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3년 1월 선조 26년 계사년 (충무공 이순신 49세)

천하한량 2007. 5. 4. 03:48
(1월1일부터 1월30일까지는 일기가 빠지고 없음)
1월22일[정축/2월22일] 「장계」에서
지난 임진년 12월28일에 성첩된 우부승지 유몽정의 서장을 선전관 채진(蔡津)이 받들고 온 것을1) 오늘 열 시에 본영에서 받아 보았다.
내용은, "명나라 대장 이 제독(李제독)이 수십만의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방금 왜적을 탕평할 계획으로 기성(평양)ㆍ해서(황해도) 및 서울을 차례로 수복했는데, 대군사가 진격하면서 마구 무찌르면 남은 왜적들은 도망쳐 돌아갈 것이므로 적의 돌아갈 길을 끊고 섬멸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니, 경은 수군을 거느리고 기회를 잡아서 길목을 누르고 협력하여 적을 무찔러 죽이도록 하라"는 분부였다.2)
오늘 10시쯤에 장계하였다.3)
1월25일[경진/2월25일] 「장계」에서
선전관 안세걸이 받들고 온 좌부승지(이국)의 서장을 오늘 오전 여덟시에 본영에서 받아 보았다.4)
"명나라 장수 제독부의 제독 이여송이 쉰 명의 장수와 수십만의 정예 부대를 거느리고 곧장 평양을 공격하여5) 이 달 초여드레에 적의 소굴을 탕복하고 왜장을 사로잡아 목을 베어 우레처럼 소리치며 바람같이 마치 그 형세가 대를 쪼개는 것과도 같이 장차 차례로 진토하여 수레바퀴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기약하는 바이니, 그대는 수군을 정비하여 힘을 가다듬어 기회를 기다려서 그들의 귀로를 막아서 해전으로 죄다 죽이고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도록 하라"6)고 했다.
1월26일[신사/2월26일] 「장계」에서
영남에 진치고 있던 적들이 본도를 침범코자 수륙으로 엿보고 있는 바, 비록 해전을 담당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육전의 방비에도 마음을 조금도 늦출 수가 없어서 호남과의 접경인 구례ㆍ석주ㆍ도탄ㆍ광양ㆍ두치ㆍ강탄 등의 요충지에 복병을 두어 파수보는 일들을 조력하고, 신칙하여 적들로 하여금 끝내 경계를 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작년 8ㆍ9월사이에 근처의 각 고을에 통고하여 여러 절간에 숨어있는 중들과, 병적에 올리지 않고 놀고 있는 자를 남김없이 적발하여 석주ㆍ도탄ㆍ두치 등지에 나누어 파수보도록 신칙하였을 무렵 중들이 소문을 듣고 기꺼이 모여들어 한 달도 못되어 사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 용략이 있는 자들로서 순천의 삼혜를 시호별도장으로, 흥양의 의능을 유격별도장으로, 광양의 성휘를 우돌격장으로, 광주의 신해를 좌돌격장으로, 곡성의 지원을 양병용격장으로 모두 정하고 나서, 달리 더 소집할 무렵에 구례의 진사 방처인, 광양의 한량 강희열, 순천의 보인 성응지 등이 분개하여 탄식하면서 의기를 분발하여 시골 사람들을 규합하고 각각 의병을 일으켰으므로 방처인을 도탄으로, 강희열과 중 성휘 등을 두치로, 중 신해를 석주로, 중 지원을 운봉 팔양치로 보내어 모두 요충지를 파수케 하여 군관과 합력하여 사변에 대비하도록 전령하고, 성응지에게 순천성을 수비하는 책임을 맡기고, 중 삼혜를 순천에 머물러 있게 하고, 중 의능은 본영에 머물면서 방비하고 있다가 적세의 경중을 보아서 육전이 중대하면 곧 육전에 임하고, 해전이 중대하면 곧 해전에 임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도망치는 적의 대부대를 모조리 무찌르자면 병세가 고약해서 안되겠기에 수군을 넉넉히 정비하고 의병장 성응지와 승장 삼혜ㆍ의능 등에게도 전선을 나누어 주어 수리해서 나누어 타고 함께 바다로 나가도록 명령하였음을 장계하였다.7)
영남의 피난민들이 본영 경내에 들어와 살고 있는 자들이 이백여 호 이상이나 되는데, 각각 임시로 살 수 있도록 하여 겨울을 지내게 하였으나, 지금은 구호할 물자를 마련할 수가 없다. 비록 사변이 평정된 뒤에는 제 고장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당장 눈 앞에서 굶주리는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을 뿐 아니라, 풍원부원군 유성룡에게 보낸 서장에 따라 비변사의 공문이 전일 도착했는데, "이번에 여러 성중에서 피난하여 농사지을 만한 땅이 있으면 피난민을 들여 보내어 살 수 있게 하되, 편안 여부를 참작하여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나는 피난민들이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해보니, 돌산도만한 곳이 없다. 그런데 이 섬은 본영과 방답 사이에 놓여 있고, 산으로 둘러싸여 적이 들어올 길이 사방으로 막혔으며, 지세가 넓고 편편하고 토질이 비옥하므로 피난민을 타일러서 차츰 들어가서 살게 하여 방금 봄갈이를 시키었다. 다만 전어사 홍종록과 감사 윤두수, 수사 박선과 이천ㆍ이영 등이 본영의 둔전 경영에 관한 일을 장계하였을 때, 병조에서는 "목장이 있는 곳으로서 말 기르는 일에 방해된다"고 장계 올리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일이 어지럽고 백성도 살 곳을 잃었으므로, 비록 의지할 곳 없는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들어가 농사짓게 하더라도 말 먹이는 일에 해로움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목마구민(牧馬救民)하면 양편이 다 편리할까 하여 망녕되이 생각하였음을 삼가 갖추어 아뢰었다.8)
본영과 진포에 있는 화약은 기본 수량이 넉넉하지 못하였는데, 전선에 나누어 싣고 다섯 번이나 영남 해역으로 출전하여 거의 다 쏘아 버렸다. 더구나 본도 순찰사ㆍ 방어사ㆍ 소모사ㆍ 소모관 및 여러 의병장과 경상도 순찰사 및 수사들의 청구도 번거로울 정도로 많아서 달리 쌓아둔 것이 너무 적다. 그런데 옮겨 받을 곳이 없고, 또 보충할 길이 없어서 백방으로 생각했으나 별다른 계책이 없으므로 본영에서 경우에 따라 끓여서 사용할 즈음에, 군과 훈련주부 이봉수(李鳳壽)가 그 묘법을 알아내어 석달 동안에 염초 천 근을 끓여내었으므로 그 염초를 조합하여 본영과 각 포구에 고루 나누어 주었거니와, 오직 석류황만은 달리 나올 곳이 없어 백 여 근쯤 내려보내 달라고 장계를 써 올렸다.9)
1월30일[을유/3월2일] 「장계」에서
소속 수군들이 모두 모여 와서 약속했지만, 풍세가 불순하여 출항하지 못하고 순풍을 기다렸다.10)

1) 조성도, 『임진장초』, 「狀 20」, "去壬辰十二月二十八日成貼宣傳官察津貴來右福承旨書狀內".
2) 『李忠武公全書』 券首, 「敎諭」12쪽, 「命率舟師截賊歸路 諭書(一)」
3) 조성도, 위의 책, 105쪽, 318쪽, "今正月二十二日己時"
4) 「장계」108쪽, 319쪽, "今正月二十五日辰時"
5) 이여송은 군사 43,000여 명을 거느리고 임진년 12월에 압록강을 건너 계사년 1월 8일 평양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6)『이충무공전서』, 卷首, 「敎諭」12~13쪽, 「命率舟師截賊歸路 諭書(二)」.
7) ①「장계」 卷首, 13쪽 ② 위의 책, 권3, 「狀啓」 1쪽, 「分送義僧把守要害狀」③ 조성도, 앞의 책, 102쪽, 314~15쪽.
8) ① 조성도, 위의 책, 104쪽, 316~17쪽 ② 『이충무공전서』권3, 「장계」1~3쪽, 「請令流民入接突山島耕種狀」.
9) ①『이충무공전서』권3, 「장계」1쪽, 「請賜硫黃狀」② 조성도, 위의 책, 100쪽, 313쪽.
10)『이충무공전서』권3, 「장계」3쪽,「令水陸자諸將直搗熊川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