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3년 5월 선조 26년 계사년 (충무공 이순신 49세)

천하한량 2007. 5. 5. 16:22

 

 

 

 

 

5월1일[갑인/5월30일] 맑다. 새벽에 망궐례를 하였다.
5월2일[을묘/5월31일] 맑다. 선전관 이춘영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는 것이었다. 이날 보성군수(김득광)ㆍ발포만호(황정록) 두 장수가 와서 모이고, 나머지 여러 장수들은 정한 기일을 물렸기 때문에 모이지 못했다.
5월3일[병진/6월1일]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수군을 거느리고 왔는데, 수군들이 많이 뒤떨어져 탄식스럽다. 선전관 이춘영이 돌아가고, 이순일이 왔다.
5월4일[정사/6월2일] 맑다. 오늘이 곧 어머니 생신날이건만 가서 축수의 잔을 올리지 못하니, 평생 한이 되겠다.
5월5일[무오/6월3일] 맑다. 선전관 이순일이 영남에서 돌아왔다. 저녁 나절에 군관들을 편 갈라 활을 쏘게 하였다.
5월6일[기미/6월4일] 흐린 뒤에 비오다. 아침에 친척 신정과 조카 봉이 게바우개에서 왔다. 저녁 나절에 퍼붓듯 내리는 비가 온종일 그치지 않았다. 내와 개울물이 넘쳐 흘러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니 참으로 다행이다.
5월7일[경신/6월5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아침밥을 먹고 배를 타고 미조항으로 향하는데, 샛바람이 세게 불어 파도가 산같아 간신히 이르러 대었다.
5월8일[신유/6월6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새벽에 출항하여 사량 바다 가운데에 이르니, 만호(이여념)가 나오므로 우수사가 있는 곳을 물었더니 지금 창신도(남해군 창선도)에 있다고 하며, 군사들이 모이지 않아 미처 배를 타지 못했다고 한다.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와서 보고 수사(원균)의 망녕된 짓이 많음을 자세히 말한다.
5월9일[임술/6월7일] 흐리다. 아침에 출항하여 걸망포에 이르니 바람이 불순하다. 우수사(이억기)ㆍ가리포첨사(구사직)와 한 자리에 앉아 작전을 토의했다. 저녁에 수사 원균이 배 두 척을 거느리고 왔다.
5월10일[계해/6월8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아침에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러 흥양(고흥)의 군사를 점검했다. 선전관 고세충이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왔다. "부산으로 후퇴하여 돌아가는 왜적을 무찌르라"는 것이다. 저녁에 영남우후 이의득이 와서 봤다.
5월11일[갑자/6월9일] 맑다. 선전관이 돌아갔다. 영등포(거제군 장목면 구영리)로 적정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가덕도 앞바다에 적선이 무려 이백 여 척이나 머물면서 드나들며 웅천에는 전일과 같다"고 했다.
5월12일[을축/6월10일] 맑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새로 만든 정철 총통을 비변사로 보냈다. 영남에서 온 선전관 성문개가 와서 봤다.1) 흑각궁ㆍ과녁ㆍ화살을 성문개에게 주어 보냈다. 성문개는 순변사 이일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새벽에 좌ㆍ우도 체탐인을 정하여 영등포 등지로 보냈다.
5월13일[병인/6월11일] 맑다. 작은 산봉우리에 과녁을 쳐 매달아놓고 여러 장수들이 편을 갈라 활을 쏘아 자웅을 겨루다가 날이 저물어 배로 내려왔다. 달빛은 배에 가득 차고, 온갖 근심이 가슴을 치민다. 홀로 앉아 이 생각 저 생각에 닭이 울 때에야 풋잠이 들었다.
5월14일[정묘/6월12일] 맑다. 선전관 박진종과 선전관 영산령복윤이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함께 왔다. 그들에게서 명나라 군사들의 하는 짓을 들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 나는 우수사(이억기)의 배에 옮겨 타고 선전관과 이야기하며 술을 두어 순 배 돌리자, 영남우수사 원균이 나타나서 술주정을 부리니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럴 듯이 속이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저녁에두 선전관이 돌아갔다.
5월15일[무진/6월13일] 맑다. 아침에 낙안군수(신호)가 와서 봤다. 윤동구가 그의 대장이 장계한 초본을 가지고 와서 보이는데, 그럴 듯이 속이는 것이라 말할 수 없다. 늦은 아침에 조카 해와 아들 울이 봉사 윤제현과 함께 왔다.
5월16일[기사/6월14일] 맑다. 각 고을에 공문을 써 보냈다. 조카 해와 아들 회가 돌아갔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베개를 베고 신음하다가, 명나라 장수가 중도에서 늦추며 머무르는 것은 무슨 교묘한 술책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으니, 나라를 위해 걱정이 많은 중에 일일이 이러하니 더욱 더 한심스러워 눈물이 쏟아졌다. 오정때 윤동구에게서 서울 관동의 숙모가 양주 천천으로 피난갔다가 거기에서 작고하셨다는 말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 언제부터 세상사가 이렇게 가혹한가! 장사 지내는 일은 누가 맡아서 지내는지! 대진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애통하다.
5월17일[경오/6월15일] 맑다. 새벽에 바람이 세게 불다. 변존서가 병으로 돌아갔다. 영남수사(원균)가 군관을 보내어 진양의 보고서를 가지고 왔다. 보니 제독 이여송은 지금 충주에 있다 하고, 적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하며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한다. 통분하고도 통분하다. 종일 바람이 세게 부니 마음이 어지럽다. 고성현령이 군관을 보내어 문안하고, 또 추로수(약술 이름)와 쇠고기로 요리한 꼬치와 꿀통을 가져 왔으나, 복중이라 받자니 미안하고, 정으로 보낸 것을 의리상 돌려보낼 수도 없으므로 군관들이라고 줬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일찍 선실로 들어갔다.
5월18일[신미/6월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몸이 무척 불편하여 온백원(위장약) 네 알을 먹었더니, 조금 있다가 시원하게 설사가 나오니 좀 편안해진다. 종 목년이 게바우개(아산 해암 해포)에서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곧 답장을 써 돌려 보내며 미역 다섯 동을 함께 보냈다. 전주부윤(권율)이 공문을 보냈는데, 지금 겸순찰사 절제사를 맡게 되었다고 하면서 도장은 찍지 않았으니 까닭을 모르겠다. 대금산과 영등포 등지의 척후병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왜적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리 큰 음흉한 꾀는 없다"고 했다.
5월19일[임신/6월17일] 맑다. 순찰사의 공문에 따르면, "명나라 장수(유원외)의 패문에 의하면 부산바다 어귀는 벌써 끊어 막았다"고 했다.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다른 변고는 없다"고 했다.
5월20일[계유/6월18일] 맑다.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데, "왜선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5월21일[갑술/6월19일] 새벽에 출항하여 거제 유자도(거제군 사등면) 가운데 바다에 이르니,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왜적의 출몰이 여전하다"고 했다. 수사 원균이 거짓 내용으로 공문을 보내어 대군을 동요케 했다. 군중에서조차 속임이 이러하니 그 흉측함을 말할 수 없다.
5월22일[을해/6월20일] 비오다. 사람들이 바라던 차에 아주 흡족하게 왔다. 늦은 아침에 나대용이 본영에서 명나라 시랑 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왔는데, 송시랑이 파견한 사람이 전선을 시찰하러 들어온다고 한다. 곧 우후로 하여금 영접하도록 하고, 나대용으로 하여금 문안하는 일로 내어 보냈다.
5월23일[병자/6월21일] 새벽에 흐리고 비는 아니오더니, 저녁나절에 비가 오락가락했다. 영남우병사의 군관이 와서 적의 소식을 전하고, 또 본도(전라도)의 병마사(선거이)의 편지를 전했다. "창원에 있는 적을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나아갈 수 없다"고 했다. 저녁에 아들 회가 와서, "명나라 관원이 영문에 와서 배를 타고 들어온다"고 전했다. 영남수사(원균)도 명나라 관원을 접대하는 일로 와서 의논하였다.
5월24일[정축/6월22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아침에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진을 옮겼다. 나대용이 명나라 관원을 사량 뒷바다에서 발견하고 먼저 와서 전하되, "명나라 관원과 통역 표헌과 선전관 목광흠이 함께 온다"고 한다. 오후 두 시쯤에 명나라 관원 양보가 진문에 이르므로 우별도위 이설이 나가 맞아 배로 안내하여 오니 매우 기뻐하는 기색이다. 우리 배로 청하여 오르게 하고, 황제의 은혜를 재삼 사례하며 마주앉기를 청하니 굳이 사양한다. 그는 앉지 않고 선 채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이야기하며 수군이 장하다고 매우 칭찬했다. 예물 명단을 올리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하더니 마침내 받고는 매우 기뻐하면 두번 세번 감사하다고 했다. 아들 호가 밤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5월25일[무인/6월23일] 맑다. 아침에 다시 통역 표헌을 청하여 명나라 장수가 무슨 말을 하던가 하고 물으니, 명나라 장수의 말이 무슨 말인지는 잘 알 수가 없고,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려고만 한다"고 했다. 또 이미 말한대로 송시랑이 "수군의 허실을 알고자 하여 자기가 데리고 온 군중 탐정2) 양보를 보낸 것인데, 수군이 이렇게도 장하니 기쁘기 한이 없다"고 했다. 늦게 명나라 관원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오정에 거제현 앞 유자도 바다 어귀로 진을 옮기고서 우수사(이억기)와 작전을 토의했다. 초저녁이 지나서 영남에서 오는 명나라 사람 두 명과 우방백령의 아전 한 사람과, 접반사군관 한 사람이 진문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어서 들이지 않았다.
5월26일[기묘/6월24일] 비오다. 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 보니 절강성의 포수 왕경득인데, 문자는 좀 안다. 한참 동안이나 이야기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으니 답답했다. 밤 열 시쯤부터 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처음에는 우수사의 배와 맞부딪치는 것을 겨우 구해 놓았더니, 또 발포만호(황정록)가 탄 배와 맞부딪쳐 거의 부서질 뻔하다가 겨우 면하고, 내 군관 송한련이 탄 협선은 발포 배에 부딪쳐 많이 다쳤다고 한다. 아침에 영남 우수사(원균)가 와서 봤다. 순변사 이빈이 공문을 보냈는데, 허튼 소리가 많으니 가소롭다.
5월27일[경진/6월25일] 비바람에 부딪치기 때문에 진을 유자도로 옮겼다. 협선 세 척이 간 곳이 없더니, 저녁 나절에야 돌아왔다. 영남병사(최경희)의 답장이 오고, 전라병사(선거이)의 편지도 왔다. "창원의 적들은 비가 오고 개이지 않아 아직 나가 치지 못했다"고 했다.
5월28일[신사/6월26일] 종일 비오다. 광양 사람이 장계를 가지고 왔다. "광양현감은 그대로 유임되고, 독운 임발영은 조사하여 처벌하라"고 하였고, "한 가족을 징발하는 일에 대해서도 전에 내린 명령대로 하라"고 했다.
5월29일[임오/6월27일] 비오다. 변유헌과 이수 등이 왔다.
5월30일[계미/6월28일] 종일 비오다. 오후 네 시쯤에 잠깐 개다가 도로 비가 왔다. 남해현령 기효근의 배가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안에 어린 색시를 태우고 남이 알까바 두려워한다. 사소롭다. 나라가 위급한 때를 맞았는데도 미인을 태우고 놀아나니 그 마음 씀씀이야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장 원균 수사부터 역시 그러하니 어찌하랴! 저녁에 조붕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1) 초서본『난중일기』에는 이 날 "嶺南來宣傳官成文漑來見"이라는 내용이 없음.
2) 원문은 '夜不守'인데, 중국의 속어임. '群衆의 탐정'이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