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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安鼎福)-

천하한량 2007. 6. 12. 18:01

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安鼎福)   

 

 

통계(統系)

 

 

통계는 사가가 책 첫머리의 제일의(第一義)로 삼는 것인데, 《동국통감》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사적을 별도로 외기(外紀)로 삼았으니, 그 의의가 옳지 못하므로 이제 정통을 기자로 시작하고, 단군을 기자가 동방으로 온 사적 다음에 붙이되, 《통감강목》 편수(篇首)의 삼진(三晉)의 예를 본떴다.

상고하건대, 단군은 맨 먼저 나라를 다스렸고, 기자는 문물(文物)을 처음 일으켜서 각각 1천여 년을 지냈으니, 신성한 정치는 민몰시켜서는 안 될 터인데, 《동국통감》에서는 ‘전하는 사서(史書)가 없어 외기(外紀)에 엮었다.’ 하였다. 외기란 명칭은 유서(劉恕)에게서 비롯되었다. 유서가 사마광(司馬光)과 함께 《자치통감》을 짓고, 다시 상고 이래의 사적을 채택하여 《통감외기(通鑑外紀)》를 지을 적에 전기에 뒤섞여 나오는 것을 취택하지 않고 그것을 써 놓았으니, 이를테면, 여와씨(女ㆍ氏 중국 상고의 황제 이름으로 복희씨(伏羲氏)의 누이동생)가 하늘을 기웠다느니, (ㆍ 요 임금 때 활 잘 쏘는 사람) 10개의 해 중에서 9개를 쏘아 떨어뜨렸다느니 하는 유들이다. 그러므로 외기라 이름하였다. 단군과 기자의 사실이 비록 인몰되기는 하였으나, 어찌 이 조목과 같이 돌릴 수 있으랴!

1. 기준(箕準)이 나라를 잃고 남쪽으로 달아났으나, 마한(馬韓)을 쳐서 나라를 다시 만들어 태사(太師 기자를 가리킨다)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 역시 정통이 돌아가는 바이므로 《통감강목》 촉한(蜀漢)의 예와 같이 썼다.

임씨의 《동사회강》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기준은 나라를 잃고 남으로 옮겼으므로 옛날의 종주(宗主)로 처우할 수는 없으되 그 분주(分註)한 기년은 삼국의 머리에 써야 하나, 쇠미하여 징험할 데가 없으므로 《강목》의 분주(分註)에 노()ㆍ위()를 기록하지 않은 예에 따랐다.

상고하건대, 이 설은 크게 잘못이다. 기자가 이미 정통의 임금이 되었으니, 쇠미하여 징험할 데가 없다 하여 정통의 열에 쓰지 않을 수 없다. 노ㆍ위는 본디 제후로 전국(戰國) 때에 쇠미함이 매우 심하였으니, 《강목》에서 쓰지 않은 것이 마땅하거니와, ()의 난왕(ㆍ王)으로 말하면 노ㆍ위보다도 심하게 쇠약하였는데도 《강목》에서는 정통으로 쓰지 않았던가!

1. 정통(正統)은 단군ㆍ기자ㆍ마한ㆍ신라 문 무왕(文武王) 9년 이후ㆍ고려 태조 19년 이후 를 말한다.

신라는 고구려에 대해 나라를 합병한 예를 썼으므로 통일한 이듬해에 정통을 이었었고, 고려는 진훤(甄萱)에게 도적을 평정한 예를 썼으므로 통합한 해에 정통을 이었다.

무통(無統 정통이 아닌 것)은 삼국이 병립한 때를 말한다.

구사(舊史)에는 백제가 의자왕(義慈王)에서 그쳤으나, 의자왕 뒤에 왕자 풍() 3년 동안 즉위하였으므로 이제 풍으로 대를 이었다.

1. 위만(衛滿)은 찬적(ㆍ賊)인데, 《동국통감》에는 단군ㆍ기자와 함께 3조선(朝鮮)이라 일컬어서 마치 그와 덕도 같고 의리도 같은 것처럼 하였으나, 이제 폄출(貶黜)하여 참국(ㆍ國)한 예에 따랐다.

1. 부여(扶餘)는 북방의 절역(絶域)에 있어서, 비록 단군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제국(諸國)의 열에 쓸 수 없는데, 하물며 징험할 데가 없음에랴!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종국이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에 이를 갖춰 써서 건국한 예에 따랐다.

1. 고려 태조는 비록 포학에 갈음하여 관대한 정치를 하여 세상을 구제한 공이 있기는 하나, 궁예(弓裔)가 신라의 반적(叛賊)이 되었을 적에 고려 태조가 그의 신하 노릇을 하였으니, 이도 반적이므로, 이제 신라가 망하기 전은 참국(ㆍ國)한 예에 따랐다.

진훤과 궁예를 《동국통감》에는 모두 참국의 예로 처우하였으되, 이제 외효(??)와 공손 술(公孫述)을 도적으로 한 예에 따라 썼다.

1. 사군(四郡 한사군(漢四郡)ㆍ이부(二府)ㆍ삼한(三韓)을 《동국통감》에는 모두 외기(外紀)에 넣었으나, 사군과 이부는 조선의 옛땅이므로 이제 마한을 정통으로 삼았으니, 그 연혁과 분합(分合)은 비록 대국이 한 일이기는 하나 모두 마한의 기년 아래에 썼다.

요동의 땅은 본래 동이(東夷)에 속했으나, 단군과 기자 이후로는 항상 우리 땅이 되었으므로 득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비고로 삼는다.

 

1. 《강목》에는 여정(呂政)ㆍ이욱(李昱)ㆍ시영(柴榮)에게는 모두 이례(異例)가 없었으니, 고려 우왕(禑王)과 창왕(昌王)도 같은 조목인 듯한데, 당시 사서를 쓰는 이가 이 예를 따르지 않고 일종의 의리로 삼았다. 이는 후민의 논의할 바가 아니나 사서(史書)의 예가 이와 같지 않으므로 감히 좇지 않는다.

우왕과 창왕의 일은 당시 재상 이색(李穡), 초야의 원천석(元天錫)의 정론을 막기 어렵고, 본조의 상론(尙論 고인의 일을 평론하는 것)하는 선비인 유희춘(柳希春)ㆍ윤근수(尹根壽)ㆍ신흠(申欽)ㆍ이덕형(李德泂) 같은 이도 모두 사필(史筆)을 거짓으로 여겼으며, 더구나 성조(聖祖 조선 태조를 말한다)가 왕씨에게 수선(受禪)하였으니, 우왕과 창왕이 왕씨이니 신씨(辛氏)이니 하는 분변은 애당초 논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정도전ㆍ조준(趙浚)ㆍ윤소종(尹紹宗)의 무리가 왕씨가 아니라는 설을 지어내어 구신(舊臣)들을 겸제(鉗制)하는 계책으로 삼는데, 온 나라가 부화하여, 따르느냐 어기느냐로써 충역(忠逆)의 구분으로 삼아 하나의 의리로 만들었으며, 뒤에 역사를 만드는 이도 모두 마음으로는 그른 줄 알면서도 다시 상고하여 분별하지 않으니, 만일 위에서 판하(判下)하는 분부가 없으면 사사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異姓)이라 할지라도 사서의 예는 이와 같이 할 수는 없다.

1. 마한이 망한 뒤에 삼한이 중국의 역사에 나온 것이 하나뿐이 아니므로, 이제 모두 각 연조의 아래에 붙여서 보였다. 잡설(雜說)에 보인다

1. 발해는 우리 역사에 기록할 수 없는 것이나, 본디 고구려의 옛땅으로 우리의 국경과 상접하여 의리가 순치지세(唇齒之勢)이므로, 《통감》에서 갖춰 썼기 때문에 이제 그대로 좇았다.

1. 예맥(濊貊)ㆍ옥저(沃沮)ㆍ가락(駕洛)ㆍ가야(加耶) 등속은 모두 소국의 예에 따랐다.

 

 

[D-001]《통감강목》 …… 예 : 삼진(三晉)은 춘추(春秋) 때 진()나라를 삼분(三分)하여 제후(諸侯)가 된 위()ㆍ한()ㆍ조()를 말한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편수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戊寅周威列王()二十三年 初命晉大夫魏斯趙籍韓虞 爲諸侯”

[D-002]촉한(蜀漢)의 예 :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에는 한 헌제(漢獻帝)가 폐위된 건안(建安) 25(220)부터 위()를 정통으로 삼았는데,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에는 그와 달리, 건안(建安) 25년부터 염흥(炎興 : 촉한 후주의 연호) 원년(263)까지 43년을 정통인 위()의 기년을 내치고 유비(劉備)가 세운 촉한을 정통으로 삼아 한()의 통서(統緖)에 이어 붙였다.

[D-003]외효(??) …… 한 예 : 외효는 왕망(王莽)이 세운 신() 말엽에 기병(起兵)하여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라 호칭했고, 공손술(公孫述)은 왕망의 신말엽에 기병하여 스스로 천자 노릇한 사람. 주희의 《통감강목》에는 왕위를 찬탈한 찬적(簒賊)의 유에도 넣지 않고 도적의 유로 취급하였다.

[D-004]이부(二府) : 《삼국유사》 기이(紀異) 이부(二席)에는, “《전한서(前漢書)》에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 기해에 두 외부(外府)를 두었다 하니, 조선의 옛땅인 평나(平那) 및 현도군(玄ㆍ郡) 등을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로 하고, 임둔(臨屯)ㆍ낙랑(樂浪) 등 두 군의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둔 것을 말한다.” 하고, 그 사평(私評)에 “조선전(朝鮮傳)에는 진번(眞番)ㆍ현도ㆍ임둔ㆍ낙랑 등 넷이다. 여기에는 평나가 있고 진번이 없으니, 아마도 같은 땅에 두 이름이 있는 것일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한서》 지리지의 현도군ㆍ낙랑군의 조항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낙랑군에 편입된 현도군의 옛 임둔 땅에 동부도위부(東部都尉府)를 두고, 역시 낙랑군에 편입된 옛 진번 땅에 남부도위부를 둔 것으로 보인다.

[D-005]여정(呂政) …… 시영(柴榮) : 여정(呂政)은 진() 시황(始皇)을 가리키고, 이욱(李昱)은 진() 간문제(簡文帝)를 가리키며, 시영(柴榮)은 후주(後周) 세종(世宗)을 가리키는데, 모두 국성(國姓)이 아닌 이성(異姓)으로 왕위를 이었다는 설이 있다.

 

 

 

동국서적(東國書籍)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 김부식(金富軾)의 찬()이다. 본기(本紀)ㆍ열전(列傳)ㆍ잡지(雜志)ㆍ연표(年表)가 있는데 모두 50권이다.

 

【안】 삼국 당시에는 각기 사관을 두어 일을 기록하였으나, 고구려ㆍ백제 두 나타는 수()와 당()의 정벌이 있었고, 신라 말기에는 진훤(甄萱)과 궁예(弓裔)가 번갈아 난을 일으켰으므로, 역대의 문적은 모두 상고할 데가 없었다. 김씨가 《삼국사기》를 찬할 때에, 신라에 있어서는 남아 있는 본사(本史)에 따랐고, 고구려와 백제에 있어서는 더욱 상고할 데가 없으므로 이른바 고기(古記)에 단편적으로 전하는 것에 의거하였는데, 삼국에 대하여 모두 중국 역사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으므로, 이 책이 소략하고 오류가 많아 사가의 규모를 이루지 못하였다. 김씨는 장상(將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임금의 하교를 받아 역사를 찬집하였으니, 문적을 널리 가져오고 또 책를 바칠 길을 열어 놓았어야 할 것인데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간략하게 책을 만들었으므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긴다.

삼국사략(三國史略) : 본조(本朝)의 권근(權近)ㆍ이첨(李詹)ㆍ하윤(河崙)의 봉교찬(奉敎撰)이다. 편년체(編年體)를 썼으며, 일명 《동국사략(東國史略)》이라 하는데, 김씨의 《삼국사기》를 따다가 찬집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 고려 중엽에 중 무극 일연(無極一然 무극은 호() 일연은 자())의 찬인데, 모두 5권이다. 이 책은 본디 불교의 원류를 전하기 위하여 지었기 때문에, 더러 연대는 상고할 수 있으나 전혀 이단(異端)의 허탄한 설이었는데, 뒤에 와서 본조에서 《동국통감》을 찬할 때에 많이 따다가 기록하였고,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지명도 이것을 많이 따랐다. ! 이 책은 이단의 괴탄한 설인데도 후세에 전해졌는데, 당시에는 어찌 사필을 잡고 기사하는 사람이 없어서 모두 전하지 않아서 없어졌으랴! 대개 이 책은 중들을 위해 전한 것이므로 바위 구멍 속에 간직하여 병화(兵火)에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인데, 후인들은 그것이 남아 있음을 오히려 다행하게 여긴 것이다. 동국 문헌의 없어짐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슬프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역사를 편찬하여 반드시 명산 석실(石室)에 간직하였으니, 그 병화를 걱정한 뜻이 깊다고 하겠다.

고려사(高麗史) : 본조 정인지(鄭麟趾)의 봉교찬(奉敎撰)이다. 세가(世家)ㆍ열전ㆍ지()ㆍ연표(年表)가 있는데, 모두 1 39권이다.

【안】 이 책은, 세가(世家)에서는 번잡한 실수가 있고, 지에서는 탈략(脫略)한 실수가 있으며, 열전에서는 소루한 실수가 있다. 김씨의 《삼국사기》에 비하면 꽤 전실(典實)하나, 후인이 한스럽게 여기는 바가 없지 않다.

고려사(高麗史) : 본조 정도전(鄭道傳)ㆍ정총(鄭摠) 등의 봉교찬(奉敎撰)이다. 편년체를 썼으며, 모두 37권이다. 이 책은 역조(歷朝)의 실록(實錄), 민지(閔漬)의 《강목(綱目), 이제현(李齊賢)의 《사략(史略), 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에서 따다가 찬집하였고, 뒤에 또 유관(柳寬)ㆍ윤회(尹淮) 등에게 명하여 교정하였으며, 세종조(世宗朝)에 또 이극감(李克堪) 등에게 명하여, 세상 교화에 관계되는 사적과 본받을 만한 제도를 모아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찬하게 하였다.

 

【안】 이 책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역사제강(麗史提綱) : 본조 유계(兪棨)의 찬이며, 모두 23권이다. 편년체를 썼다. 이 책은 번간(繁簡)이 정도에 맞아 사가의 절산(節刪)하는 체례를 가장 마땅히 하였으나, 임씨는, ‘강()을 세우는 법이 자못 《강목》의 체례에 맞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당연하다.

동국통감(東國通鑑) : 본조의 서거정(徐居正)ㆍ최보(崔溥) 등의 봉교찬이다. 동사(東史) 및 중국의 사서에서 따다가 만들었는데, 모두 57권이다. 이 책은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본따서 만들었으며, 여러 사서에 비해 자못 자세하여 거질(巨帙)이다. 그러나 의례(義例)가 흔히 어긋나고 그릇되었으며, 매우 혼잡하기도 하다.

동사찬요(東史簒要) : 본조 오운(吳澐)의 찬이다. 모두 12권인데 역대는 편년체를 쓰고 별도로 열전ㆍ지리지를 만들었다. 이 책은 간추린 것이기는 하나 자못 간요(簡要)하다.

동사회강(東史會綱) : 본조의 임상덕(林象德)의 찬이다. 편년체를 썼으며 삼국의 시초부터 시작하였는데, 모두 24권이다. 또 범례(凡例)가 있고 논()ㆍ연표가 붙어 있다. 여러 사서 중에서 가장 간결하고 마땅하나, 한두 가지 잘못된 데가 없지 않은데, 이는 구사(舊史)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공민왕(恭愍王)의 훙()한 해에서 끝났다. 거기에 쓰기를,

 

“갑신일 밤에 왕이 시해(弑害)당하여 훙()하고 강릉군 우(江陵君禑)가 즉위하였다.

하고, 그 아래에 소주(小註)로 쓰기를,

 

“이 뒤 을묘년(1375)이 폐왕 우(廢王禑) 원년이 되고, 14년 무진에 우()가 폐위되고 아들 창()이 즉위[]하였는데 기사년이 폐왕 우(廢王禑)의 원년이며, 그 해 11월에 창()이 폐위되고 정창군 요(定昌君瑤)가 즉위[]하니 이가 공양왕(恭讓王)이며, 임신년(1392)에 원주(原州)에서 손위(遜位)하고 고려가 망하였다.

하고, 그 아래에 다음과 같이 논()을 지었다.

 

“우리 태조가 왕위를 받은 것은 천명이지 인력으로 한 것이 아니다. 다만 당시 사관이 직분을 다하지 못하였고, 후세의 역사를 쓰는 이도 식견이 밝지 못하여 무릇 권도 여탈(權度予奪)은 한결같이 천리의 공변됨을 따르지 않았고, 사실의 흑백과 인물의 순자(醇疵)에도 사의(私意)를 쓰기도 하여, 이따금 그 말이 스스르 모순되는 것이 한스럽다. 그런데 《통국통감》에서는 여기에 대해 하나도 증거대어 바로잡은 것이 없고, 오씨(吳氏)의 《동사찬요》와 유씨(兪氏)의 《여사제강》에서 구구하게 한두 가지를 보존하려고 거기에 대해 필삭(筆削)하여, 대의에는 나타낸 것이 있다. 그러나 큰 강과 목에는 오히려 다 바로잡지 못하고 어물어물 때워서 마침내 구차스러울 뿐이었다. 이제 이 책은 일체 주자의 《강목》을 따랐으므로, 고려의 기()를 공민왕에서 끝내어 주기(周紀)를 끝까지 쓰지 않은 《강목》의 뜻을 적이 본떴다.

 

 

【안】 이 설은 우왕ㆍ창왕이 왕씨냐 신씨(辛氏)냐의 구별에 의심을 두어, 딱 잘라 말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이다.

 

 

파한집(破閑集) : 고려 이인로(李仁老)의 찬이다.

보한집(補閑集) : 고려 최자(崔滋)의 찬이다.

이상국집(李相國集) : 고려 이규보(李奎報)의 찬이다.

역옹패설(ㆍ翁稗說) : 고려 이제현(李齊賢)의 찬이다.

목은집(牧隱集) : 고려 이색(李穡)의 찬이다.

양촌집(陽村集) : 본조 권근(權近)의 찬이다.

용비어천가주(龍飛御天歌注)

응제시주(應製詩註) : 본조 권남(權擥)의 찬이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본조 신숙주(申叔舟)의 찬인데 곧 일본 역사다.

여지승람(輿地勝覽) : 중종조 명찬(命撰)이다.

동문선(東文選) : 중종조 명찬이다.

필원잡기(筆苑雜記) : 본조 서거정(徐居正)의 찬이다.

용재총화(傭齋叢話) : 본조 성현(成俔)의 찬이다.

퇴계집(退溪集) : 본조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찬이다.

고사촬요(攷事撮要) : 본조 어숙권(魚叔權)의 찬이다.

기자실기(箕子實記) : 본조 이이(李珥)의 찬이다.

평양지(平壤志) : 본조 윤두수(尹斗壽)의 찬이다.

동각잡기(東閣雜記) : 본조 이정형(李廷馨)의 찬이다.

지봉유설(芝峯類說) : 본조 이수광(李ㆍ光)의 찬이다.

계고편(稽古篇) : 1. 실명씨(失名氏).

해동국부(海東樂府) : 본조 심광세(沈光世)의 찬이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 본조 권문해(權文海)의 찬이다.

졸옹집(拙翁集) : 본조 홍성민(洪聖民)의 찬이다.

미수기언(眉ㆍ記言) : 본조 허목(許穆)의 찬이다.

송도잡기(松都雜記) : 본조 조신준(曹臣俊)의 찬이다.

여지고(輿地考) : 본조 한백겸(韓百謙)의 찬이다.

경세서보편(經世書補編) : 본조 신익성(申翊聖)이 《경세서(經世書)》 중에서 동사(東史)를 간추려 내어 보충해 넣었다.

수록(隨錄) : 본조 유형원(柳馨遠)의 찬이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본조 김육(金堉)의 찬이다.

범학전서(範學全書) : 본조 박세채(朴世采)의 찬이다.

동국총목(東國摠目) : 본조 홍만종(洪萬宗)의 찬이다.

사설(僿說) : 본조 이익(李瀷)의 찬이다.

여사휘찬(麗史彙簒) : 본조 홍여하(洪汝河)의 찬이다.

 

 

 

중국서적(中國書籍)

 

 

사기(史記) : () 사마천(司馬遷)의 찬이다.

한서(漢書) : () 반고(班固)의 찬이다.

후한서(後漢書) : () 범엽(范曄)의 찬이다.

삼국지(三國志) : () 진수(陳壽)의 찬이다.

남북사(南北史) : () 이연수(李延壽)의 찬이다.

수서(隋書) : () 위징(魏徵)의 찬이다.

당서(唐書) : () 송기(宋祈)의 찬이다.

통감전편(通鑑前編) : () 김이상(金履祥)의 찬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 () 사마광(司馬光)의 찬에 원() 호삼성(胡三省)이 주()하였다.

강목(綱目) : () 주자(朱子 이름은 희())의 찬이다.

송원강목(宋元綱目) : ()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 14651487) 때의 명찬(命撰)이다.

통전(通典) : () 두우(杜佑)의 찬이다.

문헌통고(文獻通考) : () 마단림(馬端臨)의 찬이다.

황명통기(皇明通紀) : () 진건(陳建)의 찬이다.

오학편(吾學編) : () 정효(鄭曉)의 찬이다.

성경통지(盛京通志) : 청인(淸人)의 찬이다.

죽서기년(竹書紀年) : 급군(汲郡)의 무덤에서 나온 고문(古文)이다.

동사강목 제14상경진 고려 충혜왕 후 원년부터 계묘 고려 공민왕 12년까지 24년간   

 

 

 

 

 

무자년 충목왕 4(원 순제 지정 8, 1348)

 

 

춘정월 재상 김륜(金倫) 등이 상서하여 강윤충(康允忠)의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왕이 어려서 즉위하였고, 덕녕공주(德寧公主 충혜왕의 비(). 원 무정왕(武靖王)의 딸로 충목왕을 낳았다)가 한창 나이로 궁중에 있었는데, 윤충과 배전(裵佺)이 출입하면서 공주에게 고임을 받아 정권을 잡고 권세를 농단(弄斷)하며 크게 위복(威福)을 부리니, 어떤 사람이 배전의 죄악을 기록하여 궁궐 문에 붙였으므로 공주가 겉으로는 그를 물리쳤다. 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어떤 사람이 방()을 써 붙이기를,

“윤충은 일개 환자(宦者)와 시녀를 매개로 임금의 어머니와 통하여 음란한 짓을 제멋대로 하며, 하유원(河有源)과 더불어 정치도감(整治都監 전지(田地)의 개량을 위해 설치했던 임시 관청)의 일을 방해하니, 만약 이들 두 사람을 베어 버린다면 나라에 근심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대행왕(大行王 충혜왕(忠惠王)을 말한다)의 시호(諡號)를 오래도록 원에 주청(奏請)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때에 와서 공주가 김륜 등을 불러 시호 청할 것을 물으니, 윤이 분개한 어조로 대답하기를,

“선왕이 돌아오시지 못한 것은 한갓 간사한 아첨배를 가까이하심으로써 원망을 모으고 덕에 누를 끼쳤던 까닭인데, 이제 화근(禍根)의 우두머리가 그대로 살아 있으니, 기필코 먼저 그 죄를 다스려 선왕의 허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 뒤에라야 시호를 청할 수 있습니다.

하고, 드디어 이제현(李齊賢)ㆍ박충좌(朴忠佐) 등 원로들과 같이 상소하여 윤충의 죄목을 고하였는데, 그 대략에,

“보옵건대, 강윤충은 천례(?) 출신으로 선왕에게 고임을 받아 간사하고 아첨하며 음란한 행동을 제멋대로 하여, 제 욕망을 한껏 채우고 악행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선왕께서는 이 때문에 조옥(詔獄 제왕(帝王)의 옥)에 붙들려 가셨다가 악양(岳陽) 땅에서 돌아가시어 반장(返葬 객사(客死)한 사람을 고향에 옮겨다 장례를 치르는 것)하게 되었으니, 윤충 한 놈 도적이 실로 그 죄의 장본인이며 민환(閔渙) 9인은 다만 지엽(枝葉)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쌓은 허물은 오로지 상()께 돌리고 교활한 꾀로 제 자신만 면하였으니, 이것이 곧 온 나라가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하고서, 이어 그 전후의 죄악을 들어 다 말하고, 또 아뢰기를,

“윤충은 국정(國政)을 제 마음대로 휘둘러 백성에 해독을 끼쳐서 선왕으로 하여금 천자의 견책을 받게 하였고, 시호 올리는 일을 이처럼 지체되게 만들었으니, 만약 이 도적의 죄악을 드러내어 다스리지 않는다면 선왕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추후로나마 밝힐 방법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상국(上國)에 글을 올려서 전대(前代)의 일이 선왕의 잘못이 아니고 모두 윤충이 한 짓임을 밝히시고, 이 도적에게 양관(兩觀)의 주벌(誅罰) 을 가하시어 돌아가신 선왕의 만세(萬世)의 수치를 씻도록 하소서.

하니, 왕과 대비(大妃)가 감동하여 깨닫고 원에 글을 올리는데, 김륜에게 개정(改正 선왕의 허물을 밝히는 일)과 시호 청하는 두 가지 표문(表文)을 가지고 원에 가게 하니, 윤이 사은하면서 말하기를,

“신이 죽을 나이가 다 된 72세로, 가는 도중에 쓰러져 죽어 왕의 밝으신 명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어찌 감히 힘껏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2월 전 첨의정승(僉議政丞)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 김륜이 졸하였다.

 

()이 원으로 가려 하는데, 갑자기 풍질(風疾)을 얻어 10일 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앓다가,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축해서 일으키게 하고는 의관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죽었다. 윤이 일찍이 변정도감부사(辨正都監副使) 및 감찰시 승(監察寺丞)이 되었을 때 간악한 자를 잡아내고 숨겨진 나쁜 일을 적발하였는데, ()에 대처함이 귀신과 같아서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를 못하였다. 그가 합포(合浦)에 진장(鎭將)으로 있을 때 군사들이 잘 훈련되어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원의 사신이 와서 보고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윤은 종족(宗族)들에게 인애(仁愛)하고 친구들에게 신의가 있었으며,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전고(典故)를 많이 알았으므로 다른 사람이 묻는 경우가 있으면 머뭇거리는 일이 없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호는 죽헌(竹軒), 또는 당촌(戇村)이다.

○ 진제도감(賑濟都監)을 설치하였다.

 

이때에 경성(京城)에 크게 기근(饑饉)이 들고 역질(疫疾)이 돌아, 왕이 찬수(饌需)를 감하여 그 비용에 충당하였다. 정승 왕후(王煦)가 상주(上奏)하여 창고에 비축되어 있는 쌀 5백 석을 내어 진제도감으로 하여금 죽을 쑤어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이도록 하고, 전라도(全羅道)의 쌀 14백 석을 조운(漕運)해다가 경성 및 충청(忠淸)ㆍ서해(西海) 양도를 진휼(賑恤)했는데, 당시 굶어죽은 시체가 길바닥에 널렸다. 영산군(永山君) 장항(張沆)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기를,

“주상께서는 스승을 높이고 배움에 뜻을 두시며, 착한 도리 듣기를 좋아하시는데도, 간사한 소인의 무리가 권력을 휘둘러 하늘을 기만하고 임금을 속여 형정(刑政)을 공평하지 못하게 하여, 해독이 죄없는 사람에게 미쳐 화기(和氣)를 손상시켰으므로, 하늘이 한재(旱災)를 내리어 굶어죽은 시체가 길에 널려 있어 까마귀와 솔개, 개와 돼지가 다투어 먹고 있으니, 그 정상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시체들을 다 묻어 주고, 굶주리고 궁핍한 백성을 구제하여 준다면 화기가 통하게 되어 풍년이 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 입속보관법(入粟補官法 곡식을 바치면 관직을 주는 법)을 시행하였다.

 

정동성 도사(征東省都事) 악우(岳友)가 왕에게 글을 올려, 농사가 흉년이 들어서 백성이 굶주리니 원의 입속보관법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벼슬이 없는 자가 종 9품이 되려면 쌀 5석을 마치고 급()이 올라갈 때마다 5석씩을 더하며, 전직(前職)이 있는 자는 쌀 10석에 1등급을 올렸다.

3월 사신을 보내어 대행왕의 시호를 원에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4월 왕의 서동생(庶同生) (?)를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으로 봉하였다.

5월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이 죽었다.

 

()은 일찍이 고용보(高龍普)에게 의탁하여 고려도원수(高麗都元帥)가 되었으므로 대관(臺官)이 이를 탄핵하였고, 죽으니 서인(庶人)의 예로 장사지냈다.

○ 큰 비가 와서 송악(松岳)이 무너졌다.

6월 찬성사 흥녕군(興寧君) 안축(安軸)이 졸하였다.

 

()은 마음가짐이 공정하고 집 다스리기를 근검히 하였으며, 일을 당하면 강개하였다. 언젠가 이르기를,

“나는 평생에 아무것도 일컬을 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네 번이나 법관이 되었는데, 무릇 백성 가운데 강제로 억울하게 종이 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양민(良民)으로 되돌아가도록 처리하여 주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호는 근재(謹齋)이다.

7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旽)이 졸하였다.

 

영돈은 동생 영후(永煦)와 함께 재상의 지위에 올라 당세에 유명하였다.

○ 감찰장령(監察掌令) 송천봉(宋天逢)을 좌천시켜 광양 감무(光陽監務)로 삼았다.

 

천봉이 평리(評理) 전윤장(全允臧)을 탄핵하기를,

“재상이 된 몸으로 왕의 굄을 받아 횡포한 짓을 제멋대로 하고, 자기의 직책은 다하지 못하면서 궁중의 주방 사람과 결탁하고 몰래 어선(御膳 임금이 드는 음식물)을 도둑질하여 모두 자기집으로 가져갔습니다. 또 민상정(閔祥正)이 황제에게 ‘선왕(先王)이 한나라의 임금이 될 만하지 못하다.’고 참소하였는데, 윤장은 상정과 한패거리가 되어 총재(?)를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죄악이 이같이 막심하니 죄를 주어 내치소서.

하니, 윤장이 도리어 참소하여 그를 좌천시켜 초도 구당(草島句堂) 초도는 지금의 사천현(泗川縣) 남쪽 바다 가운데 있는 작은 섬이다. 에 임명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관이 모두 사직하고, 감찰(監察) 등이 대궐에 나아가 천봉을 불러들일 것을 청하였으며, 정승 왕후도 그를 구해(救解)하다 성공하지 못하자 직무를 보지 않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 신맹(辛孟), 판밀직사사(判密職司事) 이공수(李公遂)도 대궐에 나아가 청하였으므로, 이에 고쳐서 광양 감무(光陽監務)로 삼았다.

8월 헌납(獻納) 원송수(元松壽)와 곽충수(郭忠秀)를 행성(行省)의 옥에 가두고 국문(鞫問)하였다.

 

송수 등이 찬성사 정천기(鄭天起)를 탄핵하기를,

“고신(告身 벼슬아치의 임명 사령장(辭令狀). 직첩(職牒))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공공연히 정방(政房)에 들어가 인물을 품정(品定)하였으며, 본처를 소원(疏遠)하게 대접하여 버려두고 늘 창가(倡家)에 있었습니다.

하자, 왕이 노하여 송수 등을 행성(行省)에 가두어 국문하고 그 직을 파면하였다. 재상과 대간이 대궐에 나아가 구해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 사슴 2마리가 덕수궁(德壽宮)에 들어왔다.

10월 상이 병환이 있어 국사(國事)는 모두 덕녕공주가 재결하였다.

11월 평양군(平壤君) 조위(趙瑋)가 졸하였다.

 

()는 연수(延壽)의 동생이다. 충숙왕(忠肅王)을 섬겨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 이때에 충숙왕이 일에 싫증을 느껴 정사를 재상에게 위임하자 위가 일의 대체(大體)를 지키기에 힘쓰며 말하는 것이 강직하여, 사람들이 그 공정함에 심복하였다.

12월 왕이 김영돈의 집에서 훙()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병이 나서 김영돈의 집으로 이어(移御)했었는데, 5(정묘)에 훙하니 재위가 5년이고 수() 12였다. 왕의 천성은 총민(聰敏)하였으나 즉위한 처음부터 모후(母后 덕녕공주(德寧公主))가 권세를 부리고, 강윤충(康允忠)ㆍ배전(裵佺)ㆍ신예(辛裔) 등이 서로 이어가면서 정권을 잡았으므로 왕후ㆍ김영돈 등이 오래된 폐단을 정리하려고 하였으나 마침내는 윤충과 예의 모함에 빠지게 되니, 식자(識者)들이 애석해 하였다. 뒤에 원에서 충목(忠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씨(李氏) 이색(李穡) 는 이렇게 적었다.

근세의 태평 시대를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들 명릉(明陵 충목왕을 말한다)을 일컫는데 ‘대개 5년 간 조야(朝野)가 깨끗하고 조용하여 사류(士類)는 즐거워하였고 백성은 의지할 수 있어 이른바 조금 안정이 되었었다.’ 하였으니 역시 지나친 말은 아니다.

○ 덕녕공주가 기철(奇轍)과 왕후에게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일을 임시로 대행하게 하였다.

○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을 원에 보내어 후사(後嗣)를 이을 임금을 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왕의 서제(庶弟)인 경창부원군(慶昌府院君) (?)는 본국에 있고 강릉대군(江陵大君) ()는 원에 있었는데, 누구를 맞아들여 왕으로 세워야 할지를 몰라 왕후가 이제현을 원에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나라에는 하루도 임금이 없을 수 없으니, 황제의 뜻에 따라 선택해 주소서.

하고, 권준(權準)ㆍ윤택(尹澤)ㆍ이승로(李承老) 등은 별도로 표문을 올려 강릉군을 세울 것을 청하였으나 원에서 따르지 않았다.

 

[D-001]양관(兩觀)의 주벌(誅罰) : 다스려지게 하기 위해서는 성인(聖人)도 간인(奸人)은 죽였다는 뜻. 《한서》 초왕전(楚王傳)에 “공자가 양관에서 베었다.” 하였고, 그 주에 “소정묘(小正卯)는 간인의 우두머리기 때문에 공자가 사구(司寇)의 직을 섭행(攝行)한 지 7일에 그를 양관 아래에서 베었다.” 하였으며, 안사고(安師古)는 “양관이란 궁궐을 말한다.” 하였다. 《漢書 卷三十六》

동사강목 제14상경진 고려 충혜왕 후 원년부터 계묘 고려 공민왕 12년까지 24년간   

임진년 공민경효왕(恭愍敬孝王) 원년 휘()는 전(?), 고휘(古諱)는 기(), 몽고명은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 충혜왕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원 순제 지정 12, 1352)

 

 

 

 

춘정월 왕이 태묘(太廟)에 관(?)하고자 하다가 결국 거행하지 않았다.

 

왕이 음양가(陰陽家),

“금년에는 몸소 제사드림이 불가합니다.

하는 말에 따라 시행하지 않으므로 재상이 이를 간쟁(諫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왕은 즉위한 이래 선조들을 받드는 예절에 정성을 다해서, 재상 장항(張沆)에게 명하여 태묘의 예악(禮樂)과 기명(器皿)ㆍ제복(祭服)을 바로잡아 고치게 하고, 또 지주사(知奏事) 원송수(元松壽)에게 명하여 태조(太祖) 이래 선왕과 선후(先后)의 진영(眞影)을 다시 그리게 하고, 그 진전(眞殿)과 산릉(山陵)을 한결같이 모두 새롭게 하였다.

○ 유탁(柳濯)을 전라도 만호(萬戶)로 삼았다.

 

()은 군사를 엄정하게 다루어 주현(州縣)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며, 사졸(士卒)들과 고락(苦樂)을 함께하니, 왕이 교서를 내려 포장(?)하고 옷과 술을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왜적이 만덕사(萬德社) 만덕산(萬德山)은 지금의 강진현(康津縣) 남쪽 15리에 있는데, 고려 때에는 백련사(白蓮社)가 있어 우리 나라의 명찰(名刹)이었다. 를 침구하여 살륙과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탁이 경기병(輕騎兵)으로 추격해 잡아서 그 포로된 사람들을 다 돌려보냈으므로, 탁이 진을 지키고 있는 동안은 왜구가 다시 침범하지 못하였다. 장생포곡(長生浦曲) 금일의 장성포(長省浦)인데, 순천부(順天府) 동쪽 60리에 있다. 을 스스로 지었는데 악부(樂府)에 전하고 있다.

○ 왕이 변발(?) 을 풀고 감찰 대부(監察大夫) 이연종(李衍宗)에게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이때에 왕이 변발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고 전상(殿上)에 앉아 있었는데 연종이 간하기를,

“변발과 호복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본받지 마소서.

하니, 왕이 기뻐하며 즉시 변발을 풀고 옷과 요를 하사하였다. 얼마 후에 연종이 또 찬성사 전윤장(全允臧)과 조익청이 뇌물받은 사실을 탄핵하였다. 착한 일을 드러내고 악을 없애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당시에 연종을 어질다고 일컬었으며, 위엄과 무력으로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철석간장(鐵石肝腸)이라고 하였다.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연종은 간사와 아첨이 아주 심한 자이다. 왕에게 변발을 풀도록 간한 것은 모두 세상을 속이고 명예를 도둑질하려는 것이었지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니었다. 당시의 군신(君臣)이 시비를 가리는 데 어두워 어진 신하라고 일컫기는 했으나, 뒷날 조일신(趙日新)의 변()이 없었다면 어찌 연종 일생의 진위(眞僞)를 알겠는가?

2월 교서(敎書)를 내려 대사(大赦)하고, 배전(裵佺) 등을 사유하였다.

 

교서에 이르기를,

“충숙왕(忠肅王) 이래 2대가 불록(不祿)하고, 원로 대신들이 내가 충선왕(忠宣王)의 손자요 충숙왕의 아들이므로 글을 천자에게 올려 나를 왕으로 봉하기를 원하여 천자께서 〈나를 왕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려 주셨으나, 돌이켜보면 내가 무슨 덕()으로 이 지위에 오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마침 시세가 점점 쇠퇴하고 풍속이 퇴폐해져서, 조정에는 요행으로 지위를 얻은 자가 많고, 창고에는 비축한 것이 없으며, 이웃 도적이 변강(邊疆)을 침략하고 천문(天文)이 재변을 알려 주니, 만약 사욕(私慾)을 억제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날마다 더욱더 삼가는 데 힘써서, 사특함과 거짓을 고치고 아첨하는 소인배를 제거하고 백성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정성을 쏟아 관후(寬厚)한 정치를 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자의 은덕에 보답하고 조종(朝宗)의 공업(功業)을 보존하며, 자전(慈殿)의 마음을 위로하고 나라 원로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무릇 모든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나의 미치지 못한 점을 바로잡아 끝을 잘 맺도록 도모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근래에 총애받는 근신(近臣)이 임금의 총명을 가림으로 말미암아 아래의 실정이 위에 통하지 못하여 임금을 그르치기에 이르렀으니, 대언(代言)의 전대(轉對)와 소사(所司)의 상신(上申) 같은 것은 친()히 하지 않을 수 없고, 서연(書筵)의 시신(侍臣)과 호분(虎賁) 의 위사(衛士)들은 가려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올바른 사람과 군자가 항상 곁에 있는 것이며, 언관(言官)과 필사(拂士)가 어찌 통하지 않음이 있으리요. 그 설시(設施)하는 계획은 유사(有司)가 모여 의논하여 상신해 들려 주기를 바란다.

하고, 이에 제향(祭享)을 중히 여기고 사전(祀典)을 삼가고 권문 호족을 눌러 사치를 금하며, 옥송(獄訟)을 공평히 하고 공부(貢賦)를 줄이며, 곤궁한 백성을 진휼하고 효자와 열녀를 정려(旌閭)하며, 학교를 일으키고 유일(遺逸)을 등용하며, 화렵(火獵)을 금하고 징채(徵債)를 엄금하니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으나, 배전은 으뜸가는 죄악을 저질렀는데도 불법으로 사해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분해 하였다.

○ 정방(政房)을 폐지하였다.

 

왕이 정방을 폐지하고 문관ㆍ무관을 전주(銓注)하는 일을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로 돌렸다. 전법판서(典法判書) 백문보(白文寶)가 상서(上書)하였다.

“정사를 하는 요체는 사람을 잘 얻는 데 있습니다. 만일 작은 허물만을 지적하고 모든 착한 일을 덮어 버린다면 등용할 만한 사람이 없고, 그 기국(器局)에 따라 직임(職任)을 제수한다면 버릴 선비가 없을 것입니다. 관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사마광(司馬光) 10()에 따라 양부(兩府)로부터 6() 이상자에 이르기까지 매년 필수적으로 10과 내에서 한 사람씩 천거하되, 그 적격자를 천거하지 못했을 때에는 천거한 사람을 함께 면직하게 하소서. 전리사와 군부사는 옛날의 정부(政府), 옛날에는 문ㆍ무관이 각기 그 벼슬길이 달라 각기 전주(銓注)를 맡았었는데 의왕(毅王 의종(毅宗)) 이후부터 문무가 교류되고 관직 역시 서로 섞바뀌어 제수되어, 근대에는 관리를 선임하는 법이 크게 무너져서 품계나 공죄(功罪)를 따지지 않고 차례대로 바꾸어 관직이 마치 섶나무 쌓이듯 하고, 전직자(前職者)가 나라에 가득 찼습니다. 그러므로 엽관(獵官) 운동하는 자들이 홍수처럼 넘치니, 마땅히 아문(衙門)을 감하거나 병합하여 긴급하지 않은 직임은 도태시키고 도목(都目)에 합하여 기록하면 거의 벼슬을 다투는 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 전법사(典法司)의 총랑(摠郞) 정운경(鄭云敬)과 좌랑(佐郞) 서호(徐浩)를 내전(內殿)에 불러 술을 내렸다.

 

두 사람이 법을 지킴에 권귀(權貴)들에게도 흔들리지 않았으므로 장려한 것이다. 상서(尙書) 현경진(玄慶進)이 간하기를,

“침전(寢殿)은 지엄(至嚴)한 곳인데 지금 외인이 드나듦이 절제가 없고, 또 형정(刑政)을 맡은 관원은 가까이해서는 안 되니, 운경과 호()에게 침전에서 술을 내리는 것은 모두 위법입니다.

하니, 왕이 옳게 여겼다.

○ 왕의 어머니인 덕비(德妃) 홍씨(洪氏)를 높여 대비(大妃)라 하고 부()를 세우고 관속을 두었다.

 

대비의 덕경부(德慶府)를 고쳐서 문예부(文睿府)라 하고, 또 공주부(公主府)를 설치하여 숙옹부(肅雍府)라 하였다.

3월 왕이 강화(江華)에 있는 폐왕(廢王)을 시해(弑害)하였다.

 

폐왕이 강화에 있는데 지공(支供)하는 음식도 충분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왕래도 끊어져 근심에 싸여 울부짖다가, 이때에 와서 짐주(?)에 의해 훙()하여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도성(都城)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뒤에 원에서 충정(忠定)이란 시호를 내렸다.

최씨(崔氏)는 이렇게 적었다.

전 사서(史書)에 ‘전왕이 짐주에 의해 훙했다.’ 하여 그 말이 은휘(隱諱)한 것 같으나 이미 ‘전왕이 강화로 물러났다.’라 하고, 이어서 ‘짐주에 의해 훙했다.’ 하였으니, 일을 미루어보면 공민(恭愍)이 찬시(纂弑)하였다는 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 다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였다.

○ 왜구가 교동(喬桐)에 불을 질렀다.

 

포왜사(捕倭使) 김휘남(金暉南)이 왜구를 막으러 풍도(風島) 지금의 수원부(水原府) 서쪽 45리에 있다. 에 이르러 적선 20척을 만나 싸우지도 않고 물러나 증원병(增援兵)을 청하였다. 얼마 있다가 좁은 물목인 안흥(安興) 지금의 태안군(泰安郡) 서쪽 34리에 있는데 뱃길이 험하다. 또 지금의 결성현(結城縣) 서쪽 18리에 있는데 곧 옛 안흥 부곡(安興部曲)이란 설도 있다.ㆍ장암(長巖) 지금은 미상 등지에서 왜구와 싸워 적선 1척을 포획(捕獲)하였다. 왜구가 다시 파음도(巴音島) 지금은 보음도(甫音島)로 일컫는데 강화에 있다. 를 도륙(屠戮)하자, 휘남은 병력이 적어 대적하지 못하고 물러가 서강(西江)에 있으면서 위급함을 고하니, 제영(諸領)의 병사 및 홀치(忽赤)를 뽑아 서강ㆍ갑산(甲山)ㆍ교동에 나누어 보내 방비하게 하니 도성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왜구가 드디어 교동 갑산창(甲山倉)을 불사르매, 전 대언 최원(崔源)이 왜구와 싸워 물리치고 적선 2척을 포획하였다.

○ 집의(執義) 김두(?)를 파직하였다.

 

조일신(趙日新)이 원에서 왕을 시종한 공을 믿고 횡포를 부리며 교만 방자하였다. 왕에게 청하기를,

“원 조정의 권신과 행신(倖臣) 중에 우리 나라와 인척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그 족속에게 관직을 줄 것을 청하였는데, 지금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로 하여금 전선(銓選)을 맡게 한다면 아마 유사(有司)가 법문(法文)에 구애되어 응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청컨대 정방(政房)을 복구하시어 벼슬을 제수하소서.

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으니, 일신이 분연히 말하기를,

“신이 무슨 면목으로 원 조정의 사대부들을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사직하였다. 이때에 감찰 대부 이연종(李衍宗)이 간교하여 사세를 헤아리고 임금의 뜻을 엿보는 데 능해서 여러 번 시사(時事)를 말하되 일신(日新)은 논하지 않으니, 원사(院使) 기원(奇轅)이 이를 기롱하였다. 연종이 말하기를,

“근자에 조익청과 전윤장을 탄핵했는데, 만약 이제현과 일신을 탄핵한다면 왕은 누구와 더불어 일을 의논하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두(?) 등이 연종은 늙은 간인(奸人)으로 일신에게 붙었다 하여 드디어 연종과는 더불어 의논하지 않고, 지평(持平) 곽충수(郭忠秀)ㆍ장령(掌令) 경천흥(慶千興)과 일신의 불법한 일을 탄핵하였다. 이에 일신이 대관(臺官)과 조정에서 대질(對質)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연종과 이공수(李公遂)에게 명하여 양쪽의 의견을 내정(內庭)에서 듣게 하였다. 연종이 탄핵장(彈劾章)을 손에 들고 조목조목 따져 물으니, (?)가 말하기를,

“공은 헌사(憲司)의 장()으로 먼저 죄인을 들어 탄핵하지는 않고 도리어 우리들을 심문하는가?

하니, 연종이 부끄러워하였다. (?)와 충수가 또 일신의 가노(家奴)를 가두자 일신이 옥()을 부수고 꺼내가서는 도리어 대관을 고소하니, 왕이 명하여 두 등에게 출사하지 말라 하였다. 연종이 명을 받들고 대(臺 사헌부(司憲府))에 앉아서 드디어 두 등을 탄핵하였다. 왕이 언젠가 밤에 이제현을 불러 국사(國事)에 대해 자문할 때 이야기 도중에 말하기를,

“연종은 거짓이 많은 사람이다.

하였다.

사신은 이렇게 적었다.

왕은 총명하고 인자하여 가히 치적이 있을 임금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바야흐로 정치를 하려 할 때에는 대관들은 법과 기강을 진작(振作)하여 옛 풍속을 복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의 좌우에서 모시고 있던 측근들은 원에서 왕에게 시종한 공을 믿고 어진이와 재능 있는 이들을 미워하였는데, 일신은 횡포가 더욱 심하였다. 연종은 자신이 헌부의 장이 되었으면서 도리어 일신에게 아부하여 드디어는 두 등을 탄핵하여 저지시켰다. 이에 뭇 소인들은 나날이 진출하고, 충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나날이 물러가서 정사는 날로 문란해졌다. 비록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다스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이연종이 죄가 있어 귀향(歸鄕)하였다.

 

연종이 처음에 조일신에게 붙었다가 일신이 탄핵을 당하게 되자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가만히 향리(鄕里)로 돌아갔다.

사신(史臣)은 이렇게 적었다.

소인(小人)을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진실로 지극한 밝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 간사함을 밝힐 수 있겠는가? 연종이 왕의 변발(?)을 간한 것을 사관(史官)은 말하기를 ‘어진 신하로다. 비록 위무(威武)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구나.’ 하였으나, 김두(?) 등을 탄핵한 데 대하여는 사관이 지목하여 말하기를 ‘늙은 것이 간사하다.’ 하였으니, 대저 위무로써도 굴복시킬 수 없는 것이 어찌 간사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인가. 두 사관은 모두 같은 시기에 그 사람을 목격하고 쓴 것인데 비난과 칭찬이 이같이 다르니, 어찌 연종에게 사()가 있어서 일부러 비난하거나 칭찬하였겠는가. 대개 연종은 형세를 잘 추측해서 거짓을 꾸며 명예를 낚는 자이다. 하는 일들을 두고 보건대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익청(益淸)과 윤장(允臧)이 다 같이 왕을 수행하고 시종한 공신으로 기세가 매우 성하기는 하였지만, 왕의 총애를 굳히며 음흉하고 악독한 점에 있어서는 일신에게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맨 먼저 탄핵하여 위세를 꺼리지 않음을 보였다. 또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데에 단단히 뜻을 두어 간언(諫言)을 잘 받아들일 것을 알았으므로 변발 같은 것은 그렇게 큰 허물이 아닌데도 홀로 간하여 과감히 꺼리지 않고 말한다는 것을 보였으며, 기원(奇轅)이 그가 말하지 않음을 기롱하니 제현과 일신을 아울러 칭찬하기를 ‘왕은 같이 국사를 의논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로 핑계대었다. 일신이 장차 패하려 할 때에는 기미(機微)를 보고 먼저 인퇴(引退)하여 화()를 멀리하려고 꾀하였으니,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용하고 거짓을 꾸미는 데 교묘하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때문에 비록 당시의 사관으로서도 그가 악한 자에게 붙는 것을 모르고 도리어 착한 것을 드러내고 악한 것을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그 소인을 알기 어려움이 이와 같다. 그런데 왕은 제현(齊賢)에게 말하기를 ‘연종은 거짓이 많은 사람이다.’ 하였으니, 간사함을 환히 꿰뚫어보는 왕의 총명이 어찌 그렇게도 지극하였던가. 그러나 한 가지 한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밝게 알면서도 물리치지 못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갔다는 명예를 도둑질하게 하였으니, 뒷날 소인을 부리는 사람은 이것을 거울삼지 않을 수 있으랴.

○ 대언(代言) 김득배(金得培)ㆍ유숙(柳淑)을 파면하였다.

 

이보다 앞서 원의 승상 탈탈(脫脫)이 사신을 보내어 글로 왕을 경계하기를,

“소인(小人)을 쓰지 말라.

하였는데, 조일신과 최덕림(崔德林)이 그 사자를 맞아 말하기를,

“유숙과 김덕배가 안에서 권세를 부린다.

하니, 사자가 왕에게 아뢰어 파직하였다. 득배 등은 다 같이 왕을 따라가 숙위하다가 귀국하여 대언(代言)에 제수되어 기밀(機密)한 정무(政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숙()은 소명(召命)이 없으면 예궐(詣闕)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일신 등이 이를 미워하여 죄를 얽어 파직케 하였다.

○ 성균관(成均館) 생원 이색(李穡)이 상서하여 일을 말하였다.

 

색은 이곡(?)의 아들이다.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여 이미 명성이 있었다. 곡이 원에 벼슬하니 색이 조관(朝官)의 자제(子弟)로 국자감(國子監) 생원(生員)에 보충되어 재학한 지 3년에 학문이 크게 진보하고 성리학(性理學) 서적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다. 곡이 본국에서 졸하니, 색이 원으로부터 분상(奔喪 타향에 있다가 부모의 임종을 듣고 급히 돌아와 거상(居喪)하는 것)하여 당시 복중(服中)에 있으면서 상서하기를,

“신은 들으니 ‘무사할 때에는 공경(公卿)의 말도 홍모(鴻毛)보다 가볍고 사변이 있은 뒤에는 필부(匹夫)의 말이라도 태산보다 중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필부의 천한 신분으로 위엄을 무릅쓰고 감히 나와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조종(祖宗)께서 창제하신 제도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전제(田制)가 더욱 심합니다. 호강(豪强)한 자들이 겸병(兼倂)하였으니 ‘까치가 지은 둥우리에 비둘기가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유사(有司)가 비록 공문(公文)에다 주필(朱筆)로 전후(前後)의 주객(主客)을 정하여 놓아도 갑()이 세력이 있는 자이면 을()은 곧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는데, 하물며 공문 주필 또한 물고기 눈이 진주(珍珠)에 섞인 것이 많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전지를 받은 집은 모두 임금의 신하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대신 경작시키기 때문에, 비록 저 사람이 토지를 잃는다고 해도 이 사람은 오히려 얻는 것이니, ()나라 사람이 잃은 활을 초나라 사람이 얻은 것과 같아서 그래도 가합니다. 그러나 백성이 하늘로 삼는 식량은 오직 전지(田地)에 달려있는데, 한 해가 다하도록 부지런히 움직여도 부모 처자를 봉양하기에도 오히려 넉넉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조세(租稅)를 거두는 것이 이미 한 농가에 대해 34가에 이르기도 하고 혹 78가에 이르기도 하므로 그 조세를 바치기에도 부족하여 또 빚을 내어 바쳐야 하니 어떻게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의 곤궁은 주로 이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그 법을 고치지 않고는 그 폐해를 제거하기 어렵습니다. 쟁탈한 것은 그 원인을 따져서 바로잡고 새로 개간하는 것은 거기에 따라 측량하여, 새로 개간한 땅에는 세를 거두고 지나치게 사여(賜與)하는 토지를 줄인다면 나라 수입이 증가할 것이며, 빼앗은 토지를 바로잡고 경작하는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면 인심이 기뻐할 것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으십니까?

둘째 왜구(倭寇)를 막는 것입니다. 근년에 왜구가 변강(邊疆)을 침략하는데, 신이 아비의 상()을 입느라고 해변 지방에 살면서 초야(草野)의 백성들에게서 들은 것이 많습니다. 지금 계책은 두 가지에 지나지 않으니, 바로 육지에서 지키는 것과 바다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수레는 내를 건널 수 없으며 배는 육지로 갈 수 없으니, 사람의 습성도 이와 같습니다. 지금 평지에 사는 백성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배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정신이 이미 어지러워져서 한번 풍파라도 만나면 좌우로 자빠지고 엎어져서 몸을 움직여 적군과 용맹을 겨루려 해도 어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육지에서 지키는 것은 평소에 살고 있는 백성을 징발하여 기계를 날카롭게 하고, 요해처(要害處)에 진을 치고 군대의 위용(威容)을 성대하게 하며 봉화(烽火)를 신중히 하여 왜인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안렴사(按廉使)나 군수면 충분히 맡길 수 있는 것이니,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수령을 욕보이고 지공(支供)하는 비용만 허비할 뿐입니다. 해전(海戰)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가 삼면에 바다를 끼고 있어 도서(島嶼) 지방에 사는 백성이 무려 1백만이나 되는데, 배 타고 헤엄치는 것이 그들의 장기(長技)입니다. 그 사람들은 농사나 누에치기를 일삼지 않고 고기를 잡거나 소금을 구워서 이()를 얻고 있는데, 근래에는 왜적 때문에 거주지를 떠나 사느라고 이를 잃어버려서 그 원망하는 마음이 육지에 사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어찌 10배에만 그치겠습니까? 그러하니 연해나 강변에서 그들을 불러모으되, 오는 자에게 반드시 상을 준다면 수천의 무리를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장기로 그들의 원한에 사무쳤던 적들과 상대해 싸운다면 이기지 못할 자가 있겠습니까? 또 추포사(追捕使)로 거느리게 하여 항상 배 위에 있게 한다면 주군(州郡)과 도성(都城)이 편안해질 것이며, 도적을 패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육지에서 지키는 것은 우리를 견고하게 하고 해전은 저들에게 위엄을 보일 것이니, 이 두 가지는 왜구를 막는 가장 중요한 방도입니다.

셋째, 문과 무를 논한다면, 문과 무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나라가 백 년 동안 태평해서 백성이 전쟁을 모르고 만호부(萬戶府)는 황조(皇朝 원을 말한다)에서 세운 것이나 이미 헛숫자만 있고, 여러 위()의 직()은 고량 진미(膏粱珍味)를 먹는 부귀한 자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군대도 없습니다. 비록 무를 중히 한다 하나 무를 쓸 실력이 없습니다. 지금 왜구 때문에 중앙과 지방이 소연(騷然)하고 또 중원(中原 중국)에도 도적이 번진다는 소문이 들리니,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생각한즉 비록 가득 차더라도 넘치지 않으며, 환란을 생각하고 미리 방비하면 무엇이 도모하기가 어렵겠습니까? 구차하게 그대로 폐습을 되풀이하다가 하루아침에 위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대비하시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동쪽에는 일본(日本)이 있고 북쪽에는 여진(女眞)이 있고, 남쪽으로는 강절(江浙 중국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과 통하고, 위로는 천조(天朝)로 가는 길이 있어 서쪽으로 연산(燕山)에 뻗었으니, 강절 지방의 도적이 만일 범선(帆船)을 타고 오거나, 여진인이 남쪽으로 그들의 기병(騎兵)을 몰아온다면 밭 갈던 백성이 그 어느 겨를에 간성(干城)의 병졸이 되겠습니까? 만약 변이 갑자기 발생한다면 사직(社稷)과 군왕(君王)을 부호(扶護)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무과(武科)를 설치해서 숙위(宿衛)하는 군사를 충원하고, 무용(武勇)을 시험하고 기예(技藝)를 익히고 벼슬을 주어 그들의 기백(氣魄)을 진작시킨다면 나라에는 정예(精銳)한 병사가 넉넉할 것이고, 사람들은 등용되는 것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넷째, 학교를 숭상하는 것입니다. 국학(國學)은 풍속과 교화(敎化)의 근원이며 인재는 곧 정교(政敎)의 근본입니다. 나무를 북돋아 기르지 않으면 근본이 반드시 견고하지 못할 것이며, 물을 준설(濬渫)하지 않으면 그 근원이 반드시 맑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중앙에 성균관과 십이도(十二徒)와 동서 학당(東西學堂)을 세웠고, 지방 주군(州郡)에까지도 각기 학교를 두었으니, 조종(祖宗)께서 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긴 소이(所以)가 깊고 간절합니다. 그러나 지금 글 배우는 무리가 흩어지고 재사(齋舍)가 퇴락한 채 그대로 있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성인(聖人)이 되려고 배웠는데, 요즈음의 배우는 자들은 작록(爵祿)을 구하려 배우므로, 시서(詩書)를 읽고 외는데 도리도 깊이 깨닫지 못하면서 출세하려는 다툼만 치열하여 문장이나 교묘하게 꾸미고 자구(字句) 수식에만 마음을 씀이 지나치니 성정(誠正)의 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혹 길을 달리하여 문필을 그만두고 무예에 종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혹 늙어도 성취함이 없으면 자기 몸 그르친 것을 탄식하니, 그 중에서 영매(英邁)하고 걸출(傑出)하여 선비의 종장(宗匠)이나 나라의 주석(柱石)이 될 자가 그 몇이나 되겠습니까? 벼슬길에 오르는 자가 반드시 급제하지 않아도 되고, 급제한 사람은 반드시 국학(國學)을 거칠 필요도 없으니, 누가 즐겨 지름길을 버리고 어려운 길을 따라가리까? 바라옵건대 명확한 조례(條例)를 내려서 지방에서는 향교(鄕校)로부터 중앙에서는 학당으로부터 그 재능을 상고하여 십이도에 올리면, 십이도에서는 또 모두 상고하여 성균관에 올려서 일정한 기한을 정해 놓고 그 덕()과 기예(技藝)를 닦는 과정을 마친 다음 예부(禮部)에 나아가게 해서, 합격자는 예()에 따라 관직을 주고, 합격하지 못한 자도 출신(出身)할 계제(階梯)를 주되, 현직에 있으면서 과거를 보려는 자는 제외하고, 그 나머지 국학의 학생이 아니면 시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면 옛날에는 불러도 오지 않던 자들이 이번에는 가라고 해도 가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되면 인재가 배출되어 아무리 써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섯째, 이단(異端)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새로 세우시매 불사(佛寺)와 민가(民家)가 서로 뒤섞여 살더니 중세 이후부터는 그 무리가 더욱 번성하여, 이제는 오교 양종(五敎兩宗)이 이()의 소굴이 되어 냇가나 산골짜기에 절이 없는 곳이 없어 백성 중에는 놀고 먹는 자가 많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가슴아프게 여깁니다. 부처는 대성(大聖)이니, 어찌 죽은 부처의 영혼인들 자기 신도(信徒)가 이와 같이 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금지하는 조목을 내리시어 이미 중이 된 자에게는 도첩(度牒)을 주되 도첩이 없는 자는 즉시 군대에 충당하고, 새로 창건된 절을 모조리 철거하되 철거하지 않는 절이 있으면 즉시 수령을 죄주소서. 신은 들으니 전하께서는 불교를 받들어 섬기시는 정성이 더욱 돈독(敦篤)하시다 하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그 경전(經典) 중에 ‘공덕(功德)을 보시(布施)하는 것이 지경(持經 경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송독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분명히 설()하였으며,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귀신을 공경하면서 멀리하라.’ 하였으니 신은 부처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렇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난()이 극하면 다스리기를 생각하는 때를 당하여, 마땅히 현사(賢士)를 기용하는 데에 급급해야 할 것인데 폐백(幣帛) 쓰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마땅히 청정(聽政)하시는 데 부지런해야 할 것인데 정료(庭燎) 를 피우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현능(賢能)한 사람이 어찌 다 등용될 수 있으며 간사한 자가 어찌 다 물러가겠습니까? 한 가지도 정사가 되는 것은 듣지 못하고 공연히 백성의 바라는 마음만 서운하게 하니, 이렇게 하고서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뒷걸음질을 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도모하고 수레의 멍에를 북으로 하고 월()로 가려는 것과 같으니, 신은 이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깁니다. 〈주역(周易)〉에 ‘천체(天體)의 운행이 건실하니 군자는 이와 같이 스스로 힘써 쉬지 말 것이다.’ 하였으니, 마음을 수양하는 요점과 정사를 행하는 방법은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하니, 왕은 가납(嘉納)하였으나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 밀직제학(密直提學) 윤택(尹澤)이 치사하였다.

 

윤택은 좌천된 광양(光陽)으로부터 가장 먼저 소환되어 당시 정사를 열거하여 상소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자, 굳이 벼슬을 사양하고 치사한 뒤에 도성 남쪽에 정사를 짓고 소요정(逍遙亭)이라 편액(扁額)하고 소요 자적(逍遙自適)하며 살았다.

5월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 왕의 탄일(誕日)이므로 내전(內殿)에 도량(道場)을 베풀었다.

 

왕이 바야흐로 불교를 믿자 백관들이 모두 왕을 위하여 축수(祝壽)하는 재()를 베풀었다.

○ 왕이 중 보허(普虛)를 소명(召命)하여 내전(內殿)에 들어오게 해서 법()을 물었다.

 

보허는 법호(法號)를 태고(太古)라 하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득도(得道)하였다.’ 하였다. 왕이 제수하여 왕사(王師)로 삼고 부()를 세워 원융(圓融)이라 하였으며 관속을 두었다. 내불당(內佛堂)에 출입할 때는 의위(儀衛)가 참람하게도 노부(鹵簿 천자의 어가의식(御駕儀式)을 말한다)와 비슷하였다. 광주(廣州) 미원장(迷元庄) 지금의 미원현(迷元縣)으로 양근(楊根)에 속하였는데 군치(郡治) 북쪽 41리에 있다.에 살았다. 널리 전원(田園)을 점령하고 목마(牧馬)가 들에 가득하였으며, 제마음대로 승려의 직()을 제수하니 중의 무리들이 떼지어 모여들어 저자와 같았다. 왕이 맞아들여 법을 물으니 아뢰기를,

“임금의 도()는 교화(敎化)를 닦고 밝힘에 있는 것이지, 반드시 부처님을 믿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국가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부처님을 지극히 받들지라도 무슨 공덕(功德)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하시려거든 태조(太祖)께서 설치하신 사사(寺社)를 수리하는 데에서 그치시고 삼가 새로운 절을 창건하지는 마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임금이 간사한 자를 버리고 올바른 사람을 등용한다면 나라를 다스림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나를 원에서 시종할 때 모두 근로(勤勞)를 다하였기 때문에 가벼이 버리지 못하는 것이오.

하였다. 보허는 뒤에 보우(普愚)로 개명(改名)하였다.

【안】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불자(佛者)도 교화(敎化)를 밝혀서 사특한 자는 버리고 올바른 자를 등용하기를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는데도, 임금은 혼미해서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이 점에 대해 소홀하여 부처를 공양하고 반승(飯僧)하는 데 백성의 재물을 탕진하여 신령의 도움을 바랐으니 어찌 어그러진 도리가 아닌가?

6월 조일신(趙日新) 등에게 공신호(功臣號)를 내렸다.

 

일신 및 유숙(柳淑)ㆍ손기(孫琦)ㆍ조익청(曺益淸)ㆍ김용(金鏞)ㆍ정세운(鄭世雲) 등 모두 37인이니, 왕이 연경에 있을 때 수종(隨從)한 공으로 녹()하였다.

○ 토목(土木)의 역사(役事) 2년을 기한으로 금하였다.

○ 왜적이 전라도와 강릉도(江陵道)를 침구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합포(合浦)에 침구하였다.

7월 폐왕(廢王 충정왕(忠定王))을 총릉(聰陵) 지금의 개성부 남쪽에 있다. 에 장사하였다.

 

장례 치르는 제구(諸具)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많았고, 모든 관아에서 한 사람씩 참최복(斬衰服)을 입었다. 신위(神位)를 보제사(普濟寺)에 봉안하고 그 전(殿)을 선명(宣明)이라 하였다.

○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이 졸하였다.

 

()은 충선왕 때에 은총이 매우 융숭하였다. 심왕(瀋王)의 난()에는 의리를 지켜 변절하지 않았고, 조적(?)의 난을 당해서는 문을 닫고 나아가지 않았다. 천성이 순후하고 진중하여 말과 웃음이 적었고 의표(儀表)가 빼어났으나 세력에 의지하여 치부(致富)하니, 식자(識者)들이 기롱하였다. 시호는 창화(昌和)이다.

8월 법사(法司)로 하여금 판결된 송사(訟事) 5일에 한 번씩 아뢰게 하였다.

○ 처음으로 서연(書筵)을 열었다.

 

이능간(李凌幹)ㆍ이제현(李齊賢)ㆍ김영후(金永煦)ㆍ한종유(韓宗愈)ㆍ인승단(印承旦)ㆍ이군해(李君?)ㆍ장항(張沆)ㆍ안목(安牧)ㆍ백문보(白文寶) 등 여러 재신(宰臣)에게 날마다 번갈아가면서 시독(侍讀)하게 하고, 강독(講讀)한 뒤에는 당시 정치의 득실(得失)과 이해를 직언(直言)하여 숨기지 말라 하였다. 하루는 강()이 파하자 승단(承旦)이 변정도감(辨正都監)을 혁파(革罷)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응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르기를,

“좀도둑이 밤에 다니느라 달빛 밝은 것을 미워하는구나.

하였다. 당시 승단은 다른 사람의 토지를 많이 점유하여 도감에 의해 이것이 추쇄(推刷)된 때문이다. 다른 날 영후(永煦)가 또 변정도감의 폐지를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나는 아름다운 말을 듣기 위하여 서연을 베풀었는데 경들이 하는 말은 실상 내 뜻과는 어긋난 것들이다.

하고, 드디어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씨(兪氏)는 이렇게 적었다.

승단은 진실로 좀도둑 같은 소인이니 공민(恭愍)의 말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그릇된 사람임을 이미 알았으면 내쳤어야 하는데도 도리어 총애해서 재상의 지위로 만들어 경악(經幄)에 출입하게 하고 좀도둑이라 책하였으니, 이는 재상의 직을 좀도둑 같은 자도 함부로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래서야 어찌 되겠는가?

9월 조일신이 난을 일으켜 왕궁을 포위하고 숙위(宿衛)하던 신료(臣僚)들을 살해하고 스스로 우정승(右政丞)이 되었다.

 

일신이 권세를 전단(專斷)하고 방자하여 조정에서 횡포를 부리니 왕 이하가 견딜 수 없었다. 또 이제현이 자기 윗자리에 있는 것을 시기하고 여러 기씨(奇氏) 및 왕의 좌우에서 굄을 받는 신하들을 미워하여 드디어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였다. 29(기해)에 일신이 그 일당인 정천기(鄭天起)ㆍ최화상(崔和尙)ㆍ장승량(張升亮) 10여 인을 자기 집에 모으고 거리의 불량배들을 모집하여 여러 기씨 및 고용보(高龍普)ㆍ이수산(李壽山) 등을 제거하고자 모의하여 그들을 죽이려고 밤을 타서 사람을 보냈는데, 기원(奇轅)만이 피살되고 나머지는 모두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그 당시 왕은 성입동(星入洞) 이궁(離宮)에 있었는데 일신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가 포위한 뒤 수직(守直)하고 있던 판밀직(判密直) 최덕림(崔德林)과 상호군(上護軍) 정환(鄭桓) 등을 죽이매 호위하던 군사들이 몹시 놀라서 두려워하니,

일신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다만 악한 무리들만 제거할 뿐이다.

하였다. 30(경자)에 일신이 왕을 위협하여 어보(御寶)를 열게 하고는 스스로 우정승에 제수되고 천기를 좌정승으로 삼고, 그 나머지 이권(李權) 등에게도 차등 있게 관직을 주었다. 홀치 순군(忽赤巡軍)으로 하여금 대대적으로 철()의 집을 수색하게 하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으니, 체포된 사람이 옥에 가득찼고 무기를 가진 군사가 길거리에 넘쳤다. 왕과 공주가 천동(泉洞) 이궁에 이어(移御)하였는데 호위하는 군사가 모두 적의 무리였으므로 국인들이 왕을 위태롭게 여겼다.

10월 조일신이 그 당여(黨與)인 최화상ㆍ장승량을 죽였다.

 

초하루(신축)에 일신이 조정 신하들을 많이 죽이고 나서는 죄를 자기 당여에게 돌리고 자기는 면하려고 해서 화상(和尙)을 꾀어 목베어 죽이고 드디어 왕에게 도적을 토벌하러 나가라고 권하여 왕이 할 수 없이 네거리에 나갔더니 그제서야 백관들이 비로소 모였다. 장승량 등 89인을 저자에 효수(梟首)하고, 정천기를 옥에 가두고 그 아들 명도(明道)를 목베었다. 일신은 스스로 자기에게 찬화안사공신(贊化安社功臣)의 호를 더하고, 왕의 좌우에 있으면서 칼을 빼어들고 기세를 부리니, 사람들이 한심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조일신이 복주(伏誅)되고, 그 당여는 차등을 두어 죽이거나 강등하고, 김용(金鏞)은 해도(海島)에 장류(杖流)하였다.

 

일신이 내외에서 호령하니 조정 신하들이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고 한 마디 말도 못하였다. 왕이 비밀리에 전 삼사좌사(三司左使) 이인복(李仁復)을 불러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아뢰기를,

“남의 신하로서 난을 일으킨 자에게는 본디 떳떳한 형벌이 있으며, 더구나 지금 천조(天朝)의 법령이 밝은데 만일 머뭇거리고 결단을 내리지 않는다면 허물이 상께 미칠까 두렵습니다.

하니, 왕이 일신을 주벌(誅罰)할 결심을 하였다. 5(을사)에 행성(行省)에 행행하여 기로(耆老)들을 모아 놓고 비밀히 의논하고는 김첨수(金添壽)에게 명하여 일신을 잡아오게 해서 행성 문 밖에 끌어내다가 베고, 그 당여(黨與)인 정을보(鄭乙輔)ㆍ이권(李權) 28인을 옥에 가두었다가 목을 베거나 강등하였다. 드디어 사신을 원에 보내어 사실을 고하게 하니,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일신의 처자를 잡아 돌아갔는데 황후(皇后)가 여러 기씨(奇氏)에게 주어 노비로 삼았다. ()은 간사하고 시기심이 많은데 왕이 연저(燕邸)에 있을 때 수종하였으므로 총애를 받아 발탁되어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일신의 난에는 호위하는 군사들이 많이 상하였는데도 용은 상호군으로 숙직(宿直)하면서 홀로 면하였고, 또 적에 대항하여 막지도 않았으므로 물의(物議)가 분분하니 왕도 이를 혐의하여 장류하였다.

○ 이제현(李齊賢)을 우정승으로, 조익청(曺益淸)을 좌정승으로, 유탁(柳濯)을 판삼사사로, 홍언박(洪彦博)ㆍ김승택(金承澤)을 찬성사로 삼았다.

 

언박은 홍규(洪奎)의 손자이고, 승택은 김방경(金方慶)의 손자이다.

○ 전 찬성사 민상정(閔祥正)이 졸하였다.

 

상정은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 부임하는 곳마다 소문난 실적(實積)이 있었다. 언젠가 양광도 안찰사(楊廣道按察使)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권귀(權貴)에 뇌물을 실어 보내는데 역체(驛遞)로 양광도 경계를 지난다는 말을 듣고, 관리를 시켜 수색해다가 이첩(移牒)하여 국고(國庫)로 보냈다. 이 때문에 호강(豪强)한 자들도 그 기세가 꺾였다. 총재에 버금가는 지위[?宰 찬성사를 말한다]에 올라 전선(銓選)을 맡아서는 관직 수를 줄여서 옛날 제도를 회복하였다. 천성이 강직하고 위엄이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았고, 자기 골육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D-001](?) : 제사지낼 때에 검은 기장으로 만든 울창(?)이라는 술을 땅에 부어 강신(降神)을 바라는 것. 즉 제사를 뜻한다.

[D-002]변발(?) : 여진족(女眞族)이나 몽고족 남자의 머리 깎는 양식. 머리의 주위를 깎고 중앙의 머리만을 땋아서 뒤로 길게 늘인 것이다.

[D-003]불록(不祿) : 보통 사()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나, 여기서는 제후(諸侯)의 죽음을 다른 나라에 고할 때 겸사(謙辭)로 쓰인 말이다. 《예기》 잡기상(雜記上)에 “임금의 부음(訃音)을 다른 나라에 고할 때 ‘과군(寡君)이 불록하여 감히 집사자(執事者)에게 고합니다.’ 한다.” 하였다.

[D-004]호분(虎賁) : 본래 제왕(帝王)을 호위하던 주대(周代)의 관명인데, 후세에 용맹한 군인의 의미로 쓰였다. 《서경》 목서(牧書) ()에 “무왕(武王)은 융거(戎車) 3백 냥()이고 호분이 3백 인이다.” 하였다.

[D-005]필사(拂士) : ()은 필()의 의미로서 즉 군주를 정도(正道)로써 보필하는 어진 선비를 말한다. 《맹자》 고자하(告子下)에 “들어가면 법도 있는 세가(世家)와 필사가 없고, 나가면 적국과 외부에서의 우환이 없다면 그런 나라는 언제나 멸망한다.” 하였고, 집주(集注)에는 “필사는 보필하던 신하이다.” 하였다.

[D-006]사마광(司馬光) 10() : 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원년(1086)에 사마광이 건의한 10개 과목의 인재 천거하는 기준. , 1. 행의(行義)가 순고(純固)하여 사표(師表)가 되는 과() 2. 경술(經術)에 해박(該博)하여 고문(顧問)에 대비할 만한 과 3. 방정(方正)하고 대체(大體)를 알아 대간이 될 만한 과 4. 문장이 전려(典麗)하여 저술에 대비할 만한 과 5. 옥송(獄訟)을 잘 처리하고 법령에 밝아 공적(公的)인 득실을 다할 만한 과 6. 마음이 맑고 바르며 재부(財賦)를 다스려 공사(公私)를 모두 편케 하는 과 7. 공정하고 위력(威力)이 있어 한 방면(方面)을 맡길 만한 과 8. 백성을 사랑하고 절조(節操)를 닦아 수령이 될 만한 과 9. 지용(智勇)과 재략(才略)이 장수가 될 만한 과 10.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법도에 맞아 전례(典禮)를 삼을 만한 과이다. 《高麗史 志 卷二十九 選擧三》

[D-007]의왕(毅王) …… 제수되어 : 의종 24(1170) 정중부(鄭仲夫) 등 무신이 정권을 잡은 이후 관리 임면(任免)이 무신의 수중에서 좌우되다가 무신 정권이 물러난 뒤에도 구제(舊制)가 복구되지 않았음을 말한다.

[D-008]물고기 …… 섞인 것 : 진위(眞僞)가 뒤섞여 있는 것을 말한다. 물고기의 눈알이 진주(珍珠)와 비슷해서 서로 섞여 있으면 분간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D-009]()나라 …… 같아서 : 소유주가 바뀌어도 그 물건은 그대로 있다는 말이다. 《家語好生》에 “초나라 공왕(恭王)이 사냥 나갔다가 오고(?)의 활을 잃어버렸는데, 좌우가 찾을 것을 권하자 왕이 ‘초나라 사람이 잃은 활은 초나라 사람이 얻을 것이니 그만두라.’ 했다.” 하였다.

[D-010]십이도(十二徒) : 십이공도(十二公徒)로 고려 문종(文宗) 이후 개경(開京)에 있었던 열 두 개의 사학(私學). 또는 그 문도(門徒). 문종(文宗) 때에 시중(侍中) 최충(?)이 사학을 일으켜 구재 학당(九齋學堂)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자, 이에 추종(追從)하여 사숙(私塾)을 설립한 사람이 11인이나 되었으므로, 이들을 세칭 십이도라 하였다. 곧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 侍中崔公徒), 시중 정배걸(鄭倍傑)의 홍문공도(弘文公徒 熊川徒), 참정(參政) 노단(盧旦)의 광헌공도(匡憲公徒), 좨주(祭酒) 김상빈(金尙賓)의 남산도(南山徒), 복야(僕射) 김무체(金無滯)의 서원도(西園徒), 시중 은정(殷鼎)의 문충공도(文忠公徒), 평장사(平章事) 김의진(金義珍 郞中 朴明保라고도 함)의 양신공도(良愼公徒), 평장(平章) 황형(黃瑩)의 정경공도(貞敬公徒), 유감(柳監)의 충평공도(忠平公徒), 시중 문정(文正)의 정헌공도(貞憲公徒), 시랑(侍郞) 서석(徐碩)의 서시랑도(徐侍郞徒), 성명 미상인(姓名未詳人)의 구산도(龜山徒)를 이른다. 공양왕(恭讓王) 3(1391)에 폐하였다.

[D-011]오교 양종(五敎兩宗) : 고려 시대 불교의 종파(宗派). 즉 오교는 열반종(涅槃宗)ㆍ남산종(南山宗)ㆍ화엄종(華嚴宗)ㆍ법상종(法相宗)ㆍ법성종(法性宗)이고, 양종은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을 말한다.

[D-012]정료(庭燎) : 대궐 안에서 밤중에 참내(參內)하는 신하들을 위하여 켜는 큰 횃불.《주례》 추관 사훼씨(司恒氏)에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분촉(墳燭)과 정료를 갖춘다.” 하였고, 그 주에 “분()은 크다는 뜻이며, 문 밖에 세우는 것은 대촉(大燭)이라 하고, 문안에 세우는 것은 정료라 한다.” 하였다.

[D-013]심왕(瀋王)의 난() : 충렬왕(忠烈王)의 손자 고()는 심양왕(瀋陽王)을 겸하고 있던 충선왕의 사랑을 받아 원에 있으면서 심양왕의 세자가 된 뒤부터 내외의 후원 세력을 믿고, 고려의 왕위를 빼앗을 계획으로 충숙왕을 갖가지로 모략하여, 충숙왕은 원에 의해 인장(印章)을 빼앗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충혜왕(忠惠王) 때에 이르러 내응 세력이던 조적(?)이 반란을 일으키다가 패몰됨으로써 왕위 찬탈 계획이 좌절되었다. 《高麗史列傳 卷四ㆍ卷四十四》

[D-014]조적(?)의 난 : 조적은 고려 말기의 역신(逆臣)으로, 한때 충숙왕의 사랑을 받다가 최안도(崔安道)에게 사랑을 빼앗기게 되자, 채하중(蔡河中) 등과 심왕 고에게 아첨하여 왕위 찬탈을 꾀하던 중, 충숙왕이 돌아가고 충혜왕(忠惠王)이 서자, 왕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한 행위를 토벌한다고 성언(聲言)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도리어 패하여 자살하였다. 《高麗史 列傳 卷四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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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사강목 제14상경진 고려 충혜왕 후 원년부터 계묘 고려 공민왕 12년까지 24년간   

 

 

갑오년 공민왕 3(원 순제 지정 14, 1354)

 

 

춘정월 이인복을 정당문학으로 삼았다.

2월 덕녕공주가 원으로부터 돌아왔다.

 

왕이 매우 정성스럽게 섬겨 삼전(三殿)을 받드는 것과 같이 하였다.

○ 채하중(蔡河中)을 영도첨의(領都僉議), 염제신(廉悌臣)을 우정승(右政丞)으로, 유탁을 좌정승으로, 강윤충(康允忠)ㆍ원호(元顥)를 찬성사로 삼았다.

 

()는 원충(元忠)의 아들로 경망스럽고 방종했으며 학술이 없었다.

3월 초하루(계해)에 일식이 있었다.

 

○ 서장관(書狀官) 이색(李穡)이 원에 가서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

 

지난해에 왕이 선비들을 시험보였는데 색()이 장원(壯元)하였고, 가을에 행성(行省) 향시(鄕試)에서도 장원하였으므로 서장관에 충원되어 원에 갔는데, 독권관(讀券官) 한림승지(翰林承旨) 구양현(歐陽玄)이 색의 대책문(對策文)을 보고 크게 칭상(稱賞)하여 제2() 2()에 발탁하며,

“도통(道統)이 해외(海外)로 갔구나.

하였다.

 

칙명(勅命)으로 색을 응봉한림문자승사랑 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仕郞知制誥)로 제수하였다.

4월 왜구가 전라도의 조선(漕船)을 약탈하였다.

 

왜구가 해마다 침략하여 노략질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또 전라도의 조운선 40여 척을 약탈하였다.

○ 원에서 노책()을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 삼았다.

 

()이 딸을 원주에게 들어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은 본디 탈(?)이라 하였는데, 음은 책()이니 바르다[]는 것으로 훈고(?)한다.

○ 원에서 군대를 징발하였다.

 

이때에 원의 정사가 쇠퇴해져서 하남(河南)의 요망(妖妄)한 도적 한산동(韓山童)ㆍ한교아(韓咬兒) 등이 처음 난을 일으키고, 영천(?)의 요인(妖人) 유복통(劉復通)이 또 군사를 일으키어 홍건(紅巾)으로 명호를 삼고 그 무리 관선생(關先生)ㆍ사유이(沙劉二)ㆍ장사성(張士誠) 등과 같이 중원(中原)을 노략질하여 산동(山東)에 나누어 웅거하니, 그 세력이 크게 떨치고 도적이 떼를 지어 일어나서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승상(丞相) 탈탈(脫脫)이 도적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고 남정(南征)하려 하는데, 이 당시 마침 채하중(蔡河中)이 왕명을 받들고 원에 사신으로 가 있다가 다시 재상이 되려고 꾀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군사를 내어 정벌을 돕기를 청하고, 이어 정승 유탁과 염제신 등이 용맹과 지략이 있다고 천거하므로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유탁과 염제신 및 권겸ㆍ원호ㆍ나영걸(羅英傑)ㆍ인당(?)ㆍ김용(金鏞)ㆍ이권(李權)ㆍ강윤충(康允忠)ㆍ정세운(鄭世雲)ㆍ최영(崔瑩)ㆍ이방실(李芳實)ㆍ안우(安祐) 등과 서경(西京)의 수군(水軍) 3백 명을 징발하고 날래고 용감한 군사를 모집하여 8 10일을 기한으로 연경(燕京)에 집합하여 장사성을 토벌하게 하였다.

○ 채하중을 정승으로, 이수산(李壽山)을 평리(評理)로 삼았다.

 

하중 등이 정벌을 돕겠다고 청하고 나서는 원의 사신보다 앞질러 와서, 수산이 원주의 말을 선포한다고 하면서,

“하중(河中)은 일을 익히 알아 쓸만하다.

하고, 하중도 원주의 말을 전한다면서,

“수산은 영리한 사람이니 왕은 그를 등용하라.

하였다. 왕이 탈탈에게 핍박되어 염제신을 파직하고 하중을 등용하니, 감찰사(監察司)가 그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고 있다가 여러 달 만에야 서경하였다.

○ 정승으로 치사한 한양부원군(漢陽府院君) 한종유(韓宗愈)가 졸하였다.

 

종유는 한양인(漢陽人)으로 천성이 중후(重厚)하고 체구가 크고 위엄이 있어 바라보면 엄연(儼然)하여 재상의 기국(器局)이 있었다. 처음 벼슬하기 시작한 뒤로 아홉 관직을 역임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었다. 담소하기를 좋아하여 벗들과 어울려 술마시는 중에는 화기(和氣)가 유연(油然)하였다. 일을 처리하고 사물을 접함에 여유가 있었고, 문장을 지을 때는 속기(俗氣)를 떨쳐 버리기에 힘을 썼는데, 더욱 시에 마음을 두었다. 4()를 내리 섬기면서 다사다난한 때를 당하여 일에 있어서는 어려운 것도 사양하지 않으니, 세상에서 일컫기를 고려 말기의 명상(名相)이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을 얻어 아들과 사위에게 이르기를,

“포의(布衣)에서 일어나 지위가 총재(?)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한될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였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안】 한종유는 비록 일대의 명상이라고는 하지만 평생에 한 일 중 물의(物議)가 될 만한 것이 많았다. 사관(史官)이 되어서는 거짓된 상서(祥瑞)를 찬()하였고, 전주(銓注)를 맡았을 때는 기롱을 받았고 선거를 맡았을 때는 사정(私情)을 썼다. 그러나 4조를 내리 섬기면서, 충렬(忠烈)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ㆍ충혜(忠惠)의 다사다난한 때를 당하여 일에 있어서는 어렵다고 사양하지 않았고, 수상이 되어서는 어린 임금을 보필(補弼)하여 대신의 대체(大體)를 지켰다. 인물을 논함에는 마땅히 그 대절(大節)을 보아야 하는데, 그 대절이 이와 같았으며, 또 나이가 치사할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치사하고 빨리 돌아가 권세나 총행(寵幸)을 겨루려 하지 않았고 귀한 벼슬에 연연하여 탐하지 않았으니 시호를 문절(文節)이라고 한 것 또한 타당하지 않은가.

○ 처음으로 첨설직(添設職)을 설치하였다.

 

이때에 원에서 군사를 징발하자 왕이 크게 장사(將士)들을 제배(除拜)했는데, 육부(六部)의 판서(判書)와 총랑(摠郞)은 정조(政曹)를 제외하고는 배수(倍數)를 더 첨설하고, 각사(各司) 34()도 모두 첨설하였으며, 42도부(都部)에 있어서는 영()마다 중랑장(中郞將)과 낭장(郞將) 2인씩을 첨설하고, 별장(別將)과 산원(散員)을 각 3인씩 제수하여, 상군정(賞軍政)이라 하였으니 첨설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7월 유탁(柳濯)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원에 갔다.

 

이때에 탁() 등이 원에 가게 되자 장사(將士)들에게 모두 지위와 계급을 더해 주고 자원(自願)한 군사에게는 모두 3()을 올려 주었다. 백관(百官) 및 승도(僧徒)에게는 각각 형편에 따라 말을 공출(供出)하게 하고, 군사들에게는 적절한 값으로 말을 사서 정벌에 나아가게 하였는데, 군사들 중에 강제로 매입(買入)하거나 백성들의 말을 빼앗아가는 자가 많았으나 행성(行省)에서 이를 금지할 수 없었다. 오직 염제신(廉悌臣)ㆍ나영걸(羅永傑)ㆍ손불영(孫佛永)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달 4(계해)에 탁 등 40여 인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원으로 갔다. 일행이 압록강(鴨綠江)에 이르자, 강윤충(康允忠)이 여러 사람들과 모의하기를,

“우리들이 친척과 조상의 분묘(墳墓)를 버리고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데 어느날에나 돌아올 것인가? 날랜 기병 50기로 경성(京城)에 되달려가서 처음 발병(發兵)을 주장한 자를 목베자.

하고, 이 말을 제신에게 고하자, 제신이 말하기를,

“그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우리 임금은 하늘인데 하늘을 피해 어디로 도망갈 것인가? 충신(忠臣)ㆍ의사(義士)가 어찌 반측(反側)하는 말을 할 수 있느냐?

하고, 드디어 탁 등과 같이 샛길로 빨리 달려갔으므로 윤충이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당시 탈탈(脫脫)이 군사 80만을 거느리고 고우성(高郵城)을 공략하는데, 탁 등 출정(出征)에 나아간 장사 및 우리 나라 사람으로 연경(燕京)에 있는 자가 총 2 3천 명이 전봉(前鋒)이 되었다. 성이 함락되려 하는데 지원노장(知院老長)이란 자가 우리 나라 사람이 공을 독차지하는 것을 시기하여,

“날이 저물었다.

하고 휘하 군사들을 후퇴시켰더니, 이날 밤으로 도적이 방비를 갖추어 성을 빼앗지 못하였다. 이때 마침 탈탈이 참소(?)를 받아 유배되었으므로 남방의 도적이 날로 성해졌다. 우리 군사는 육합성(六合城)을 빼앗고, 또 이동하여 회안로(淮安路)를 방어하였다. 전후 수십 차례의 싸움에 이권(李權)ㆍ최원(?) 6인이 전사하고, 최영(崔瑩)은 힘껏 싸워 몸에 무수히 상처를 입었으나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듬해 군사가 되돌아았다.

○ 서해도(西海道)에서 궁수(弓手)를 모집하였다.

 

이때에 장수와 재상 중 명망이 있는 자 및 정예(精銳)한 병졸은 모두 정벌에 참여하여 궁궐의 숙위(宿衛)가 텅 비게 되니, 왕이 두려워하여 서해도에서 궁수를 모집하여 뜻밖의 변에 대비하였다.

○ 최유(崔濡)를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으로 봉하였다.

 

()는 일찍이 원에 들어가 본국을 어지럽히려고 우리 나라에서 남정(南征)할 군대 10만을 징발하라 주청(奏請)하니, 당시 우리 나라 사람으로 원에 있던 자들이 다 상주하기를,

“고려는 한 귀퉁이에 있는 작은 나라로 지금 한창 왜구(倭寇)의 환()을 당하고 있는 중이며, 또한 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어 군사를 징발할 수 없습니다.

하니, 원주가 그렇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조서(詔書)를 받들고 와서 군사 징발을 독책하고 또 창() 만들 재료를 요구하니, 왕이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삼고 봉군(封君)하였다.

12월 채하중(蔡河中)을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 이제현을 우정승으로, 홍언박(洪彦博)을 좌정승으로, 최천택(崔天澤)을 찬성사로 삼았다.

 

 

[D-001]거짓된 상서(祥瑞)를 찬()하였고 : 충숙왕(忠肅王)의 몽고 비() 금동공주(金童公主)의 부()인 위왕(魏王)의 관사(館舍) 뜰 벽돌에 햇빛이 비쳐 서릿발 같은 광채가 화초 모양을 이루자 어떤 자가, 아마 하늘이 상서(祥瑞)를 내려 성덕(聖德)을 표하는 것이라 하고, 또 중 원과(元果)가 기이한 풀을 드리매, 종유가 내관 등과 말하기를 “성덕이 이러한 상서를 이루었습니다.” 하였다. 《高麗史世家 卷三十四ㆍ列傳 卷二十三》

[D-002]전주(銓注)를 …… 썼다 : 충혜왕(忠惠王) 초에 한종유가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우대언(右大言) 이윤해(李尹?)와 시관(試官)이 되어 주빈(周斌) 등을 뽑을 때, 당시 폐신(嬖臣) 최안도(崔安道)의 아들 경()이 남의 손을 빌어 글을 지어 합격하였으므로, 간관이 시관의 취사(取士)가 고르지 못함을 논하여 다시 시험 치를 것을 청하였다. 《高麗史 列傳 卷二十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