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3년 4월 선조 26년 계사년 (충무공 이순신 49세)

천하한량 2007. 5. 5. 16:18
(3월23일부터 4월30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4월6일[경인/5월3일] 「장계」에서
이 달 4월3일에 이억기와 약속하고 본도(전라도)로 돌아왔으며, 접전할 때 철환을 맞아 다친 사람들을 발포통선의 전사자와 한꺼번에 기록하여 장계했다.1)
선행이 없는 내가 외람되이 중책을 맡아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티끌만한 공로나마 보답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나, 작년 여름과 가을에 독한 성미를 함부로 부린 흉적들이 수륙으로 침범할 때에 다행히 하늘의 도움으로 여러 번 승첩하여, 거느린 군사들이 승첩한 기세를 타고 교만한 기운이 날로 더하여 앞다투어 돌진하며 오직 뒤쳐질까 두려워하므로 재삼 신칙하여 "적을 가벼이 이기면 반드시 패하는 것이 원칙이다"고 하였지만, 그래도 경계하지 않더니만 마침내 통선 한 척이 전복되어 많은 사망자를 생기게 하였다.
이것은 내가 군사를 다스리는 방법이 좋지 못하고 잘못 지휘한 때문이므로 지극히 황송하여 거적자리에 엎드려 죄를 기다렸다.2)
또 소속된 수군은 단지 5개 고을과 5개 진포로써 흥양현감 배흥립은 순찰사가 육전으로 데려가고, 보성군수 김득광은 일찍이 두치(하동읍 두곡리)의 복병장으로 파견되었다가 이번에 수군으로 되돌아 왔으며, 녹도만호 송여종은 군량을 운반하는 차사원으로 올라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 나머지 순천ㆍ광양ㆍ낙안ㆍ보성 등 고을의 수령과 방답ㆍ사도ㆍ여도ㆍ발포 등의 진장들로써 여러 책임 장수로 배정했으나 오히려 부족한데,도내에 왕명을 받은 장수들이 위 수군의 장수들을 육전으로 이동시킨다거나, 혹은 명령을 들었다 하면서 전령을 내어 소란하게 찾아서 잡아내는 바, 달리 수군과 육군을 나누어 배정할 뜻이 없을 뿐 아니라 동서로 분주하여 어디로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명령이 여러 군데서 나오므로 호령이 시행되지 못하고, 극성스러운 일이므로 앞으로는 수순에 소속된 수령과 변방 장수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말고, 전적으로 해전에 소속시키도록 조정에서는 각별히 본도 감사(권율)ㆍ병사(선거이)ㆍ방어사(이복남)ㆍ조방장(조위) 등에게 신칙해 주도록 따로 장계했다.3)
4월8일[임진/5월8일] 「장계」에서
광양현에 사는 김두 등 126명의 연명으로 된 호소문에,
"이 고을의 원이 자주 전출입하므로 새로 도임하는 원을 맞이하고 전출하는 원을 송별하는 일로 백성들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여 장차버린 고을이 되겠다. 그런데 현감이 도임하여 즉시 질고를 묻고 폐정을 개혁하며, 병기를 수선하여 비치하고, 나라를 근심함이 자기집같이 하므로 지난날 도망해 흩어진 자들도 소문을 듣고 돌아와 모이기 되어 경내에는 편안해졌는데, 작년 4월영남 접경에서 일어난 사변으로 하동ㆍ곤양ㆍ남해 등지의 백성들이 거의 다 달아났기 때문에 인심이 동요되어 모두 흩어지려는 뜻을 품고 짐을 지고 나섰다. 이때 아마 침착하고 도량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진정시키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현감은 성품과 도량이 정중하며, 의심이나 유혹됨이 없고, 성을 지키며 해전과 방어하는 책략에 상세히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두치와 강탄을 파수하는 일들을 일시에 함께 실행하며, 적에 대항해야 하는 이치를 순순히 타일러서, 모여 오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안정시켰다. 뿐만 아니라, 수군의 여러 장수들과 여러 번 출전할 때마다 제몸을 잊고 앞장서서 돌진하여 왜적을 섬멸한 공로가 이미 월등하므로 당상에까지 승진하였다.
그런데 지난 1월27일 출전한 뒤에 독운어사(임발영)가 여러 고을을 순찰하여 각 고을의 창고의 곡식을 뒤적거리면서 조사하여 그 수량만 알고 운반해 가는 데만 전력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 고을에는 장부에 기록된 회계수량 밖에 쌀ㆍ콩ㆍ벼 등 육백 여 섬을 평상시에 저장해두고 혹은 군량에 보태어 쏘기도 하며 혹은 고을 백성들을 구휼하기도 하였다. 유위장도 그 쌀. 콩. 벼 등을 전혀 씨나락과 구호미로 쓰고 도목장에 기록하지 않았는데, 독운어사가 현감이 없을 때 고을에 와서 창고의 물건을 조사하면서 도목장 이외에 저장해 둔 원 수량 이외의 곡식이니, 현감이 사사로이 쓰는 것이라고 지적하여 장계하고, 곧 구례현감을 차원으로 명하여 봉고하였는 바, 씨나락과 구호미를 모두 바랄 수 없게 되었다.
농사철이 지나 논밭이 황폐해지면 금년과 내년에 실어 보낼 곡식은 반출할 것이 없어 극히 민망스럽고 걱정이 된다. 현감도 임금께서 서쪽으로 몽진한 뒤에 필요한 물자를 대기가 어려울 것을 민망히 여겨 원수량 외의 백미 예순 섬과 다른 잡물을 함께 배에 실어 올려 보냈는데, 현감이 그것을 사사로이 쓰려고 한 것이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 성의를 다했다는 것이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범하지 않는 일에 걸리어 장차 갈리게 되니, 온 고을의 백성들이 마치 부모를 잃어버린 것과 같은데, 순찰사는 멀리 서울지구에 주재하여 바닷가의 백성들은 민망함을 호소할 곳이 없으므로 도에 와서 호소문을 제출하는 것이니, 속히 이 뜻을 장계하여 군사와 백성의 원통함을 풀어주기 바란다"는 소장이었다.
광양현은 영남과 접경한 곳인데 사변이 일어난 뒤에 인심이 흉흉하여 모두 흩어져 달아날 꾀만 품고 있는데, 어영담이 이를 진정시켜 편안케 하여 마침 온 고을 백성들로 하여금 옛과 같이 그들이 있던 곳에서 편안히 살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경상도와 전라도의 변장으로 임용되어 물길의 형세를 잘 알아서 모르는 것이 없으며, 계교와 생각함이 뛰어난 사람이므로 중부장으로 정하여 함께 일을 의논하며 계획하였으며, 여러 번 적을 무찌를 때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앞장서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므로 호남 한쪽이 이제까지 온전히 보호되고 있는 것은 이 사람의 일부분의 힘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제 독운어사의 장계대로 본직이 갈린다고 하는 바, 창고의 곡식이 더하고 덜한 것은 내가 잘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대개 어영담은 지난 2월 초엿새 우리가 출전할 때 거느리고 나가 거제와 웅천 등지에서 진을 쳤으므로, 독운어사가 그 고을에 들어가서 각종 곡식을 조사할 때의 여러 안건들을 그 고을 유위장이 전담하여 제출한 것이니,비록 그 수량에 차이가 있더라도 이같이 몹시 어려운 때를 맞아 의기있는 장수 한 사람을 잃게 되는 것은 적을 방어함에 해로움이 있을 뿐 아니라, 해전은 사람마다 능한 것이 아니므로 이런 시기에 다달아 장수를 바꾼다는 것은 또한 군사상 좋은 계책이 아니다. 더구나 민심도 이러한 바, 사변이 평정될 때가지는 아직 그대로 그 자리에 눌러 두어서, 한편으로 해상으로 침범하는 적을 막고, 한편으로는 어린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 주도록 할까 하여 조정에서 잘 처리해 주도록 아뢰었다.
이일은 내가 품의할 바는 아니나, 순찰사(권율)와 도사(최철견)가 각각 먼 곳에 있고, 도망치는 큰 부대의 적을 차단하여 섬멸하는 것이 급한 일인데, 잔약한 백성들이 울며 부르짖는 호소를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으므로 엎드려 죄를 무릅쓰고 죽기를 마다 않고 장계했다.4)
4월10일[갑오 5월10일] 「장계」에서
전일 "친족에게 미치는 폐단 때문에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대충 징벌하지 말라" 하신 분부에 따라 관찰사의 공문이 도착했으므로, 간략하게 좋고 나쁜 점을 여거하여 먼저 체찰사에게 보고하고 그 회답을 받은 뒤에 의견을 낱낱이 열거하여 장계하였거니와 대개 수군은 육군에 비교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 호구 네 장정 중에 떠돌이가 절반이 넘으므로 폐단을 없애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려면 변방을 지키러 갈 사람이 없으며, 분부대로 변방을 굳게 지키려면 백성들이 매우 쇠약하여 병들게 된다. 이 두 가지 중에 편한 일을 아무리 생각해도 어찌 할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여 방어를 충실하게 하던 것은 이미 그렇게 해 오던 것이므로, 각 고을에도 "죽어서 자손이 끊어진 호구를 일체 징발하지 말고, 본인 및 친족과 이웃이 이것을 미끼로 삼아 숨어서 피한 자를 전례대로 도목장에 기록하여 보내라"고 공문을 보내왔다.
그런데 이번에 독운어사 임발영이 내려온 뒤에는 일체 군무에 관한 일과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일을 분부대로만 시행하므로 각 고을에서는 그 이론에만 의거하여 방비에 보낸 군사를 보낼 뜻이 없다. 또 각 고을의 군사와 아전들도 그 이론대로 숨겨두고서 공교롭게 기피할 꾀만 내어 도망했다가 살아 온 것을 죽었다고 하니,군령이 크게 무너져 수습할 방도가 없으며, 군사의 수가 날로 줄어도 군사를 뽑아낼 수가 없어 연해안의 중요한 지역이 일시에 텅 비게 되고, 대장이 있는 큰 진에도 장차 성문을 지킬 군졸이 없게 될 것이니, 방어의 허점이 사변을 겪은 지역보다 더 심한 편이어서 아무리 생각하여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이러한 일은 평시에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물며 이같은 큰 사변을 맞은 때 극악한 적을 제거하지 못하고 곳곳에서 서로 겨루고 있으므로,도망치는 적을 무슨 힘으로 길목을 막아 죽이며, 성을 지킴에 계속 도와야 하는 일을 무슨 힘으로 조처할까. 일에는 경중이 있고 시기에는 완급이 있다. 굳이 불가하면 한 때의 폐단 때문에 길이 후회할 일을 아뢸 수는 없다. 이는 이미 지난날 경험한 일이다. 호남 한쪽이 오늘까지 온전한 것은 오직 수군의 큰 힘에 된 것일 뿐 아니라, 나라를 회복할 기기도 또한 이 때 있으니.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한는 폐단을 중지하는 것"은 사변을 평정한 뒤에도 늦지 않을 것이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니, 조정에서 전후 장계를 참작하여 외적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양편이 다 편하도록 장계를 써 올렸다.5)

1) ①『이충무공전서』 권3,「狀啓」8쪽, 「討賊狀」. ② 조성도 『壬辰狀草』, 120쪽, 321쪽.
2) ①『이충무공전서』 권3,「장계」8쪽, 「統船一雙傾覆後待罪狀」 ② 조성도,『임진장초』, 121쪽. 322쪽.
3) ①『이충무공전서』 권3,「狀啓」8~9쪽,「淸舟師屬邑守令專水戰狀」 ② 조성도, 앞의 책, 122쪽, 333쪽.
4)『이충무공전서』 권3,「狀啓」9~11쪽,「淸光陽縣監魚泳潭仍任狀」.
5)『이충무공전서』,11~12쪽,「申靑反汗一族勿侵之命狀」② 조성도, 앞의 책, 114쪽, 3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