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웅이순신 ▒

1593년 8월 선조 26년 계사년 (충무공 이순신 49세)

천하한량 2007. 5. 5. 16:33

 

 

 

 

8월1일[임오/8월26일] 맑다. 새벽꿈에 큰 대궐에 이르렀다. 모양이 마치 서울과 같다. 영의정과 마주 앉아서 임금님께 파천하신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눈물을 뿌리며 탄식하는데, 적의 형세는 이미 질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로 의논할 때 좌우 사람들이 무수히 구름같이 모여드는 것을 보고 깨었다. 무슨 징조가 일어날지 모르겠다.
8월2일[계미/8월27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마음이 답답하여 닻을 올려 포구로 나갔다. 충청수사 정걸이 따라 나오고, 순천부사·광양현감이 와서 봤다. 소비포권관(이영남)도 왔다. 저녁에 진쳤던 곳에 되돌아 왔다. 이홍명이 왔다. 저물녘에 우수사(이억기)가 배에 와서 하는 말이, "방답첨사(이순신)가 부모를 뵈러 가겠다"고 간절히 청하나 여러 장수들이 보내지 않았다고 하며, 우수사 원균이 망녕된 말을 하며 나에게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더라고 전하나 모두가 망녕된 짓이니 무슨 관계가 있으랴. 탐후선이 들어와서 아들염이 아픈 데가 곪아서 종기가 되었는데, 침으로 쨌더니 고름이 흘렀다. 며칠만 늦었더라면 고치기 어려울 뻔했다고 한다. 큰일 날 뻔 했다. 지금은 조금 생기가 났다하니 다행이다. 의사 정종지의 은혜가 매우 크다.
8월3일[갑신/8월28일] 맑다. 이경복·양응원과 영리 강기경 등이 들어왔다.
「장계」에서
경상좌수영 앞바다에서 뭍으로 올라 성돌 등 각각 살던 곳의 제 집으로 돌아가고 제만춘이 그 마을에 사는 황을걸의 집에 머물렀다.1)
8월4일[을유/8월29일] 맑다. 순천부사·광양현감이 와서 보고는 돌아갔다. 저녁에 도원수의 군관 이완(李緩)이 삼도에 퍼져 있는적의 형세를 보고하지 않은 군관·색리를 잡아다가 심문하려고 진으로 왔다. 웃을 일이다.
8월5일[병술/8월30일] 맑다. 조붕·이홍명, 우수사(이억기) 및 우후가 와서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소비포권관(이영남)도 밤에 돌아갔다. 아산에서 이예(李禮)가 밤에 왔다.
8월6일[정해/8월31일] 맑다. 아침에 이완이 송한련·여여충과 함께 도원수에게로 갔다. 식사를 한 뒤에 순천부사·광양현감·보성군수·발포만호, 이응화 등이 와서 봤다. 저녁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오고, 우수사 경수 이억기, 충청수사 정걸도 와서 의논을 하고 있는동안에 우수사 원균이 하는 말은 걸핏하면 모순된 이야기를 하니 한심한 일이다.
8월7일[무자/9월1일] 아침에 맑더니 해질녘에 비가 내려 농사에 흡족하다. 당포만호(하종해)가 작은 배를 찾아갈 일로 왔으므로 주어 보내라고 사량만호(이여념)에게 일러주었다. 저녁에 경상우수사의 군관 박치공이 와서 전하는데, "적선들이 물러갔다"고 했다. 그러나 원균 수사와 그의 군관은 항상 헛소문만 내기를 좋아하니 믿을 수가 없다.
8월8일[기축/9월2일] 맑다. 식사를 한 뒤에 순천부사·광양현감·방답첨사·흥양현감 등을 불러 들여 복병 등에 관한 일을 같이 논의했다. 충청수사의 전선 두 척이 들어왔는데, 한 척은 쓸 수 없다고 한다. 김덕인이 그 도(충청도)의 군관으로 왔다.
8월9일[경인/9월3일] 맑다. 아침에 아들 회가 들어와서 어머니께서는 편안하시고, 염은 병이 조금 나아졌다고 하니 기쁘고 다행이다. 오후에 우수사(이억기)의 배에 이르니 충청수사(정걸)도 왔다. 영남수사(원균)는, "복병군을 한꺼번에 보내어 복병시키기로 약속했다"하여 먼저 보냈다고 한다. 해괴한 일이다.
8월10일[신묘/9월4일] 맑다. 아침에 방답의 탐후선이 들어와서 임금님의 분부와 비변사의 공문과 감사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해남 현감(위대기)이 방답첨사 이순신과 같이 왔다. 순천부사·광양현감도 왔다. 우수사(이억기)가 청하므로 그의 배로 가니, 해남현감이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러나 몸이 불편하여 간신히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2)
8월11일[임진/9월5일] 늦게 소나기가 쏟아지고 바람이 몹시 불더니만, 오후에 비는 그쳤으나 바람은 그치지 않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종일 앉았다 누웠다 했다.
8월12일[임진/9월6일] 비가 오다 개었다 하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종일 누워서 신음했다. 옷이 젖도록 식은땀이 나는 데도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순천부사·우수사, 방답첨사 이순신이 와서 종일 장기를 두었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한다.
8월13일[갑오/9월7일] 본영에서 온 공문에 결재하여 보냈다. 몸이 몹시 불편하여 홀로 봉창 아래에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다 일어난다. 이경복에게 장계를 지니고 가라고 내어 보냈다. 송두남이 군량미 삼백 섬과 콩 삼백 섬을 실어 왔다.
8월14일[을미/9월8일] 맑다. 방답첨사(이순신)가 제사 음식을 갖추어 왔다. 우수사(이억기)와 충청수사(정걸)와 순천부사(권준)도 왔다.
8월15일[병신/9월9일] 맑다. 오늘은 한가위 날이다. 우수사(이억기)·충청수사(정걸)·순천부사(권준)·광양현감(어영담)·낙안군수(신호)·방답첨사(이순신)·사도첨사(김완)·흥양현감(배흥립)·녹도만호(송여종), 이응화, 이홍명, 좌도령공·우도령공 등이 모두 모여 이야기했다. 저녁에 아들 회가 본영으로 갔다.
8월16일[정유/9월10일] 맑다. 광양현감(어영담)이 제사 음식을 갖추어 왔다. 우수사(이억기)·충청수사(정걸)·방답첨사(이순신)·순천부사(권준)·가리포첨사(구사직), 이응화 등이 함께 왔다. 아침에 들으니 제만춘이 일본에서 어제 나왔다고 한다.
8월17일[무술/9월11일] 맑다. 지휘선을 연기로 그을리고 좌별도선에 옮겨 탔다. 저녁 나절에 우수사(이억기)의 배로 가니 충청수사(정걸)도 왔다. 제만춘을 불러서 문초하니, 분하고 분한 사연들이 많이 있다. 종일 의논하고나서 헤어졌다. 이 날 밤 달빛은 대낮같고, 물결이 비단결같다.
8월18일[기해/9월12일] 맑다.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정걸과 함께 이야기했다. 조붕이 와서 하는 말이, "경상우수사의 군관 박치공이 장계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고 했다.
8월19일[경자/9월13일] 맑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원균 수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내 배에 옮겨 타라고 청하였다. 우수사(이억기), 충청수사 정걸도 왔다. 원연도 함께 이야기했다. 원균 수사의 형제가 옮겨 간 뒤에 천천히 노를 저어 진으로 돌아왔다. 우수사, 정수사와 같이 앉아 자세히 이야기했다.
8월20일[신축/9월14일] 아침식사를 한 뒤에 송희립을 순찰사에게 문안케 했다. 또 제만춘을 문초한 공문을 가지고 가게 했다. 방답첨사와 사도첨사로 하여금 돌산도 근처에 이사하여 사는 자들로서 작당하여 남의 재물을 약탈한 자들을 좌우 두 패로 나누어 잡아오라고 파견하였다. 저녁에 적량만호 고여우가 왔다가 밤이 깊어서야 갔다.
8월21일[임인/9월15일] 맑다.
8월22일[계묘/9월16일] 맑다.
8월23일[갑진/9월17일] 맑다. 윤간과 조카 뇌·해가 와서 어머니께서는 평안하시다고 전한다. 울은 학질을 앓는다는 소식도 들었다.
8월24일[을사/9월18일] 맑다. 조카 해가 돌아왔다.
8월25일[병오/9월19일] 맑다. 꿈에 적의 모양이 있었다. 그래서 새벽에 각 도의 대장에게 알려서 바깥바다로 나가 진을 치게 하였다. 해질 무렵에 한산도 내항으로 돌아왔다.
8월26일[정미/9월20일] 비가 왔다 개었다 하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왔다. 조금 있으니 우수사(이억기)와 충청수사 정걸도 모였다. 순천부사·광양현감·가리포첨사는 곧 돌아갔다. 흥양현감도 왔다. 제사 음식을 대접하는데, 경상우수사 원균이 술을 먹겠다고 하기에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망발하는 것이 우습기만 하다. 낙안군수(신호)가 보내 온 것을 보니, 풍신수길이 명나라 황제에게 상서한 초본과 명나라 사람이 고을에 와서 적은 것이었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8월27일[무신/9월21일] 맑다.
8월28일[기유/9월22일] 맑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봤다.
8월29일[경술/9월23일] 맑다. 아우 여필과 아들 울, 변존서가 한꺼번에 왔다.
8월30일[신해/9월24일] 맑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와서 영등포로 가자고 독촉한다. 참으로 음흉스럽다고 할 만하다. 자기가 거느린 스물 다섯 척의 배는 모두 다 내어 보내고, 다만 일 여덟 척을 가지고 이런 말을 내니, 그 마음 쓰고 행사하는 것이 다 이 따위이다.

1)『이충무공전서』권3, 「장계」26쪽,『登聞被擄人所告倭淸狀』.
2)「장계」, 이 날에 이순신 장군은 "웅천땅 적항역 앞을 지나서 상륙하여 13일에 본가로 돌아왔다(初十日熊川地赤項驛前過涉十三日本家來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