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3년 7월 선조 26년 계사년 (충무공 이순신 49세)

천하한량 2007. 5. 5. 16:30

 

 

 

 

7월1일[계축/7월28일] 맑다. 나라 제사날(인종의 제사)이라서 공무를 보지 않았다. 밤기운이 몹시 서늘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아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일어난다. 초저녁에 선전관(유형)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7월2일[갑인/7월29일] 맑다. 날이 늦어서야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봤다. 선전관(유형)이 오후에 돌아갔다. 해질 무렵에 김득룡이 와서 진양(진주)이 함몰되었다고 전한다. 황명보ㆍ서예원ㆍ김천일ㆍ이종인ㆍ김준민1)죽었다2)고 한다. 놀라고 비통함을 이길 길 없다. 그러나 그럴 리 만무하다. 어떤 미친 놈이 잘못 전한 말일 것이다. 초저녁에 원연ㆍ원식이 와서 군사에 관한 극단적인 말을 하니 웃음이 나온다.
7월3일[을묘/7월30일] 맑다. 적선 몇 척이 견내량을 넘어와 뭍으로 올라 가려다가 우리 배들이 나타나 쫓으며 물리치는 것을 보고 급히 달아났다.
7월4일[병진/7월31일] 맑다. 저녁에 걸망포로 물러나 진을 치고 잤다.
「양건당문집」에서 황대중이 다리를 절며 가까스로 와서 진주성 함락 소식을 전했다. 다리 저는 효자가 어떻게 적의 창칼 끝을 뚫고 여기까지 오게 되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인가! 나는 실성통곡하면서 북향하여 절을 네번 하고 "하늘은 어찌 이런 극단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고!"하면서 하늘에 빌었다.3)
7월5일[정사/8월1일]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데, "적선 10여척이 견내량을 넘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배들이 한꺼번에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니, 적선은 허겁지겁 달아났다. 거제땅 적도에는 말만 있고 사람은 없으므로 싣고 왔다. 저녁에 진양(진주)이 함락 되었다는 보고가 광양에서 왔다. 도로 걸망포에 이르러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7월6일[무오/8월2일] 맑다. 아침에 방답첨사(이순신)가 와서 보고, 소비포권관(이영남)도 와서 봤다. 한산도에서 배를 끌고 오는 일로 중위장이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나갔다. 공방 곽언수가 행재소에서 들어왔는데, 도승지 심희수와 지사 윤자신과 좌상 윤두수가 편지를 보내왔고, 윤기헌도 안부를 보내왔다. 아울러서 관보를 보니 탄식할 일들만 많다.
7월7일[기미/8월3일] 맑다. 순천부사ㆍ가리포첨사ㆍ광양현감이 와서 보고는 군사일을 의논했다. 각각 가볍고 날랜 배 열 다섯 척을 뽑아 견내량으로 가서 탐색케 해 보았으나, 적의 행적이 없다고 한다. 거제에서 사로잡혔던 한 사람을 얻어 와서 왜적의 소행을 꼼꼼이 물으니, "흉적들이 우리 수군의 위세를 보고 달아나려고 하였다"고 하고, 또 "진양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어찌 전라도를 넘을 것인가"라고 한다. 이 말은 거짓말이다. 우수사(이억기)가 내 배로 왔기에 같이 이야기하였다.
7월8일[경신/8월4일] 맑다. 남해로 왕래하는 사람 조붕에게서 듣건대, "적이 광양을 친다하여 광양 사람들이 벌써 고을 관청과 창고를 불질렀다"고 한다. 해괴함을 이길 길 없다. 순천부사(권준)ㆍ광양현감(어영담)을 곧 보내려고 하다가, 길 가다가 들은 소문을 믿을 수 없으므로 이들을 머무르게 하고, 사도군관 김붕만을 내보내어 알아 오게 했다.
7월9일[신유/8월5일] 맑다. 남해현령이 또 와서 "광양ㆍ순천이 이미 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광양현감(어영담)ㆍ순천부사(권준)와 송희립ㆍ김득룡ㆍ정사립ㆍ이설 등을 떠나 보내 놓고, 듣자하니 뼈아픈 일이라 말을 못하겠다. 우수사(이억기)와 경상우수사(원균)와 함께 일을 논의했다. 이날 밤,

바다에 달은 밝고 잔물결 하나 일지 않네
물과 하늘이 한 빛인데 서늘한 바람이 건듯 불구나
홀로 뱃전에 앉았으니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한밤에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적정을 알리는데, "실은 왜적들이 아니고, 영남 피난민들이 왜놈 옷으로 가장하고 광양으로 마구 들어가 여염집을 불질렀다"고 하고,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것도 헛소리라고 했다. 그러나 진주의 일만은 그럴 리 만무하다. 닭이 벌써 운다.
7월10일[임술/8월6일] 맑다. 김붕만이 두치(하동읍 두곡리)에서 와서 하는 말이, "광양의 적들은 사실이다"고 했다. 다만 "왜적 백여 명이 도탄에서 와서 광양을 침범하고 들어왔는데, 총통도 한 발 쏜 일이 없다"고 했다. 왜놈이 어찌 포를 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저녁에 오수(汚水)가 거제의 가삼도(가조도)에서 와서 하는 말이, "적선이 안팎에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 말하기를, 적도들이 무수히 창원 등지로 가더라"고 했다. 그러나 남들이 하는 말이라 믿을 것이 못된다. 초저녁에 한산도 끝 세포로 진을 옮겼다.
7월11일[계해/8월7일] 맑다. 이상록이 명령을 어긴 여러 장수들에게 전령할 일로 나갔다가 돌아와 보고하는데, "전선 10여 척이 견내량에서 내려온다"고 하므로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들이 벌써 진 앞에 이르기에 그대로 추격하니 달아나버렸다. 오후 네 시쯤에 걸망포로 돌아와 물을 길었다. 사도첨사(김완)가 와서, "두치나루의 적의 일은 헛소문이요, 광양 사람들이 왜놈옷으로 갈아 입고 저희들끼리 서로 장난한 짓이다"고 하니 통분함을 이길 길 없다. 어두울 무렵 오수성이 광양에서 와서 보고하는데, "광양의 적변은 모두 진주의 피난민과 제 고을 사람들이 이런 흉계를 짜내어, 관의 창고는 하나같이 비어 있고 여염집 마을도 쓸쓸하게 되었다. 순천이 가장 심하고,낙안이 그 다음 간다"고 했다.
7월12일[갑자/8월8일] 맑다. 식사하기도 전에 울과 송두남과 오수성이 돌아갔다. 가리포의 군량 진무가 와서 전하는 말이, "사량 앞바다에 와서 묵을 때, 왜적들이 우리나라 옷으로 변장하고, 우리나라 배를 타고 마구 들어와 포를 쏘며 약탈해 가려한다"고 한다. 그래서 각각 가볍고 날랜 배 세 척을 내어 달려가 잡아오게 하고, 또 각각 세 척씩을 정하여 착량으로 보내어 요새를 방어하고 오라고 했다.
7월13일[을축/8월9일] 맑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광양ㆍ두치 등에는 적이 없다"고 한다. 순천 거북배의 격군이며 경상도 태생인 종 태수가 달아나다가 잡혀 사형에 처했다. 저녁 나절에 흥양 현감(배흥립)이 들어와서, 두치의 잘못된 거짓 보고와 장흥부사 유희선의 겁내던 일과, 또 그 "고을 창고의 곡식을 남김없이 나누어 주었다"고 전하고, 또 행주대첩을 전했다.
7월14일[병인/8월10일] 맑다. 저녁 나절에 비가 조금 와서 땅의 먼지를 적실 뿐이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종일 신음했다. 순천부사(권준)가 들어와서 본부의 일을 말로 나타내지를 못한다. 진을 한산도 둘포(통영시 한산면 두억리 개미목)로 옮겼다.
7월15일[정미/8월11일] 맑다. 저녁 나절에 사량의 수색선, 여도만호 김인영, 순천의 김대복이 들어왔다.

가을 기운이 바다로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네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도 번거롭네
달이 뱃전을 비치니 정신이 맑아져 잠 못이루는데 어느덧 닭이 우는구나.
7월16일[무진/8월12일] 맑다. 저녁에 소나기가 와서 농사에 흡족하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7월17일[기사/8월13일] 비오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 광양현감(어영담)이 왔다.
7월18일[경오/8월14일] 맑다. 몸이 불편하여 앉았다 누웠다 했다. 정사립이 돌아왔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봤다. 신경황이 두치에서 와서 적의 헛소문임을 전했다.
7월19일[신미/8월15일] 맑다. 이영남이 와서, "진주ㆍ하동ㆍ사천ㆍ고성 등지의 적들이 이미 도망해 버리고 없다"고 전했다. 저녁에 광양현감(어영담)이 진주에서 피살된 장병들의 명부를 보내왔는데, 이를 보니 참으로 비참하여 원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7월20일[임신/8월16일] 맑다. 탐후선이 본영에서 돌아왔다. 병사의 편지와 명나라 장수의 통첩이 왔다. 그 통첩의 사연을 보니 참으로 괴상하다. 두치의 적이 명나라 군사에게 몰리어 달아났다고 하니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명나라 사람들이 이와 같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말해본들 무엇하랴. 통탄할 일이다. 충청수사(정걸)ㆍ순천부사(권준)ㆍ방답첨사(이순신)ㆍ광양현감(어영담)ㆍ발포만호(황정록)ㆍ남해현령(기효근) 등이 와서 봤다.
7월21일[계유/8월17일] 경상우수사(원균)와 충청수사 정걸이 함께 와서 적을 토벌하는 일을 의논하는데, 원 수사의 하는 말은 극히 흉칙하고 말할 수 있는 흉계이다. 이러하고서도 일을 같이 하고 있으니 뒷걱정이 없을까. 초저녁에 오수(吳水) 등이 거제 망보는 곳에서 와서 보고하기를, "영등포의 적선이 아직도 머물면서 제 맘대로 횡포를 부린다"고 했다.
7월22일[갑술/8월18일] 맑다. 울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자세히 말한다. 다행이다.
7월23일[을해/8월19일] 맑다. 울이 돌아갔다. 충청수사 정걸이 와서 봤다.
7월24일[병자/8월20일] 맑다. 순천부사·광양현감·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오수(吳水)가 사로잡혔다가 도망쳐 나와서 하는 말이, "적이 물러가긴 하였으나 장문포(거제군 장목면 장목리) 적들은 여전하다"고 한다.
「장계」에서
밤중에 동래에 사는 성돌, 절 종 망연, 봉수꾼 박검손, 목동 박검실, 절 종 김국·김헌산, 종 돌이, 절 종 윤춘, 양산에 사는 강은억·박은옥, 김해에 사는 갑주 만드는 공인 김달망, 사사집 종 인상 등 나와 열세 명이 배 한 척을 훔쳐 타고 노를 재촉하여 육기도(六岐島)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4)
7월25일[정축/8월21일]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이야기했다. 조붕도 와서 체찰사의 공문이 영남수사(원균)에게 왔는데, 문책하는 말이 많이 있더라고 한다.
「장계」에서
순풍에 돛을 달고 떠났는데, 일본국의 군량을 실은 배 삼백 척과 상봉하여 간신히 피해서 육기도로 되돌아가 정박했으나, 양식이 떨어져서 내가 입고 있던 왜의 속옷 한 벌과 홑옷 한 벌 등을 팔아 쌀 스물 일곱 말과 중솥 한 개를 샀다.5)
7월26일[무인/8월22일] 맑다. 순천부사·광양현감·방답첨사가 왔다. 우수사도 같이 이야기하고, 가리포첨사도 왔다.
7월27일[기묘/8월23일] 맑다. 우수사의 우후(이정충)가 본영에서 와서 우도의 사정을 전하는데, 놀랄 만한 일들이 많았다.
7월28일[경진/8월24일] 맑다. 경상우수사(원균) 및 충청수사(정걸)와 본도 우수사(이억기)가 함께 와서 약속했다. 정여흥이 공문과 편지를 가지고 체찰사에게로 갔다. 순천부사·광양현감이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사도첨사(김완)가 복병했을 때에 잡은 보자기 열 명이 왜놈옷으로 변장하고 하는 짓거리가 매우 꼼꼼하다하여 잡아다가 추궁을 하니, "경상우수사(원균)가 시킨 일이다"고 했다. 곤장만 치고 내보냈다.
7월29일[신사/8월25일] 맑다. 새벽 꿈에 사내 아이를 얻었다. 사로잡혔던 사내 아이를 얻은 꿈이다. 순천부사·광양현감·사도첨사·흥양현감·방답첨사를 불러 와서 이야기했다. 흥양현감은 학질을 앓아서 곧 돌아가고, 남은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방답첨사는 복병할 일로 돌아갔다. 본영 탐후인이 와서, "아들 염의 병이 차도가 없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다. 저녁에 보성군수(김득광)·소비포권관(이영남)·낙안군수(신호)가 들어왔다.

1) 김준민(金俊民)이 여기서는 '숲峻民'으로 적혀 있다. 그런데 초서본『난중일기』6월 29일자 및 『선조대왕수정실록』(권27, 癸巳 12)에는 '金俊民'으로 적혀 있다.
2) ① 초서본『난중일기』의 이 날짜에는 전사자 기록이 없다. ②『宣祖大王修正實錄』권27, 癸巳 12~15쪽에는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자는 金千鎰ㆍ金象乾(金千鎰의 아들)ㆍ崔慶會ㆍ高從厚ㆍ梁山璹ㆍ李宗仁ㆍ文弘獻ㆍ吳宥ㆍ高敬兄ㆍ徐禮元ㆍ成汝楷ㆍ金俊民 등 6~7만명임.
3)『兩蹇堂文集』(낭주인쇄사, 1978), 45~57쪽. "七月初四日(黃大中)至李統制管下李公舜臣握手流涕曰 蹇孝子貫穿賊鋒而至此豈是偶然哉因 詳晋陽之陷李公失聲痛哭而北向四拜曰 天何爲至於此極耶".
4)『이충무공전서』권3,「장계」25쪽,「登聞被虜人所告倭情狀」, "二十四日 夜半東萊居成突寺奴望連烽燧軍朴儉孜子朴儉實寺奴金國金軒山奴突伊 寺奴允春梁山居姜銀億朴銀玉金海居甲匠金達望私奴仁尙幷小人等十三人偸 騎一船促櫓到六岐鳥至泊經夜".
5)「장계」. "二十五日從風懸帆日本國軍糧載船三百雙相逢艱難回避泊六岐島 糧米乏絶故所着倭釉衣一單衣一等放賣捧米二十七斗中鼎一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