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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의 영정(?)

천하한량 2006. 12. 8. 00:43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의 영정

 

 

 

 

문화재명 이색영정

여말삼은(麗末三隱) 가운데 1인이었던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영정(影幀) 허목(許穆)의 "목은화상기(牧隱畵像記)"에 의하면, 원래 관복과 평상복의 초상화 2본(本)이 있었는데 원본은 전하지 않고 동형동규(同形同規)의 초상화가 서천 영모영당(永慕影堂)과 예산 문정공영당(文靖公影堂)(누산영당(樓山影堂))에 모셔왔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기간 보관과정에서 초(초)가 떨어져 나가는 등 훼손이 심해 효종(孝宗) 5년(年)(1654) 후손들이 2본(本)을 모사하여 영당에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예산(禮山) 누산영당소장본(樓山影堂所藏本)은 1654년 사대부화가였던 허의(許懿)(1601~?)와 유명한 화사(畵士) 김명국(金明國)이 그렸다고 전해지며 사모(紗帽)를 쓴 우안구분면(右顔九分面)의 자세에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공신도상형식(功臣圖像形式)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목은영당소장(牧隱影堂所藏)의 소본(小本)은 비록 사방이 잘려나가 본래의 형태가 분명하지 않은 반신상(半身像)이지만 필세(筆勢)에 골격(骨格)이 감지되고 안면처리(顔面處理) 역시 섬세하여 누산영당본(樓山影堂本)과 같은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지며 전체적으로 고격(古格)을 견지하고 있다. 대본(大本)은 누산영당본(樓山影堂本) 동형동규(同形同規)의 것으로 화폭(畵幅) 우측상단(右側上端)에 추근(椎近)의 찬문(讚文)이 적혀 있는데 1526년 김희수(金希壽)(1475~1527)가 제기(題記)를 썼던 영정을 1711년에 다시 개형(改模)하여 임강서원(臨江書院)에 봉안(奉安)하였던 것으로 보여지며 고식(古式)을 충분히 따르되 약간씩 내비치는 선양기(渲梁氣)가 이 초상화의 이모년대(移模年代)를 말해준다. 영모영당(永模影堂)의 영정(影幀) 역시 동일(同一)한 상용형식(相容形式)인데 화폭 우측상단에 추근(椎근)의 목은선생화상찬(牧隱先生畵像讚)과 제기(題記)가 적혀있어 이 초상화가 1755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본(本)은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에 비해 수염처리나 창의(창衣)의 묘사 등 표현 기법면에서 뒤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이는 이모(移模)을 거듭한 이유 외에 화사(畵師)의 기량이 못미친 때문으로 보인다.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화기(畵記)에 의해 조선 헌종 10년(1844)에 이모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예산 누산영당본과 동형동규(同形同規)의 본(本)으로 서대(犀帶) 및 족좌대(足座臺) 위의 문양표현이나 연폭(聯幅)를 사용하지 않은 점에서만 차이를 보일 뿐 양식적으로 고식을 띠고 있으며 공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어 뛰어난 화사에 의해 이모되었음을 시사해준다.

이상에서와 같이 이색영정은 재세시(在世時)의 본(本)은 전하지 않지만 조선중기(朝鮮中期) 일류화가의 솜씨가 노정(露呈)된 원본(原本)에 충실한 반신상(半身像)과 전신상(全身像) 역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초상화 양식을 갖추고 있고 연대(年代)가 올라가는 원본에는 거듭 중모(重模)한 것으로 3본(本) 모두 작품의 수준이 높고 비교적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피상인물(被寫人物)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므로 회화사연구(繪畵史硏究)에 귀중한 자료(資料)로 평가(評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