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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유원 자선대부 태상 예의원사 고려국 추충수의 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익산부원군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3:43

묘지(墓誌)
 
 
유원 자선대부 태상 예의원사 고려국 추충수의 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익산부원군 시문충 이공 묘지명 병서 (有元資善大夫大常禮儀院使高麗國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益山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 幷序 )
 

익주(益州 익산의 옛이름)의 이씨는 명성이 난 지 오래였다. 상서좌복야 휘(諱) 주연(周衍)이 참군(參軍) 휘 열(冽)을 낳았는데, 참군은 직사관(直史館) 휘 영재(英梓)를 낳았고, 직사관은 증 상서좌복야 양진(陽眞)을 낳았고, 좌복야는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翰林學士承旨) 휘 주(湊)를 낳았고 승지는 조봉대부 국자전주 보문각직학사 지제고(朝奉大夫國子典酒寶文閣直學士知製誥) 휘 행검(行儉)을 낳았으니, 곧은 절조로 이름이 있었다. 공이 형부(刑部)의 관원이 되었을 때 동료들이 권세에 압력을 받아 송사에 곧은 자를 패소하게 하는 것을 전주공이 한사코 그 불가함을 고집하다가 때마침 질병으로 정고(呈告 사직서) 중에 있었는데, 동료들이 공이 없음을 다행으로 여겨 곧 이를 자기들의 생각대로 결단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예리한 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형부의 관리들을 두 조각으로 내는 일이었다. 얼마 안 되어 그 관리들이 모두 갑자기 병으로 죽고, 전주공만 아무 탈이 없어 지금까지도 이를 칭송한다. 전주공이 승봉랑 감찰규정(承奉郞監察?正) 휘 애(崖)를 낳아 통직낭중(通直郞中) 송탐(宋耽)의 딸과 결혼하여 지대(至大) 무신년 12월 24일에 공을 낳았다. 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고, 재상 전공(全公) 휘 사의(思義)의 집에서 거두어 양육하니, 공의 자부(姉夫)이다. 그리하여 전공이 생존했을 때에 공이 이미 현달하여 전공을 아버지 섬기듯이 하였고, 전공이 사망하자, 그 누님을 어머니 섬기듯이 하였다. 돌아가시자, 같은 묘혈(墓穴)에 장사하였으며 제사에 예를 다하였고, 늙어서도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말할 만하다. 지원(至元) 경진년에 공의 나이 33세였다. 이때 상락군(上洛君) 김공(金公) 휘 영돈(永暾)과 순흥군(順興君) 안공(安公) 휘 축(軸)이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공이 낭장 겸 감찰규정으로서 장원급제하였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전의주부(典儀注簿)와 성균직강(成均直講)에 두 번 천전하였고, 임오년에는 봉선대부 성균사예 예문응교 지제교로 전직되었으며, 계미년에는 봉상으로 올라서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옮겨 춘추관 수찬관에 보충되었다. 갑신년에 다시 중현대부 전교령 밀직사우부대언 예문관직제학 지제교(中顯大夫典校令密直司右副代言藝文館直提學知製敎)로 승진되고, 을유년에 지신사(知申事)로 옮기고, 그해 겨울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옮겼고, 다음해에 다시 감찰대부로 승진되었다. 정해년 7월에 밀직부사에 임명되고, 무자년 정월에는 다시 광정대부 판밀직사사(匡靖大夫判密直司使)로 올랐다. 4월에는 원 나라에 들어가서 천수성절(天壽聖節)을 하례하였고, 6월에 겸 감찰대부가 되었다. 경인년에 정당문학에 임명되었고, 임진년 윤 3월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로 옮겨 또 감찰대부를 겸임하였으며, 10월에는 삼사우사(三司右使)로 고쳐 제수되었다. 계사년에 다시 도첨의(都僉議)로 들어가서 찬성사에 승진되고, 을미년에 지공거가 되어 안을기(安乙器) 등 33명을 선발하니, 뒤에 고관에 이른 자와 저명한 인사로 일컬어진 자가 많았다. 이해에 현릉(玄陵)이 스스로 불러 동성도사(東省都事)로 삼으니, 황제의 칙첩(?牒)을 받고 황제의 궁궐에 들어가서 사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이를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승진되어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신축년에 사적(沙賊)이 우리 북방 변경을 침범하여 공이 죽전(竹田)에서 이를 막았으나, 서울이 함락됨을 보고 공은 단기(單騎)로 중원(中原) 행궁으로 달려가니, 임금이 몹시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하였다. 임인년 6월에 찬성사에 임명되어 판판도사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判版圖司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으로 승진되었다. 이해에 사적(沙賊)이 붕괴되어 달아났으나, 서울이 병란에 파괴되어 모든 일을 새로 창설해야 했다. 공이 명을 받고 와서 인재(人材)와 일의 완급을 헤아려 방략(方略)을 지시해 주니, 조정에는 폐지된 정사가 없었고 돌아오는 자는 위로하고 안정되게 거주할 수 있도록 양식과 종자를 안배하여 분급하니, 들에는 노는 백성이 없었다. 종묘의 제사를 받들고 또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에게 제사드리고, 생도들을 국고의 양곡으로 먹이니 내외(內外)의 학교가 다 풍족하여 예절과 풍속을 인도해 이루고 인재를 양육하게 하였으며, 대개 무예를 강론하는 것과 군마를 쉬게 하고 치도를 논하는 것에 대해서도 깊이 터득한 점이 있었다. 계묘년에 임금의 거가를 맞아 서울로 돌아오니, 간신(奸臣) 최유(崔儒)가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원 나라의 권력을 가진 자에게 붙어서 현릉(玄陵)의 폐위를 계책하여 황제의 명을 받고 실행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명하여 표문을 받들고 북경으로 가게 하고, 밀직제학(密直提學) 허강(許綱)으로 보좌하게 하였다. 공이 길을 출발하여 서경(西京)에 이르러 태조 원묘(太祖原廟)에 나아가서 두 번 절하고 맹서하기를, “우리 임금님이 복위하지 못하시면 신(臣) 공수(公遂)는 죽음을 맹서하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미 북경에 이르니, 황후와 황태자가 교외에서 위로하려고 보낸 사자가 연이어 끊이지 않았고, 4월 3일에는 황제가 흥성궁(興聖宮)에 앉아서 전서원사(典瑞院使) 완택독(完澤篤)에게 명하여 공을 불러들여 위로하였고, 공은 예물을 바쳤다. 그리고 나서 황후가 찬물(饌物)을 베풀어 후히 위로하고 공에게 이르기를, “공이 이미 마음을 다하여 우리 어머니께 효도하였으니, 이는 곧 나의 친형(親兄)인데, 어찌 감히 친형을 대하는 예로서 공을 대하지 않겠소.” 하니, 공이 아뢰기를, “주(周) 나라의 강원(姜嫄)ㆍ태임(太任) 태사(太?)가 성인(聖人)을 낳아 나라를 교화하는 터전을 만든 것이 《시경》 풍(風)ㆍ아(雅)에 있습니다. 그 중간에 쇠퇴하였는데, 강후(姜后)가 죄주기를 기다림으로써 선왕(宣王)이 크게 깨닫고 스스로 근면하여 중흥의 큰 업적을 세웠으나, 한편 패망을 자초한 임금들은 포사와 달기와 여(呂)ㆍ무(武)가 종사(宗社)를 뒤엎고 제사를 그치게 하였으니, 아름답고 악한 것이 밝아져 천년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고려와 원 나라는 처음에는 신하로서 형제의 의(義)를 맺었고, 다음에는 천자께서 생구(甥舅)를 정하여 백여 년 동안을 물고기와 물이 서로 만나듯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지금 전하로 말씀하면 바로 주 나라 태임과 태사가 되셨으니, 삼한(三韓)의 다행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이제 고려 국왕이 원 나라에 심력을 다하고 적을 정벌하여 국가를 위하여 공훈을 세웠으니, 마땅히 상전(賞典)을 행하여 밝게 사방에 보임으로써 장수들의 사기를 격려하여야 할 것이온데, 어찌 사사로운 감정으로 공의(公義)를 폐하리까. 병신년의 화는 실로 우리 집안이 너무 넘침을 만족할 줄 모르고 그치지 못한 소치이지, 왕의 죄는 아닌 것입니다. 스스로 허물할 줄 모르고 공이 있는 임금을 폐하려 하시니, 조정에 사람이 없단 말씀이십니까. 다른 날에 반드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전하께옵서는 황제께 잘 아뢰시어 우리 임금을 복위하게 하시고, 간신을 쫓아내시면 이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나이다.” 하니, 황후가 비록 그 말에 감동하였으나, 그 노여움이 아직도 풀리지 않아서 드디어 공으로 하여금 덕흥군을 받들고 돌아가라고 하므로, 공이 병을 칭탁하고 더 머무르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전지하기를, “고려인으로서 조정에 있는 자는 이 공수를 제외하고 모두 왕을 따라 가라.” 하였다. 21일에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使)에 임명되니, 다음날 조정에 들어가 아뢰기를, “신이 변방에서 생장하여 언어가 통하지 않고, 중국의 예법을 익히지 못하였사오니, 어찌 감히 은총을 무릅쓰고 기롱과 비웃음을 취하겠습니까. 또 지금 밖에 포진해 있는 장수들 중 공을 세운 자에게도 상을 내리시지 않으셨으니, 신은 혹시 천하에서 이것을 가지고 폐하를 비난이나 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미 황제의 윤허의 명을 얻지 못하고 27일에 그 자리에 부임하니, 자정원(資政院)에서는 의지(懿旨 황후의 전지)를 받들고 예로 대접하는 음식을 성대하게 베풀어 동료들에게 향응하였다. 종묘대향(宗廟大享)에 공이 두 번 태상경(太常卿)이 되어 예법을 따라 행하니 보는 자가 모두 공경히 대하였다. 이리하여 공의 할아버지 좨주공(祭酒公)에게는 중봉대부 집현학사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아버지 규정공(?正公)에게는 자선대부 전서원사(資善大夫典瑞院使)의 증직을 내렸으며, 할머니 정(鄭)씨와 어머니 송(宋)씨, 그리고 부인 김(金)씨는 모두 농서군부인(?西郡夫人)을 봉하였다. 황태자가 황제의 명으로 공을 불러 같이 만수산(萬壽山)의 광한전(廣寒殿)에 올라갔었는데, 태자가 전액(殿額)에 쓴 인지(仁智)의 의미를 물었다. 공은 말하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인(仁)이라 이르고, 사물을 분별하는 것을 지(智)라고 이르는 것인데, 제왕이 이 두 글자를 가지고 사해를 통어(統御)하면 만대까지라도 태평을 누릴 것입니다.” 하였다. 광한전 안으로 들어가서 황태자는 금과 옥으로 장식한 기둥을 가리키면서, “노인은 일찍이 이와 같은 기둥을 본 일이 있소.” 하였다. 공은 “신이 들으니, 제왕이 정사를 행할 때, 인정(仁政)을 베풀면 그 거처하는 집은 비록 썩은 나무일지라도 금과 옥의 견고함과 같을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금석(金石)의 견고함도 도리어 썩은 나무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궁전에서 나와서 왕가노(王家奴) 태사백 살리소보(太師伯撒里少保)에게 자리를 주고, 공에게 명하여 그 다음 자리에 앉게 하고는, 독로첩목아첨사(禿魯帖木兒詹事)가 서서 비파를 타는 것을 태자가 이를 가지고 타다가 곡조를 이루지 못하니 놓으며 말하기를, “오랫동안 익히지 않았더니 잊어버렸다.” 하는 것이었다. 공이 즉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면 비파 위의 한두 곡조를 잊었다 한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하였다. 황제가 태액지(太液池)의 배 위에 있으므로 태자가 공의 말한 것을 아뢰니, 황제가 이르기를, “내 진실로 이 노인이 어진 사람임을 알았다. 너의 외가에는 오직 이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하루는 황후가 그의 형 평장사(平章事)의 집안이 화란을 당한 연유를 물었다. 공이 말하기를, “재물을 탐하여 원망이 쌓여 모이면 화를 모면하는 경우가 드물지요. 상황의 격화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이지, 왕의 마음도 아니며, 왕의 죄도 아닙니다.” 하였다. 환관 박불화(朴不花)가 황후에게 밀고하기를, “이모(李某)는 그 임금만을 위하니, 어찌 그 친족을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하여 황후는 오랫동안 공을 불러보지 않았다. 덕흥군이 이미 요양로(遼陽路)에 이르니, 최유(崔儒)가 말하기를, “이모(李某)가 북경에 있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일이 혹시 중간에 변한다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고 이에 독로첩목아(禿魯帖木兒)와 박불화(朴不花)에게 뇌물을 많이 주고 기필코 공을 데리고 돌아가려 하였다. 공이 이를 알고 그의 서장관 임박(林撲)에게 말하기를, “내 이미 부모도 없고 또 후사도 없으며, 벼슬도 또한 최고로 이르렀는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시 돌아보고 생각할 것이 있겠는가. 마땅히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것이요, 결코 저 사람들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였고, 독로첩목아와 박불화 두 사람이 조정에 들어가서 아뢰었으나, 황제도 윤허하지 않았다. 7월에 패라첩목아(?羅帖木兒)가 군사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와서 승상(丞相) 삭사(?思)를 내쫓고 그 자리를 대리하면서 독견첩목아(禿堅帖木兒)를 대신(臺臣)으로 삼아 쌓인 폐단을 개혁하고 이에 말하기를, “고려 국왕이 공은 있어도 아무 죄없이 소인들의 곤욕을 당하고 있으니, 이를 먼저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이리하여 조서를 내려 왕위를 회복하게 하고, 최유를 착고에 채워 본국으로 보내니, 공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였다. 제화문(齊化門)을 나와서 수종하는 종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는, 따르는 자에게 말하기를, “천하의 즐거움이다. 이보다 더할 즐거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연도(沿途)에서 말이 피곤하여 따르는 종이 화살 한 개로 1속(束)의 콩을 사서 먹이니, 공이 이를 보고 말하기를, “왜 궁한 백성들의 먹을 것을 빼앗았느냐.” 하고, 면포(綿布)를 잘라주어 그 값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여산참(閭山站)에는 사람은 없고, 양곡만 들에 쌓여 있었는데, 공이 조 1속의 값이 면포 몇 척(尺)인가를 묻고, 그 말대로 이를 두 끝에 써서 조를 쌓아둔 속에 넣어 두었다. 수종하던 자들이 말하기를, “말[馬]을 가지고 온 자가 돌아갈 때에 반드시 가져갈 것이니, 무엇이 유익하겠습니까. 값을 보상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도 본시 알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10월 25일에 서울로 들어와 합문(閤門)으로 나아가서 고하기를, “사명을 받들고 갔던 신 이공수가 돌아왔습니다.” 하고 조금도 힘들고 어려웠던 상황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임금은 후히 대접하였다. 이때에 성균관에서는 공역(工役)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었는데 공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즉시 황제가 내린 금대(金帶)를 풀러 이를 희사하여 그 경비를 도왔다. 취성(鷲城 신돈)이 국권을 잡게 되자 매우 공을 꺼려하였고, 공도 자신의 분에 넘침을 스스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집에 들어 앉아 두문불출하였다. 공이 이미 원 나라 서울로 가니 4월에 공에게 도첨의자정승 판군부사사(都僉議左政丞判軍簿司事)에 임명하였다. 다음해 10월 17일에 다시 추충수의 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영도첨의사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推忠守義同德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領都僉議事右文館大提學監春秋館事)로 승진되었는데, 25일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을사년 6월에 익산부원군(益山府院君)에 봉하니, 이로 인하여 일찍이 하루도 묘당에 앉아서 총재(?宰)의 직무를 행한 일이 없어 사람들이 자못 이를 한탄하였다. 아, 공의 밝은 지혜와 삼가한 처사는 당대의 나이와 덕이 높은 대신들 중에도 견줄 사람을 보기가 드물다. 과단성과 씩씩한 풍모는 뛰어나 어떤 권세에도 구속을 받지 않으면서도 풍류가 조용하고 단아하였다. 그 산수를 좋아하는 지취를 스스로 가릴 수 없는 점이 있어, 덕수현(德水縣)에 별서(別墅)를 두고 스스로 남촌선생(南村先生)이라 칭호하고, 복건(幅巾)과 여장(藜杖)으로 동년의 여러분을 초청하여 그 가운데서 휘파람 불고 시도 읊었으며, 혹시 문생(門生)이 가서 뵈면 언제나 술에 취해 돌아가게 하였다. 부인 김(金)씨는 신라 금부대왕(金傅大王)의 13대 후손인 삼중대광 의흥부원군(三重大匡義興府院君) 김공 휘 상기(上琦)의 딸로 어진 행실이 있었고, 군자의 덕에 짝하여 종족들이 지금까지도 그 인자함을 칭송한다. 병오년 5월 초 1일에, 병으로 자택에서 서거하여 부음을 아뢰니, 임금이 애도하여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명하고, 장례에 따른 일체의 경비를 관에서 부담하게 하여 24일에 별서의 서쪽 산기슭에 합폄(合?)하였다. 공은 자녀가 없어 족인(族人)의 딸을 길러 성균생원(成均生員) 안속(安束)에게 출가시켰다. 아, 이(李)씨의 8대가 공에 이르러서 더욱 창성하였는데, 전주공(典酒公)의 덕과 명망으로 그친 것은 하늘이 진실로 그 지위를 아낀 것이요, 규정공이 착한 일을 쌓아 뒤를 이으니 이것으로 문충공의 탄생의 보답이 있었던 것인데, 문충공이 더욱 그 문호를 번창하게 하여 이미 그 선조를 빛나게 하였으나 그 후사가 없으니, 참으로 저 창망한 하늘이 끝에 없는데, 사람이 잠시 그 사이에 붙어 있음을 알겠도다. 아, 슬프다. 공의 휘는 공수(公遂)요, 자는 □이요, 사는 집을 형재(衡齋)라 하였다. 공이 성절(聖節)을 하례하러 갔을 때에 내가 따라 갔었고, 성균관에서 학업을 받아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공의 은혜이다. 명하는 글을 어찌 사양하리요.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삼동에도 푸른 소나무의 곧음이요 / 三冬而靑松也惟貞
백 번 녹여도 단단한 철의 좋음이여 / 百煙而剛鐵兮孔良
아름답다 문충공이여 / 懿哉文忠
조정에서 온화하게 자득하였네 / 委蛇朝中
차디찬 샘물 같고 / 有洌其泉
훈훈한 바람 같았네 / 有熏其風
섬기는 임금에게 충절을 다하여 / 盡忠所事
황제는 그 뜻을 가상히 여겼네 / 帝嘉其志
공을 이루고도 자랑하지 않으니 / 成功不居
사람들이 의리를 탄복하였네 / 人服其義
태실에 종향하여 / 從享大室
모두 길함을 동의하였으니 / 僉同其吉
공로가 많은 것이 아니요 / 匪功之多
그 덕이 한결같기 때문이네 / ?德之一
비록 자손은 없으나 / 雖無子孫
이 조묘가 보존되어 있도다 / ?廟之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