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6년 12월 선조 29년 병신년 (충무공 이순신 52세)

천하한량 2007. 5. 5. 18:56
(10월12일부터 12월그믐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12월27일
[기축/1597년 2월12일]
「선조실록」에서
“신의 장수 가운데 계려(計慮)가 있고 담력과 용기가 있는 사람 및 군관·아병(牙兵)으로 활을 잘 쏘고 용력이 있는 자들이 있는데, 항상 진영에 머물면서 함께 조석으로 계책을 논의하기도 하고, 그들의 성심을 시험하기도 하고 함께 밀약하기도 하였으며, 또 그들을 시켜 적의 정세를 정탐하게도 하였다. 그러던 터에 거제현령 안위 및 군관 급제 김난서, 군관 신명학이 여러 차례 밀모하여 은밀히 박의검을 불러 함께 모의했다. 그랬더니 박의검은 아주 기꺼워하여, 다시 김난서 등과 함께 간절하게 지휘하면서 죽음으로 맹세하고 약속하였다.
같은 달 12일 김난서 등은 야간에 약속대로 시간되기를 기다렸는데, 마침 된하늬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바람결에다 불을 놓으니, 불길이 세차게 번져서 적의 가옥 1천 여 호와 화약 창고 두 개, 군기와 잡물 및 군량 2만 6천 여 섬이 든 곳집이 한꺼번에 다 타고, 왜선 20여 척이 역시 잇따라 탔으며, 왜놈 24명이 불에 타 죽었다. 이는 하늘이 도운 것이지만, 대개 김난서가 통신사의 군관에 스스로 응모하여 일본을 왕래하면서 생사를 돌보지 않았기에 마침내 이번 일을 성공한 것이다.
안위는 평소 계책을 논의하다가 적에 대한 언급할 경우 의분에 분개하여 자신이 살 계책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의 군관 김난서와 신명학 등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들어가 갖가지로 모의하여 흉적의 소굴을 일거에 불태워 군량·군기·화포 등 제구(諸具)와 선박 및 왜놈 서른 네 놈을 불태워 죽게 하였다. 부산의 대적을 비록 모조리 다 죽이지는 못했지만 적의 사기를 꺾었으니 이 역시 한가지 계책이 계책이었다. 일본을 왕래하는 경상수영 도훈도 김득이 부산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날 밤 불타는 모습을 보고는 이 달 12일 밤 열 시쯤에 부산의 왜적 진영 서북쪽가에 불을 놓아 적의 가옥 천 여 호 및 군기와 잡물·화포·기구·군량 곳집을 빠짐없이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러자 왜적들이 서로 모여 울부짖으며 ‘우리 본국의 지진 때에도 집이 무너져 사망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이번에 이곳에서 또 화환(火患)을 만나 이 지경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디서 죽을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또한 그럴 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안위·김난서·신명학 등이 성심으로 힘을 다하여 일을 성공시켰으니 매우 가상하며, 앞으로 대처할 기밀의 일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니 각별히 논상하여 장래를 격려하소서”
1) 라고 부산 왜영을 불태운 사실을 장계하였다.

1)『선조소경대왕실록』84, 선조 30년(정유) 1월 1일(임진).
이 장계를 받은 이튿날인 1월 2일에 이조좌랑 김신국의 장계가 왔었다.
"적의 진영을 몰래 불태운 일은 도체찰사 이원익이 거느린 군관 정희현에게 명하여 도모한 것이며, 정희맹의 심복인 허수석이 적진을 마음대로 출입하여······ 몰래 모의하여······ 불태웠습니다. 이순신의 군관이 부찰사의 복물선을 운반하는 일로 부산에 도착했는데, 마침 적의 영이 불타는 날이었습니다. 그가 돌아가 이순신에게 보고하여 자기 공으로 삼은 것일 뿐 이순신은 당초 이번 일의 사정을 모르고 치계한 것입니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면밀히 검토해 봐야 한다. 이순신 장군이나 도체찰사 이원익도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일을 도모하여 성공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산 왜영 방화는 12월 12일인데, 도체찰사의 지시로 이루어졌다면, 이순신 장군의 장계가 15일 걸려 조정에 1월 1일에 도착했으니, 이 사실은 매우 중대한 것이므로 김신국이나 도체찰사의 장계는 이보다도 먼저 조정에 보고되었어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