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4년 1월 선조 27년 갑오년 (충무공 이순신 50세)

천하한량 2007. 5. 5. 16:51

 

 

 

 

1월1일[경진/2월20일]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중이지만 다행한 일이다. 저녁 나절에 군사훈련과 전쟁 준비하는 일로 본영으로 돌아오는데, 비가 그치지 않았다.
1월2일[신사/2월21일] 비는 그쳤으나 흐렸다. 나라 제사날(명종 인순왕후 심씨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1월3일[임오/2월22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해질무렵에 관사로 돌아와서 조카들과 이야기했다.
1월4일[계미/2월23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1월5일[갑신/2월24일] 비오다.
1월6일[을유/2월25일] 비오다. 동헌에 나가 남평(南平)의 도병방(都兵房)을 처형했다.
1월7일[병신/2월26일] 비오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저녁에 남의길이 들어와서 마주 앉아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고서 헤어졌다.
1월8일[정해/2월27일] 맑다.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남원의 도병방을 처형했다.
1월9일[무자/2월28일] 맑다.
1월10일[기축/3월1일] 맑다. 아침에 남의길을 맞이하여 이갸기하는데, 피난하던 일과 그때 길바닥에서 고생하던 일을 들으니 개탄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다.
「장계」에서
순천의 돌산도와 흥양의 도양장, 해남의 화원곶, 강진의 화이도(완도군 고금면) 등지에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보충함이 좋겠다는 사유는 전에 이미 장계하였다.1)
돌산도에는 나의 군관인 훈련주부 송성을, 도양장에는 훈련정 이기남을 모두 농감관으로 임명하여 보냈으며, 농군은 흑 백성들에게 내주어 병작케 하든지, 혹은 유민(피난민)들에게 짓게 하든지 하여 관에서는 절반을 수확하도록 했다. 또 순천·흥양의 유방군과 노약한 군사들을 제대를 시켜 병작케 하되, 보습·영자·쟁기 등을 각각 그 본 고을에서 준비해 보내라고 이미 공문으로 통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도의 화이도와 화원곶에도 종사관 정경달을 "둔전의 형편을 순시·검칙하여 제 시기에 시행하도록 하라"고 이미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 도착한 호조판서의 공문에 따른 순찰사 이정암의 공문 내용에, "돌산도 등 감목관에게 이미 둔전관을 겸직시켰다"고 하거니와, 순천 감목관 조정은 벌써 전출되었고 정식 후임이 아직 내려오지 않았으며, 흥양 감목관 차덕령은 도임한지 벌써 오래되었는데 멋대로 처리하며 목장에서 "말먹이는 사람들을 몹시 학대하여 안정되게 살 수 없게 하기 때문에 경내의 모든 백성들이 꾸짖고 걱정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하며, 나도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벌써 그런 소문을 들었으므로 이번에 경작에 관한 모든 일을 이 사람에게 맡기게 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작폐하고 백성들의 원성은 더욱 더 이어갈 것이니, 차덕령을 빨리 전출시키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여 빠른 시일 안으로 보내어 농사 감독에 같이 힘쓰고,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삼가 갖추어 장계하였다.2)
그리고 본도에서 더 만들고 있는 전선을 직접 보살피고 조처해야 하겠다는 사유를 들어 장계한 뒤에 지난 12월12일에 본도로 돌아와서 검칙하였던 바, 본영에 소속된 다섯 고을로서 순천은 원래의 책임 수량과 더 만드는 수량을 아울러 전선 열 척, 흥양이 열 척, 보성이 여덟 척, 광양이 네 척, 낙안의 세 척 등은 벌써 다 만들었으나, 허다한 사부와 격군들을 일시에 보충할 수가 없어서 이들을 일제히 돌아오게 할 수 없으므로, 순천 다섯 척, 광양 두척, 흥양 다섯 척, 보성 네 척, 낙안 두척만을 먼저 검색하고 독려하여 거느리고, 이 달 1월 17일 거제땅 한산도 진중으로 출항할 것이고, 정비되지 못한 전선들은 "뒤따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아오라"고 전령하였다.
우도는 전선의 수효가 좌도보다 배나 되므로 반드시 허다한 사부와 격군을 제 기한에 보충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의 종사관 정경달을 시켜 "순검하여 조처하라"고 우수사 이억기와 약속한 곳으로 독촉해 보내면서 신칙하였다.
그러니 겸순찰사 이정암에게 아울러 각별히 독려하여 돌려 보내게3) 하도록 해당 관원을 시켜 분부해 주도록 갖추어 장계하였다.
1월11일[경인/3월2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아침에 어머니를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 따라 바로 곰내(古音川 : 熊川)에 대었다. 남의길·윤사행, 조카 분이 같이 가서 어머니를 앞에서 뵈니, 기력은 약하시지만 말씀하시는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지 못했다.
1월12일[신묘/3월3일]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한다"고 두번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이라도 떠난다는 뜻에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몸이 좀 불편한 것같다. 바로 뒷방으로 들어갔다.
1월13일[임진/3월4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너무 불편하여 자리에 누어서 땀을 내었다.
1월14일[계사/3월5일] 흐리며 바람이 세게 불었다. 저녁 나절에 동헌에 나가 장계를 봉함하고, 또 승장 의능에게 천민의 신분을 면해준다는 공문을 봉하여 올렸다.4)
1월15일[갑오/3월6일] 맑다.
「장계」에서
이 달 초이레 성첩한 겸사서(조유한)의 서장에, "이번에 경상감사(한효순)의 서장을 보니 '좌도의 적들이 모두 거제로 모였다'고 하는데, 적들의 움직임은 반드시 먼저 호남의 관사 곡식을 먹고 올라갈 것이니, 본도의 형세는 영남에 비해서 만 배나 위급하게 되었으니 경은 수군을 독려하여 거느리고 나가 길을 막고 무찌르라"고 동궁께서 명령했다는 서장을 받았다고 장계하였다.5)
1월16일[을미/3월7일] 맑다. 늦게야 동헌에 나갔다. 황득중이 들어왔다. 소문에 "문학 유몽인이 암행어사로 흥양현에 들어왔다"고 한다.
1월17일[병신/3월8일] 새벽에 눈이 오고 저녁 나절에 비가 왔다. 이른 아침에 배에 올라 아우 여필과 여러 조카와 아들 등을 배웅했다. 다만 조카 분과 아들 울을 배로 데리고 떠났다. 오늘 장계를 띄워보냈다. 오후 네 시쯤에 와우(노량땅)에 이르니 맞바람이 불고 물이 빠져 배를 운행할 수가 없었다. 닻을 내리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여섯 시쯤에 다시 닻을 오려 노량에 이르렀다.
「장계」에서
수군도 각 고을의 수령들이 태만함이 버릇되어 점검하여 보내는 데는 성의가 없을 뿐 아니라, 이제와서는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순찰사 이정암의 공문을 돌린다. 이치를 논한 첩보가 있어도 하나도 정비되지 않은 채 잡아 보내지도 않는 형편이며, 심한 관리들은 잡아 보내라는 전령을 보냈어도 그저 핑계만 대고 꿈쩍하지 않는다. 전선을 이미 더 만들어 놓았지만 격군을 보충할 길이 없으니 참으로 통분하다. 전라우도는 내 종사관 정경달을 시켜 순검ㆍ정비하도록 우수사 이억기와 약속한 곳으로 달려 보냈으며, 내게 소속된 각 고을과 포구의 전선을 간신히 정비하고서 진중으로 돌아왔다고 장계하였다.6)
1월18일[정유/3월9일] 맑다. 새벽에 떠날 때는 맞바람(셋바람)이 세게 일었다.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이르니 바람이 순하게(하늬바람) 불어 돛을 올려 사량에 이르니까 바람이 도로 거슬러(샛바람)세게 불었다. 다만 사량만호 이여념과 수사의 군관 전윤이 와서 봤다.
1월19일[무술/3월10일] 흐리다가 저녁 나절에 개이고 바람이 세게 불다. 아침에 출항하여 당포 바깥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따라 반돛으로도 순식간에 한산도에 도착하였다. 활터 정자에 올라 앉아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이야기했다. 저녁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왔다. 소비포권관 이영남에게서 영남의 여러 배의 사부 및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겠다는 말을 들으니, 참혹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1월20일[기해/3월11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고 몹시 춥다. 여러 배에서 옷없는 사람들이 거북이처럼 웅크리고 추위에 떠는 소리는 차마 듣지를 못하겠다. 군량미조차 오지를 않으니 더욱 민망스럽다. 낙안군수(신호), 우수사 우후(이정충)가 와서 봤다. 저녁 나절에 소비포권관(이영남)ㆍ웅천현감(이운룡)ㆍ진해현감(정항)도 왔다. 병들어 죽은 자들을 거두어 장사지낼 차사원으로 녹도만호(송여종)를 정하여 보냈다.
1월21일[경자/3월12일] 맑다. 아침에 본영의 격군 칠백 마흔 두 명에게 술을 먹였다. 광양현감(어영담)이 들어왔다. 저녁에 녹도만호(송여종)가 와서 보고하는데, "병들어 죽은 시체 이백 열 네 명을 거두어서 묻었다"고 한다.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두 명이 경상우수사 원균의 진영에서 와서 여러가지 적정을 상세히 말하긴 했으나 믿을 수가 없다.
1월22일[신축/3월13일] 맑다. 날씨가 따뜻하고 바람도 없다. 활터 정자에 올라 앉아 진해현감(정항)으로 하여금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게 했다. 활을 종일 쏘았다.
1월23일[임인/3월14일] 맑다. 낙안군수와 고부군수가 나갔다. 전선 두 척이 들어왔다. 최천보ㆍ유황ㆍ유충신ㆍ정량 등이 들어왔다. 저녁 나절에 순천부사도 왔다.
1월24일[계묘/3월15일] 맑고 따뜻하다. 아침에 산역(山役)하는 일로 귀장이(耳匠:木手)마흔 한 명을 송덕일이 거느리고 갔다. 영남우수사 원균이 군관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경상좌도에 있는 왜적삼백 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고 한다. 정말 기쁜 일이다.평의지(平義智:대마도주 宗義智)가 지금 웅천에 있다고 하는 데 밝혀지지는 않는다.
1월25일[갑진/3얼16일] 흐리다가 저녁 나절에 개었다. 송두남ㆍ이상록 등이 새로 만든 배를 돌아오게 하려고 사부와 격군 백서른 두명을 거느리고 갔다. 우수사 우후가 여도만호(김인영)와 활쏘기 시합을 했는데, 여도만호가 일곱 푼을 이겼다. 나는 활을 열 순을 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스무 순을 쏘았다.
1월26일[을사/3월17일] 맑다. 아침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서 활열 순을 쏘았다. 순천부사(권준)의 기일을 어긴 죄를 논했다.
1월27일[병오/3월18일] 맑다. 새벽에 배 만들 목재를 끌어 올일로 우후(이몽구)가 나갔다. 어머니 편지와 아우 여필의 편지가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다행이다. 다만 동문 밖 해운대(여수시 동북쪽에 있음)옆과 미평에 횃불 든 강도들이 나타났다고 한다. 놀랄 일이다. 저녁에 녹도의 복병한 곳에 왜적 다섯 명이 함부로 다니면서 포를 쏠 적에 한놈을 쏘아 목을 베고, 나머지는 화살을 맞고는 도망을 가벼렸다. 우후의 배가 재목을 싣고 왔다.
1월28일[정미/3월19일] 맑다. 아침에 우후가 와서 봤다. 경상우후(이의득)가 보고하기를, "명나라 제독 유정이 군사를 돌려 이 달 25ㆍ26일 사이에 올라간다"고 하며, 또 "위무사(장병을 위로하러 파견된 관리) 홍문교리 권협이 도내를 순시한 뒤에 수군영으로 온다"고 하며, 또 "화적 이겸 등을 잡아다 가두고, 아산ㆍ온양 등지에서 함부로 다니는 도적떼 90여 명을 잡아서 목을 베었다"고 하며, 또 익호장(김덕령)은 근일중에 들어올 것이다"고 했다. 전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1월29일[무신/3월20일] 비가 종일 오고 밤새도록 왔다. 새벽에 각 배들이 아무 탈 없다고 한다. 몸이 불편하여 저녁에 누워서 신음했다.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거세어 배를 안전하게 매어 둘 수가 없으니 마음이 몹시도 괴롭다. 미조항청사(김승룡)가 배를 꾸밀 일로 돌아갔다.
1월30일[기유/3월21일] 흐리고 바람이 세게 불다가 저녁 나절에는 개이고 바람도 조금 잠잠했다. 순천부사, 우수사 우후, 강진현감(유해)이 와서 알려주고 돌아갔다. 나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땀을 흘렸다. 군관과 여러 장수들은 활을 쏘았다.

1)『이충무공전서』권3,「장계」39∼40쪽,「請設屯田狀」.
2)「장계」10∼11쪽,「請改差興陽牧官狀」.
3)「장계」8∼9쪽,「還陣狀(一)」.
4)『이충무공전서』권4,「장계」1쪽, 「封進僧將僞帖狀」에, "도총섭 승 유정은‥ 공문을 체찰사(윤두수)의 공문처럼 만들어 보냈는데, 그 양식이 규격에 맞지 않으며 서명도 달라 위조한 것이 분명하다. 부역을 면제해 주거나 신분을 면제해 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인연이 있다하여 제멋대로 공문을 위조하는 바, 극히 무례하다. 이런 일을 징계하지 않으면 반드시 막기 어려운 폐단이 생길 것이다(憁攝僧惟晶‥ 體察使貼文榛成送而規違格着暑亦異僞造明白免後不輕免賤事과也 因綠時勢任意僞作極僞無狀此而不懲必有難防之幣)"라 하여 위조공문임을 밝혔다.
5) 조성도, 앞의 책, 203쪽 및 408쪽,「적을 무찌르도록 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을 아뢰는 장달」.
6)『이충무공전서』권4,「장계」9쪽, 「環陣狀(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