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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파평군 윤공 묘지명 병서 (坡平君尹公墓誌銘 幷序 )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3:44

묘지(墓誌)
 
 
파평군 윤공 묘지명 병서 (坡平君尹公墓誌銘 幷序 )
 

지정(至正) 신축년 겨울에 사적(沙賊)이 서울을 핍박해 와서 현릉(玄陵)이 남방으로 행행할 계책을 결정하니, 조관들이 많이 벼슬을 버리고 달아났다. 파평군(坡平君) 윤해(尹?)가 전직 복주 목사(福州牧使)로서 필마로 왕의 거가를 따라 광주(廣州)에 이르러, 객사의 문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웃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는데, 내 비로소 그 얼굴을 알게 되었으니, 대개 기이한 큰 인물이었다. 내가 병중에 있을 때 일찍이 문병하러 온 일이 있었다. 그때에 그의 얼굴빛을 살펴보니, 나를 몹시 애처롭게 여기는 것 같아 내 지금까지도 감히 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 아, 공이 사망한 지도 벌써 5년이 되었고, 또 병이 앓은 나머지 졸렬한 글로써 공의 묘소에 명(銘)하게 되니, 어찌 느끼는 바 없으리요. 공의 이름은 해(?)요, 자는 자기(子奇)이니, 파평현 사람이다. 13대조 신달(莘達)을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 부르는데, 공신 선지(先之)를 낳았고, 공신은 좌복야 금강(金剛)을 낳았고, 좌복야는 우복야 집형(執衡)을 낳았으며, 우복야는 추충좌명 평융척지 진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수태위문하시중 판이부사 영평군개국백 식읍 3천 5백호 실봉 3백호 감수국사 문숙공(推忠佐命平戎拓地鎭國功臣開府儀同三司上柱國守太尉門下侍中判吏部事鈴平郡開國伯食邑三千五百戶實封三百戶監修國史文肅公) 관(瓘)을 낳았다. 예왕(睿王) 때에 여진(女眞)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문숙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쫓아버리니, 여진이 멀리 도망하기에 돌을 세워 공적을 기록하고 돌아왔다. 문숙공이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언이(彦?)를 낳으니, 의지와 기개가 있었고 죽고 사는 이치에 통달하여, 운명하려 할 때에 시(詩) 한 편이 있었는데, 선가(禪家)의 말과 같았다. 이 평장사가 상서병부시랑(尙書兵部侍郞) 돈신(惇信)을 낳았고, 시랑이 위위소윤(衛尉少尹) 상계(商季)를 낳았고, 소윤이 태상록사(太常錄事) 복원(復元)을 낳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다. 녹사가 공의 증조인 감찰어사 순(純)을 낳았고, 어사는 조부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 부(珤)를 낳았으며, 영평은 아버지 소부윤(少府尹) 암(?)을 낳았는데, 만호 판삼사사(萬戶判三司事) 박지량(朴之亮)의 딸을 아내로 맞아 원정(元貞) 정미년 7월 모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나이 14세에 가문의 공덕으로 처음 주릉직(周陵直)에 제수되었다가, 지원(至元) 경진년에 흥위위 정용호군(興威衛精勇護軍)에 발탁되어 봉선대부(奉善大夫)의 자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의 하사를 받았고, 다음해 봉상 겸 통례문부사(奉常兼通禮門副使)에 올랐고, 흥배(興拜)하는 절차가 모두 도수(度數)에 맞았으며, 호군(護軍) 40여 명이 모두 용맹있고 호방하여 법도를 지키지 않았으나 공은 매양 예법에 의하여 행동하였으므로, 지금까지 그 방도를 공경히 본받았다. 임오년에는 친어군 호군(親禦軍護軍)으로 승진되었다. 이때 감시주사(監試主司) 민사평(閔思平) 집의 종이 나무를 하려고 성 밖으로 나아가서 생 소나무를 베고 있는 것을 반주(班主) 인안(印安)이 마침 교외에 나갔다가 보고 법으로 당연히 금하여야 하기 때문에 금지하였는데, 민사평 집의 종들이 반주임을 알지 못하고 모여들어 쳐서 그 다리에 상처를 입혔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중방(重房)으로 하여금 민주사의 가택을 부수라고 하니, 공은 말하기를, “종은 참으로 죄가 있으나 그 주인이 어째서 관련된단 말입니까. 또 지금 많은 선비들이 모두 눈을 씻고 방(榜)의 게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주사의 집을 부수려 한다면 주사가 무슨 마음으로 시권(試券)을 고열(考閱)하겠습니까.” 하였더니, 얼마 후에 임금의 노기가 풀려 그 일이 중지되었다. 계미년에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三司左尹)에 승진되었는데, 공이 청렴하고 근면하여 보흥고(寶興庫)의 관원으로 있은 지 무릇 3년 만에 왕의 부름을 받고 원 나라 서울 북경으로 갈 때에 정승 홍빈(洪彬)이 돈과 물품을 회계해 보니, 공만이 조금도 하자가 없었으므로, 홍공이 이를 탄복하고 칭찬하였다. 기축년에 대신(臺臣)을 선발하게 되자, 집정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윤모(尹某)는 대대로 예법을 지키고 맑은 절조를 숭상하여 왔으며, 또 기강의 대체를 알고 있으니 이 사람만한 자가 없다.” 하여, 드디어 집의(執義)로 옮겨서 많이 건의한 것을 비록 모두 시행하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명성이 진동하였고, 지평(持平) 정국경(鄭國經)도 청백하고 근신하며 또 강개하여 사람들의 기대하는 대상이 되어, 당시 감찰원에, “집의는 강기(綱紀)를 잡고 지평은 부절(符節)을 가졌다.”는 말이 있어 사대부들이 이를 흠모하였다. 경인년에 봉순대부 판소부시사 지전법사사(奉順大夫判少府寺事知典法司事)가 되어 재결을 공평하고 타당하게 시행하자 사람들의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현릉 5년 을미에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에 제수하니, 중방의 여러 이서(吏胥)들이 평소부터 공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므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기만하지 못했다. 달을 지나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부임하라는 명이 있어 공이 부임하자 모든 조치에 법도가 있어 백성들이 그 혜택을 많이 받았다. 신축년 겨울에 공의 아들 지금의 밀직공(密直公)에게 명하기를, “나는 행재소로 가지 않을 수 없으니, 너는 너의 어머니와 더불어 지름길로 좇아가라.” 하고, 드디어 왕을 따라 가서 경상도 점군병마사가 되었다. 얼마 후에 바로 서울을 회복하고 공신을 선정하여 기록하니, 공의 공(功)은 2등에 있었다. 공의 공로를 아는 사람들이 모두 “공은 억울한데 어찌 호소하지 않는가.” 말하니, 공은 웃고 답하지 않았다. 갑신년에 봉익대부 판전의시사(奉翊大夫判典儀寺事)로 승진되고 임자년에는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임명되었으며, 갑인년 겨울에 파평군(坡平君)에 봉하고 대광(大匡)의 관계에 올랐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이 시중공(侍中公) 이하로 무릇 7대를 내리 과거에 올랐는데, 우리 부자(父子)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였다. 병진년 12월 12일에 병으로 자택에서 별세하니, 향년 70이었고, 다음해 정월 갑인일에 송림(松林)의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최(崔)씨니 봉상대부 사헌장령(奉常大夫司憲掌令) 용(甬)의 딸로 4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의 이름은 호(虎)이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이요, 다음은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맏딸은 판내부사(判內府事) 김회조(金懷祖)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지여흥군사(知驪興郡事) 유원무(柳元茂)에게로 시집갔다. 손자는 남녀 몇 명이 있으니, 밀직공은 지선주사(知善州事) 이원후(李元厚)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아무개요, 큰 딸은 중서사인(中書舍人) 방순(方恂)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합문지후(閤門祗候) 남재(南在)에게 시집갔으며, 내부(內府)가 3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 첨(瞻)은 문하주서(門下注書)요, 다음은 우(?)요, 그 다음은 반(盼)인데 아직 어리고, 딸은 호군(護軍) 김간(金侃)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지여흥군사가 6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아무개요, 다음은 아무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밀직공의 사람됨이 단정하고 근신하며 큰 뜻이 있었고, 글씨를 잘 쓰고 바둑에 능하여 일찍이 현릉(玄陵)에게 알려져 현릉이 고시(古詩)를 써서 바치라고 명하니, 이는 필적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공은 말하기를, “달 아래 맺힌 이슬과 바람결에 떨어지는 꽃을 읊은 따위의 시는 왕 앞에 바칠 것이 못 된다.” 하고, 드디어
어두운 방에서는 속일 수 있다 하나 항상 그런 것도 아니요 / 欺暗常不然
밝음을 속이면 응당 죽임과 욕을 당하게 될 것이네 / 欺明當自戮
한 사람의 손을 가지고 / 難將一人手
천하 사람의 눈을 가리긴 어렵도다 / 掩得天下目
라고 써서 올리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는 나를 은미하게 간언하는 글이다.” 하고, 이 때문에 공을 점점 멀리 하였으나 군자들은 말하기를, “공은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였다. 아, 파평군은 아들을 잘 두었다고 말할 만하다. 밀직공이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께서는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지 않으셨으나 마실 때에는 일정한 주량이 없었고, 평생 질병이란 없으셨으며, 천성이 검약을 숭상하여 육식하시는 일이 적었으며, 더운 때에도 반드시 옷을 갖추어 입으셨고, 추위에는 갖옷을 겹쳐 입지 않으셨으며, 음악이나 여색은 더욱 멀리하셨다. 또 널리 제도와 조격(條格)에 통하셨고, 본국 판지(判旨)에 더욱 유의하셨는데,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하니, 나는 이에 더욱 공이 어진 아들을 두었음을 알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영평의 봉군을 / 鈴平之封
왕이 윤공에게 주었네 / 王錫尹公
군사를 출동하여 국토를 개척하고 / 出師闢國
그 공적을 비에 세웠네 / 乃碑其功
또 개부를 습봉한 분은 / 襲封開府
공의 조부로다 / 在于公祖
공이 뒤를 이어 / 公克嗣之
높은 벼슬을 역임하였도다 / 惟仕之?
공의 이름은 / 惟公之名
오직 그 의가 밝음이로다 / 惟誼之明
지위가 덕에 걸맞지 못하였으니 / 位不稱德
누가 그 공평함을 맡았는가 / 孰司其平
이 묘비명 / 幽堂之誌
길이 앞날에 보이리라 / 于永厥?
나의 아첨이 아니요 / 匪我之諛
공이 어진 아들을 두었도다 / 公有賢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