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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의 영정(경북 안동시)

천하한량 2006. 12. 8. 00:34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의 영정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171호 (안동시)
명     칭 목은영정(牧隱影幀)
분     류
수량/면적 1폭
지 정 일 1983.06.2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
시     대
소 유 자 이장원
관 리 자 이장원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안동시 유교문화권개발사업단 054-851-6392
설     명

고려 후기의 문신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은 공민왕 1년(1352) 세금제도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장려, 불교억제 등 여러 정책에 대해 건의문을 올렸다. 공양왕 1년(1389) 이성계 일파가 위화도 회군으로 세력을 잡자 장단지역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그를 조정으로 불러 들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이듬해 여강지역으로 가던 도중 생을 마치었다.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의 대학자였던 권근의 찬하는 글이 있고, ‘영락갑신9월’이라는 기록이 함께 있어, 조선 태종 4년(1404)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은거한 뒤 야인 차림의 초상화가 따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한편 이 초상화는 임진왜란 당시 분실되었다가 일본에 갔던 사신에 의해 되찾게 되었다는 설도 함께 전해오고 있다.

 

 

이 영정은 고려 삼은(三隱) 중 한분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선생의 초상이다. 작자는 미상이나 조선초의 대학자인 양촌 권근((陽村 權近), 1352∼1409)선생의 찬문이 있고 영락(永樂) 갑신(甲申) 구월(九月)이란 연대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1404년(태종 4년) 이전 작품으로 추정된다. 전해오는 바로는 영정은 당초 은거한 뒤 야복(野服) 차림의 별본(別本)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서산서원 서재(西齋)에는 미완성 모사본이 보관되어 있기도 하다. 일설에는, 영정은 임진왜란 당시 분실되었다가 일본으로 사행(使行)갔던 사신에 의해 되찾게 되었다고도 한다.

 

 

 

 

 

 

(충남 예산군 덕산에 살던 후손 기태씨가 소장하고 있는 것은 '정덕갑술'이라고 적혀 있는데, 태조 4년으로부터 정덕갑술인 1514년까지는 118년이나 시간적인 격차가 난다. 그렇다면 기태씨가 소장했던 영정은 태조 4년 이전에 그려진 원본을 모사한 것이다.

 

'정덕갑술본'은 서울 제용감 뒤 (지금의 수송동 영당터)에 있던 목은의   손자 휘 맹진(= 맏 아들 휘 종덕 문양공의 4남) 판중추공   가묘에 봉안되어 자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왔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 왜장에게 약탈당해   멀리 일본 에도(=지금의 동경)까지 건너갔다. 
그 후 목은의 외예손인 부산첨사 여우길이 통신사로   에도에 갔을 때 이 영정을 발견하고는 가지고 돌아왔다.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1654년(효종5)에 후손 휘 단 등이 김명국 화백을 시켜오래 되어 하반신이 없어진 구본을 바탕으로 두 본을 모사하였다. 그 중 한 본은 지금 수송동 영당에,또 하나는 충남 한산의 문헌서원에 모시게 했다.

 

1767년(영종32)에 후손 휘 수옥 등이한산 문헌서원의 구본을 가지고 화백 변상벽, 정선, 조영우 등으로 하여금 두 본을 모사하게 하여 하나는 수송동 영당에,또 하나는 한산 영당에 모시게 했다. 이들 목은 영정은 최근에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제1215호)로 지정되었다.

 

1938년 후손 훈구씨가 원규, 조원씨와 더불어 새로 3본을 모사하여 한 본은 해주 영귀정 영당에, 또 한 본은 덕산 누산영당에, 나머지 한 본은서울 수송동 영당에 모셨다.

 

목은의 영당은 서울을 비롯하여 경성, 대전, 덕산, 마전, 상주, 안동, 장단, 청주, 하동, 한산, 해주, 회양, 횡성 등 전국 각지에 있고,이들 영당의 화본은 대부분 수송동 영당의 영정을
모사해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