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3년 2월 선조 26년 계사년 (충무공 이순신 49세)

천하한량 2007. 5. 4. 03:55

 

 

 

 

 

2월1일[병술/3월3일] 종일 비오다. 발포만호(황정록)ㆍ여도권관(김인영)ㆍ순천부사(권준)가 와서 모였다. 발포진무 최이가 두 번이나 군법을 어기었으므로 군율로써 처형했다.
2월2일[정해/3월4일] 늦게야 개이다. 녹도가장ㆍ사도첨사(김완)ㆍ응양현감(배흥립) 등의 배가 왔다. 낙안군수(신호)도 왔다.
2월3일[무자/3월5일] 맑다. 여러 장수들이 거의 다 모였는데, 보성군수(김득광)가 미처 못온 것이 섭섭하다. 오후 여덟 시쯤부터 비바람이 세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하였다.
2월4일[기축/3월6일] 늦게야 개이다. 성 동쪽이 아홉 발이나 무너졌다. 객사 동헌에 나가 공무를 봤다. 오후 여섯 시부터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바람조차 몹시 사납게 불어 각 배들을 간신히 구호하였다.
2월5일[경인/3월7일] 비가 억수같이 내리다가 늦게야 개이다. 경칩날이라 둑제를 지냈다. 아침밥을 먹은 뒤 대청으로 나가 공무를 봤다. 보성군수(김득광)가 밤을 새워 육지를 거쳐 달려 왔다. 잡아들여 기일을 어긴 죄를 묻고, 그 대장(代將)을 처벌했다. 저녁에 이언형이 아뢰고 돌아갔다.
2월6일[신묘/3월8일]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 나절에야 개이다. 날이 밝자 배를 풀고 돛을 올렸으나1), 정오 때에 맞바람이 불어 저물어서야 사량에 이르러 머물렀다.
2월7일[임진/3월9일] 맑다. 새벽에 떠나 곧장 견내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미 먼저 와 있었다. 기숙흠도 와서 보고, 이영남ㆍ이여념도 왔다.
2월8일[계사/3월10일] 맑다. 아침에 영남우수사가 내 배에 와서 전라우수사의 기약 어긴 잘못을 몹시 탓하고는 지금 먼저 떠나자고 한다. 나는 애써 말려 "좀 더 기다려 봅시다. 오늘 안으로 도착할 겁니다."고 언약을 하였더니, 과연 정오에 돛을 달고 다가오므로 모든 진중의 장병들이 바라보고는 기뻐 날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오후 네 시쯤에 출항하여 초저녁에 온천도(칠천도)에 이르렀다.
2월9일[갑오/3월11일] 종일 많은 비가 오다. 그대로 머물러 출항하지 않았다.
2월10일[을미/3월12일] 아침에 흐리다가 저녁 나절에 개이다. 오전 여섯 시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ㆍ웅포에 이르니 적선이 줄지어 정박했는데, 두 번이나 유인했으나 진작부터 우리 수군을 겁내어 나올 듯하다가도 돌아가 버리므로 끝내 잡아 없애지 못했다. 참으로 분하다. 밤 열 시쯤에 도로 영등포 뒤 소진포(장목면 송진포)에 이르러 계류하고서 밤을 지냈다.
2월11일[병신/3월13일] 흐리다. 군사를 쉬게 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2월12일[정유/3월14일] 아침엔 흐리다가 저녁 나절에는 개이다. 삼도의 군사가 일제히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웅천ㆍ웅포에 이르니, 왜적들은 어제와 같다. 나아갔다 물러갔다 하며 유인했지만 끝내 바다로 나오지 않는다. 두번이나 뒤쫓았으나 잡아 섬멸하지 못하니 너무도 분하다. 저녁에 칠천도에 이르자 비가 많이 쏟아지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2월13일[무술/3월15일] 비가 창대같이 오다. 적 토벌에 관해 의논할 일로 순천부사(권준)ㆍ광양현감(어영담)ㆍ방답첨사를 불러 이야기했다. 정담수가 와서 봤다.
2월14일[기해/3월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본영 탐후선이 와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삼도 군사들을 모아 약속할 적에 영남우수사는 병으로 모이지 않고, 전라 좌ㆍ우도의 장수들만이 모여 약속하는데, 다만 우후가 술에 취하여 마구 지껄이며 떠드니 그 기막힌 꼴을 어찌 다 말하랴. 어란포만호 정담수, 남도포만호 강응표도 역시 그랬다. 이렇게 큰 적을 맞아 무찌르는 일로 모이는 자리에 술에 만취되어 이렇게까지 되니, 그 인물됨이야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가덕첨사 전응린이 와서 봤다.
2월15일[경자/3월17일] 아침에 맑더니 저녁에 비오다. 날씨는 따뜻하고 바람도 잤다. 과녁을 걸고 활을 쏘았다. 순천부사ㆍ광양현감ㆍ사량만호ㆍ소비포권관ㆍ영등포만호가 또 왔다. 이 날 순찰사(이광)의 공문이 왔는데, 명나라에서 또 수군을 보내니 미리 알아서 처리하라는 것이다. 해질녘에 원균이 와서 봤다.
2월16일[신축/3월18일] 늦은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었다. 오후에 우수사(이억기)가 와서 봤다. 순천부사ㆍ방답첨사도 와서 봤다. 밤 열 시쯤에 신환(愼環)과 김대복이 교서 두 장과 부찰사의 공문을 가져 왔는데 보니, 명나라 군사들이 바로 송도(松都)를 치고, 이 달 초엿새날에는 마땅히 서울에 있는 왜적을 함몰시키겠다고 하였다.
2월17일[임인/3월19일] 흐리되 비는 아니오다. 종일 샛바람이 불었다. 이영남ㆍ허정은ㆍ정담수ㆍ강응표 등이 와서 봤다. 오후에 우수사(이억기)에게 가 봤다. 새로 온 진도군수 성언길을 봤다. 우수사와 함께 영남우수사(원균)의 배에 갔다가 선전관이 임금님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는 소문을 듣고, 노를 바삐 저어 진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선전관을 만났으므로 급히 배 위로 맞아들여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보니, "급히 적의 퇴로를 끊고 도망하는 적을 몰살하라"는 것이었다. 즉시 받았다는 답서를 써 부치고나니, 밤이 벌써 두 시었다.
2월18일[계묘/3월20일] 맑다. 이른 아침에 출항하여 웅천에 이르니 적의 형세는 여전하다. 사도첨사(김완)를 복병장으로 임명하여 여도만호ㆍ녹도가장ㆍ좌우별도장ㆍ좌우돌격장ㆍ광양이선ㆍ흥양대장ㆍ방답이선 등을 거느리고 송도(진해시 웅천2동)에 복병하게 하고 모든 배들로 하여금 유인케 하니, 과연 적선 10여 척이 따라 나왔다. 경상도 복병선 다섯 척이 날쌔게 나가 쫓을 때, 나머지 복병선들이 일제히 적선들을 에워싸고 여러 무기들을 쏘아대니, 왜적의 죽은 자의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적의 기세가 크게 꺽이어져 다시는 나와서 항거하지 않는다. 날이 저물어서 사화랑(진해시 웅천2동)으로 돌와왔다.
「장계」에서
이날 싸움에서 좌별도장 군관 주부 이설과 좌돌격귀선장 주부 이언량 등이 적선 세 척을 끝까지 쫓아가서 세 척에 타고 있던 백 여명의 왜적을 거의 다 사살하였는데, 그 중에 금빛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은 자가 크게 외치면서 노를 재촉하다가 피령전을 맞고 곧 배 안에 엎어졌으며, 거의 그 배를 온전히 사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미 깊숙한 곳에 들어갔으므로 끝까지 쫓아가지 못하고 임치통선이 곁에서 싸움을 돕다가 물에 빠지는 왜놈의 머리 한 급을 베었다.
2월19일[갑진/3월21일] 맑다. 하늬바람이 세게 불어 배를 띄울수가 없으므로 그대로 사화랑에 진을 쳤다. 남해현령이 와서 봤다. 고여우와 이효가도 와서 봤다.
2월20일[을사/3월22일] 맑다. 새벽에 출항하자 샛바람이 약간 불더니 적과 교전할 때에는 바람이 세게 불어 배들이 서로 부딪치고 깨어질 지경이었다. 거의 배를 감당할 수조차 없다. 곧 호각을 불게 하고 초요기(지휘기)를 올려 싸움을 중지시키니, 여러 배들이 다행히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소진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이 날 사슴떼가 동서로 달아났는데, 순천부사(권준)가 한 마리를 잡아 보냈다.
「장계」에서
지난 10ㆍ12ㆍ18ㆍ20일에 모든 수군이 혹은 복병을 보내어 유인하기도 하고 드나들기도 하면서 도전하였을 때, 적들은 우리 수군의 위세에 눌려 바다 가운데로는 나오지 못하고, 언제나 가볍고 빠른 배로써 별안간 포구로 나왔다가는 추격하면 빨리 돌려서 으슥한 곳으로 들어갔다. 철환을 빗발치듯 쏘면서 교만한 꼴을 보이므로, 우리 전선이 대열을 나누고 떼를 지어 좌우로 일제히 진격하여 총통과 화살을 번갈아 쏘니 그 형세가 바람같고 우레같았다.
이렇게 하기를 하루에 두 세 차례씩 반복함에 사살되어 엎어져 넘어진 놈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으며, 적의 세력은 크게 꺽였다. 그러나 그곳의 험한 설비가 의심스러워 포구 안까지는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또 뭍으로 올라가 추격하여 죽이지도 못하여 늘 분개한 마음 뿐이다.2)
2월21일[병오/3월23일] 흐리고 바림이 세게 불다. 이영남ㆍ이여념이 와서 봤다. 우수사 원균과 순천부사ㆍ광양현감도 와서 봤다. 저녁에 비가 오더니 자정이 되어서야 그쳤다.
2월22일[정미/3월24일] 새벽에 구름이 검더니 샛바람이 세게 불다. 적을 무찌르는 일이 급하므로 출항하여 사화랑에 이르러 바람 멎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바람이 멎는 듯하므로 재촉하여 웅천에 이르러 삼혜와 의능 두 승장과 의병 성응지를 제포(진해시 웅천2동)로 보내어 곧 상륙을 하는 체하게 하고, 또 우도의 여러 장수들의 배들도 시원치 않은 배들을 골라서 동쪽으로 보내어 곧 상륙하는 체하게 했더니 왜적들이 당황하여 갈팡질팡한다. 이 틈을 타서 모든 배를 몰아 일시에 무찌르니, 적들은 세력이 분산되고 약해져서 거의 섬멸하게 되었는데, 발포의 두 배와 가리포의 두 배가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돌입하다가 그만 얕은 곳에 얹혀(좌초)3) 적에게 습격받은 것은 참으로 통분하여 가슴이 찢어질 것같다. 진도의 좋은 배 한 척도 적에게 포위되어 거의 구하게 되지 못하게 될 즈음에 우후가 곧장 달려가 구해냈다. 경상좌위장과 우부장은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끝내 구하지 않았으니, 그 괘씸함을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참으로 통분하다. 오늘의 통분함을 어찌 다 말하랴. 모두 경상우수사(원균)의 탓이다. 돛을 달고 소진포로 돌아와서 잤다. 아산에서 뇌와 분의 편지가 웅천 진중에 왔고, 어머니도 편지도 왔다.
2월23일[무신/3월25일] 흐르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봤다. 그 음흉함을 이를 길이 없다. 최천보가 양화진(고양시)에서 와서 명나라 군사들의 소식을 자세히 전하고, 조도어사의 편지도 전했다.
2월24일[기유/3월26일] 맑다. 새벽에 온양 · 아산 편지와 집안 편지를 써서 보냇다. 아침에 출항하여 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니 비가 몹시 퍼부어 곧장 다다를 수 없으므로 배를 돌려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2월25일[경술/3월27일] 맑다. 풍세가 불순하므로 그대로 칠천량에 머물렀다.
2월26일[신해/3월28일] 바람이 세게 불다. 그대로 머물렀다.
2월27일[임자/3월29일] 맑으나 바람이 세게 불다.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이야기했다.
2월28일[계축/3월30일] 맑으며 바람조차 없다. 새벽에 출항하여 가덕에 이르니 웅천의 적들은 기가 죽어 대항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우리 배가 바로 김해강 아래쪽 독사리목(부산시 강서구 명지동)으로 향하는데, 우부장이 변고를 알리므로 여러 배들이 돛을 달고 급히 달려가 작은 섬을 에워싸고 보니,경상수사 원균의 군관의 배와 가덕첨사의 사후선(척후선)등 두 척이 섬에서 들락날락하는데 그 짓거리가 황당했다. 두 배를 붙잡아 매어 경상수사 원균에게 보냈던 바, 수사(원균)가 크게 성을 냈다고 한다. 알고 보니 그 본의는 군관을 보내어 어부들의 목을 찾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초저녁에 아들 염이 왔다. 사화랑에서 잤다.
2월29일[갑인/3월31일] 흐리다.바람이 몹시 불까 염려되어 배를 칠천량으로 옮겼다. 우수사 이억기가 와서 봤다. 경상우수사(원균)도 와서 봤다.
2월30일[을묘/4월1일] 종일 비오다. 봉창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1)『이충무공전서』권1, 「狀啓」2, 「令水陸자諸將直搗熊川狀」3쪽에는 "2일에 출항(初二日發行)", 「장계」4쪽 「討賊狀」에는 "6일 출항(初六日發船)" 하였다고 했는 바, 1월 30일~2월 5일까지의 날씨로 보아 2일의 출항은 불가능하고, 6일 출항이 맞다고 봄.
2)『이충무공전서』권3,「장계」4~5쪽.
3)『이충무공전서』권3,「狀啓」25쪽. 「登聞被擄人所告倭情狀」. "우리 판옥선 두 척이 서로 부딪쳐 넘어지자 왜의 부장이 우리 배에 뛰어 올랐는데, 우리 뱃사람들이 긴 창으로 그의 가슴을 찔러 죽였다. (我國板屋船二雙相觸飜覆 倭福將稱號者跳登我船 我船之人以長槍刺其胸卽死)"라고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