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3년 6월 선조 26년 계사년 (충무공 이순신 49세)

천하한량 2007. 5. 5. 16:25

 

 

 

 

 

6월1일[갑신/6월29일]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와 어머니 편지를 보니 평안하시다고 한다. 다행이다. 아들의 편지와 조카 봉의 편지가 한꺼번에 왔다. 충청수사 정걸이 왔다. 그와 함께 조용히 이야기 하였다.
6월2일[을유/6월30일] 맑다. 아침에 본영의 공문을 적어 보냈다. 온양의 강용수가 진에 와서 명함을 통하고서 들어와 봤다. 가리포첨사 우경 구사직이 와서 한 시간이나 이야기하였다.
6월3일[병술/7월1일] 새벽에 맑더니 저녁 나절에 비가 많이 오다. 순찰사(권율)ㆍ순변사(이빈)ㆍ병사(선거이)ㆍ방어사(이복남) 등의 답장이 왔다. 각도의 군마가 많아야 오천을 넘지 못하고, 양식도 거의 다 떨어졌다고 한다. 왜적들의 발악이 날로 더해 가는 이 때에 일마다 이와 같으니 어찌하랴! 어찌하랴!
6월4일[정해/7월2일] 종일 비오다. 식사하기 전에 순천부사(권준)가 왔다. 식사한 뒤에는 충청수사(정걸)와 이홍명과 광양현감(어영담)이 와서 종일 군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6월5일[무자/7월3일] 종일 비오다. 바람이 몹시 세차게 불므로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했다. 경상수사가 웅천의 적도들이 혹 감동포(부산시 북구 구포동)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 들어가 치자고 공문을 보냈다. 그 음흉한 꾀가 가소롭다.
6월6일[기축/7월4일] 비가 오락가락하다. "보성군수(김득광)는 갈려 가고, 김의검이 되었다"고 했다. 저녁에 본영 탐후인이 와서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고 한다.
6월7일[경인/7월5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저녁에 본도(전라도) 우수사의 우후(이정충)가 와서 봤다.
6월8일[신묘/7월6일] 잠깐 맑다가 바람이 불고 온화하지 않다. 군관 나대용이 병으로 본영에 돌아갔다. 탐후선이 들어왔다. 각 고을의 색리 열 한 명을 처벌했다. 옥과의 향소(鄕所)는 전년부터 군사를 다스리는 일에 많이 부지런하지 못하여 결원이 거의 수백 명에 이르렀는 데도 매양 속이어 허위보고를 했다. 그래서 오늘은 사형에 처하여 목을 높이 매달아 보였다.
6월9일[임진/7월7일] 맑다. 수십 일이나 괴롭히던 비가 비로소 활짝 개이니, 진중의 장병들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배에 누워 있었다. 접반관의 공문이 왔는데, "제독이여송이 충주에 이르렀다"고 한다.
6월10일[계사/7월8일] 맑다. 우수사(이억기)가 이곳에 와서 작전계획을 세부적으로 의논했다. 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보고 하는데, "웅천의 적선 네 척이 본토(일본)로 돌아갔고, 또 김해 어귀에 적선 150 여 척이 나타났는데, 열 아홉 척은 본토로 돌아가고, 그 나머지는 부산으로 갔다"고 한다. 밤 두 시쯤에 수사 원균의 편지가 왔는데, "내일 새벽에 나아가 싸우자"고 한다. 그 하는 흉계와 시기하는 꼴을 말로서는 못하겠다. r래서 밤이 되어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6월11일[갑오/7월9일] 잠깐 비가 오다 개이다. 아침에 적을 쳐부술 공문을 작성하여 영남우수사 원균에게 보냈더니 술에 취하여 정신이 없더라고 했다.
6월12일[을미/7월10일] 잠깐 비가 오다 개이다. 밤 열 시쯤에 변존서와 김양간이 들어왔다. 듣건대 동궁(東宮 : 광해군)께서 평안하지 않다고 하니 그지없이 걱정이 된다. 정승 유성룡의 편지와 지사 윤우신의 편지가 왔다. 중 해당도 왔다.
6월13일[병신/7월11일] 맑다. 저녁 나절에 잠깐 비오다가 그치다. 명나라 사람 왕경(王敬)과 이요(二?)가 와서 수군의 상황을 살폈다. 소문에 들으니, "제독 이여송이 나가 치지 않아 명나라 조정에서 문책을 했다"고 한다. 그들과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느껴지는 게 많았다. 저녁에 진을 거제도 세포(거제군 사등면 성포리)로 옮겼다.
6월14일[정유/7월12일] 비가 잠깐 오다 개이다. 전운사 박충간의 공문과 편지가 왔다. 저물녘에 비바람이 세게 치더니 곧 그쳤다.
6월15일[무술/7월13일] 비가 잠깐 오다 개이다. 우수사(이억기)ㆍ충청수사(정걸)ㆍ순천부사(권준)ㆍ낙안군수(신호)ㆍ방답첨사(이순신) 등이 와서 철맞이 음식을 먹으며 놀다가 저물어서야 헤어졌다.
6월16일[기해/7월14일] 잠깐 비오다. 저녁 나절에 낙안군수를 통하여 진해의 고목(告目 : 常人이 양반에게 하던 편지)을 얻어 보니, 함안에 있는 각 도의 대장들이 "왜놈들이 황상동으로 나가 진을 쳤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물러나, 진양과 의령을 지킨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초저녁에 영등포의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데, "김해ㆍ부산에 있던 적선 무려 오백 여 척이 안골포ㆍ제포 등지로 들어왔다" 고 한다.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적도들이 세력을 모아서 옮겨 다니며 침범할 계획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우수사(이억기)와 충청수사 정걸에게 공문을 보냈다. 밤 열 시쯤에 대금산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송희립을 경상우수사(원균)에게 가서 의논케 하니, "내일 새벽에 군사를 거느리고 오겠다"는 것이다. 적의 꾀란 헤아리기 어렵다.
6월17일[경자/7월15일] 비가 오다가 개이다가 한다. 이른 아침에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정걸 등이 와서 의논했는데, "함안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진주로 물러가 지킨다"는 것이 사실이다. 식사를 한 뒤에 경수 이억기의 배로 가서 종일 이야기했다. 조붕이 창원에서 와서 "적세가 매우 대단하다"고 했다.
6월18일[신축/7월16일] 비가 오다가 개이다가 한다. 아침에 탐후선이 들어왔다. 오후에 경상우수사(원균)의 배로 가서 같이 앉아 군사일을 의논하고 왔다.
6월19일[임인/7월17일] 비가 오다가 개이다가 한다. 바람이 세차게 불며 그치지 않는다. 진을 오양역(거제군 사등면 오양리) 앞으로 옮겼으나, 바람에 배를 고정할 수가 없으므로 다시 고성 역포(亦捕 : 통영시 용남면)로 옮겼다. 봉과 변유헌, 두 조카들을 본영으로 보내어 어머니의 안부를 알아서 오게 했다.
6월20일[계모/7월18일] 흐리며 바람이 세게 불다. 조붕이 그의 조카 조응도와 함께 와서 봤다. 이 날 배 만들 재목을 운반해 오는 일로 그대로 역포에서 잤다. 밤이 되니 바람이 잤다.
6월21일[갑진/7월19일] 맑다. 새벽에 진을 한산도로 옮겼다. 아침에 아들 회가 들어와 어머니께서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이다. 오정에 원연이 왔다.
6월22일[을사/7월20일] 맑다. 초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보고하기를, "별 다른 소식은 없지만 적선 두 척이 온천(칠천량)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왔다"고 한다.
6월23일[병오/7월21일] 맑다. 새 배에 쓸 밑판을 만드는 것을 마쳤다.
6월24일[정미/7월22일] 비오다. 식사를 한 뒤에 비가 많이 오고 바람이 세게 불더니 저녁까지 그치지 않았다. 저녁에 영등포 척후병이 와서 보고했다. "적선 오백 여 척이 23일 밤중에 소진포(거제군 장목면 송진포)로 모여 들어갔는데, 그 선봉대는 칠천량에 이르렀다"고 한다.
6월25일[무신/7월23일] 종일 비가 많이 오다. 우수사(이억기)와 함께 적을 칠 일을 의논하는데, 경상우수사(원균)도 와서 함께 상의했다. 소문에 "진양이 포위되었는데도 감히 아무도 나가 싸우지 못한다"고 했다. 연일 비가 내려서 적도들이 날뛰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하늘이 호남지방을 돕고 있는 것이다. 순천부사(권준)가 군량 이백 섬을 가져와서 바쳤다.
6월26일[기유/7월24일] 비가 많이 오고 마파람이 세세 불다. 복병선이 변고를 보고했다. "적선이 오양역 앞까지 이르렀다" 한다. 호각을 불어 닻을 올리고 모두 적도(통영시 화도)로 가서 진을 쳤다. 저녁에 김붕만이 진양의 적정을 살피고 와서 보고하기를, "적도들이 동문 밖에서 진을 합쳤는데, 연일 비가 많이 와서 물에 막혀 있고, 또 계속하여 구원해 줄 길도 없으니 만약에 대군을 합쳐 쳐들어간다면 한꺼번에 섬멸할 수 있다"고 했다.
6월27일[경술/7월25일] 잠깐 비가 오다 개이다 한다. 오정에 적선이 견내량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온 진이 출항하여 나가보니 이미 달아나고 없어 불을도(통영시 적도ㆍ화도) 앞바다에 진을 쳤다.
6월28일[신해/7월26일] 잠깐 비가 오다 개이다 한다. 나라 제사날(명종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강진의 척후선이 적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온 진이 출항하여 견내량에 이르니, 적도들은 우리 군사들을 바라보고 놀라 황급히 달아난다. 역풍과 역조류를 받아 들어올 수가 없어 그대로 머물러 밤을 지냈다. 밤 두 시쯤에 불을도에 도착했다. 종 봉손ㆍ애수 등이 들어와 분산(墳山 : 무덤이 있는 산)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6월29일[임자/7월27일] 맑다. 하늬바람이 잠깐 불더니 청명하게 개었다. 순천부사ㆍ광양현감이 와서 봤다. 어란만호(정담수)ㆍ소비포권관(이영남) 등고 와서 봤다.1)

1) 草書本『난중일기』6월 29일에는‥‥‥(뒤에 써붙임) "진양이 함락되었다. 황명보ㆍ최경회ㆍ서예원ㆍ김천일ㆍ이종인ㆍ김준민이 전사했다고 한다(晋陽陷沒 黃明甫崔慶會徐禮元金千鎰李宗仁金俊民 戰死之云)"라고 했으며, 7월 2일에는‥‥‥ "김득룡이 와서 진주가 위태하다고 한다. 놀라고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金得龍來傳 晋陽不利云 不勝驚慮)"고 하면서 그들의 이름은 빠졌다. 이것으로 보아 이순신 장군은 진주 함락 소식을 7월 2일에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나 진양이 위태하다는 소식은 이미 6월 25일에 들었었다. 그래서 이 새 번역 『난중일기』에는 초본을 따르지 않고 『이충무공전서』본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