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3년 12월 선조 26년 계사년 (충무공 이순신 49세)

천하한량 2007. 5. 5. 16:41
(9월 16일부터 12월 말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12월12일[신유/2월1일] 「장계」에서
본도로 돌아와서 전번에 더 만드는 전선의 사부와 격군을 직접 보살피며 정리하고 검칙하였지만, 연해안 다섯 고을의 괄장군들은 일찍 육군에서 징발하기 때문에 거의 반이나 도망하여 이름은 있더라도 실제는 없다.1)
12월22일[신미/2월11일] 「장계」에서
겸순찰사 이정암의 공문이 왔다. "이번에 도착한 무군사(撫軍司)의 공문에 따르면, '이번에 동궁(광해군)께서 전주로 내려와 주둔하면서 하삼도(전라·충청·경상)의 무사들에게 과거를 보아 인재를 뽑으려고 하는데, 규정은 일반 규정에 의한 초시(初試)·회시(會試)·전시(殿試) 등 세 번의 시험을 생략하고, 평안도의 예에 따라 한번 시험을 보아서 인재를 뽑은 뒤에 그대로 전시를 시행하여 인재를 넉넉히 뽑을 계획을 하였으며, 시험 날짜를 12월 27일로 하여 시험을 보게 하려는 바, 아직 결정은 하지 않았지만 기일이 박두했으니 인재를 넉넉히 뽑으려고 한다는 뜻을 급히 통보하여 유능한 인재가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공문이었으므로, 공문 내의 사연을 상고하여 시행한다"는 공문이었다.
사변이 일어난지 2년 동안에 남도의 무사들이 오랫 동안 진중에 있지만 그들은 위로하고 기쁘게 한 일이 없었는데, 이제 들으니 동궁께서 완산(전주)에 머무르게 되어 온 백성들이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다.2)
12월23일[임신/2월12일] 「장계」에서
겸순찰사 이정암의 같은 공문이3) 도착했다.
12월25일[갑술/2월14일] 「장계」에서
이 달 12월 4일에 성첩한 겸사서(司書 : 세자 寺講院, 정6품)의 서장 내용에, "무릇 친족과 이웃에게 일체 대충 징발하는 것을 금하여 백성들의 삶에 대한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도록 하라"는 동궁께서의 명령이 있었다는 서장과, 같은 날에 성첩한 문학의 서장 내용에, "형장을 남용하는 일을 일체 하지 말라"는 동궁께서의 명령이 있었다는 서장 두 통을 받았다.4)
12월29일[무인/2월18일] 「장계」에서
들으니, 12월27일에 전주부에서 과거시험장을 개설하라고 명령하셨다고 하므로, 해상의 진중에 있는 장병들이 모두 기꺼기 달려가려고 하였으니 물길이 요원하여 제 기한 안으로 도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과 서로 대진해 있는 때에 뜻밖의 환란이 없지도 않을 것이므로, 정예 용사들을 일시에 내어 보낼 수 없는 일이니 수군에 소속된 군사들은 경상도의 예에 따라 진중에서 시험을 보아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도록 하되, 규정 중에 있는 '말타고 달리면서 활쏘는 것(騎射)'은 먼 바다에 떨어져 있는 외딴섬이라 말을 달릴 만한 땅이 없으니 말달리면서 활쏘는 것은 편전을 쏘는 것으로 재능을 시험보면 편리할까 생각되어 조정에서 선처해 주도록 장계하였다.5)
그리고 작년에는 다행히 종묘 사직의 위엄있는 신령이 돌보아 주어서 여러번 해전에서 승첩하였지만, 올해에는 흉악한 적들이 험한 곳에 의거하여 곳곳에 소굴을 만들어 겁내고 싸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해가 다 되도록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아직도 공을 이루지 못하여 통분하기 그지없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계책을 논의하고 의논을 채택하여 전선을 배나 더 만들고, 연해안 괄장군들을 남김없이 뽑아내어 사부와 격군을 정비하여 1월부터는 합세하여 부대를 나누어 바로 부산 앞바다를 가로막아 죽음을 맹세하고 한번 결전하겠다는 사연을 낱낱이 써 올렸다. 그런데 요즘와서는 의논이 한결같지 않아 수군에 소속된 여러 잡색군과 군량과 군기들을 육군의 여러 곳에서 차츰 옮겨 가는 형편이므로, 연해안의 백성들은 수군과 육군의 침해를 번갈아 받아 동서로 분주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길가에 떠돌아 다니기 때문에 열에 아홉 집이 비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전라우도의 수군에 소속된 연해안 열 네 고을 중에서 장흥·해남·강진·진도·영암 등 다섯 고을은 다시 수군에 소속되게 하고, 그 나머지 아홉 고을은 육군에 소속시켰으므로 전선을 더 만들던 것을 또 다시 중단하게 되었는 바, 나라의 위태로움이 극도에 다다른 이때 해전에 관한 모든 일은 방책을 세울 길이 없어 위로는 "전선을 많이 만들라"는 임금의 명령을 어기게 되고, 아래로는 내가 해를 두고 계획해 오던 것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
수군들도 사변이 일어난 뒤로 교묘하게도 병역을 피할 계책으로 서로 이사를 하며 다니면서 사는데, 수령들도 좋지 못한 자는 도망갔다고 핑계하여 끝내 잡아내지 않는다. 또한 사변이 일어난 뒤로 남원같은 고을들의 수군은 방비에 궐석한 인원이 많을 때에는 천 여명에 이르고, 옥과·남편·창평·능성·광주 등의 고을들은 칠 팔백 여 명 혹은 삼사백 여 명씩 된다. 그래서 더 만드는 전선에 필요한 사부와 격군은 고사하고 원래 있는 전선의 사부와 격군 중에서 사망한 인원마저 채울 사람이 없어 비록 수 백 척의 전선이 있다고 해도 끝내 적을 무찌를 도리가 없으니, 매우 민망스럽고 염려가 된다.
앞으로 연해안의 군사와 군량과 군기들은 장계대로 수군에 전속시키고,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명령하고, 우도 연해안의 고을도 아울러 수군에 돌려 주고, 방비에 궐석한 수군들도 수령들을 시켜 빠짐없이 붙잡아 오게 하는 일들을 모두 충청(윤승훈)·전라(이정암) 및 경상(한효순)의 삼도 순찰사들에게 각별히 분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삼가 갖추어 장계하였다.6)

1) ① 『이충무공전사』 권4, 狀 9쪽, 「還陣狀(二)」 ② 위의 책, 권4, 「狀啓」 7쪽, 「陣倭情狀」.
2)「장계」 권3, 「狀啓」 41~2쪽, 「請於陣中試才狀」.
3) ① 조성도, 『임진장초』, 175~76쪽 및 382~83쪽, 「진중에서 관거 보이는 계본」 ② 『이충무공전서』 권3, 「狀啓」 41~2쪽, 「請於陣中試才狀」.
4) ① 위의 책, 권4, 「狀啓」 7쪽, 「更請反汗一族勿侵之命狀」. ② 조성도, 『임진장초』, 199~201쪽 및 405~406쪽, 「일족에게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다시 취소해 주기를 거듭 청하는 달본」.
5)「장계」 권3, 「狀啓」 41~42쪽, 「請於陣中試才狀」.
6) ①「장계」 권3, 「狀啓」 42~43쪽, 「請沿海軍兵糧器勿令遞移狀」 ② 조성도, 앞의 책, 194~95쪽 및 401~02쪽, 「군령과 무기 등을 옮기어 가지 못하도록 명령해 주시기를 청하는 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