禮成江)이요, 한수(漢水)와 낙하(洛河)가 교류(交流)하여 서로 바다에 쏟는 것은 조강(祖江)인데, 당두(當頭)가 정히 그 요충(要衝)에 자리 잡고 있다. 가깝게는 교동(喬桐) ㆍ 강화(江華) 해상의 여러 도시가 잠기락 뜨락 하고, 멀리는 연안(延安) ㆍ 해주(海州)의 지경에 수양산(首陽山) 및 여러 산이 역력히 헤아릴 수 있다. 이날에 구름과 연기가 엷게 끼어 경면(鏡面)이 씻은 듯한데, 남북의 크고 작은 배들은 바다를 덮어오고, 지는 해도 거꾸로 빛을 쏘아 금물결이 넘실거리며 조망(眺望)이 활짝 열려 거리낌이 없으니, 비록 군산(君山) 동정호(洞庭湖)의 장관으로도 이보다 나을 것이 없을 줄로 생각된다. 풍덕 군수(?德郡守) 송숙기(宋叔琪)가 사악(?)과 더불어 마중을 와서 술상을 차렸는데, 반찬이 매우 좋아서 각각 잔을 돌려 서로 권하며 가득 부어 마시어 크게 취하였다. 저물녘에 풍덕으로 가는데, 사람을 시켜 호각을 불고 앞을 인도하게 하여 횃불이 두어 마장을 뻗쳤다.

기축일에 경숙(磬叔) ㆍ 기지(耆之) ㆍ 자진(?)은 떠나서 서울로 돌아가고, 헌지(獻之) ㆍ 태허(太虛)는 주인에게 끌려서 사악(?)과 더불어 대교(大橋)에 가서 고기 노는 것을 구경하고, 나는 일이 있어 장단(長湍)으로 향했다.

임진일에 서울에 돌아오니 모두 열흘이 차지 않았는데, 송경 같은 아름다운 땅을 거의 두루 구경하게 되었다. , 모두 공무에 매인 몸으로 방외(方外)에 노닐 기회를 얻어 평소의 소원을 풀었으니, 어찌 우리들이 경행(慶幸)이 아니겠는가. 다만 관람에 몰리어 지키는 바를 상실한다면 이는 옛사람의 경계하는 바이니, 우리들의 놀음이 너무도 안일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지나온 노정(路程)을 기록하고 또 우리들의 허물을 써서 스스로 고치기를 힘쓰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