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 제14하
임인년 공민왕 11년(원 순제 지정 22, 1362)
춘정월 왕이 복주에 있었다.
○ 총병관 정세운과 도원수 안우 등이 홍두적을 크게 쳐부수고 경성을 수복하였다.
17일(갑자)에 안우ㆍ이방실ㆍ황상(黃裳) 황석기(黃石奇)의 아들이다.ㆍ한방신(韓方信)ㆍ이여경(李餘慶)ㆍ김득배ㆍ안우경(安遇慶)ㆍ이귀수(李龜壽)ㆍ최영 등 여러 장수들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송경(松京) 보정문(保定門) 밖 3리에 있다. 에 둔쳤다. 정세운이 그들을 독려하여 나아가 경성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와 도솔원(兜率院) 임진도(臨津渡) 동쪽 기슭에 있다. 에 둔쳤다. 이때 마침 진눈깨비가 내렸으므로 적들이 방비를 허술히 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여경이 숭인문(崇仁門) 송경의 동문(東門)이니 학교(鶴橋) 동쪽에 있으며 속칭 동대문이다. 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휘하 호군 권희(權僖)가 염탐하여 알려 주기를,
“적의 정예 부대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으니, 불의(不意)에 공격한다면 승리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때에 적들이 성 가운데 채(寨)를 쌓고 방어하며 지켰으므로 여러 군사들이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하였다. 영해인(寧海人) 박강(朴强)이 말에서 내려 널판쪽을 지고 나아가서 사다리를 만들어 타고 올라가서는 칼을 뽑아들고 큰 소리로 호통을 치니, 채에 올라와 있던 적들이 모두 겁을 내어 채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박강이 따라 내려가면서 마구 난도질하여 수십 명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사들도 뒤를 잇따라 쳐들어가서 채문(寨門)을 쳐부수어 열었다.
18일(을축) 동틀 무렵에 권희가 다시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돌격하면서 북 치고 함성 올리며 분격(奮擊)하니, 적의 무리들이 놀라 허둥대는 것을 여러 장수들이 사면에서 휘몰아 공격하였다. 우리 태조는 휘하의 친병(親兵) 2천 명으로 앞장서서 크게 적을 무찔러 해질 무렵에는 적의 괴수 사류(沙劉)ㆍ관선생(關先生) 등을 목베니, 적의 무리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밀치고 짓밟혀서 죽어 자빠진 시체가 성에 가득하였다. 적의 수급 10여 만을 베고, 원 황제의 옥새(玉璽) 2개, 금보(金寶) 1개, 옥인(玉印) 3개, 금ㆍ는ㆍ동의 인장, 금ㆍ은의 그릇, 패면(牌面) 등의 물건을 노획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궁한 도적을 다 잡을 수는 없다.”
하고, 숭인문ㆍ탄현문(炭峴門) 동문(東門)을 회창문(會昌門)이라 하며, 속칭 탄현문으로 현성사(賢聖寺) 북쪽에 있다. 을 열어 주었다. 적의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 등 10여만 명이 달아나서 압록강을 건너 쫓겨갔다. 파두반은 달아나다가 요양 행성(遼陽行省)의 동지(同知) 고가노(高家奴)에게 사로잡혀 죽고, 드디어 적이 평정되었다.
성을 공격하던 날, 적들은 비록 형세가 궁해졌으나 진루(陣壘)를 구축하여 굳게 지켰는데, 저물녘에 우리 군사들이 진격하여 포위를 좁혀갔다. 태조는 길가 어느 집에 쉬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들이 포위를 헤치고 달아나므로 태조가 말을 달려 추격하여 동문까지 이르렀다. 우리 군사와 적들이 성문에서 서로 뒤범벅이 되어 싸우니 문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뒤미처 온 적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뒤를 찔러 형세가 매우 다급하였으나 태조는 칼을 뽑아 앞의 적 7~8인을 무찌르고, 말을 탄 채 성을 뛰어넘었다. 그런데 말이 넘어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 김용이 왕의 교지라 거짓 꾸며서 안우등에게 총병관 평장사 정세운을 죽이게 하였다.
김용이 본래 정세운과는 사이가 나빴고 또 안우ㆍ김득배ㆍ이방실 등이 큰 공을 세워 왕의 신임이 두터워질까 두려워하여, 안우 등에게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는 이를 죄로 몰아서 그들을 다 죽이려 하였다.
22일(기사)에 김용이 왕의 교지를 거짓으로 꾸며 글을 만들어서 자기 조카인 전 공부 상서(工部尙書) 김림(金琳)을 시켜 은밀히 안우 등을 꾀어 정세운을 처치하도록 하면서,
“정세운이 본래부터 공경들을 시기하였으니 적을 무찌른 뒤에는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하여 먼저 도모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에 안우와 이방실이 김득배의 장막(帳幕)에 나아가 말하기를,
“이제 정세운이 적을 겁내어 진격하지 않고 김용의 서신이 또 이와 같으니, 그의 말을 좇아 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니, 김득배가 말하기를,
“이제 겨우 적을 평정하였는데 어찌 서로 죽여 없애겠소? 옛날 양저(穰?)가 독단으로 장가(莊賈)를 목베었으며 위청(衛靑)이 소건(蘇建)을 죽이지 않은 것은 고금의 밝은 거울이니, 삼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만일 부득이한 일이라면 왕의 궁궐 앞에 붙잡아 가서 왕의 처리를 받는 것이 옳지 않겠소?”
하니, 안우와 이방실이 일단 물러갔다가 밤중에 다시 와서 말하기를,
“정세운을 목베라는 것은 왕명이오. 이제 우리들이 전공(戰功)을 이루고도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는 그 후환(後患)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소?”
하였으나, 김득배는 그러한 짓이 결코 옳지 않다고 굳이 고집하였다. 그러나 안우 등은 기어코 행하려 하여, 이에 술을 장만하여 놓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오라 해서 그가 이르자, 안우 등이 장사들에게 눈짓하여 그 자리에서 쳐죽였다. 홍언박(洪彦博)이 정세운(鄭世雲)의 죽음을 듣고 말하기를,
“총병이 군사를 출동할 적에 언동이 너무 오만하였으니 그가 이렇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였다.
23일(경오)에 정세운의 노포(露布 포백(布帛)에 써서 널리 알리는 전승보(戰勝報)) 가 행재소에 이르니,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정세운에게 의복과 술을 하사했는데, 이때 다시 정세운이 죽었다는 변고를 듣고 크게 노하여 장차 군사를 풀어 정세운을 죽인 자들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조금 뒤에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의 죄상을 진술한 서신을 보고서는 왕이 도리어 기뻐하면서 사자를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고 빨리 개선하라고 독촉하였다.
이색(李穡)은 이렇게 적었다.
정세운은 비상한 사람이었다. 임금 섬기기를 충성으로 하여 일찍이 조금이라도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 아부한 적이 없었고, 뜻을 확고히 지녀 조금이라도 바꾼 적이 없었다. 신축년(1361)에 왕이 복주까지 피난갔을 적에 정세운이 분개하여 싸우기를 청하여서, 한 달 동안에 종묘 사직을 다시 안정시켰으니, 그의 훌륭함은 현묘(顯廟) 때의 강시중(姜侍中 강감찬(姜邯讚)을 말한다)과 맞먹는다 하겠다. 그런데 강시중이 개선하였을 적에는 현묘가 친히 성밖까지 나가서 맞이하였으니, 이제 정세운의 불행은 현릉(玄陵 공민왕을 말한다)으로서는 상심(傷心)할 일이다. 하늘이 무슨 까닭으로 그리하였을까? 아, 슬프도다.
【안】《성호사설(星湖僿說)》에 이렇게 되어 있다.
김용이 왕의 교지를 빙자하여 세 원수(元帥)를 죽였으니, 왕의 교지를 빙자하여 흉악한 짓을 한 그의 죄는 참으로 크다 하겠다. 안우와 이방실은 말할 여지도 없겠지만 김득배에 있어서는 다만 바른말로 직간(直諫)하다가 차라리 같이 임금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차마 죄없는 자에게 칼을 들이대지는 않았어야 할 것이다. 홍두적을 토벌하는 이번 전쟁에 네 사람이 같이 일을 하였지만 실상은 정세운이 주장하였다. 그러니 참으로 공을 시기하는 마음이 없었던들, 분명찮은 서신 한 장으로 인하여 불의(不義)를 자행한 것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직 먼저 편벽된 소견에 얽매임이 있었기 때문에 물욕(物慾)에 가리어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김용의 계략에 세 사람이 빠지게 된 것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들마저 화를 면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김득배의 김해군시(金海郡詩)를 보니, 대개 공명(功名)을 자랑한 것이었다. 그 시에 이르기를,
분성을 와서 관리한 지 20년에 / 來管盆城二十春
당시의 부로들은 반이나 진토되었네 / 當時父老半爲塵
서기로부터 원수가 되었으니 / 自從書記爲元帥
손가락을 꼽아 본들 나 같은 이 몇일런가 / 屈指如余有幾人
하였다.
○ 홍여하(洪汝河)는 이렇게 적었다.
1월 18일(을축)에 적을 쳐부수었고, 22일(기사)에 세 원수가 정세운을 죽였고, 23일(경오)에 정세운의 노포(露布)가 행재에 이르렀다면, 김용의 편지 사건은 승첩(勝捷) 이전에 있었던 일이라 하겠다. 그러니 설사 왕의 교서라 하더라도, 왕은 아직 그들이 성공할는지의 여부를 모르고서 어떻게 죽이라 하였겠는가? 여러 장수들도 이 교서를 보았으면 왕에게 은밀히 아뢰었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정세운이 본래부터 그대들을 시기하였으니 그대들이 먼저 도모하지 않겠느냐?’ 한 것은 김용의 본심이 다 드러났다 하겠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의심을 갖지 않고 문득 주장(主將)을 죽였는가? 세 원수는 만세를 두고 그 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2월 조소생이 납합출(納哈出)을 이끌고 와서 동북면에 침구하였다.
이때에 원의 조정은 정치가 어지러웠다. 이에 오랑캐 납합출이 심양 등지를 차지하고서 행성 승상(行省丞相)이라고 자칭하였다. 조소생ㆍ탁 도경 등이 이미 쌍성을 빼앗기고는 본국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납합출을 유인하여 삼살(三撒) 지금의 북청(北靑) 과 홀면(忽面) 지금의 홍원(洪原) 등지에 침구하였다.
○ 환자(宦者) 고용보(高龍普)가 복주되었다.
고용보가 원에서 세력을 잃자 본국에 돌아왔는데, 조일신(趙日新)의 반란 때에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고 드디어 중이 되어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 있는 것을, 왕이 중승(中丞) 정지상(鄭之祥)을 보내어 그를 목베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충혜왕이 붙잡힐 적에 고용보가 내응하였기 때문에 이 형벌이 있었다.”
한다.
○ 왜가 악양현(岳陽縣) 지금은 진주(晋州)의 속현으로 진주 서쪽 1백 21리에 있다. 을 분탕질하였다.
○ 왕이 복주(福州)를 출발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렀다.
25일(신축)에 복주를 출발하여 27일(계묘)에 어가가 상주에 이르렀다.
목사 최재(崔宰)가 공진(供進)하는 것은 모자람이 없었으나 선사하는 물건이 없었기에 좌우의 신하들로부터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받아 드디어 파면되었다.
○ 도원수 안우와 원수 이방실ㆍ김득배를 죽였다.
안우 등이 함창(咸昌)에 이르렀을 적에 왕은 대신 가운데서 계획이 있는 자를 뽑아 보내서 그를 맞아 비상(非常)한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하게 하였다. 이에 시중 유탁(柳濯)을 보냈다. 유탁이 함창에 이르러 꿇어앉아서 술을 올리면서 원수가 서서 마시기를 청하니, 안우가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유탁이 말하기를,
“이제 공(公)이 삼한(三韓)을 수복하였습니다. 내가 감히 관직의 지위를 마음에 두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렸다.
29일(을사)에 안우가 개선하여 행궁에 나아가 알현(謁見)할 적에 김용이 목인길(睦仁吉)에게 인도하게 하고 안우가 중문(中門)에 이르자, 문 지키는 자를 시켜 안우의 머리를 철퇴로 쳤다. 그러나 안우는 얼굴빛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차고 있던 주머니를 세 번이나 가리키면서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조금만 늦추어다오. 원컨대, 임금 앞에 나아가서 주머니 속의 서신을 바치고 죽임을 받겠다.”
하였으나 철퇴 든 자가 다시 쳐서 죽이고 그 시체를 뜰에 끌어내렸다. 왕은 안우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전지(傳旨)하기를,
“너희들이 제멋대로 정세운을 죽였으니 마땅히 목을 베어 죽일 것이로되 이제 너를 목베지 않는 것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였다. 안우가 가리킨 주머니 속의 서신이란 곧, 안우 등을 속여서 정세운을 죽이게 한 김용의 서신이었다.
김용은 또 김림(金琳)이 자기의 음모를 누설시킬까 염려하여 먼저 김림을 목 베었다. 그리고 왕에게 보고하기를,
“안우 등이 멋대로 주장을 죽였으니 이는 전하를 염두에도 두지 않은 것으로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왕은 안우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안우의 어린 아들이 벌거벗은 채로 길가에 섰는 것을 보고 애처롭게 여겨 그를 불러서 금중(禁中)에 머물게 하였다가 그가 갈 만한 곳을 물어서 돌려보냈다. 이에 안우의 휘하 장사들이 모두 놀래어 달아나려 하자 왕이 그들을 불러 주식(酒食)을 주며 위로하였다.
김용이 다시 교지(敎旨)를 선포하면서 방시(榜示)하기를,
“안우 등이 충성하지 못하여 제마음대로 정세운을 죽였기 때문에 그는 이미 죄를 받았다. 김득배와 이방실을 붙잡아 오는 자가 있으면 중한 상을 준다.”
하고, 대장군 오인택(吳仁澤), 만호 박춘(朴椿)ㆍ김유(金庾)ㆍ정지상(鄭之祥) 등을 나누어 보내서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날 이방실이 행재소에 나아가려고 용궁현(龍宮縣)까지 왔었는데, 박춘이 그곳에 와서 왕의 교지가 있다고 일컬으니, 이방실이 뜰에 내려가서 꿇어앉자 오인택이 칼을 뽑아 그를 쳤다. 이방실이 곧 넘어져서 기절하였다가 한참 만에 다시 깨어나서 담을 넘어 도망가자 박춘이 그를 쫓아가 붙잡고, 정지상이 뒤에서 다시 쳐서 죽였다.
김득배는 기주(基州) 지금의 풍기(?基) 까지 와서 변이 있었음을 알고, 따르는 기병 두어 명을 데리고 도망쳐 산양현(山陽縣) 지금은 상주에 속한다. 상주 북쪽 63리에 있다. 선영(先塋)의 곁에 숨었다. 이에 김득배의 아내와 자식들을 옥에 가두고 국문을 하니, 그의 사위인 직강(直講) 조운흘(趙云?)이 장모에게 말하기를,
“사실대로 말을 하여 고초를 당하지 마소서.”
하니, 그 장모가 한참 동안 참고 견디다가 마침내 사실대로 고하였다. 그리하여 3월 1일(정미)에 김유ㆍ박춘ㆍ정지상 등이 김득배를 붙잡아 목베어 상주(尙州)에서 효수(梟首)하니 보는 자들이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안우는 탐진인(耽津人)이고, 김득배는 상주인이고, 이방실은 함안인(咸安人)이다. 김득배는 과거를 보아 진출한 자였다. 그의 문생(門生)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鄭夢周)가 왕에게 간청하여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는데 그 제문에,
“홍두적이 쳐들어와서 임금이 피난하였을 적에 공(公)이 만번 죽음을 무릅쓰는 계책을 세워서 삼한(三韓)을 회복하는 큰 업을 이루었으니, 비록 죄가 있더라도 공(功)으로 죄를 덮었어야 할 것이요, 만일 죄가 공보다 더 무거우면 반드시 그 죄를 승복(承服)시킨 뒤에 목을 베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말[馬]에 땀이 마르기도 전에, 개가(凱歌)가 끝나기도 전에, 태산 같은 큰 공을 세운 분이 칼날 밑에서 피로 물들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게 묻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것을 듣는 이들은 그를 의롭게 여겼다.
안우와 이방실의 아들들은 나이 겨우 10여 세였다. 그들이 저자로 돌아다니니,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그들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오늘날 편안하게 침식(寢食)하는 것은 모두 세 원수의 공이다.”
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들까지 있었다.
오씨(吳氏)는 이렇게 적었다,
하늘을 떠받는 큰 공훈이 있는 세 원수가 모두 김용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런데도 왕은 이를 반성하여 깨닫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마 하늘이 왕씨(王氏)를 싫어하여 그의 총명을 빼앗아서 멸망을 재촉하는 조짐을 싹트게 함이 아니었을까. 일찍이 관찰하여 보건대, 위기를 당하여 난리를 평정할 적에는 장수에 주의(注意)하게 된다. 그런데 공(功)이 온 세상을 덮은 자로서 도리어 의심을 받고 시기를 당하고, 소인들이 이러한 틈을 타서 귀신과 물여우 같은 짓을 하여 ‘군사를 데리고 반역을 도모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군사의 마음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여 반드시 손으로 장성(長城) 같은 장수를 죽이게 하니,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마저 삶아 죽이는 격으로 나라가 따라서 멸망한다. 앞 수레가 이미 엎어졌으니 뒷수레가 엎어질 것은 고금(古今)이 동일한 법칙이어서 오직 저 혼미하고 용렬한 공민왕은 구태여 깊이 책망할 것도 못된다. 그러나 당시에 시종하던 신하로서 이암ㆍ유탁ㆍ홍언박 등 여러 사람이 어찌 모두 적(賊) 김용의 도당들이기야 했겠는가마는 한 사람도 말 한 마디 내어 임금을 깨우치는 이가 없었다. 이는 오히려 세 원수의 아들들에게 서로 물건을 주어 은공을 갚으려는 시정인(市井人)들만도 못함이니, 아, 슬프다.
유씨(兪氏)는 이렇게 적었다.
김용의 계교가 본래 간악하고 묘해서, 왕이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왕은 본래 잔인하고 시기심이 많은 임금으로서 평소에 김용을 심복으로 대하였었다. 이제 여러 장수들이 세상에 뛰어난 큰 공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의구심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김용과 더불어 그들을 억제하는 방법을 비밀히 의논하여, 김용으로 하여금 왕의 마음을 엿보아 헤아리게 한 것이다. 그러기에 김용이 틈을 만들어서 간악한 짓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김용을 죽일 적에 왕이 눈물을 흘려서까지 김용을 생각하였겠는가. 당시의 일을 대략 짐작할 만하다.
【안】 김용이 세 원수를 죽였는데도, 김용이 죽였다고 쓰지 않은 것은 죄를 왕에게 돌리려는 뜻에서이니, 유씨의 의론이 대개 그 실정(實情)을 얻었다 하겠다.
3월 평장사 이공수(李公遂)를 보내어 경성을 수비하였다.
이때의 경성은 궁궐과 여항이 모두 폐허가 되고, 백골(白骨)이 산더미처럼 쌓였었다. 그러자 이공수와 참지정사 황상(黃裳), 추밀 김희조(金希祖) 등에게 명하여 경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이인복을 명하여 국사실록(國史實錄)을 수습하니 겨우 세 궤짝에 10여 상자만 남아 있었다. 이공수가 재능 있는 이를 뽑아서 일을 맡기고, 유민(流民)들을 안정시키며 생도들을 교육시켰다.
○ 사유하고 행궁에서 대포(大? 임금이 신하들에게 크게 주식(酒食)을 내리는 일)하였다.
전쟁에 나갔던 장수와 군사들을 위로함이다.
○ 지진이 있었다.
○ 다시 관제(官制)를 개정하였다.
다시 원조(元朝)와 교통을 하였기 때문에, 관직이 외람되게 상국(上國)과 비슷한 것을 개정하여 대충 충렬왕 때의 옛 관제와 같이 하였는데, 예부(禮部)를 예의사(禮儀司), 공부(工部)를 전공사(典工司), 육부(六部)를 모두 판서(判書), 한림원(翰林院)을 예문관(藝文館), 사관(史館)을 춘추관(春秋館), 학사(學士)를 모두 제학(提學)이라 일컬었다.
○ 이암(李?)이 면직하니, 유탁(柳濯)을 좌정승으로, 유숙(柳淑)을 지도첨의사로 삼았다.
유숙은 연경(燕京) 왕저(王邸)에 있을 때부터의 옛 신하였기 때문에 왕에게 친근하고 믿는 바가 되어서, 항상 측근에 있었다. 처음에 안우 등이 정세운을 죽이고 말하기를,
“이미 총병관(摠兵官)은 죽였지만 유숙이 중앙에 있으면서 매양 기묘한 계책을 잘 내니 두려운 존재다.”
하였다. 유숙이 이 말을 듣고 왕에게 고하기를,
“여러 사람의 노염은 대적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여러 장수들이 신을 시기하는 것은 다만 신이 전하의 측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신을 내보낸다면, 신은 하나의 포의(布衣)일 뿐이리니 누구의 입에 다시 오르내리겠습니까?”
하여, 나가서 동경 유수(東京留守)가 되었었는데, 이때에 다시 불러들인 것이다.
하4월 경성의 큰 우물에 흐린 물이 용솟음쳤다.
○ 복주를 승격시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하였다.
왕이 복주에 머물러 있을 적에, 복주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여 공궤를 올렸고, 마침내는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경도를 수복하였기 때문에 승격시킨 것이다. 또 수원(水原)이 먼저 적에게 함락되었기 때문에 주군(州郡)들이 감히 적의 예봉(銳鋒)을 꺾지 못하였다. 그런데 조그마한 고을이지만 오직 안성(安城)만이 계획을 세워 적을 섬멸하였으므로 적이 감히 남쪽으로 더 내려오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수원은 급을 내려 군으로 하고 그에 속해 있던 4부곡(部曲)을 덜어내어 안성에 예속시켜 안성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 우리 태조를 동북면 병마사로 삼았다.
이때에 납합출(納哈出)의 노략질이 날로 심해져서 지휘사 정휘(鄭暉)가 여러 번 나가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자, 우리 태조를 보내자고 청하였으므로 드디어 태조를 병마사로 임명하여 보냈다.
5월 성(省)의 낭관(郞官)들에게 명하여 6품 이상으로서 외직을 맡을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대간이 아뢰기를,
“비록 대간과 정조(政曹)에서 수령(守令)을 보거(保擧)하라는 명이 있습니다만, 모두 안면과 정실에 따라 천거하는 형편입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천거된 사람을 인견(引見)하시어 천거된 자가 적격자가 아닐 경우에는 천거한 자를 반드시 책벌(責罰)하소서.”
하니, 왕이 그를 좇았다. 그래서 왕이 죽을 때까지 자주 재상들에게 명을 내려 각기 수령이될 만한 자를 천거하게 하였다.
6월 혜성(彗星)이 자미원(紫微垣)에 나타났다.
○ 사신을 원에 보내어 홍두적 평정한 일을 고하였다.
추7월 우리 태조가 납합출을 동북계에서 크게 무찌르니, 납합출이 도망하였다.
납합출이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탁도경ㆍ조소생 등과 홍원(洪原)의 달단동(??洞) 홍원현의 남쪽 30리에 있다. 에 둔쳤는데, 우리 태조가 그들의 선봉 1천여 인을 덕산동평(德山洞坪) 함흥부(咸興府) 동쪽 40리에 있다. 에서 만나 쳐서 쫓고 함관령(咸關嶺)ㆍ차유령(車踰嶺) 모두 함흥부 동북쪽 70여 리에 있다. 을 넘어 추격하여 거의 섬멸하였다. 이날 태조가 후퇴하여 답상곡(答相谷) 함흥부 동북쪽에 있다. 에 둔쳤다. 납합출이 성이 나서 덕산동에 옮겨 둔치자, 태조가 밤을 틈타서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패주시키니, 납합출이 다시 달단동으로 돌아갔다. 태조도 다시 물러나와 사음동(舍音洞) 함흥부 동북쪽 25리에 있다. 에 둔치고 척후병(斥候兵)을 보내니 척후병이 차유령에 이르자, 적들이 산에 올라와서 땔나무를 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척후병이 이를 태조에게 보고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병법에 마땅히 약한 데를 먼저 공격하라 하였다.”
하고, 드디어 그들을 공격하여 모조리 사로잡고 목베었다. 그리고 정예 기병 6백 명으로 잇달아 공격하여 차유령을 넘어 영 아래까지 이르니, 적들이 그제야 깨닫고 맞아 싸우려 하였다. 태조가 기병 10여 명을 이끌고 돌격하여 그의 비장(裨將) 한 사람을 쏘아 죽였다. 처음에 태조가 그곳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에게 여러 번 패한 이유를 물으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매번 전투가 한참 무르익을 때면, 쇠 투구에 붉은 기를 장식한 적장 한사람이 창을 휘두르며 돌진해 오는데 그때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쫓겨서 감히 대적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자, 태조가 그 적장을 물색하여 혼자 그를 대적하다가 거짓 패한 체하고 달아나니, 그 장수가 과연 분격하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창을 휘두르는 것이 매우 급박하였다. 이때 태조가 몸을 재빨리 날려서 말 안장에 몸을 붙이니 적장이 중심을 잃고 창에 쏠려 거꾸러지자 태조가 곧 쏘아 죽였다. 그러자 적들이 낭패하여 도망치는 것을 태조가 쫓아가며 공격하여 적의 둔친 데까지 이르렀다가 날이 저물어서 본진으로 돌아왔다. 납합출의 아내가 납합출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천하를 두루 다녀보았지만 어디 저와 같은 장군이 있었습니까? 그러니 마땅히 피해서 속히 돌아갑시다.”
하였으나, 납합출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태조가 함관령을 넘어서 바로 달단동에 이르러 납합출과 대치하여 진을 치자 납합출이 속임수로 말하기를,
“우리가 이곳에 온 의도는 홍두적을 추격하기 위함이었고 귀국(貴國)을 침략하려는 것이 아니었소. 이제 우리는 여러 번 싸우다가 패하여 군사 1만여 명을 잃었소. 그러니 전투를 끝낸다면 명령대로 따르겠소.”
하였다. 그때는 적의 형세가 매우 강성한 때이기에 태조는 그들의 속임수임을 짐작하고 그들을 빨리 항복시키고자 하였다. 그때에 납합출의 곁에 서있는 적장 한 사람을 태조가 활로 쏘니 그 장수가 보기좋게 명중되어 거꾸러졌다. 태조가 다시 납합출의 말을 쏘아 죽이매, 납합출이 다른 말을 바꾸어 타니, 또 쏘아 죽였다. 이리하여 큰 전투가 한참 계속되면서 서로 일진일퇴하였다.
태조가 납합출을 급히 추격하니, 납합출이 급해지자 말하기를,
“이만호(李萬戶 태조를 말한다)여, 우리 두 장수가 무엇 때문에 서로 이다지 핍박하는가?”
하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자 태조가 또 그 말을 쏘아 죽였다. 이때 납합출의 휘하 군사가 자기는 말에서 내리고 그 말을 납합출에게 주어 타게 하였으므로 납합출이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해가 또 저물자 태조도 군사를 인솔하여 물러서면서 스스로 후군(後軍)을 담당하였다. 적장들이 쫓아오자 태조가 연달아 적장 세 사람을 쏘아 죽이고 곧 이어 적의 무리 수십 인을 죽이니,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태조는 철기로 추격하여 적을 유린하니, 적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짓밟혀 죽었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태조가 돌아와 정주(定州) 지금의 정평(定平) 에 둔치고 수일 동안 머물면서 군사를 휴식하게 하였다. 그리고 요충지(要衝地)마다 군사를 매복시키고 군대를 삼군(三軍)으로 나누어서, 좌군(左軍)은 성관(城串) 산 이름이니 함흥부 북쪽 2리에 있다. 을 경유하게 하고, 우군(右軍)은 도련포(都連浦) 곧 도린포(道鱗浦)이니 함흥부 남쪽 35리에 있다. 를 경유하게 하고, 자신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함흥평(成興坪)에서 납합출과 대치하였다.
태조가 단기(單騎)로 용기를 북돋우어 돌진하며 적을 시험하니, 적의 날랜 장수 세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나왔다. 태조가 거짓 패한 체하고 말고삐를 끌어당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곧 달리려는 모양을 하니, 적의 세 장수가 서로 앞을 다투어 추격하여 왔다. 이때 태조가 갑자기 말을 빼어 오른편으로 빠져나와 뒤에서 쏘니, 세 장수가 모두 명중되어 거꾸러졌다. 이어 전전(轉戰)하면서 적을 요충지대로 끌어들여 좌우의 복병이 한꺼번에 내달아 포위 공격해서 적을 크게 쳐부수니, 납합출이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음을 알고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도망하였다. 이에 동북의 변경이 모두 평정되었다.
그전에 환조가 원에 조회하러 갈 적에 납합출이 있는 곳을 지나면서 그에게 태조의 재능을 칭찬하여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납합출이 패전하여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지난날 이모(李某 환조를 가리킨다)의 말이 과연 거짓이 아니었구나.”
하였다. 그 후에 납합출이 사람을 보내 고려 왕에게 통호(通好)하면서, 비고(?鼓 적을 공격할 적에 두드리는 말에 메운 북이다) 하나와 좋은 말 한 필을 태조에게 특별히 보내어 예의를 표하였다. 이는 대개 마음으로 감복한 것이다.
8월 왕이 상주를 출발하여 청주(淸州)에 머물렀다.
이에 앞서 왕은 수원에 행행하여 궁궐을 지으려 하였으나 대신(臺臣)들이 말하기를,
“수원은 지역이 좁고 바다에 접해 있으므로 왜구의 염려가 있으며, 또 지난번에는 홍두적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인심을 보장할 수가 없습니다. 청주는 삼도(三道)의 요충지이므로 양곡을 운반하기에 편리하고 이미 순행(巡幸)할 처소도 준비되어 있으니, 원컨대 어가를 청주에 머무르소서.”
하니, 왕이 이를 좇아서 25일(정해)에 상주를 출발하여 30일(임진)에 청주에 도착하였다.
○ 원주(元主)가 학사 흔도(?都)를 보내어 왕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였다.
○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송경(宋卿)이 파면되었다.
송경이 홍언박(洪彦博)에게 말하기를,
“백성들은 공이 다시 재상이 되기를 바란 지가 오랩니다. 공이 이제 총재(?宰)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한 가지 일도 여망(輿望)에 맞추는 것이 없습니까? 종묘 사직이 적에게 함몰되고 주상이 피난을 떠나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공이 일찍 도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 제주가 배반하여 원에 붙었다.
탐라(耽羅)의 목호(牧胡)ㆍ고독불화(古禿不花)ㆍ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 등이 성주(星主) 고복수(高福壽)와 함께 배반하여 원에 부속하니, 원에서 그곳에 만호관(萬戶官)을 두어 다스렸다.
9월 녹전색(祿轉色)을 두었다.
왕이 파천한 이래로 녹전(祿轉)의 출납을 창관(倉官)에게 맡기지 않고 따로 한 부서를 두었으니 이를 ‘녹전색’이라 하였다. 또 조도(調度)가 넉넉지 못하였기 때문에 민호(民戶)에 차등을 두어 쌀ㆍ콩ㆍ팥 등을 거두어들이면서 이름을 ‘무단미(無端米)’라 하였는데 백성들이 매우 괴롭게 여겼다.
행궁에서 수요(需要)되는 금과 은이 모자라는데도 왕의 쓰임새는 절도가 없었다. 홍언박이 아뢰기를,
“내탕(內帑)의 저축이 어떻게 경도에 있을 때와 같겠습니까? 그러니 경비를 마땅히 줄여 쓰소서.”
하니, 왕이 한참 바라다볼 뿐 응답이 없었다.
○ 금살도감(禁殺都監)을 두었다.
홍두적이 경도를 함락하고서, 소와 말을 마구 잡아먹어 거의 없어졌으므로 이에 금살령(禁殺令)을 엄하게 내렸다.
동10월 지진이 있었으므로 하교하여 구언(求言)하였다.
7일(무인)에 지진이 있었고, 10일(신사)에 또 지진이 있었다. 이런 재이(災異)가 있으므로 왕이 백관과 수령들에게 명하여, 시정(時政)의 득실(得失)과 민간의 이해(利害)를 진언하게 하였다. 감찰 대부(監察大夫) 김속명(金續命), 헌납(獻納) 황근(黃瑾) 등이 상서하기를,
“땅이라는 것은 신도(臣道)의 표상(表象)입니다. 이제 상벌이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소의 신하들이 직무에 태만하기 일쑤이며, 또는 군공(軍功)으로 인하여 백정(白丁)이 갑자기 경상(卿相)으로 임명되기도 하고 조례(?隷)가 외람되이 조반(朝班)에 서기도 하므로 신도가 어지러워져서 지진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청컨대 지금부터 신상 필벌로 명기(名器 작호(爵號)와 거복(車服))를 중히 여겨 아끼소서. 옛날에 선군(選軍)은 전토를 주었으므로 군사가 모두 먹을 것이 넉넉하여 전쟁에 나가기를 꺼리지 않았는데 근자에는 토호(土豪)들이 그 토지를 겸병(兼倂)하여서, 이제는 한 이랑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징발(徵發)할 즈음에 벌써 거의 다 해체되어 버리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적개심을 바라겠습니까? 청컨대 선군에게 전토를 주는 제도를 다시 회복하소서.
좌우 전후가 모두 바른 사람들이라면 임금께서 누구와 더불어 바르지 못한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 날마다 형벌에 처하고 남은 음흉한 무리들과 친압하여, 저속하고 황당 무계한 말을 듣기 좋아하며, 한밤중까지 유흥을 일삼고 한낮까지 늦잠자며 대신들을 멀리하여, 좋은 계획과 바른 의론이 들어올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삼전(三殿)의 환관(宦官)들을 각각 10여 인씩만 남겨 두고 그 나머지는 모두 도태(淘汰)하여 단정한 인사가 항상 좌우에서 전하를 모시게 하소서.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는 오로지 경전(經典)에 있는 것이요, 불서(佛書)로 다스림을 성취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불법을 지나치게 믿으시므로 여러 중들이 이를 인연하여 드나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중들이 궁중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다시 경연(經筵)을 열어 날마다 다스리는 도리를 찾으시며, 항상 성현의 글만 보시고 이단(異端)의 말은 듣지 마소서. 여알(女謁)은 정치를 하는 데 있어 큰 해가 됩니다. 이제 바느질하는 낭자(娘子), 내료(內僚)의 딸로서도 분수에 지나치게 외람되이 옹주(翁主)와 택주(宅主)로 수봉(受封)된 자가 있어서 존비(尊卑)의 체통을 잃고 있습니다. 부득이한 종실(宗室)이나 훈구(勳舊)를 제외하고는 봉작(封爵)하는 일을 허락하지 마시고 이미 봉한 것은 빼앗아들이소서.
전리(田里)의 기쁨과 슬픔은 오로지 수령(守令)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제 비록 대성(臺省)에서 보거(保擧)하라는 명이 있사오나, 모두가 안면과 정실에 따라 하기 때문에 그 천거되었다는 사람이 심지어는 글자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궁헌(宮軒)에 납시어 친히 인견하여 명실(名實)을 깊이 조사하셔서 천거된 자가 그만한 인물이 못되면 천거한 자를 반드시 벌주소서.”
하고, 끝으로 자주 사유(赦宥)하는 폐단을 말하자, 왕이 대간을 불러서 힐문(詰問)하였다. 그러나 대간이 면전에서 간쟁(諫爭)하기를 더욱 절실히 하므로 왕의 노여움이 심하였다. 유숙(柳淑)이 진언하기를,
“이미 바른말하기를 구하시고 이제 말한 자에게 노여움을 품으신다면 옳겠습니까?”
하니, 왕의 노여움이 조금 풀렸다.
○ 밀직제학(密直提學) 백문보(白文寶)가 또 상서하여 일을 아뢰기를,
“이제 상란(喪亂)의 뒤를 당하여 백성들이 삶을 영위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너그러운 은덕을 베푸시어 살아남은 백성들을 살 수 있도록 보살피소서. 공리(功利)ㆍ화복(禍福)의 설(說)을 따르지 않고 요순(堯舜)ㆍ육경(六經)의 도리를 준행하면 하느님이 도우시어 나라의 복조(福祚)가 연장될 것입니다. 원컨대 예묘(睿廟)께서 청연각(淸燕閣)ㆍ보문각(寶文閣) 을 설치했던 옛일을 생각하시어, 천인(天人)의 도덕에 대한 말을 강구(講究)하여 성학(聖學 제왕(帝王)의 학문을 말한다)을 밝히소서. 또 향곡(鄕曲)이 모두 바르게 되면 국가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당(唐)은 향(鄕)에다 대중정(大中正)을 두었었고 우리 나라 초기에는 사심관(事審官)을 두었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주현(州縣)에 다시 사심관을 두어 비위(非違)를 규찰(糾察)하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9품으로부터 1품에 이르기까지 각기 직첩(職牒)을 주는 것은 간악한 짓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근세에는 조정의 사령(辭令)이 처음에는 여럿이 서명했었으나 나중에는 한 관서에서만 서명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렵다가 나중에는 쉬워져서 관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농간(弄奸)을 부립니다. 이제부터는 6품 이상은 각자 첩(牒)을 써서 성(省)에 제출하여 갖추 서명 날인을 받도록 하고, 7품 이하는 전리(典理)와 군부(軍簿)에서 함께 서명 날인을 하게 하며, 품마다 같은 품으로 이동(移動)할 적에는 사령장만 주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삼대(三代)의 제도에는 하사(下士)와 서인(庶人)이 9인의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는 지방이 2천 리니 산림(山林)이 비록 그 반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1백 리의 나라보다는 10배나 됩니다. 그런데 경대부(卿大夫)의 녹봉(祿俸)이 9인의 식구를 먹여 살리기에도 부족하니, 하물며 그 나머지의 관리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녹봉을 중하게 주는 방법을 유사(有司)로 하여금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경사(京師)에 가까운 땅으로서 평탄하고 넓고 비옥하여 농사를 지을 만한 데를 목장(牧場)으로 만들어서 그 지리(地利)를 빼앗고 있습니다. 마땅히 목장을 산골짜기나 섬으로 옮겨서 그 지리를 제대로 이용하게 하소서. 경기(京畿) 안에 있는 8현(縣)의 전토도 반드시 녹과전(祿科田)으로만 나누어 줄 것이 아니라, 대부(大夫)나 사(士)들의 제전(祭田)으로 골고루 나누어 주시어 서울에 거주하는 자들의 긴급한 처지를 도와 주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나라의 전토에 대한 제도는 한(漢)나라의 한전제도(限田制度)를 본뜬 것으로서 10분의 1을 조세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상도의 조세도 다른 도와 같기는 하나, 조운하는 비용이 배나 됩니다. 원래 정한 것으로는 족정(足丁)은 전토 7결(結)이고 반정(半丁)은 3결이오나, 더 주어서 조세 운반하는 비용에 충당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강회(江淮)의 백성들이 큰물이 지거나 가뭄이 들어도 근심하지 않는 것은 물레방아의 힘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은 그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마땅히 계수관(界首官)에게 명하시어 그 모양을 본따서 만들어 민간에 전하게 하소서. 이것은 가뭄에 대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는 데 제일의 방책이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옛날 염호(鹽戶)가 없어져서 원액(元額)이 날로 줄어 삭염(朔鹽)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지금 민간에서 삭염의 세금으로 바치는 포백은 한결같이 전례대로 거두기 때문에 염호는 없는데 세금으로 바치는 포백은 여전히 있어서, 이서(吏胥)들이 이를 빙자하여 간악한 짓을 하므로 백성들은 비록 포백을 바치지만 소금 한 되의 세금도 관에서는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소금의 다소를 포백의 수에 준(準)하여 골고루 주는 것을 법식으로 정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가난한 백성들이 대부(貸付)를 받을 적에 부호(富豪)한 집에서 예(例)대로 이자를 받지 말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봄은 기쁨의 신[喜神]이라 하고, 가을은 성내는 신[怒神]이라 합니다. 만일 기쁨의 신을 한번 거스르면 농사가 풍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봄ㆍ여름에는 경한 형벌은 사면하여 주고, 중한 형벌도 등급을 감하여 속히 판결해 주며, 모역(謀逆) 이외의 대벽(大?)은 겨울철에 집행하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향역(鄕驛)의 아전들이 출가(出家)하여 부역을 도피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관으로부터 도첩(度牒)을 받아야 출가할 수 있게 하고, 3정(丁)이 되지 않는 집에서는 출가를 허하지 마소서.”
하였다.
12월 원에서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세워 고려왕으로 삼았다.
곧 덕흥군(德興君) 혜(?) 충선왕의 아들이다. 이다. 기 황후(奇皇后)가, 왕이 기씨들을 죽인 데에 원한을 품고 기필코 보복하려 하였다. 그래서 태자에게 이르기를,
“네 나이 이미 장성하였는데, 어찌 나를 위하여 원한을 갚아주지 않느냐?”
하였다. 이때에 최유(崔濡)가 원에 있으면서 본국을 모해(謀害)하고, 또 김용이 국내에서 내응(內應)할 것을 믿어서 드디어 여러 나쁜 무리들과 황후를 꾀어 공민왕의 폐위를 꾀하였다. 덕흥군도 말하기를,
“지금 왕이 홍두적의 난리에 죽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덕흥군을 세워 왕으로 삼고 기 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元子)로 삼았으며, 김용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삼고, 최유는 스스로 좌정승이 되었으며, 국인으로서 원에 있는 자는 모두 위관(僞官)을 주니, 김첨수(金添壽)ㆍ유인우(柳仁雨)ㆍ문익점(文益漸) 등이 모두 그에 붙었다. 그전에 심왕(瀋王) 고(暠)의 손자 독타불화(篤朶不花)는 아버지의 지위를 습위(襲位)하여 심양왕으로 봉해졌다. 기 황후가 처음에는 독타불화를 고려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독타불화가 굳이 사양하기를,
“숙부는 후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그가 승하(昇遐)한 뒤에는 나라가 누구한테로 가겠습니까? 이제 숙부가 아무 탈이 없는데 어떻게 자리를 빼앗겠습니까?”
하니, 이에 탑사첩목아를 왕으로 삼았다. 천하 사람들이 독타불화를 현명한 자라고 여겼다.
공민왕은 이 변보(變報)를 듣고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혹 덕흥군에게 붙어 딴마음을 가지는 자가 있을까 의심하고 염려하여 홍사범(洪師範)을 서북면 체복사(西北面體覆使)로 삼아서 정세(情勢)의 진위(眞僞)를 살펴보게 하였다.
○ 이수산(李壽山)을 보내어 여진(女眞)과의 국경을 정하였다.
○ 얼음이 얼지 않았다.
[주D-001]양저(穰?)는 …… 않은 것 : 군법(軍法)은 엄한 것이나 경우에 따라 달리 다스려야 한다는 말. 양저는 춘추 시대 제 경공(齊景公)의 장수로 성은 전씨(田氏)인데 사마(司馬) 벼슬을 하였으므로 사마양저(司馬穰?)라고도 한다. 양저는 진(晉)과 연(燕)이 침입했을 때 경공의 명을 받아 출정하면서 감군(監軍) 장가(莊賈)가 회기(會期)를 어기자 그가 존귀한 신분이었지만 독단으로 참(斬)하여 군령을 엄하게 했다. 위청(衛靑)은 대장군이 되어 한 무제(漢武帝)의 명으로 흉노를 치러 나갔을 때 우장군 소건이 단독으로 적진에 들어갔다가 중과 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단신 도망해오자, 위청은 제멋대로 처단할 수 없다 하여 소건을 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니 다른 사람들이 잘 처리했다고 했다. 《史記 卷六十四 司馬穰?列傳, 漢書卷五十五 衛靑?去病傳》
[주D-002]토끼가 …… 죽이는 격 : 한 고조(漢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 천하 통일에 가장 공이 많았던 한신(韓信)이 여후(呂后)의 의심을 받아 잡혀 죽을 때 “나는 새를 다 잡으니 좋은 활도 쓸모없다고 감추어 두고, 들판에 달리는 토끼를 다 잡으니 사냥개가 필요없다고 삶아 죽이듯, 적국(敵國)을 다 무찌르니 훌륭한 장수를 다 죽이는구나.” 하였다.
[주D-003]청연각(淸燕閣)ㆍ보문각(寶文閣) : 모두 고려 예종(睿宗) 때 설치했던 학문 연구 기관. 예종 11년(1116) 궁중에 청연각을 설치하여 문신 중에서 학사ㆍ직학사(直學士)ㆍ직각(直閣) 등 각 1인씩을 뽑아 조석으로 경서(經書)를 강론하고 시부를 짓게 하였는데, 궁중에 있어 학사의 숙직과 출입이 불편하므로 그 옆에 보문각을 따로 설치하여 학자들의 회강(會講) 장소로 정하자 청연각은 경연청의 구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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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제15상갑진 고려 공민왕 13년부터, 갑인 공민왕 23년까지 11년간
병오년 공민왕 15년(원 순제 지정 26, 1366)
춘정월 전 밀직제학 정운경(鄭云敬)이 졸(卒)하였다.
운경은 강직하고 백성을 잘 다스렸다. 처음에 상주사록(尙州司錄)에 보임되었는데, 용궁감무(龍宮監務)가 재물을 탐한다고 무고하는 자가 있어 안렴사(按廉使)가 운경을 보내어 국문하게 하였다. 운경이 용궁에 이르러 감무를 보고는 문초하지도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관리의 탐오(貪汚)함은 비록 악덕이라 하겠으나 재주가 법을 농락하고 위엄이 사람을 두렵게 할 만한 자가 아니면 능히 탐오하지 못하는 법인데, 지금의 감무는 늙고 또 자기 소임도 이기지 못하니 누가 뇌물을 바치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안렴사가 과연 무고임을 알고 탄식하기를,
“근자에 관리들은 가혹하기를 숭상하는데 사록은 진실로 장자(長者)이다.”
하였다. 복주판관(福州判官)으로 옮겨갔는데 주리(州吏) 권원(權援)이 일찍이 운경과 같이 공부를 한 사이라 이때에 술을 가지고 와서 뵈었다. 운경이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지금 그대와 술을 마심은 옛정을 잊지 않아서다. 그러나 내일이라도 그대 가법을 범한다면 판관(判官 운경 자신을 가리킨다)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고을에 어떤 중이 있어 옹천역(瓮川驛) 지금의 안동부(安東府) 북쪽 34리에 있다. 에서 도적에게 몽둥이를 맞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역리(驛吏)가 그 연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내가 베[布] 약간 필을 가지고 가다가 밭에 거름하는 사람에게 밥을 먹이는 자를 보았고, 또 밭에서 김매는 자를 보았는데, 잠깐 있다가 어떤 사람이 뒤에서 ‘나는 김매던 사람이다.’ 하고 소리지르며 곧 치고는 베를 빼앗아갔다.”
하였다. 그러고 얼마 안 되어 중은 죽어버렸다. 아전이 김매던 자를 잡아와 주(州)에 고하고 국문하여 옥사(獄事)가 이미 성립되었다. 그런데 운경이,
“중을 죽인 자는 아마 이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하고, 즉시 거름하던 밭의 주인을 불러 묻기를,
“네가 밭에 거름하던 사람에게 밥을 먹일 때 중에 관해 말한 자가 있었으렷다. 숨기지 말라.”
하니, 밭 주인이,
“한 사람이 ‘중이 가진 베가 술값에 충당할 만하다.’ 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 사람을 구속해 와 밖에다 두고 먼저 그 아내를 국문하기를,
“내 들으니 아무 달 아무 날에 네 남편이 너에게 베 약간 필을 주었다는데 그 베를 어디서 얻었다더냐?”
하니, 아내가 대답하기를,
“남편이 베를 가지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베를 꾸어간 사람이 돌려 주었다.’ 했습니다.”
하므로, 즉시 남편에게 베를 꾸어간 자가 누구냐고 따져 물으니 남편은 말이 막혀 자복(自服)하였다. 목사(牧使)가 놀라 묻자 운경이 말하기를,
“무릇 도적은 그 행적을 감추고 오직 남이 알까 두려워하는데 그가 ‘나는 김매던 사람’이라고 말함은 거짓입니다.”
하니, 읍인(邑人)이 모두 탄복하였다. 또 전주목사(全州牧使)로 있을 때에 중으로서 장가들어 집에서 사는 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외출하였다가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그 아내가 관가에 와서 호소하였으나 증거가 없어 오랫동안 처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운경이 그 아내에게 사통한 자가 있느냐고 물으니 아내는,
“없습니다. 다만 이웃에 한 사내가 있어 일찍이 희롱하기를 ‘늙은 중놈이 죽으면 일이 잘 될 것이다.’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그 사내를 잡아다 밖에다 두고 먼저 그 어미를 국문하기를,
“아무 달 아무 날에 네 아들이 집에 있었느냐?”
하니, 그 어미가,
“그날 내 아들이 밖에서 들어와 말하기를 ‘친구와 술을 마셨더니 취해서 곤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즉시 그 사내에게 그날 함께 술을 마신 자가 누구냐고 신문하니 곧 자복하였다.
나중에 지형부(知刑部)가 되었는데 송사(訟事)가 도당(都堂)으로부터 내려온 것이 있었다. 운경은 재상에게 말하기를,
“백관을 차례지워서 능한 자를 올리고 능치 못한 자를 물리침은 재상의 일입니다. 그러나 법을 지키는 일에 이르러서는 각각 유사(有司)가 있거늘 사사 건건 모두 묘당(廟堂)을 경유하는 것은 직권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가 옥사를 판결하고 법을 지키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3월 왕이 궁중에서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다.
왕은 후사가 없음을 근심하여 가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신돈이 문수회(文殊會)를 개설하면 반드시 원자(元子)가 탄생되리라 하니 왕이 이 말을 좇아 흔연히 아들 얻을 소망을 두었다. 돈이 무릇 7일 동안 회를 베풀었는데 불승(佛僧)ㆍ도사(道士) 따위의 잡류들이 궁중을 메우고 물자의 소모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 사신을 보내어 원(元)의 하남왕(河南王) 곽확첩목아(廓擴帖木兒)를 빙문하였다.
당시 곽확첩목아가 천하 원수(天下元帥)가 되어 정토(征討)를 맡고 있었다. 그래서 왕이 밀직제학(密直提學) 전녹생(田祿生)과 군부 좌랑(軍簿佐郞) 김제안(金齊顔)을 보내어 빙문하였다. 그런데 연경(燕京)에 이르니, 원이 그 사사로운 교통(交通)을 싫어하여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제안이 녹생에게 이르기를,
“공은 대신이라 원나라의 눈을 속이고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소. 내가 머물러 있다가 반드시 사명(使命)을 달성하겠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질병을 칭탁하고 연경에 머물러 있다가 단기(單騎)로 샛길을 따라 하남(河南)으로 달려가 마침내 국서를 전달하고, 이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 왕은 총명하고 인무(仁武)하시어 앉아서 홍건적(紅巾賊) 백만의 무리를 섬멸하여 재실(帝室)을 편안케 하기를 천하에 창도하시었습니다. 이제 대왕(大王 곽확첩목아를 가리킨다)의 충의가 천하에 들리고 있으므로 동서(東西)가 힘을 합하여 참란(僭亂)을 삭평(削平)하고자 합니다.”
하니, 곽확첩목아가 크게 기뻐하여 조정에 아뢰어 병부 낭중(兵部郞中)을 제수하였다. 제안은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이다.
하4월 크게 우박이 내렸다.
○ 우정언(右正言) 이존오(李存吾)와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정추(鄭樞)가 상소하여 신돈을 몰아내기를 청하니, 왕은 그 소문(疏文)을 태워버리고 존오를 좌천시켜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삼고, 추를 좌천시켜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삼았다.
신돈이 국권을 잡고부터 참람하게 굴고 불법을 자행하였으나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존오가 장차 이를 논란하려고 소문(疏文)의 초고를 옷소매에 넣어 가지고 성(省)에 가서 동료들에게 내보이며,
“요망한 자가 나라를 그르치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여러 낭관들이 두려워 움츠러들어 아무도 응대하는 이가 없고 오직 정추가 여기에 따랐다.
드디어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신등(臣等)이 삼가 3월 18일 전내(殿內)에서 베푼 문수회(文殊會)에 참석하였는데 영도첨의(領都僉議) 신돈(辛旽)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앉지 않고 감히 전하와 나란히 앉았는데 그 사이가 몇 자 떨어지지 않아 나라 사람들이 놀라 흉흉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대저 예란 상하를 분별하고 백성의 뜻을 안정케 하는 것이니 진실로 예가 없으면 어찌 군신(君臣)이 되며, 어찌 부자(父子)가 되며, 어찌 국가가 되겠습니까? 보옵건대 돈(旽)은 상(上)의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국정을 오로지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당초 영도첨의 판감찰(領都僉議判監察) 제수의 명이 내리던 날에 법으로 마땅히 조복(朝服)을 입고 나와서 사례를 드려야 할 터인데도 반달이 되도록 나오지 않다가 궐정(闕庭)에 나아감에 미쳐서는 무릎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항상 말을 타고 홍문(紅門)을 출입하며 전하와 나란히 하여 호상(胡床)에 기대어 앉고 그의 집에서는 재상이 뜰 아래에서 절을 하여도 모두 앉아서 대우합니다. 비록 최항(崔沆)ㆍ김인준(金仁俊)ㆍ임연(林衍)의 소위라 하더라도 일찍이 이와 같이 한 적은 없었습니다. 전날에는 사문(沙門)으로 있었는지라 마땅히 법도 밖에 두어 그 무례함을 반드시 책망할 것까지는 없었으나 지금은 재상이 되었으니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졌는데도 감히 예를 잃고 강상(綱常)을 훼손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 연유를 추구하면 필시 사부(師傅)의 이름을 칭탁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승단(兪升旦)은 고왕(高王 고종(高宗))의 스승이요, 정가신(鄭可臣)은 덕릉(德陵 충선왕(忠宣王))의 스승이었으나 신등은 그 두 사람이 감히 이와 같이 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자겸(李資謙)은 인왕(仁王 인종(仁宗))의 외조부라 인왕이 겸양하여 조손(祖孫)의 예로 서로 보려 하였으나 공론이 두려워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군신의 분의(分義)가 본디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군신의 예는 군신이 있어 온 이래로 만고에 걸쳐 바뀌지 않는 것이니 돈과 전하가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스스로 높이기를 이와 같이 한단 말입니까?
돈이 이미 위복(威福)을 짓고, 또 전하와 예를 대등하게 하니, 이는 나라에 두 임금이 있는 격입니다. 참람함이 지극하고 교만함이 습속을 이루면 위(位)를 가진 자 모두 그 분수에 안돈하지 못하고 소민(小民)은 그 상도(常度)를 넘을 것이니 가히 두렵지 않겠습니까?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은 말하기를 ‘기강이 서지 않으면 간특한 영웅이 마음을 낸다.’ 하였습니다. 그러니 예는 엄히 하지 않을 수 없고 습속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이 사람을 공경하여 백성에게 재화가 없게 하실 양이면 그 두발을 깎고 그 옷을 승복(僧服)으로 입히고 그 관직을 삭제하여 사원(寺院)에 두어 공경할 것입니다. 반드시 이 사람을 써서 국가가 평안하게 되도록 하시려면 그 권세를 억제하고 상하의 예를 엄하게 하여 부리시어야 백성의 뜻이 안정될 것이요 나라의 환난이 풀려질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돈을 어질다 하시나 돈이 권세를 부린 이래로 음양이 예를 잃어 겨울인데도 우레가 일고 누른 안개가 사방에 가득 끼기를 열흘에 걸치며, 해에 흑자(黑子)가 있고 밤에 붉은 기운이 있으며 천구(天狗 별의 이름)가 땅에 떨어지고 상고대[木氷]가 너무 심하게 끼었으며, 청명(淸明) 뒤에는 우박이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 하늘의 기상이 여러 차례 변하고 산새와 들짐승들이 한낮에 성안에서 날고 뛰어다닙니다. 그러니 돈의 논도섭리공신(論道燮理功臣)의 호가 과연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의 뜻에 부합되겠습니까?
신등은 직책이 간원(諫院)에 있어, 전하의 재상 선택이 그 적임자가 아니어서 장차 사방에서 웃음을 사고 만세에 기롱을 당할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말하지 않는 죄책을 면할까 합니다.
소가 올라가자, 왕이 크게 노하여 절반도 채 보지도 않고 불살라 버리라고 명하고 정추 등을 불러 면책(面責)을 하였다. 그때에 돈이 왕과 평상을 마주하고 있기에 존오가 돈을 쏘아보며 질책하기를,
“늙은 중이 어찌 이렇게 무례한가?”
하니, 돈이 놀라 황망하여 저도 모르게 평상에서 내려왔다. 왕이 더욱 노하여 정추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리고 이춘부(李春富)ㆍ김난(金蘭)ㆍ이색(李穡)ㆍ김달상(金達祥) 등에게 명하여 국문케 하였다. 그리고는 좌우에게 이르기를,
“내 존오의 성난 눈을 두려워한다.”
하였다. 춘부 등이 정추에게 묻기를,
“너를 꾀어 상소케 한 자가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부자가 대를 이어 간대부(諫大夫)가 되어 함께 나라의 은혜를 받아왔다. 이제 상(上)께서 정사를 마땅치 않은 사람에게 맡겨 장차 사직을 위태롭게 할 판이어서 사람마다 분한(憤恨)을 머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언직(言職)에 있으면서 잠자코 있을 수 없었을 따름이다. 어찌 남이 꾀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말을 할까보냐! 그리고 돈이 위복을 휘둘러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서로 눈을 흘기는데 누가 시킨 것이겠는가?”
하고, 단지 임박(林樸)과 김주(金湊)가 알았다고만 말하였다. 이에 임박 등이 모두 연루되어 신문을 받았다.
또 존오에게 묻기를,
“네 아직 입에 젖내나는 동자가 어찌 능히 스스로 알았겠느냐. 필시 몰래 사주(使嗾)한 늙은 여우가 있을 터이니 숨기지 말라.”
하니, 대답하기를,
“국가가 동자를 아는 것이 없다 않고 언관(言官)의 자리에 두었으니 감히 말을 하지 않아 국가를 저버리겠는가?”
하였다. 당시 존오의 나이는 25세였다.
돈이 이 일을 계기로 자기에 대립하는 명망 있는 사람들을 깡그리 제거하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정추 등에게 말하기를,
“만약 전(前) 정당(政堂) 원 송수(元松壽)와 전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을 끌어들이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
하니, 대답하기를,
“몸이 간관(諫官)이 되어 단지 국적(國賊)을 논핵했을 따름이다. 어찌 남의 지촉을 받음이 있겠는가. 무릇 죽고 사는 데는 명이 있다. 어찌 남을 무함해서 죽음을 면하기를 구하겠는가?”
하였다. 좌헌납(左獻納) 박보록(朴普祿)이 정추 등을 옥에서 만나 보고 나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사람 노릇 못하네, 사람 노릇 못해. 돈의 무리가 반드시 죽이려고 들 것이네.”
하였다. 이색(李穡)이 춘부에게 이르기를,
“두 사람의 광망(狂妄)함은 진실로 죄줄 만하네. 그러나 우리 태조(太祖) 이래로 아직 일찍이 한 사람의 간관(諫官)도 죽인 적이 없네. 그런데 지금 영공(令公) 돈(旽)이다. 으로 인하여 간관을 죽인다면 악한 소리가 멀리 전파될까 우려되네.”
하니, 춘부가 그렇게 수긍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에 정추를 좌천시켜 동래현령으로 삼고, 존오를 좌천시켜 장사감무(長沙監務) 장사는 지금의 무장(茂長)인데, 옛터가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이 존오를 일러 진정한 정언(正言)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돈의 사납게 날뜀은 더욱 심해지고 재상(宰相)도 대간(臺諫)도 모두 돈에게 붙어 언로(言路)가 막히고 말았다.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돈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었으나 공경 대부(公卿大夫)들 가운데는 감히 한 마디도 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존오는 소를 올려 극론하여 임금의 우레 같은 위엄을 범하고도 조금도 꺾이지 않았고, 늙은 간물[老奸]의 승냥이ㆍ호랑이 같은 노여움을 건드리고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그 충간의담(忠肝義膽)은 곧바로 일월(日月)ㆍ빙상(氷霜)과 빛을 다툴 만하다. 고려 5백 년에 간관(諫官)은 이 한 사람일 뿐이다. 그가 죽는 날에 ‘돈이 죽어야 내가 죽을 것이다.’ 한 말을 남겼으니 또한 왕실(王室)에 마음을 다해 죽으나 사나 변하지 않는 지절(志節)을 볼 수 있다.
○ 평리(評理) 목인길(睦仁吉)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임군보(任君輔) 등을 귀양보냈다.
신돈이 이미 계략을 써서 구신(舊臣)들을 모두 쫓아내었는데 인길은 비록 왕의 잠저(潛邸) 때부터의 오랜 신료(臣僚)였으나 그가 글자를 모르는 무인(武人)이었기 때문에 별로 꺼려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돈이 자신의 흉포함과 사기성이 더욱 노출되자, 인길이 왕에게 고해 바칠까 두려워하던 참에 인길이 어떤 일로 왕의 뜻을 거슬리어 왕이 성을 내니 돈이 그 틈을 타고 인길을 참소하였다. 군보가 왕에게 인길은 구신(舊臣)이라 작은 실수로 그를 버릴 수 없다 하니, 돈이 군보까지도 아울러 참소하여 두 사람이 같은 날 귀양가게 되었다.
○ 지영주사(知營州事) 영주는 지금의 영천(榮川) 정습인(鄭習仁)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당초에 습인이 〈영주에 부임하여〉 일을 보려 하는데 아전이 전례를 들어 소재도(消災圖)에 나아가 분향하기를 청하였다. 습인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의(義) 아닌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어디서 생겨나겠는가? 만약 터무니없지 않는 재앙이라면 순순히 받을 따름이다.”
하고, 아전을 명하여 그 소재도를 철거시켜 버렸다. 고을에 불탑(佛塔)이 있어 이름을 무신(無信)이라 하였다. 습인이 말하기를,
“이상하기도 하다. 이름에 악(惡)자가 든 나무 밑에서는 쉬지 않고 도(盜)자가 든 샘의 물은 마시지도 않는다 하니, 이는 그 이름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우뚝한 형상을 하고 있어 온 읍(邑)의 우러러보는 바 되어 있는데 무신(無信)이란 이름을 붙였단 말인가?”
하고는, 고을의 아전에게 명하여 날을 재촉하여 허물어 버렸다. 돈이 이 소식을 듣고 노하여 습인을 계림부(鷄林府)의 옥에 가두게 했다가 전옥(典獄)으로 옮겨 가두어 두고는 기어코 죽이려 들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그 불가함을 왕에게 아뢰는 이가 많아 이에 죽음은 면하고 폐해져 서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습인에게 주(州)에 나아가 다시 그 탑을 쌓도록 하였다.
5월 전(前) 영도첨의(領都僉議) 익산부원군(益出府院君) 이공수(李公遂)가 졸하였다.
공수는 정명(精明)하고 근신(謹愼)하여 털끝만큼도 함부로 취하거나 주지 않았으며 일에 임하기를 꿋꿋한 자세로 하여 형세에 몰림을 받지 않았다. 풍류가 있고 한아(閑雅)하여 소연(蕭然)히 산야(山野)의 풍취가 있었다. 덕수현(德水縣)에 별장을 두었으며, 남촌 선생(南村先生)이라고 불렀다. 복건에 청려장(靑藜杖)으로 소요자적(逍遙自適)하였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자부(?夫) 전공의(全公義)에게서 성장하였는데 현달(顯達)하고 나서도 공의를 아비 섬기듯, 누이를 어미 섬기듯 하였다. 공수가 병이 들자 친속(親屬)들이 그 아내 김씨에게,
“왜 부처님께 기도하지 않느냐?”
하니, 김씨는 대답하기를,
“공(公)이 평생 동안 일찍이 부처를 섬긴 적이 없는데 어찌 감히 그의 도(道)를 저버리고서 속이겠는가?”
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왜(倭)가 심악현(深嶽縣) 폐현(廢縣)인데 지금의 교하군(交河郡) 남쪽 10리에 있었다. 을 침구하였다.
○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을 설치하고 신돈(辛旽)을 판사(判事)로 삼았다.
왕은 다음과 같은 영(令)을 내렸다.
근래에 기강이 크게 무너져 탐욕이 풍속을 이루어, 종묘(宗廟)ㆍ학교(學校)ㆍ창고(倉庫)ㆍ군수(軍須)의 전지와 국인(國人)의 세업(世業)의 전민(田民 토지와 거기에 예속된 민호)을 호강(豪强)이 빼앗아 점거하고, 주현(州縣)의 역리(驛吏)ㆍ관노(官奴)ㆍ백성(百姓)으로 역(役)을 도피한 자들을 모두 빠뜨려 숨겨 크게 농장(農庄)을 주어,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여위게 하고 있기에 이제 도감을 설치하여 추정(推整)하려 한다.
이영이 나와 권호(權豪)들이 많이들 그 빼앗았던 전민(田民)을 본주인에게 돌려 주니 중외(中外)가 기뻐하였다. 돈은 하루 건너씩 도감에 나왔고 이인임(李仁任)ㆍ이춘부(李春富) 이하는 돈의 지시를 들어 처결하였다. 돈은 외면으로는 공의(公義)를 가탁하였으나 실속으로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팔았다. 그래서 무릇 천예(賤?)로서 양민(良民)되기를 호소하는 자는 모두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러자,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자들이 봉기하여 말하기를,
“성인이 나왔다.”
하였다. 돈이 군소(群小)들의 마음을 거두어 그의 간특한 일을 성취시키려 함이 이와 같았다. 부녀로서 송사해 오는 자가 만약 아리따운 용모와 자태를 가지고 있으면 돈은 겉으로는 불쌍히 여기는 척하면서 그의 집으로 꾀어가서 간음하고는 송사는 반드시 해결해 주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여자의 청알(請謁)이 성행하였고 사부(士夫)는 이를 갈았다.
○ 공주(公主 공민왕 비 노국대장 공주(魯國大長公主))의 영전(影殿)을 크게 세웠다.
왕륜사(王輪寺) 동남에다 공주의 영전을 크게 세웠다. 덕릉(德陵 충선왕릉(忠宣王陵))의 나무를 거의 다 벌채해서 재실(齋室)을 영건(營建)했으나 능을 지키는 자 감히 금하지 못하였다. 백관으로 하여금 질록(秩祿)에 따라 역부(役夫)를 내게 하여 목석(木石)을 운반하는 데 수백 인이 나무 하나를 잡아 당기어도 나무가 끌려가지 않아 ‘어여차’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고, 죽어간 마소가 길에 잇달았다.
중랑장(中郞將) 나흥유(羅興儒)가 일꾼들을 독촉하여 돌을 운반하는데, 손에 깃대를 잡고 돌 위에 올라가 깃대를 흔들며 소리질러 지휘하니, 왕이 기뻐하여 여러 차례 승진시켜 주었다. 나흥유가 왕명으로 목반룡(木蟠龍 나무로 서린 용의 모양을 만든 것)을 만들어 전각 문을 장식하는 일을 감독하였는데 마침내 기교(技巧)로 칭찬받았다. 나중에 재목을 도용(盜用)한 죄로 헌사(憲司)로부터 탄핵을 받아 면직되었다.
사신(史臣) 윤소종(尹紹宗)이 이렇게 적었다.
왕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조상을 받들고 추모함이 지성스러웠는데 신돈이 권세를 휘둘러 어진 사람들이 물리쳐지고 소인들이 아첨하여 조상 능의 소나무를 벌채하기에 이르러도 왕이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탄식을 어이 금하랴.
○ 백관이 신돈의 집에 모였는데, 이날 크게 지진이 있었다.
신돈의 전횡이 날로 심해 가 백관들이 그를 대우하기를 왕처럼 하였다. 그의 출입에 전후를 옹위했으며 그의 집에 번갈아 숙직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양부(兩府 문하부(門下府)와 밀직사(密直司))가 정릉(正陵 노국 대장공주의 능)에 제사를 지내는데 돈은 절도 하지 않고 공주(公主)의 신좌(神座)와 마주앉아 음식을 먹었다. 왕이 여러 능을 배알할 적에 백관들은 모두 왕을 따라 절을 하나 돈은 홀로 서서 절을 하지 않았다. 왕이 일찍이 가루(假樓 임시로 세운 누대)에 거둥하여 격구(擊毬)를 구경하는데 돈이 말을 타고 도당(都堂)의 천막앞에 이르러 여러 상신(相臣)들이 다 일어섰으나 돈은 말을 탄 채로 여러 상신과 이야기하고 가루 밑에 이르러서야 말에서 내려 왕과 함께 다락 위에 앉으니 도무지 군신(君臣)의 예가 없었으며 복식(服飾)도 왕과 같아 보는 이들이 분별할 수가 없었다. 유탁(柳濯)이 음식을 날라들이니 돈이 앉아서 받아 술을 마시고 나머지를 시중(侍中) 윤환(尹桓)에게 주니 환이 그것을 마시고서도 아무런 부끄러운 빛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백관이 돈의 집에 모이니 거마(車馬)가 거리를 메웠으나 궁문(宮門)은 적막하여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이날 크게 지진이 있었다.
○ 왜(倭)가 교동(喬桐)을 도륙하였다.
24일(을사)에 왜가 교동을 침구해서 도륙하고는 주둔하여 떠나가지 않자 경성(京城)이 크게 술렁거렸다. 왕은 찬성사(?成事) 안우경(安遇慶), 평리(評理) 지용수(池龍壽), 판개성(判開城) 이순(李珣) 등 33인의 병마사(兵馬使)에게 명하여 동강(東江)ㆍ서강(西江)과 승천부(昇天府)에 나가 주둔하며 방비하게 하였다. 당시 왜의 침구가 없는 곳이 없어 연해(沿海)의 군읍(郡邑)들이 이 때문에 결딴이 났다. 국가의 창고는 텅 비고 군정(軍政)은 닦여지지 않아 병갑(兵甲)은 다 떨어져 제군(諸軍)은 적을 바라보기만 하고 감히 나아가지를 못하였다.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설장수(?長壽)가 글을 올리기를,
“신이 일찍이 진양(晋陽)을 지킨 적이 있어 백성의 고통을 알고 있사온대 왜구(倭寇)를 막음이 가장 긴급한 일입니다. 그윽이 생각건대 적선의 출몰은 일정한 때가 없는데 연해의 방수(防戍)는 명목만 있고 이익됨이 없습니다. 대개 진수병졸(鎭戍兵卒)은 모두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 본디 교련의 엄격함도 없으며, 기계(器械)ㆍ갑주(甲?)가 견고하고 날카롭지 못한데다 영루(營壘)를 쌓아 보장(保障)으로 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일단 왜구가 이르면 바라보기만 하고는 무너지니, 비록 염파(廉頗)와 이목(李牧) 같은 사람을 장수가 되게 한다 해도 역시 호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방수하는 곳이 먼 것은 상거가 50~60리나 되고 가까운 것도 20~30리는 되어 적이 이 사이를 통해 침구해 올 수 있으며, 연해(沿海) 촌락의 백성들은 혹은 성글게 혹은 조밀하게 사방에 흩어져 사는데, 저 적들은 많은 경우는 몇천 몇백으로 떼를 짓고, 적은 경우는 열이나 다섯 정도로 대(隊)를 만들어, 요사한 꾀와 궤휼한 계략을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밝은 낮에는 그래도 그 오는 자취를 엿보아 수의 많고 적음을 증험하여 경비를 할 수 있으나, 어두운 밤에는 먼 데까지를 살펴보기 어렵기 때문에 때로 짐작을 벗어나 출몰하여 멋대로 날뜁니다. 수가 많으면 성세(聲勢)를 허장(虛張)하고 서쪽으로 향하는 듯하다가 동쪽으로 향하기도 하여, 우리 병세(兵勢)가 나누어짐을 기다려 몰래 습격해 오는데, 방수를 버리고 곧바로 민가를 습격하는가 하면 혹은 민가를 버리고 먼저 방수를 습격하기도 합니다. 수가 적으면 미리 간첩을 보내어 그 부유한 집을 정탐해서는 몰래 약탈하여, 관병(官兵)이 알고 추격할 무렵에는 적은 이미 가득 싣고 멀리 달아납니다. 이에 남정(男丁)을 추가로 더 동원시키면 백성은 이미 잔폐되고 도적은 이미 가버립니다. 동원했던 남정을 돌려보내기에 미치면 백성이 겨우 떠나자 도적은 다시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성들은 휴식할 틈이 없으며 군사는 용병(用兵)할 기회가 없습니다. 청야(淸野 가옥ㆍ곡식 따위를 철거하여 적에게 이용의 기회가 없도록 하는 작전)의 방책 같은 것은 그 폐단이 더욱 깊습니다. 대저 연해의 땅은 기름진 곳이 자못 많은지라 소민(小民)이 그 땅에 안주(安住)하기를 생각하니 〈그들을 이주시킴은〉 본래는 이익되게 하고자 함이나 도리어 해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연해지(沿海地)에서 깊숙이 들어온 곳은 전토도 한정이 있는데다 토착한 백성들이 여기에만 매달려 생계를 유지해 가고 있으므로 만약 객호(客戶 타처에서 떠들어와 사는 집)를 기르게 한다면 그들 또한 쇠폐하게 될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연해지에서 이주를 당한 백성들은 원망을 품고 유이(流移)해 갈 것이요, 깊숙한 지역의 토착민들은 재앙을 입고 실업(失業)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신(臣)이 평소에 통탄하고 이를 가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입보(入保 안전지대에 일시 들어와 보호를 받는 일)의 영(令)은 처음에는 일식정(一息程 한 참의 거리)으로 한정하였는데, 지금은 적이 이르는 곳이 때로 60~70리를 넘으니 이로써 견주어 본다면 비록 1백 리라 하더라도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해의 1백 리 사이에 이미 옮겨간 백성과 현재 있는 백성을 모아다가 사방 30리 혹은 50리의 기름지고 경작할 수 있는 땅에, 형세가 평이하고 땔나무와 물이 있는 곳을 가려서 호수의 많고 적음을 헤아려 성보(城堡)를 쌓고 2~3백 가(家)의 비율로 관부(官府)를 설치하여 살게 할 것입니다. 집을 서로 잇닿게 지어 겨우 그 무리만 수용할 수 있도록 하여 옥사(屋舍)를 제한 외에는 단지 곡장(穀場 낟가리를 쌓아두거나 타작을 하기 위한 마당)만 마련하고 그 채마밭 따위는 모두 성 밖에다 땅을 줄 것입니다. 무릇 성과 해자는 높고 길게 하며 성 위에는 망루(望樓)를 두고 성문에는 조교(釣橋 성문의 외호(外濠)에 걸어 놓는 다리)를 설치할 것입니다. 그 밖에 수비의 기구들을 적의하게 배치하며 성과 해자 사이에 품(品)자 형으로 작은 구덩이를 많이 파고 녹각(鹿角)을 심어 왕래를 막으며, 경고(更鼓 밤 시간을 알리기 위하여 북을 치는 것)를 엄하게 하고 봉수(烽燧)를 세심하게 할 것입니다. 농사철이 되면 멀어도 20여 리를 넘지 않게 할 것이니 새벽에 나갔다가 저물녘에 돌아오게 하면 왕래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벼가 익으면 베는 대로 실어들여 지체하지 말게 할 것입니다. 만약 적이 이르면 소장(少壯)은 성에 오르고 노약(老弱)은 공급을 하여, 방면을 나누어 막아낼 뜻을 굳게 하고 봉수를 통해서 이웃 성에 구원병을 부를 것이며, 이웃 성에 급박한 사태가 있으면 정예기병을 뽑아 달려가게 할 것이니, 만약 알고도 달려가 구원하지 않는 경우는 통솔관에게 죄가 미치도록 할 것입니다.
대저 적의 왕래는 조수(潮水)를 믿고 기한을 삼는 것으로 성을 공격하고 땅을 점령하여 오래 머무르기를 꾀하려 함이 아니요, 단지 노략질하려는 마음만 가질 따름이니, 이미 소득이 없게 되면 형세로 보아 반드시 물러갈 것입니다. 이에 틈을 타서 습격을 하고 다방(多方)으로 낭패시키어, 그 용기를 베풀 데 없게 하고 그 무리를 쓸데없게 하여, 노략하려도 소득이 없고 공격을 하려도 할 수 없이 하며, 나아가면 배복(背復)에 적(敵)을 맞게 되는 근심이 있고 물러나면 수미(首尾)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근심이 있게 하여, 우리의 편안함으로써 저들의 피로함을 기다리면 싸우지 않고도 저들의 군사를 굴복시킬 것이니, 도적을 제어할 수 있어서 백성이 가히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이전의 폐단을 고식적으로 따라 한갓 방수(防守)한다는 허문(虛文)만 베푼다면, 이른바 읍양(揖讓)하여 불을 끄려 하고 종용(從容)하여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 함이니 일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고 남에게 모욕만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양강(兩江 임진강(臨津江)ㆍ예성강(禮成江))은 서울과의 순치(唇齒)이고 양천(陽川)은 공부(貢賦)가 모이는 곳이니 역시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아뢴 말씀이 일에 있어서는 어려울 것 같으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헤아려보건대 처음은 어렵겠으나 나중에는 마땅히 쉬울 것입니다.”
하여, 이 글을 도당(都堂)에 내렸으나 진의(陳議)한 것이 끝내 행하여지지 않았다.
6월 전(前) 정당문학(政堂文學) 원 송수(元松壽)가 졸하였다.
송수는 풍채가 청수하며 진퇴에 법도가 있어 왕이 그가 범상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고 발탁하여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삼아 기밀(機密)을 맡겨 날로 왕의 친신(親信)을 받았다. 전주(銓注)에 참여하여 벼슬자리를 신중하게 하여 조금도 사사로이 하지 않아서 비록 왕명이라 하더라도 구차하게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왕이 더욱 그를 공경히 대하고 소중히 여겨 송수가 이르는 것을 보면 반드시 일어나 대접하였다. 기무(機務)을 맡은 지 8년에 항상 우구(憂懼)를 품고 울며 교체시켜 주기를 빌었더니, 왕이,
“경과 똑 같은 사람을 추천하라.”
하여 이에 이강(李岡)을 천거하여 대신케 했다.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옮겨간 지 얼마 안 되어 신돈의 비위에 거슬려 파면되었다. 돈이 더욱 권세를 휘두르자 근심과 분통이 병이 되어 졸하니 43세였다. 송수는 재상의 기량이 있었는데 그가 졸하자 나라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그의 호는 매계(梅谿)이다.
○ 송수는 일찍이 시를 짓기를,
늙기 전에 한가롭게 되기를 기약했는데 / 少日心期未老閒
벼슬살이 쉽게도 홍안을 덜어가네 / 宦遊容易損紅顔
임금의 은혜 다 갚고 돌아간다면 / 君恩報了方歸去
내 눈은 푸른 산 볼 길이 없네 / 吾眼無由見碧山
하였는데, 이는 대개 관직에서 물러나려 하나 물러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추7월 초하루(신사)에 개기일식(皆旣日食)이 있었다.
8월 태백(太白)이 경천(經天)하였다.
○ 왕이 태후전(太后殿)에서 태후를 모시고 연회하였다.
이때 덕녕 공주(德寧公主)가 문예부(文睿府)에서 태후에게 잔치를 베풀고 있었는데 왕이 시연(侍宴)하였다. 신돈이 왕을 따라들어가 뵈었으나 태후는 돈에게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돈이 나가자 왕이 태후에게,
“첨의(僉議 왕이 신돈을 공경하여 부른 칭호)는 나라의 주석(柱石)인데 어찌 앉으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정색을 하고,
“미망인(未亡人)이 어찌 감히 외승(外僧)과 같이 앉겠오?”
하니, 왕은 잠자코 있었다. 돈이 이로 말미암아 깊이 앙심을 품었다. 당시 공경 구신(公卿舊臣)들은 모두 축출되고 돈이 꺼려하는 이는 오직 태후뿐이었으므로 갖가지 계략으로 참소하고 이간시켜 이에 왕의 태후에 대한 효성이 드디어 쇠해갔다.
○ 전(前) 찬성사(?成事) 이귀수(李龜壽), 평리(評理) 김귀(金貴), 밀직(密直) 박춘(朴椿)을 죽였다.
신돈이 세 사람을 기어코 죽이고자 이들을 모두 삭발시켜 산사(山寺)에 두었다가 얼마 뒤에 사람을 보내어 강물에 빠뜨려 죽였다. 이에 조신(朝臣)들이 눈을 흘겨 보며 돈을 이리나 호랑이처럼 보았다.
【안】 죽인 자는 신돈인데 돈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은 왕을 죄줌이다. 최적(崔賊 : 최충헌을 가리킴)이 마음대로 사람을 죽인 것은 정사가 최적에게서 나왔고 왕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적의 이름을 썼으나, 신돈이 마음대로 사람을 죽인 것은 왕이 신돈에게 정사를 맡겨 전횡을 부리게 했기 때문에 돈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다른 경우도 이에 준한다.
○ 심왕(瀋王)이 사자를 보내왔다.
즉 독타불화(篤朶不花 심왕(瀋王)이었던 충선왕의 증손으로 원에 있었다)이다. 왕이 그가 위(位 심왕의 위)를 사양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상히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사자가 왔다. 왕은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였다.
○ 왕이 이름을 전(?)으로 고쳤다.
9월 유성(流星)이 낮에 떨어졌다.
2일(신사)에 어떤 물건이 서북에 떨어졌는데, 크기가 대자리만한 것이 하늘에서 내려와 염주(鹽州)ㆍ배천(白川) 지경에 떨어져 흰 기운이 하늘을 쏘아 비치더니 이윽고 사라졌다.
○ 왕이 낙산사(洛山寺) 장단부(長湍府) 서쪽 30리, 오관산(五冠山) 동북쪽 용암산(湧巖山)의 밑에 있다. 에 거둥하였다.
낙산사는 신돈의 원찰(願刹)이다. 좌우에서 올해는 크게 풍년이 들었다고 말하니, 왕은 부처 앞에 꿇어앉아,
“이 못난 사람이 나라에 임하고부터 수재와 한재가 들었는데 올해의 풍년은 실은 첨의(僉議)가 조화롭게 다스린 데에 말미암았습니다.”
하였다. 왕은 신돈을 공경하여 항상 첨의(僉議)라고 일컫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 왜(倭)가 양천현(陽川縣)에 들어와 조선(漕船)을 노략질하였다.
동10월 지진이 있었다.
○ 왕이 종실(宗室)의 처녀를 맞아들여 비(妃)로 삼아 한씨(韓氏)로 성을 고쳐 불렀다. 또 안씨(安氏)를 맞아들였다.
왕씨는 덕풍군(德豊君) 의(義)의 딸이니 이 이가 익비(益妃)이고, 안씨는 상시(常侍) 극인(克仁)의 딸이니 이가 정비(定妃)이다. 신돈이 일찍이 들어가 왕을 뵐 적에 두 왕비는 동쪽에 있고 돈은 서쪽에 있었는데 돈이 왕에게 이르기를,
“두 비는 나이가 어리고 어리석습니다.”
하니, 왕이,
“어리석지 않다.”
하였다. 돈은 또 왕에게 농담하기를,
“성체(聖體)가 너무 피로하지 않습니까.”
하니, 왕은,
“피로하다.”
하였다.
그 설만하고 무례하기가 이와 같았다.
11월 크게 안개가 끼어 무릇 3일 동안 개지 않았다.
○ 일본(日本)에 사신을 보냈다.
이때 왜구(倭寇)가 해마다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검교중랑장(檢校中郞將) 김일(金逸)을 보내어 일본에 가서 해적(海賊)을 금해 주기를 청하였다. 일본의 정이 대장군(征夷大將軍)은 즉시 금하는 영을 내리기로 약속하여 이로부터 조금 안녕을 얻게 되었다.
○ 곽확첩목아(廓擴帖木兒 하남왕(河南王))가 사자를 보내와 보빙(報聘)하였다.
중서검교(中書檢校) 곽영석(郭永錫)을 보내어 김제안(金齊顔)과 함께 왔다. 왕이 연회를 열어 대접하였는데 술이 반쯤 돌았을 때 영석이 시신(侍臣)의 연구(聯句)를 청하니, 좌우가 모두 무인(武人)이어서 서로 돌아보며 실색(失色)하고 왕은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영석이 문묘(文廟)에 배알하고 학사(學舍)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서 관반(館伴)인 이색(李穡)에게 이르기를,
“귀국이 문(文)을 숭상한다고 들었는데 어찌 이지경에 이르렀오?”
하니, 이색이,
“국학(國學)은 신축년(辛丑年 홍건적이 침구한 1361년)에 불타버리고 왕은 바야흐로 백성을 안식시키기에 힘쓰느라 궁궐도 아직 중수하지 못하고 있오. 이것은 개성부학(開城府學)이오.”
하였다. 왕이 이 사실을 듣고서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영석이 돌아감에 왕이 선물을 했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당시 임박(林樸)이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영석이 지도와 예악 관제(禮樂官制)를 보기를 청하였다. 임박이,
“우리 나라 산수(山水)가 영이(靈異)하여 지금 위로 황후(皇后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가 된 고려 여인 기씨(奇氏)를 가리킨다)와 태자(太子)가 있게 되었으니 어찌 빼어난 정기가 모여져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영석이 무릎을 치며 소리높이 읊조리기를,
“드디어 천하 부모의 마음으로 하여금 아들 낳기를 중히 여기지 않고 딸 낳기를 중히 여기게 하였다.”
하므로 좌우가 부끄러워하였다.
12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이해의 일로, 민간의 어떤 형제가 같이 길을 가다가 아우가 황금 2정(錠)을 주어 그 중의 하나를 형에게 주었다. 양천강(陽川江)에 이르러 함께 배를 타고 건너다가 아우가 문득 금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형이 괴이하게 생각 되어 물으니, 아우는 말하기를,
“제가 평일에 형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돈독했는데 지금 금을 나누어가지고 나서는 문득 형이 싫어지는 마음이 생기니 이것은 좋지 않은 물건입니다. 강물에 던져 버리고 잊어버림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형도,
“네 말이 참으로 옳다.”
하고 역시 물에다 금을 던져 버렸다. 당시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무지한 백성이라서 그 성명도 물어 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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