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7년 1월 선조 30년 정유년 (충무공 이순신 53세)

천하한량 2007. 5. 5. 18:58
(1월1일부터 3월말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1월23일[갑인/3월10일] 「실록」에서
선조 : 우리나라는 행장(小西行長)보다 훨씬 못하다. 한산도의 장수(이순신 장군)는 편안히 누워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었다.
윤두수 : 이순신은 왜구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로 나가 싸우기에 싫증이 낸 것입니다. 임진년 정운이 죽을 때에도 절영도에서 배를 운행하다가 적의 대포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산해 : 이순신은 정운과 원균이 없었으므로 해서 그렇게 체류한 것입니다.
김응남 : 정운은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 하여 참(斬)하려 하자 이순신이 두려워 마지 못해 억지로 싸웠으니, 해전에서 이긴 것은 대게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 정언신이 항상 정운의 사람됨을 칭찬했습니다.
선조 : 이번에 이순신에게 어찌 청정의 목을 벨라고 한 것이겠는가. 단지 배를 시위하여 해상을 순회하는 것 뿐이었는데, 끝내 하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제 도체찰사의 장계를 보니 시위할 약속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한참 한숨을 쉬다가) 우리나라는 이제 끝났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산해 : 인심을 책려하고 수군을 정돈하여 장래를 도모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1)
1월27일[무오/3월14일] 「실록」에서
선조 : 전라도 등은 전혀 방비하고 있지 않다. 한 사람도 수군으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판중추부사 윤두수 : 이순신은 조정의 명령을 듣지 않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싫어해서 한산도에 물러나 지키고 있어 이번 대계(大計)를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대소 인신(人臣)이 누군들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지중추부사 정탁 : 이순신은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선조 : 이순신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계미년 이래 사람들이 모두 거짓되다고 하였다. 이번에 비변사가 “제장과 수령들이 호령을 듣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비변사가 그들을 옹호해 주기 때문이다. 중국 장수는 못하는 짓이 없이 조정을 속이고 있는데, 이런 습성을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두 답습하고 있다. 이순신이 부산 왜영을 불태웠다고 조정에 속여 보고하였는데, 영상(領相)이 이 자리에 있지만 반드시 그랬을 리가 없다. 지금 비록 그의 손으로 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결코 그 죄는 용서해 줄 수 없다.
영의정 유성룡 : 이순신은 한 동네 사람이어서 신이 어려서부터 아는데, 직무를 잘 수행할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는 평일에 대장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선조 : (이순신이란 자는) 글을 잘 아는가?
유성룡 : 성품이 강의(强毅)하여 남에게 굽힐 줄을 모르는데, 신이 수사로 천거하여 임진년에 공을 세워 정헌(正憲)까지 이르렀으니, 매우 과람합니다.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하고 게을러집니다.
선조 :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 무장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우상(右相)이 내려갈 때에 말하기를, “평일에는 원균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되고, 전시에는 써야 한다.”고 하였다.
좌의정 김응남 : 수군으로서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버릴 수 없습니다.
유성룡 :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상당산성(上黨山城)을 쌓을 때, 원균은 토담집을 지어 놓고 몸소 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고 합니다.
선조 : (원균을) 수군의 선봉을 삼고자 한다.
김응남 : 지당하십니다.
영중추부사 이산해 : 임진년 수전을 할 때, 원균과 이순신이 서서히 장계하기로 약속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이순신이 밤에 몰래 혼자서 장계를 올려 자기의 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원균이 원망을 품었습니다.
윤두수 : 이순신을 전라충청통제사로 삼고, 원균을 경상통제사로 삼으면 어떻겠습니까?
선조 : 원균이 만약 적의 소굴로 직접 침입하면 누가 당하겠는가?
김응남 : 모름지기 어사를 보내 그로 하여금 규찰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조 : 문신(文臣)으로 특별히 어사를 정해 그간의 사정을 살피게 해야한다.
윤두수와 김응남이 함께 : 이순신은 조용한 사람인 듯한데, 다만 속임수가 많고 전진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조 : 원균의 일을 급히 조처하라!
병조판서 이덕형 : 원균을 처음 수전에 보낼 때 의논이 일치되지 않아 이에 이르렀습니다. 근래 변방 장수의 일을 보건대, 이운룡은 도적 한 두 명을 보면 나아가서 싸우지 않고 단지 글월[文報]만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평시같았으면 어찌 그의 몸에 벌이 미치지 않았겠습니까. 원균을 (전라)좌도로 보내는 것이 무방합니다.
선조 : 좌도로는 보낼 수 없다.
김수 : 서성이 술을 차려 잔치를 베풀고서 두 사람이 화해하도록 하였는데, 원균이 이순신에게 말하기를, “네에게 다섯 아들(권준, 배흥립, 김득광 등을 말함)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의 분해하는 불평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덕형 : 군사 일은 반드시 조리가 있어 마치 그물에 벼리가 있는 것과 같이 연후에야 두서(頭緖)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전라도의 일은 매우 문란합니다.2)
윤두수 : 신이 선거이, 이순신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영등포에 진을 치고 적과 싸우도록 했더니, 장문포에 진을 쳐 있는 적들이 와서 구원하고, 장문포에 진치고 있는 적과 싸우면 영등포에 진치고 있던 적들이 와서 구원할 뿐 행장의 군사들은 관망만 하고 있으면서 후원할만한데도 끝내 와서 구원하지 않았으니, 역시 오는대로 격파해야 합니다. 원수(元帥)가 길에서 왜적 대여석 명을 만났다고 하는데, 적이 만약 원수가 고단(孤單)함을 알았다면 말할 수 없이 되었을 것입니다. 체찰사 역시 간약(簡約)한 사람인데, 행동을 경솔히 해서는 안됩니다. 지난번에 비변사에서 이순신의 죄상을 이미 헌의했으므로 이순신의 죄상을 임금께서도 이미 통촉하시고 계시지만, 이번 일은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분노하고 있으니 행장이 지휘하더라도 역시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꾸는 것이 비록 어려운 일이지만, 이순신을 체직시켜야 할 듯합니다.
정탁 :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급할 때에 장수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선조 : 나는 이순신의 사람됨을 자세히 모르지만, 성품이 지혜가 적은 듯하다. 임진년 이후에 한번도 거사를 하지 않았고, 이번 일도 하늘이 준 기회를 취하지 않았으니 법을 범한 사람을 어찌 매번 용서할 것인가. 원균으로 대신해야 하겠다. 명나라 장수 이제독 이하가 모두 조정을 기만하지 않는 자가 없더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걸 본받는 자가많다. 왜영을 불태운 일도 김난서와 안위가 몰래 약속하여 했다고 하는데, 이순신은 자기가 계책을 세워 한 것처럼 하니, 나는 매우 온당치 않게 여긴다. 그런 사람은 비록 청정의 목을 베어 오더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이산해 : 임진년에 원균의 공로가 많았다고 합니다.
선조 : 공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앞장서서 나아가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사졸들이 보고 본받기 때문이다.
유성룡 : 신의 집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에 있기 때문에 신이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선조 : 경성(京城) 사람인가?
유성룡 : 그렇습니다. 성종 때 사람 이거의 자손인데, 직사(職事)를 감당할 만하다고 여겨 당초에 신이 조산만호로 천거했습니다.
선조 : 글을 잘 하는 사람인가? (두번째 질문임)
유성룡 : 그렇습니다.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 임진년에 신이 차령(車嶺)에 있을 때에 이순신이 정헌이 되고, 원균이 가선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늘 작상(爵賞)이 지나치다고 여겼습니다. 무장은 지기(志氣)가 교만해지면 쓸 수가 없게 됩니다.
선조 : 그 때에 원균이 그의 동생 원전을 보내 승전을 알렸기 때문에 그런 상이 있었다.
유성룡 : 거제에 들어가 지켰다면 영등?김해의 적이 반드시 두려워 했을 것인데, 오랫동안 한산에 머물면서 별로 하는 일이 없었고, 이번 바닷길도 역시 요격하지 않았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체대(遞代)하는 사이에 사세가 어려울 것같기 때문에 전일에 그렇게 계달하였던 것입니다. 비변사로서 어찌 이순신 하나를 비호하겠습니까.
선조 : 이순신은 조금도 용서할 수 없다. 무신이 조정을 가볍게 여기는 습성은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이 조산만호로 있을 때, 김경눌(金景訥) 역시 녹둔도에 둔전하는 일로 마침 그곳에 있었는데, 이순신과 김경눌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순신이 밤중에 호인(胡人) 하나를 잡아 김경눌을 속이니, 김경눌은 바지만 입고 도망하기까지 하였다. 김경눌은 허술한 사람이어서 그처럼 위태로운 곳에서 계엄을 하지 않았고, 이순신은 같은 변방 장수로서 서로 희롱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내가 그런 일을 일찍이 들었다.
이정형 : 이순신이 거제로 들어가 지키면 좋은 줄은 알지만, 한산도는 선박을 감출 수 있는 데다가 적들이 물깊이를 알 수 없고, 거제도는 그 만이 비록 넓기는 하나 선박을 감출 곳이 없을 뿐 아니라, 또 건너편 안골의 적과 상대하고 있어 들어가 지키기는 어렵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합당한 듯합니다.
선조 : 체찰사가 이순신과 원균에게 분부한 일이 있으면 비록 온당하지 못하더라도 이순신은 그런대로 면종(面從)하지만, 원균은 노기를 내어 청종(聽從)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그의 공을 빼앗겨서인가? 원균을 좌도수사에 임명하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두 사람을 진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정형 : 이순신과 원균은 서로 용납하지 못할 형세입니다.
김수 : 원균은 매양 이순신이 공을 빼앗았다고 말했습니다.
덕열 :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빼앗아 권준의 공으로 삼으면서 원균과 상의하지 않고 먼저 장계한 것입니다. 그 때에 왜선 안에서 여인(女人)을 얻은 사실을 탐지하고는 곧장 장계했다고 합니다.
선조 : 전라도는 중국 사신을 지지하느라 주사와 격군이 아직 정돈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은 모두 이순신만을 책할 수 없다.
김수 : (부산 왜영을) 불태우는 일은 이순신이 처음에 안위와 밀약하였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불사르니 이순신이 도리어 자기의 공로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윤두수 : 이순신과 원균을 모두 통제사로 삼아 서로 세력을 협조토록 해야 합니다.
선조 : 비록 두 사람을 나누어 통제사로 삼더라도 반드시 조절하여 절제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원균이 앞장서서 싸움에 나가는데 이순신은 물러나 구하지 않는다면 사세가 어려울 것이다.
김응남 : 그렇게 한다면 이순신은 중죄로서 처해야 합니다.
선조 :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해야 한다. 원균은 오늘 정사(政事)에서 해야 하는가?
이정형 : 원균을 통제사로 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으니, 경솔히 하지 말고 자세히 살펴서 해야 합니다.
1월28일[기미/3월15일] 「실록」에서
비망기로 유영순(柳永詢)에게 전교했다.
“우리나라가 믿는 바는 오직 수군 뿐인데, 통제사 이순신은 나라의 중한 임무를 맡고서 마음대로 속이고 적을 토벌하지 않아 청정으로 하여금 안연히 바다를 건너게 하였으니, 잡아다 국문하고 용서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바야흐로 적과 진을 맞대고 있기 때문에 우선 공을 세워 효과를 거두게 해야 한다. 나는 평소 경의 충용을 알고 있어 이제 경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경상도통제사로 삼노니 경은 더욱 책려하여 나라를 위해 힘을 다하라. 우선 이순신과 합심하여 전의 유감을 씻고 해적을 다 섬멸하여 나라를 구해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훈공이 종정(鐘鼎)에 새겨지게 하라. 경은 공경히 하라. 이것을 원균에게 하유하라” 하고 원균에게 전달했다.

1)『선조실록』 제84권, 108~109쪽.
2) 이 날에 " 이복남을 전라도병마수군절도사로, 원균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삼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