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3년 11월 선조 26년 계사년 (충무공 이순신 49세)

천하한량 2007. 5. 5. 16:39
(9월 16일부터 12월 말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윤11월5일
[을유/12월27일]
「장계」에서
광양 가관(임시 임명된 관리) 김극성의 공문이 왔다. "좌의정(윤두수) 및 도원수(권율)가 같이 의논하여 써 보낸 사령서에 '이번에 광양현감을 장계하여 파직하고 그 직을 가관으로 임명하는 것이니, 관인과 병적 문서를 인도하여 공무를 행하도록 하며, 두치목을 파수보는 일들을 경솔히 하지 말고, 검칙하여 사변에 대비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 달 초이틀에 고을에 도임하였으나, 현감은 이미 출전하여 관인과 병적 문서를 인도할 수 없으므로 공사간의 창고를 봉하고 공무를 시행한다."1)
윤11월14일
[갑오/1594년1월5일]
「장계」에서
왜적의 조총 중에서 정결하고 좋은 것을 골라 서른 자루를 봉하여 올려 보냈다.2)
윤11월17일
[정유/1월8일]

「장계」에서
전현감 어영담은 이미 파직되었거니와, 바닷가에서 자라나 뱃길에 매우 익숙하고 영남과 호남의 물길 사정과 섬들의 형세를 또렷하고 상세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적을 무찌를 일에 몸과 마음을 다하였다. 작년에 적을 무찌르던 날에도 매번 선봉장으로 나서서 여러번 큰 공을 이루었는데,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내세울 만한 인재이므로 어영담을 이미 파직하였더라도 우선 수군 조방장으로 임명하여 끝까지 계획하고 방책을 세워 큰일을 이룰 수 있도록 장계했다.
그리고 지난 10월 초아흐레에 받은 서장에는, "경은 통제의 책임으로 삼도의 장수와 군사들을 두 패로 나누어서 집으로 돌아가 쉬게 하고, 겸하여 의복과 식량까지 마련해 주라"는 분부가 있었다.3)
경상도는 탕패한 나머지 선부와 격군이 더욱 엉성할 뿐 아니라, 결진한 곳이 처음부터 본도(경상도) 내로서 틈보아 드나들며 무상으로 번갈아 쉬게 하였으며, 전라좌도도 그리 멀지 않아서 계속 번갈아 쉬게 하였거니와, 전라우도는 물길이 멀리 떨어져 있어 당장 바람이 세찬 날씨에 위험한 파도를 무릅쓰고서 쉽게 왔다갔다 할 수 없을 뿐더러 왕복하는 데에 걸핏하면 수십 일이나 한 달이 넘게 되므로 그 도의 수사 이억기를 시켜서 전선 서른 한 척을 거느리고 벌써 지난 11월 초하루에 먼저 출발케 하였다.
이에 앞서 이미 "해가 바뀌기 전에 전쟁기구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쉬게ㅐ도 하고, 전함을 더 건조시키고 격군과 수병 및 괄장군들을 낱낱이 점검하여 미리 정비해 두었다가 1월 15일 안으로 빠짐없이 거느리고 오라"고 하였다. 진에 머물러 두어야 할 전선은 50여 척으로써 항상 머물러 두어서 사변에 대비하게 하였다.4)
나는 중들을 모이게 하여 특별히 '화주'(化主 : 철물 구하는 중)라고 일컫고는 권선문(勸善文)을 지어 주어서 마을마다 돌아 다니면서 쇠붙이를 구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보충하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정은 다 되어 그 역시 쉽게 되지 않아 밤낮으로 생각하여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 듣자하니, 멀고 가까운 여러 고을에 혹시 쇠를 바치고 병역을 면제받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아랫 사람으로서는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감히 품의하여 혹시 그 철물의 경중에 따라 혹 직함으로 상 주기도 하고, 혹 벼슬길을 터 주기도 하고, 병역을 면제케 하며, 천한 신분을 면하게도 하는 공문을 만들어 내려 보내 주면 쇠를 거두어 모아 총통 등을 만들면 군사상의 중요한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변이 일어난 뒤부터 이제까지 염초(화약재료)는 넉넉히 끊여 내었으나, 거기에 넣을 석류황은 달리 나오는 곳이 없으므로, 묵은 곳간에 있는 유황 이백여 근쯤 채취하여 내려보내 주도록 장계하였다.5)
그리고 여러 섬에 있는 목장의 비어 있는 곳에 명년 봄부터 밭이나 논으로 개간하기 시작하되, 농군은 순천과 흥양의 유방군들을 써서, 나가서는 싸우고 들어와서는 농사를 짓도록 함이 좋겠다는 사연을 이미 아뢰었고, 그것을 허락해 준 사연을 낱낱이 들어 감사와 병사들에게 공문을 보냈다.
그런데 순천부의 유방군은 순찰사 이정암의 장계에 따르면, "광양땅두치에 신설되는 첨사진으로 이동시켜서 방비시킬 계획이다"고 하므로, 돌산도를 개간할 농군을 징발할 길이 없다. 내 생각에도 각 도에 떠도는 피난민이 한 곳에 모여 살 곳도 없고, 먹고 살 생업도 없으므로 보기에 참담하니, 이 섬으로 불러들여 살게 하면서 협력하여 경작하게 하여 절반씩 나눠 가지게 한다면 공사간에 다 편리할 것 같다.
흥양현 유방군은 도양장으로 들어가 농사짓게 하고, 그밖에 남은 땅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병작케 하고, 말들은 절이도로 옮겨 모으면 말을 기르는 데도 손해가 없고 군량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전라우도의 강진땅 고이도(완도군 고금면)와 해남땅 황원 목장(해남군 황산면)은 땅이 비옥하고, 농사지을 만한 땅도 무려 천 여 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으므로 철 맞추어 부침하면 그 소득이 매우 많을 것인데, 농군을 뽑아낼 길이 없거니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병작케 하여 나라에서 절반만 거두어 들여도 군량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군량이 공급만 된다면 앞날에 닥쳐올 큰 일을 치르는데 군량이 없어서 급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이야말로 시기에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유방군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감사나 병사들이 제 시기에 나서서 해야 할 일인데, 봄 농사가 멀지 않았건만 아직 실행한다는 소식이 없으니 참으로 민망하다. 조정에서 본도 순찰사(이정암)와 병사(선거이)에게 다시금 허락해 주는 분부를 거듭 밝혀 주기를 바란다.
돌산도에 있는 둔전은 벌써 묵은지 오래된 곳이며, 그곳을 개간하여 군량에 보충하고자 장계하지만, 앞에서 말한 농군은 각처에서 번들어와 수비하는 군사들 중에서 적당히 뽑아내어 짓게 하려 했으나, 요즘은 곳곳에서 변방을 지키고 있으므로 뽑아낼 사람이 없어 끝내 짓지 못하고 그대로 묵어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본영의 둔전 스무 섬지기는 늙어 남아있는 군사들을 뽑아내어 짓게 하여 그 지질을 시험해 보았던 바, 거둔 것이 중정조(중품 벼)가 오백 섬이나 되므로 씨앗으로 쓰려고 본영 성 안 순천 창고에 들여 놓았음을 갖추어 장계하였다.6)

윤11월21일
[신축/1월12일]
「장계」에서
이 달 17일에 도착한 겸순찰사 이정암에 공문에, "이번에 총병의 분부에 따른 도원수의 공문에 '정예군사 삼만 명을 모두 본도에다 배정하고 방금 징발을 독려하므로, 소속 각 고을을 삼위(三衛)로 나누어 방어사와 병사에게 각각 오천 명씩, 좌우도의 수사에게 각각 이천 명씩 배정했다'고 하므로 소속 각 관포에 고루 배정하고 명령을 따라 정비하여 도원수의 명령을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해안의 사부와 괄장군을 계속 징발하는 일만으로도 오히려 민망하고 걱정스러운 일인데, 좌우도의 수사에게도 아울러 정예군사 사천 명을 배정하여 징발을 독려하라고 하는 바, 수군의 사부와 격군을 남김없이 뽑아 내어도 사천 명의 수가 차지 못하거니와, 대개 방어사나 병사는 육전의 대장으로서 언제나 육지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각각 오천명의 군사를 정비하는 것이 이치에 당현하다고 하겠으나, 수군은 해로를 끊어 막고 있기 때문에 그 방비함이 각각 다르다. 그러므로 바다를 떠나 육지로 올라오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근간의 적세를 살펴보면, 육지쪽 웅천 등지의 적이 거제로 왕래하면서 무상으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바, 적들의 흉모와 비계를 예측하기 어렵다. 수군에 소속된 정예군사 한 명은 능히 백명의 적을 당적해 내는 것이므로 도저히 뽑아내어 보낼 수 없다는 사유를 들어서 우선 회답을 하였으니, 조정에서도 순찰사 이정암과 도원수에게 아울러 각별히 신칙을 주기를 바란다.
다만 수군을 징발하는 일이 이렇게도 소란스러우면 내 소관의 수병들을 통제할 길이 없을 것이며, 해상을 방비하는 모든 일이 백가지 중에 한 가지도 조처할 수 없게 되고, 수군의 군세가 나날이 고약하여진다면 해상으로 덤벼드는 적을 저지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밤낮없이 근심하고 있음을 갖추어서 장계하였다.7)

1) 조성도,『임징장초』163쪽 및 371쪽.
2) ① 조성도,『千辰狀草』, 165쪽 및 371쪽, ②『이충무공전서』卷首,『敎諭』14쪽,「明進鳥銃諭書(一)」"서울에 남아 있는 왜적의 총통은 다만 수량이 적을 뿐 아니라 명나라 장수들이 구하기도 하니, 경이 얻은 조총 중에서 정결하고 좋은 것을 골라서 올려라"고 했다. ③ 위의책「明進鳥銃諭書(二)」. "박진의 말을 들으니, '경상도의 사람들은 비록 조총을 얻어도 쏘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는데, 서울에서는 지금 가르치며 훈련시키고 있으니 경은 그 조총들을 올려 보내라" 하였다.
3)『이충무공전서』卷首,「敎諭」5쪽,「授三道統制使敎書」, "경을 이용하여 본직에다 전라·충청·경상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게 한다(用卿以本職仍兼全羅忠淸慶尙三道水軍流制使)"라고 하였다.
4)「狀啓」30∼31쪽,「還營狀」.
5)「請下納鐵公文謙賜硫黃狀」.
6) ①「狀啓」39쪽∼40쪽,「請設屯田狀」② 조성도, 앞의 책, 173∼74쪽 및 380∼81쪽,「둔전을 설치하도록 청하는 계본」.
7) ①「장계」154~55쪽 및 362~63쪽, 「수군에 소속된 고을에는 육군을 배정하지 말도록 청하는계본」. 장계 초본의 본문 앞에 "1593년(계사) 10월 1일에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교서를 받았으므로 비로소 썼다(癸巳十月初一日兼統制使敎書到付故始用)"라고 적혀있다. ② 『이충무공전사』권3, 「狀啓」41쪽, 「請舟師所屬勿定陸軍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