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4년 2월 선조 27년 갑오년 (충무공 이순신 50세)

천하한량 2007. 5. 5. 16:56

 

 

 

 

2월1일[경술/3월22일] 맑다. 늦게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았다. 청주의 겸사복 이상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는데,경상감사 한효순의 장계에 " 좌도의 적들이 모여서 거제로 들어가서 앞으로 전라도로 침범하려하니, 경은 삼도의 수군을 합하여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다. 오후에 우수사의 우후(이정충)를 불러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사도첨사(김완)가 전선 세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2월2일[신해/3월23일] 맑다. 늦게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순을 쏘았다. 바람이 어지럽게 불고 따뜻하지 않다. 사도첨사가 기한에 미치지 않았으므로 처벌했다.
2월3일[임자/3월24일]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에 올라서 활을 쏘았다. 우조방장(어영담)이 왔는데, 역적들의 소식을 들으니 걱정되며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원식ㆍ원전이 와서 상경한다고 했다. 날이 저물어 막사로 내려왔다.
2월4일[계축/3월25일] 맑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순천 부사ㆍ우조방장이 와서 이야기 했다. 저녁 나절에 본영의 전선ㆍ거북배가 들어왔다. 조카 봉이 오는 편에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기쁘고도 다행이다.
2월5일[갑인/3월26일] 맑다. 꿈에 좋은 말을 타고 바위가 첩첩인 산마루로 올라가니 아름다운 산봉우리가 동서로 뻗쳐 있고, 산마루 위에는 평평한 곳이 있기로 거기에 자리잡으려다가 깨었다.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또 어떤 미인이 홀로 앉아 손짓을 하는데, 나는 소매를 뿌리치고 응하지 않았으니 우스웠다. 아침에 군기시에서 흑각궁 백 개와 화피 여든 아홉 장을 낱낱이 셈하여 수결(서명)했다. 발포만호(황정록), 우수사의 우후가 와서 봤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우조방장, 우수사의 우후, 여도만호 등과 활을 쏘았다. 원수(권율)의 회답 공문이 왔는데, 유격 심유경이 벌써 화친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한 꾀와 교묘한 계책을 헤아릴 수 없다. 전에도 놈들의 괴에 빠졌었는데, 또 이처럼 빠지려드니 한탄스럽다.
2월6일[을묘/3월27일] 비오다. 오후에 개었다. 순천부사ㆍ조방장ㆍ웅천현감ㆍ사도첨사가 와서 봤다.
2월7일[병진/3월28일] 맑은데 하늬바람이 세게 불었다. 어머니께 문안편지를 조카 분이 가는 편에 부쳤다. 조카 봉은 분과 같이 떠나는데, 봉은 나주로 가고 분은 온양으로 갔다. 마음이 섭섭하다. 고성현령(조응도)의 보고에, "적선50여 척이 춘원포(고성군 광도면 예승)에 이르렀다"고 했다. 오늘 군대를 개편하고, 격군을 각 배에 옮겨 태웠다. 보성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와서 봤다.
2월8일[정사/3월29일] 맑은데, 샛바람이 세게 불고 날씨는 몹시 추웠다. 이침에 순천부사가 와서 말하기를, "고성땅 소비포에 적선 50여 척이 들어왔다"고 했다. 그래서 곧 제만춘을 불러 지형이 편리한지를 물었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고 저녁에 돌아왔다. 바다에 달이 밝아 잠이 오지 않는다. 순천부사와 우조방장이 와서 아야기하다가 밤 열 시쯤에 헤어졌다.
2월9일[무오/3월30일] 맑다. 새벽에 우후가 배 두 세 척을 거느리고 소비포 뒤쪽에 띠풀을 베러 나갔다. 아침에 고성현령이 왔으므로 당황포에 적선이 드나들었는지를 물었다. 또 백성드이 굶어서 서로 잡아 먹는다고 하니, 앞으로 어찌하면 살 수 있을 것인지도 물었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활 열 순을 쏘았다. 이유함이 왔다가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그의 자(字)를 물으니 여실(汝實)이라 했다. 순천부사ㆍ우조방장ㆍ우후ㆍ사도첨사ㆍ여도만호ㆍ녹도만호ㆍ강진현감ㆍ사천현감ㆍ하동현감ㆍ보성군수ㆍ소비포권관도 왔다.
2월10일[기미/3월31일] 가랑비가 걷히지 않고 바람이 세게 불다. 오후에 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와서 저녁 때까지 이야기하며 적을 토벌할 일을 논의 했다.
2월11일[경신/4월1일] 맑다. 아침에 미조항첨사(김승룡)가 왔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니, 경상우수사(원균)와 우조방장이 왔다. 같이 취했다. 활 세 순을 쏘았다.
2월12일[신유/4월2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오전 열 시쯤에 적도(거제군 둔덕면)로 진을 옮겼다. 오후 두 시쯤에 선전관 송경령이 임금의 분부 두 통과 비밀문서 한 통, 모두 세 통을 가지고 왔는데, 한 통에는 "명나라 군사 십만 명과 은 삼백냥이 온다"고 하였고 한통에는 "흉적들의 뜻이 호남지방에 있으니, 힘을 다하여 파수를 보내 형세를 보아 무찌르라"고 하였으며, 밀서에는 "일년이 지나도록 해상에서 근로하는 것을 임금님께서 잊지 못하니, 공로를 세운 장병들이 아직도 상을 받지 못한 자가 있거든 적어 올리라" 는 것이 적혀 있었다. 또 그에게서 서울에서 여러가지 소식과 역적들의 일로 임금님께서 밤낮으로 근심하며 분주하시다니 감개무량하다. 영의정(유성룡)의 편지가 왔다.
2월13일[임술/4월3일]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영의정에게 회답편지를 썼다. 식사를 한 뒤에 선전관(송경령)과 작별을 하고서는 종일 배에 머물렀다. 오후 네 시쯤에 소비포만호(이영남)ㆍ사량만호(이여념)ㆍ영등포만호(우치적)가 왔다. 오후 여섯 시쯤에 출항하여 한산도로 돌아올 때, 경사우수사의 군관 제홍록이 삼봉(고성군 삼산면 삼봉리)에서 와서 말하기를, "적선 여덟 척이 들어와 춘원포에 정박하였으므로 들이칠 만하다"고 했다. 그래서 곧 나대용을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보내어,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기회를 엿보아서 무찔러야 한다"는 말을 전하게 했다. 미조항첨사ㆍ순천부사ㆍ조방장이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2월14일[계헤/4월4일] 맑고 따뜻하며 바람도 잔잔했다.경상도의 남해ㆍ하동ㆍ사천ㆍ고성 등지에는 송희립ㆍ변존서ㆍ유황ㆍ노윤발 등을, 우도에는 변유헌ㆍ나대용 등을 점검하여 내어 보냈다. 존영 군량미 스무 섬을 실어 왔다. 방답첨사와 첨지 배경남이 왔다. 장언춘을 천민에서 면하게 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2월15일[갑자/4월5일] 맑다. 새벽에 거북배 두 척과 보성의 배한 척을 멍에나무(駕木)치는 곳으로 보내어 초저녁에 실어 오게 했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좌조방장의 늦게 온 죄를 심문했다. 흥양 배의 부정을 조사해 보니 허술한 일이 많았다. 순천부사, 우조방장, 우수사의 우후, 발포만호, 여도만호, 강진현감 등이 함께 와서 활을 쏘았다 날이 저물어 순찰사(이정암)가 공문을 보냈는데, "조도어사 박홍로가 순천ㆍ광양ㆍ두치 등지에 복병을 두고 파수보게 해달라고 장계를 올렸던 바, 수군과 수령을 아울러 이동시키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는 대답이 내려왔다" 는 것이다.
2월16일[을축/4월6일] 맑다. 암행어사 유몽인의 장계 초본을 보니, 임실현감 이몽상, 무장현감 이충길, 영암군수 김성헌, 낙안군수 신호를 파면하고, 순천부사는 탐관오리의 우두머리로 논란하고, 담양부사(이경로), 진원현감(조공근), 나주목사(이용순), 창평현령(백유항) 등 수령의 악행은 덮어주고 포상하도록 상신한다.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나라일이 이러고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또 그 가운데에는 수군 가족에 대한 징발과 네 장정 속에서 두 장정에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일을 심히 비난하였으니, 나라의 위급함은 생각하지도 않고 쓸데없이 눈앞의 임시방편의 일에만 힘쓰고 있다. 나라의 위하여 심히 통탄할 일이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순천 부사, 흥양현감, 우조방자,우수사의 우후, 사도첨사, 발포만호, 여도만호, 녹도만호, 강진현감, 광양현감 등오가 활 열 두 순을 쏘았다.
2월17일[병인/4월7일] 맑다 따뜻하기가 초여름같다.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공무를 보았다. 이홍명ㆍ임희진이 왔다. 대로 총통을 만들어 왔기에 시럼으로 쏘아 보니, 소리는 비슷한데 별로 쓰일 데가 없다. 우습다. 우수사가 들어왔는데, 거느린 전선이 다만 스무 척이니 한심스럽다. 순천부사ㆍ우조방장도 와서 활 다섯 순을 쏘았다.
2월18일[정묘/4월8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해남현감 위대기의 명령을 거역한 죄를 벌주었다.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와서 알현한 뒤에 활 두어 순을 쏘았다.
2월19일[무진/4월9일] 가랑비가 종일 오다. 활터 정자에 올라가 혼자 앉아 있는데 , 우조방장과 순천부사가 오고, 손충갑도 왔다. 불러들여 그 적을 토벌하던 일을 물었더니, 강개함을 이길 길이 없다. 종일 이야기했다.
2월20일[기사/4월10일] 안개같은 이슬비가 걷히지 않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나가지 않았다. 우조방장과 첨지 배경남이 와서 이야기했다.
2월21일[경오/4월11일] 맑다. 순천부사와 우조방장이 와서 "견내량에 복병한 곳을 가보고 왔다"고 보고했다. 청주 의병장 이봉(李逢:원본에 이름이 빠져 있음)이 순변사에게 가서 육지의 사정을 자세히 일러 주고서 해질녘에 돌아갔다. 오후 여서 시쯤에 벽방의 척후장(제한국)이 와서 구화역(통영시 광도면 노산리)앞바다에 왜선 여덟척이 줄지어 대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가 치라!"고 전령하고서, 원균의 군관 제홍록의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다.
2월22일[신미/4월12일] 제홍록이 와서 보고하는데, "왜선 열척은 구화역에 이르렀고, 여섯 척은 춘원포에 이르렀다"고 했다. 또 이미 날이 새어 미처 따라 잡지 못했다고 하므로 다시 와서 정찰이나 하라고 일러 보냈다.
  (2월23일부터 2월27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2월25일[갑술/4월15일] 「장계」에서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1월25일에 , 충청수사 구사직은 2월5일에 모두 내 관할에 소속한 여러 장수들을 일제히 거느리고 오라고 기한을 정하여 전령하였는데, 이억기의 첩보에 "나주ㆍ무안ㆍ영광 등의 고을이 입방수군의 도목조차 전혀 보내지 않아 허다한 전선에 격군을 보충할 길이 없는데, 기한이 벌써 박두하였으니 매우 민망하고 걱정이 된다"고 재삼 보고해 왔다.
그래서 나는 각 고을로 공문을 보냈는데, 이 달 2월17일 전선 스물 두 척을 거느리고 진중에 왔는바, 먼저 온 전선과 합하면 마흔 여섯척이다. 우도에 배정한 전선이 원래 책임진 수량과 더 만드는 수량을 합한 아흔 척 안에서 나주 이상의 아홉 고을에 배정된 전선 스물 일곱척은 전혀 정비되지 않아서 일이 매우 괴상하게 되었다는 사유는 이미 장계했으나, 이번에 다시금 장계하거니와 그 나머지 스물 한 척은 전선을 모두 새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격군이 없어서 기한이 다 되어도 진작 거느리고 오지 못하였으므로, 수군을 징발하여 보내지 않은 각 고을에 다시 전령을 보내어 독촉하였다.
대개 우수사 이억기도 이같이 흉적들이 꾀를 부려내는 때를 당하여 일정한 기한에 대지 못하였으니 기한 어긴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되, 다만 격군이 없어서 일정한 기한 안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그런 고민을 계속해서 보고 했으나, 각 고을에서 수군을 전혀 징발하여 보내지 않은 것이 근일에는 더욱 더 심하여 각 진포의 전선을 쉽게 조정할 수 없는 것이 도내가 똑같이 그러하므로 먼저 행수군관과 도훈도는 군령에 의하여 처벌하였다.
충청수사 구사직은 벌써 기한이 지난지 한 달이 되어도 아직 진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중대한 약속을 태만함이 이와 같으므로 조정에서 각별히 재촉함이 좋을 것같아 망녕되이 생각한 바를 장계하였다.1)
「장계」에서 그리고 이번에 도착한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첩보에 따르면, "이번에 우도에 소속된 각 고을과 포구의 원래 책임진 전선 및 더 만드는 전선등을 1월20일 안에 '상도에서는 우수영 앞바다로, 하도에서는 가리포(완도군 완도읍 군내리)앞바다로 모이게 하라'고 군관까지 보내어 재촉하였는데. 각 고을에서 입방수군을 전혀 보내지 않아서 격군을 정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진작 모이지 못하고, 벌써 기한을 넘겨기로 매우 민망스럽고 걱정되어 먼저 도착한 전선 스물 두 척을 거느리고 이 달 17일 진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주ㆍ무안ㆍ함평ㆍ영광ㆍ무장ㆍ장흥ㆍ흥덕ㆍ고부ㆍ부안ㆍ옥구 등 고을에는 더 만들라고 배정한 전선을 보내는 것은 고사하고 원래 책임진 전선까지도 정비해서 보내지 않을 뿐 아니라. 각 진포에서 달아난 수군의 도목장조차 보내지 않아 선부와 격군을 정비하지 못하므로 민망하고 걱정스럽다. 각 포구에서는 보고가 잇달고는 있지만. 군산 포만호 이세환과 범성포만호 조대지와 다경포만호 이식은 아직 관하의 변방 장수로 있으면서 격군이 없다는 것을 핑계하고 지금까지 오지 않으니 더욱 놀라운 일이므로, 위에 적은 각 고을과 포구의 수령 및 변방 장수들을 군령에 따라 엄중히 처벌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도록 해야 하겠다" 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일곱 도(팔도중 전라도는 빼고)에 가득찼던 적들이 모두 한 곳으로 모여 흉모와 교모한 게책을 안 꾸미는 것이 없으므로, 전라도를 침범할 걱정이 순식간에 박두하였는데, 수군 소속의 나주 이상 아홉 고을의 수령들이 더 만들라고 배정한 전선은 고사하고 원래 책임진 전선까지도 정비해서 보낼 뜻이 없을 뿐 아니라, 각 진포의 입방수군 중에서 달아난 수군마저 한명도 잡아 보내지 않아서 각 진포의 전선을 역시 정비할 수 없게 되었는 바, 군령이 중대한 일인데 이렇게까지 느슨해 있으니 공격하거나 수비하는 방도가 전혀 없을 것이므로 참으로 놀랄 일이다.
대개 임진년에 적세가 매우 날카롭던 무렵에 영남의 여러 성들이 연달아 무너지고 연해안 일대에 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아주 끊어졌을때, 고성ㆍ사천ㆍ하동ㆍ남해는 호남에 연접한 지방으로써 무려 이백 여척의 적선이 연속해서 들어왔는데, 우리 수군은 서른 척 미만의 전선을 가지고서도 용감하게 돌진하여 쳐서 무찌르고 하나도 빠져 돌아가지 못하게 하여 그 날카롭고 민첩한 기세를 꺽었다.
그 뒤로 전선이 조금씩 더 준비되어 전라좌ㆍ우도는 모두80척으로써 매양 삼도의 수사 및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죽음으로서 맹세하고, 물길을 가로 막아 전라도로 침범하지 못하게 한지 3년이 되었다.
호남이 보존된 것은 수군에 힘입은 것이며, 요즘에 와서는 의논이 분분하여 수군에 소속된 좌ㆍ우도를 아울러 열 아홉 고을 중에서 아홉고을이나 육군에 소속시키었을 뿐 아니라, 원래 배정된 입방수군마저도 전혀 보내지 않으므로 수군의 고약함이 전일보다 훨씬 더 심하여 참으로 민망스럽고 걱정이 된다.
나주 이상 아홉 고을 중에서 더욱 심한 곳은 나주 및 무안 등으로서 배정된 전선을 기일이 넘도록 보내지 않고 또 입방수군도 전혀 보내지 않은바, 그 죄상과 군산포만호 이세환, 법성포만호 조대지, 다경포(무안군 망운면 성내리)만호 이식 등도 아직 수군에 소속된 변방 장수들로서 재삼 독촉해도 끝내 나오지 않았으니, 크게 군율을 범하였으므로 모두 조정에서 처치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게 하되, 순찰사 이정암으로 하여금 이들에게 전선들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보내 오도록 각별히 분부하여 장계하였다.2)
2월28일[정축/4월18일] 맑다.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종사관(정경달)과 종일 이야기했다.
2월29일[무인/4월19일] 벽방의 척후장 제한국의 보고에, "적선 열 여섯 척이 소소포(고성군 마암면 두호리)로 들어왔다"고 하므로 전령하여 알리게 했다.

1)『이충무공전서』권4,「장계」12~13쪽,「請忠淸水軍節度使催促到陣狀」.
2)『이충무공전서』권4,「장계」13~15쪽,「請罪遲留諸將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