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은자료실 ▒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의 영정(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

천하한량 2006. 12. 8. 00:28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의 영정

 

  

 

종    목 보물  제1215호
명     칭 이색영정(李穡影幀)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5폭
지 정 일 1995.03.1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한산이씨대종회
관 리 자 한산이씨대종회
설     명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로 85.2㎝, 세로 143㎝ 크기의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은 관리들이 쓰는 사모를 쓰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모에는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얼굴에는 옅게 붉은 기운을 넣어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옮겨 그린 것이지만 당시 일류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누산영당본과 같은 시기인 1654년 그린 것으로 현재는 반신상이지만 잘려나간 곳을 감안하면 전신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본은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1711년에 옮겨 그려 임강서원에 모셔 두었다.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의 문헌서원본(文獻書院本)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와 옷의 묘사 등의 표현기법이 떨어지는데 이는 화가의 기량 차이 때문인 것 같다.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이며,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옛 그림 화풍이 잘 표현된 초상화이다.

현재 이색영정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류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4본 5점 모두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며, 역사상 중요 인물을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목은 화상기(牧隱?像記)


목은(牧隱) 이 문정공(李文靖公)의 화상이 호서(湖西) 한산군(韓山郡) 문헌서원(文獻書院)에 있는데, 찬(贊)은 권양촌(權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다. 찬 끝에 ‘영락(永樂) 갑오년(1414, 태종14) 9월 하한(下瀚)에 문인 권근(權近)이 짓다.’라고 쓰여 있다. 덕산현(德山縣) 이씨의 옛집에 또 문정공 영당(影堂)이 있는데, 그 영정에 씌어진 연월(年月)은 정덕(正德) 갑술년(1514, 중종9)으로 되어 있으니, 앞서 그린 화상의 연도가 어느 해였는지는 잘 모르나, 우리 태조가 선위 받던 이듬해에 공이 죽었고, 그해는 홍무(洪武) 26년(1393, 태조2) 계유이다. 그러니 양촌의 찬은 아마 수십 년 후였을 것이다. 영락 갑오년에서 정덕 갑술년까지는 124년이고, 홍무 계유년에서 숭정(崇禎)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는 300년쯤 된다.
화상은 본디 두 벌로, 한 벌은 치관(?冠) 서대(犀帶)에 붉은 도포를 입었고 수염이 희끗희끗한데 지금 서원에 소장된 것이 바로 이것이며, 영당에 있는 것은 이것을 보고 그린 것이다. 또 한 벌은 전야(田野)의 옷차림이니, 슬픈 일이다. 나는 일찍이 그의 유리(流離)할 때의 감회시(感懷詩)를 외고 있었다.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농부나 촌늙은이와 다름없었으니, 그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원의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잃어버렸는데, 후에 어느 사신이 일본에 갔다가 찾아왔다. 일본의 한 늙은이가 사신에게 가져다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귀인의 화상이니 그의 자손에게 돌려주시오.’ 하였다 한다. 이상도 하다. 이것은 귀신이 한 일이지 사람으로서는 기대조차 못할 일이다. 옛날 그림이 긴 세월을 두고 떠돌아서 천이 낡고 찢어져 아래 부분 절반은 없어졌다.
효종(孝宗) 5년(1654) 겨울에 후손들이 화상을 서울로 모셔다 두 벌을 모사(摸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이 중추(李中樞 이현영(李顯英)) 옛집에 봉안(奉安)하고, 한 벌은 구본(舊本)과 함께 문헌사당에 도로 봉안하였다.
갑오년(1654, 효종5) 겨울 동짓날에 외후손 양천(陽川) 허목이 삼가 기록한다.
가운데 아우 의(懿)가 중림(重林)에 찰방(察訪)으로 있을 때 모사(摸寫)한 것이다.
사예(司藝) 이전(李?)이 이 일을 맡아 보았다.


                                                                   기언(記言) 제9권 원집(原集) 상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