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보물 제1215호 |
명 칭 | 이색영정(李穡影幀) |
분 류 |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
수량/면적 | 5폭 |
지 정 일 | 1995.03.10 |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한산이씨대종회 |
관 리 자 | 한산이씨대종회 |
설 명 |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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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화상기(牧隱?像記) |
목은(牧隱) 이 문정공(李文靖公)의 화상이 호서(湖西) 한산군(韓山郡) 문헌서원(文獻書院)에 있는데, 찬(贊)은 권양촌(權陽村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다. 찬 끝에 ‘영락(永樂) 갑오년(1414, 태종14) 9월 하한(下瀚)에 문인 권근(權近)이 짓다.’라고 쓰여 있다. 덕산현(德山縣) 이씨의 옛집에 또 문정공 영당(影堂)이 있는데, 그 영정에 씌어진 연월(年月)은 정덕(正德) 갑술년(1514, 중종9)으로 되어 있으니, 앞서 그린 화상의 연도가 어느 해였는지는 잘 모르나, 우리 태조가 선위 받던 이듬해에 공이 죽었고, 그해는 홍무(洪武) 26년(1393, 태조2) 계유이다. 그러니 양촌의 찬은 아마 수십 년 후였을 것이다. 영락 갑오년에서 정덕 갑술년까지는 124년이고, 홍무 계유년에서 숭정(崇禎)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는 300년쯤 된다.
화상은 본디 두 벌로, 한 벌은 치관(?冠) 서대(犀帶)에 붉은 도포를 입었고 수염이 희끗희끗한데 지금 서원에 소장된 것이 바로 이것이며, 영당에 있는 것은 이것을 보고 그린 것이다. 또 한 벌은 전야(田野)의 옷차림이니, 슬픈 일이다. 나는 일찍이 그의 유리(流離)할 때의 감회시(感懷詩)를 외고 있었다. 고려가 멸망한 뒤에는 농부나 촌늙은이와 다름없었으니, 그때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서원의 것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잃어버렸는데, 후에 어느 사신이 일본에 갔다가 찾아왔다. 일본의 한 늙은이가 사신에게 가져다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옛날 귀인의 화상이니 그의 자손에게 돌려주시오.’ 하였다 한다. 이상도 하다. 이것은 귀신이 한 일이지 사람으로서는 기대조차 못할 일이다. 옛날 그림이 긴 세월을 두고 떠돌아서 천이 낡고 찢어져 아래 부분 절반은 없어졌다.
효종(孝宗) 5년(1654) 겨울에 후손들이 화상을 서울로 모셔다 두 벌을 모사(摸寫)하여 한 벌은 태창동(太倉洞) 이 중추(李中樞 이현영(李顯英)) 옛집에 봉안(奉安)하고, 한 벌은 구본(舊本)과 함께 문헌사당에 도로 봉안하였다.
가운데 아우 의(懿)가 중림(重林)에 찰방(察訪)으로 있을 때 모사(摸寫)한 것이다.
사예(司藝) 이전(李?)이 이 일을 맡아 보았다.
기언(記言) 제9권 원집(原集)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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