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4년 3월 선조 27년 갑오년 (충무공 이순신 50세)

천하한량 2007. 5. 5. 16:58

 

 

 

 

3월1일[기묘/4월20일] 맑다. 망궐례를 드렸다. 활터 정자로 올라가 검모포만호를 곤장치고, 도훈도를 처형했다. 종사관(정경달)이 돌아왔다. 막 어두울녘에 출항하려는데, 벽방 척후장 제한국이 보고하기를, "왜선이 이미 도망가 버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초저녁에 장흥의 2호선이 실수로 불을 내어 다 타버렸다.
3월2일[경진/4월21일] 맑다. 저녁 나절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좌조방장ㆍ우조방장ㆍ순천부사ㆍ방답첨사와 활을 쏘았다. 초저녁에 강진의 장작 쌓아 둔 곳에 실수로 불을 내어 장작이 모두 다 타버렸다.
3월3일[신사/4월22일] 맑다. 아침에 전문을 절하여 보내고, 곧 활터 정자에 앉았다. 경상우후 이의득이 와서 말하기를, "수군을 많이 잡아오지 못했다'하여 그의 수사(원균)에게서 매을 맞고, 또 발바닥까지 맞을 뻔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순천부사ㆍ좌조방장ㆍ우조방장ㆍ방답첨사ㆍ가리포첨사ㆍ좌수사 우후, 우수사 우후 등과 함께 활을 쏘았다. 오후 여섯 시쯤에 벽방 적후장(제한국)이 보고하되, "왜선 여섯 척이 오리량(마산시 합포구 구산면 고리량)ㆍ당항포 등지에 정박해 있다" 한다. 그래서 곧 배를 소집시키라고 전령하고, 대군을 흉도 앞바다에 진치고, 정예선 서른 척을 우조방장(어영담)이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도록 했다. 그리고 초저녁에 배를 움직여 지도에 이르렀다가 새벽 두 시쯤에 출항했다.
「장계」에서
오후 두 시에 고성땅 벽방(통영시 광도면) 척후장 제한국이 급히 보고해 왔다. "당일 날이 밝을 무렵 왜의 대선 열 척, 중선 열 네 척, 소선 일곱 척(모두 서른 한 척)이 영등포에서 나오다가, 스물 한 척은 고성땅 당항포로, 일곱척은 진해땅 오리량에, 세 척은 저도로 모두 향하여 갔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즉시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에게 전령하여 다시금 엄하게 약속했다. 한편으로는 순찰사 이빈에게도 전날의 악속대로 "보벼와 기병을 거느리고 빨리 진격하여 상륙한 왜적들을 모조리 쳐서 사로 잡도록" 통고한 뒤에, 그 날 밤 여덟 시에 삼도의 여러 장수들을 남김없이 거느리고 한산 바다 가운데서 출항하여 어둠을 타고 몰래 향해하여 밤 열 시쯤 거제도 내면 지도(통영시 용남면) 바다 가운데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1)
3월4일[임오/4월23일] 맑다. 진해 아바다에 이르러 왜선 여석척을 뒤쫓아 잡아 불태워 버렸고, 저도(마산시 함포구 구산면)에서 두척을 불태워 버렸다. 또 소소강에 열 네 척이 들어왔다고 하므로 조방자와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나가 토벌하도록 전령했다. 고성땅 아잠포(阿自音浦 : 고성군 동해면)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장계」에서 새벽에 전선 20여 척을 견내량에 머물게 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고, 또 삼도의 가볍고 빠른 배(輕銳船)를 가려내어 전라좌도에서는 좌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일령장 노천기, 이령장 조장우, 좌별도장 전첨사 배경남, 판관 이설, 좌위좌부장 녹도만호 송여종, 보주통장 최도전, 우척후장 여도만호 김인영, 일령장 윤봉, 귀선돌격장 주부 이언량,
전라우도에서는 응양별도장 우후 이정충, 좌응양장 어란포만호 정담수, 우응양장 남도포만호 강응표, 조전통장 배윤, 전부장 해남현감 위대기, 중부자 진도군수 김만수, 좌부장 금갑도만호 이전표, 통장 곽호신, 우위중부장 강진현감 유해, 좌부장 목포만호 전희광, 우부장 주부 김남준.
경상우도에서는 미보항첨사 김승룡, 좌유격장 남해현령 기효근, 우돌격장 사량만호 이여념, 좌척후장 고성현령 조의도, 선봉장 사천현감 기직남, 우척후장 웅천현감 이운룡, 좌돌격장 평산포만호 김축, 유격장하동현감 성천유, 좌선봉장 소비포권관 이영남, 중위우부장 당포만호 하종해 등 서른 한 명의 장수들을 선발하고, 수군 조방장 어영담을 장수로 삼아 당항포와 오리량 등지의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몰래 급히 보냈다.
그리고 나는 이억기 및 원균과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영등포와 장문포의 적진 앞바다의 시루섬(甑島:마산시 합포구 구산면)해상에서 학익진을 형성하여 한바다를 가로 끊어서 앞으로는 군사의 위세를 보이고 뒤로는 적의 퇴로를 막았다.
그러자 왜선 열 척이 진해 선창(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진동리)에서 나와 기스락을 끼고 항해하므로 조방장 어영담이 거느린 여러 장수들이 한꺼번에 돌진하여 좌우로 협공하자, 여섯 척은 진해땅 읍전포(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고현리)에서, 두 척은 고성땅 어선포(통영시 용남면)에서, 두 척은 진해땅 시굿포(마산시 합포구 구산면)에서 모두 배를 버린채 뭍으로 올라가므로 모두 남김없이 쳐부수고 불태워 버렸다. 녹도만호 송여종은 왜선에 사로잡혀 있던 고성 정병 심거원과 진해 관비 예금과 함안 양가집 딸 남월등을 빼앗았다. 그리고 사로잡혔던 두 사람은 왜적들이 머리를 베어 버리고 가벼렸다.
당항포에 들어와 정박한 왜선은 대ㆍ중ㆍ소선을 아울러 스물 한 척인데, 불타는 연기를 바라보고는 모두들 기운이 꺾이어서 스스로 세력이 궁함을 알고 상륙하여 결진하는 것이었으므로, 순변사 이빈에게 다시금 육군의 지원을 독촉하는 공문을 보내고, 어영담에게 명령하여 인솔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바로 그곳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마침 저녁 조수가 이미 나가고 날조차 어두워서 진격하지 못한 채 당포 포구를 가로막고 밤을 지냈다.2)
3월5일[계미/4월24일] 겸사복(윤봉)을 당항포로 보내어 적선을 쳐부수고 불태웠는지를 탐문케 하였더니, 우조방장 어영담이 보고하되 "적들이 우리 군사들의 위엄을 겁내어 밤을 틈타서 도망했으므로 빈 배 열 일곱 척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했다. 경상우수사(원균)의 보고도 같은 내용이었다. 이 날 아침 순변사에게서도 토벌을 독려하는 공문이 왔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배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은 각각 돌아갔다. 저녁에 광양의 새 배가 들어왔다.
「장계」에서 이른 새벽에 나와 이억기는 한바다에 진을 치고 밖에서 들어오는 적에 대비하고, 어영담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포구 안으로 바로 들어 갔는데, 오후 두 시에 도착한 어영담 등의 급보에 "왜적들은 모두 도망해 버렸고, 왜선 스물 한 척에는 기와와 왕대를 가득 실은 채 줄지어 정박해 있었으므로, 모두 쳐부수어 불태워 버렸다"고 하였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도 여거 장수들의 보고하는 바에 따라 역시 같은 내용으로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기운을 뽐내던 남은 왜적들이 감히 항전을 못하고 배를 버린 채 밤중에 도망친 것인 바, 이러한 때를 당하여 수륙이 상응하여 일시에 합공했더라면 거의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수륙군의 주둔한 곳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쉽게 빨리 통고하지를 못하여 새장 속에 들어 있는 적을 다 잡지 못한 것이 참으로 통분하거니와, 고성 및 진해로 쏘다니던 적들도 이뒤로는 스스로 뒤돌아다 보게 되어 제 멋대로 드나들지는 못할 것이다.
이 날 수군 총원이 합세하여 한바다에 그득한 채 포성은 하늘을 진동케 하며, 동서로 진을 바꾸면서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영등포ㆍ장문포ㆍ제포ㆍ웅천ㆍ안골포ㆍ가덕 및 천성 등지에 웅거했던 적들이 바로 공격할까 겁내어 복병하고 있던 막집을 모두 제손으로 불지르고 , 무서워서 굴속으로 기어 들어가서 밖에는 그림자조차 없어지고 말았다.3)
3월6일[갑신/4월25일] 맑다. 거제로 향하는데 맞바람이 거슬러 불어 간신히 흉도에 도착하니,4) 남해현감이 보고하되 "명나라 군사 두명과 왜놈 여덟 명이 패문을 가지고 왔기에, 그 패문과 명나라 군사 두 명을 보낸다"고 했다. 그 패문을 가져다 보니, 명나라 도사 담종인이 "적을 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몸이 몹시 괴로워서 앉고 눕기조차 불편했다. 저녁에 우수가 (이억기)와 함께 명나라 군사를 만나 보았다.
3월7일[을유/4월26일] 맑다. 몸이 극도로 불편하여 꼼짝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아랫 사람으로 하여금 패문을 지어오라고 하였더니, 지어 놓은 글이 꼴이 아니다. 또, 경사우수사 원균이 손의갑으로 하여금 작성했는 데도 그것마저 못마땅하다. 나는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앉아 초를 잡고, 정사립에게 이를 다시 써 보냈다.5) 오후 두 씨쯤에 출항하여 한산도 진중에 이르렀다.
「장계」에서 대체로 말하면,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승첩한 기세로 기뻐 뛰며 다들 사생결단으로 바로 돌진하려고 할 뿐 아니라, 주리고 파리하여 숨이 가빠하던 군졸들도 모두 즐거이 출전하여 왜선 30여 척을 모두 쳐부수고 불태웠으며, 한 척도 빠져 나간 것이 없다. 그리고 그대로 장문포와 영등포의 적들을 차차 무찌르려고 계획하되, 수군에 소속된 나주 이상 아홉 고을은 더 만드는 전선은 고사하고 원래 책임진 전선 등이 모두 오늘까지 돌아오지 않고, 그 도의 각 포구에서도 역시 각 고을의 수군을 징집해 보내지 않으므로 정비되지 않고 있으며, 충청수사 구사직도 아직까지 진에 도착하지 않아 병력의 위엄이 고약할 것같으므로, 형세를 보아서 진결하기로 하고 , 한산 진중으로 돌아왔다.
3월8일[병술/4월27일] 맑다. 병세는 별로 차도가 없다. 기운이 더욱 축이 나서 종일 앓았다.
3월9일[정해/4월28일] 맑다. 기운이 좀 나은 듯 하므로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아프긴 해도 다른 증세는 없다.
3월10일[무자/4월29일] 맑다. 병세는 차츰 나아지는 것 같은데 열기는 치올라 그저 찬 것만 미시고 싶은 생각뿐이다.
「장계」에서
삼도의 여러 장수들이 적선을 분멸한 수는 이억기와 어영담의 보고에 따라 상세히 정리하여 적었거니와, 왜적의 물건들은 약탈하면서 돌아다니던 적들이라 별로 중요한 것이 없고, 다만 의복ㆍ양식ㆍ솥ㆍ나무그릇 등의 잡물 뿐이므로, 수색해온 장병들에게 고루고루 나누어 주었다.
오직 경상우수사 원균은 적선 서른 한 척을 그 도의 여러 장수들만이 모두 불태운 것처럼 공문을 만들어 보냈으니, 온 진중의 장수와 군사들이 괘씸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니 조정에서 참고하여 시행하여 주도록 장계하였다.
3월11일[기축/4월30일] 종일 큰비가 오다. 병세가 아주 많이 나아졌고 열도 또한 내리니 참으로 다행이다.
3월12일[경인/5월1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몸이 몹시도 불편하다. 장계 정서하는 일을 마쳤다고 들었다.
3월13일[신묘/5월2일] 맑다. 아침에 장계를 봉해 올렸다. 병은 차츰 차도가 나아진 것같으나, 기력이 매우 고달프다. 그대로 회와 송두남을 내어 보냈다.
3월14일[임진/5월3일] 비오다. 병은 나은 듯하지만, 머리가 무겁고 기분이 좋지 않다. 저녁에 광양현감(송전), 강진현감(유해). 첨치 배경남이 같이 갔다. 소문에 "충청수사(구사직)가 이미 신장(薪場)에 왔다"고 한다.
3월15일[계사/5월4일] 비는 그쳤으나 바람이 세게 불었다. 종일 끙끙 앓았다. 미조항첨사가 돌아갔다.
3월16일[갑오/5월5일] 맑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우수사가 와서 봤다. 충청수사가 전선 아홉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3월17일[을미/5월6일] 맑다. 몸이 회복되지 않는다. 해남현감(위대기)은 새 현감과 교대하는 일로 나가고, 황득중 등 복병에 관한 일로 거제도로 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3월18일[병신/5월7일] 맑다. 몸이 몹시 불쾌하다. 남해현감 기효근, 보성군수(김득광), 소비포권관 이영남, 적량첨사 고여우가 와서 봤다. 기효근은 파종 때문에 돌아갔다. 낙안 유위장과 향소 등을 잡아 가두었다. 보성군수가 아뢰고 돌아갔다.6)
3월19일[정유/5월8일] 맑다. 몸이 불편하여 종일 끙끙 앓았다.
3월20일[무술/5월9일] 맑다. 몸이 불편하다.
3월21일[기해/5월10일] 맑다. 몸이 불편하다. 명단을 작성하는 관리도 여도만호(김인영), 남도포만호(강응표), 소비포권관 이영남을 뽑아 담당시키었다.
3월22일[경자/5월11일] 맑다. 몸이 약간 나아진 것같다. 원수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 지휘 담종인의 자문(중국과 왕래하던 문서)과 왜장의 서계(일본과 왕래하던 문서)를 조파총이 가지고 간다"고 하였다.
3월23일[신축/5월12일] 맑다. 기운이 여전히 불쾌하다. 방답첨사(이순신)ㆍ흥양현감(배흥립)ㆍ조방장(어영담)ㆍ발포만호(황정록)가 와서 봤다.
3월24일[임인/5월13일] 맑다. 몸이 조금 나아진 것같다. 정사립이 왜놈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왔다.
3월25일[계묘/5월14일] 맑다. 흥양현감과 보성군수가 나갔다. 사로잡혔던 아이(希順)7)는 왜의 진중에서 명나라 장수(담종인)가 가지고 왔던 자인데, 흥양으로 보냈다. 아우 여필, 아들 회, 변존서, 신경황이 와서 어머니 안부를 자세히 들었다. 다만 선산이 모두 산불에 탔는데, 아무도 끄지 못했다고 한다. 몹시 가슴 아프다.
3월26일[갑진/5월15일] 맑다. 따뜻하기가 여름 날씨같다. 조방장ㆍ방답참사가 와서 밨다. 경사우후(이의득)ㆍ영등포만호(우치적)도 왔다가 "창신도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3월27일[을사/5월16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조카 봉이 "저녁에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했다.
3월28일[병오/5월17일] 종일 비오다. 조카 봉의 병세가 더 악화되었다. 몹시도 민망하다.
3월29일[정미/5월18일] 담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하였다. 웅천현감ㆍ하동현감ㆍ장흥부사ㆍ방답첨사ㆍ소비포권관 등이 와서 봤다.
3월30일[무신/5월19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활터 정자로 올라가 충청군관과 도훈도, 낙안 유위장과 도병방 등을 처벌했다. 삼가현감 고상인이 와서 봤다.

1)『이충무공전서』권4,「장계」21쪽,「唐項捕破倭兵狀」.
2) ①『이충무공전서』 권4, 「장계」21~22쪽.
    ② 조성도,『임진장초』, 216~20쪽, 419~22쪽,「당항포 승첩을 아뢰는 장계」.
3)『이충무공전서』권4,「장계」23쪽.
4) "고성땅 아잠포에서 출항하여 순풍에 돛을 앞뒤를 서로 이어 거제읍 흉도 앞바다로 향하려고 할 때 남해현령 기효근이 보고··· (固城境阿自音浦發船從風懸帆首尾相接而臣濟邑前胸島前洋指向時南海縣令奇孝謹)"라 하여 바람 방향이 '역풍'과 순풍으로 다름.
5)「잡저」15~16쪽,「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
"조선 신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삼가 명나라 선유도사 대인 앞에 답서를 올립니다.
왜적이 스스로 흔단을 일으켜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죄없는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또 서울로 쳐들어가 흉악한 짓들을 저지를 것이 말할 수 없으며,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의 통분함이 뼈 속에 맺혀 이들 왜적과는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하고 있습니다. 각 도의 배들을 정비하여 곳곳에 주둔하고 동서에서 호응하는 위에, 육지에 있는 장수들과도 의논하여 수륙으로 합동공격해서 남아 있는 왜적들을 한 척의 배도 못 돌아가게 함으로써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이 달 초사흗날 선봉선 이백 여 척을 거느리고 바로 거제도로 들어가 그들의 소굴을 무찔러 씨를 없애고자 하였던 바, 왜선 30여 척이 고성·진해 지경으로 들어와서 여염집들을 불태우고 우리 백성들을 죽이며 또 사로 잡아가고, 기와를 나르며 대를 찍어 저희 배에 가득 일어가니 그 정상을 생각한다면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적들의 배를 쳐부수고 놈들의 뒤를 쫓아 도원수에게 보고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합세하여 나서는 이때, 도사 대인의 타이르는 패문이 뜻밖에 진중에 이르므로 받들어 두번 세번 읽어보니, 순순히 타이르신 말씀이 간절하고 곡진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다만 패문의 말씀 가운데, '일본 장수들이 마음으로 돌려 귀화하기 않는 자가 없고, 모두 병기를 거두어 저희 나라로 돌아가려고 하니 너희들 모든 병선들은 속히 각각 제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하여 트집을 일으키지 말도록 하라고 왜인들이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지에 진을 치고 있는바, 거기가 모두 다 우리 땅이거늘 우리더러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 하심은 무슨 말씀이며, 또 우리더러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제 고장이란 또한 어디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고, 또 트집을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니요 왜적들입니다. 또한 왜인들이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적도들이 아직도 그 포악스러운 행동을 그만두지 아니하고, 바닷가에 진을 친 채 해가 지나도 물러가지 아니하고, 여러 곳으로 쳐들어와 살인하고 약탈하기를 전일 보다 갑절이나 더하오니, 병기를 거두어 바다를 건너 돌아가려는 뜻이 과연 어디 있다 하오리까. 이제 강화한다는 것은 실로 속임과 거짓밖에는 아닙니다. 그러나 대인의 뜻을 감히 어기기 어려워 잠깐 얼마쯤 두고 보려 하오며, 또 그대로 우리 임금께 아뢰려 하오니 대인은 이 뜻을 널리 타이르시어 놈들에게 역천과 순천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답서를 드립니다."
6) 초서본 『난중일기』 3월 18일자의 마지막 부분에는 "보성군수가 아뢰고 돌아갔다(寶城告歸)" 라는 말이 없음.
7)『이충무공전서』권4,「장계」19쪽.「陳倭情狀」에는 상주에 사사집 종이라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