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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여흥군부인민씨 묘지명(驪興郡夫人閔氏墓誌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3:45

묘지(墓誌)
 
 
여흥군부인민씨 묘지명(驪興郡夫人閔氏墓誌銘)
 

이색(李穡)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 윤 5월 갑진(甲辰)에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金氏)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는데, 거리가 십 몇 보나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참군사(?軍事) 명선(明善)을 보내어 명(銘)을 구하였는데,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行狀)을 상고하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輸誠秉義協贊功臣重大匡都僉議贊成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 시호 문온(文溫) 급암선생(及菴先生) 휘 사평(思平)은 그 아버지요,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사(密直司使) 시호 문순(文順) 휘 적(迪)은 그 대부이고,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시호 충순(忠順) 휘 종유(宗儒)는 그 증조이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시호 정렬(貞烈) 죽헌(竹軒) 김공(金公) 휘 윤(倫)은 그 외조이다.
내외의 문벌이 혁혁하여 온 나라에서 부러워하였는데 부인이 그 사이에서 태어나 견문이 익숙하여 대개 마땅히 할 일에는 모두 어머니를 모범으로 근본을 삼고, 부모를 섬기되 매우 효도하여 혼정신성(昏定晨省)을 병이 들어도 폐하지 않으니 종족들이 칭찬하였다.
신축년 겨울에 도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피난 갈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이 편안하였다. 그 뒤에 여흥(驪興)에 살면서 십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다.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안 할 것이니, 내 어찌 차마 떠나겠는가. 내 어찌 차마 떠나겠는가.” 하였다. 5월 계사일에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56세였다. 구용씨(九容氏)가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맑은 덕을 알까 걱정하시며 남모르게 양성하였더니,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할꼬.” 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김모(金母)여, 문온공(文溫公)이 비록 아들이 없으나, 이러한 딸이 있어서 구용씨를 낳았고, 또 그 생질이 사마천의 사전(史傳)을 지었으니, 어질다 이르지 않으리오.” 하였다. 아들이 셋인데 맏은 구용이니, 전(前)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充春秋館編修官)이었고, 다음은 제안(齊顔)으로 중의대부 중서 병부랑중 겸첨서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中書兵部郞中兼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奉善大夫典敎副令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이요, 다음은 구덕(九德)인데, 전(前) 좌우위(左右衛) 보승산원(保勝散員)이었다.
딸이 아홉인데 밀직부사 김사안(金士安) ㆍ 전(前) 개성윤(開城尹) 이창로(李彰路) ㆍ 전 종부령(宗簿令) 최유경〈崔有慶〉 ㆍ 전(前) 낭장(郞將) 허호(許顥) ㆍ 전 부령(副令) 허의(許誼) ㆍ 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 ㆍ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金瞻)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아직 시집가지 못하였다. 그 명(銘)이 다음과 같다.
사물이 그 근본으로 돌아갔으니 / 物歸其根
그 삶은 무궁하도다 / 其生不窮
여흥 민씨를 / 驪興閔氏
그 가운데 장사하니 / 葬于其中
강물은 흘러 흘러 / 江之??
어찌 쉴 때가 있으리오 / 曷其有終
강물과 함께 길지어다 / 與之俱長
영가의 풍모여 / 永嘉之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