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이색
판서 박공 묘지명 병서 (判書朴公墓誌銘 幷序
영해(寧海) 박씨(朴氏) 중 유술(儒術)과 이사(吏事)로써 세상에 현달된 자는 전법판서(典法判書) 휘 원계(元桂)이니, 자는 □였다. 충숙왕(忠肅王)때에 사신이 중국으로부터 와서 은총을 믿고 기세를 부려 노비의 일로 왕께 아뢰어, 남의 곧은 일을 굴복시켜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려고 두 차례나 궁문에 이르니 대신(臺臣)에게 명하여 해결을 하게 하였다. 판서 공이 마침 장령(掌令)이 되어 잘잘못을 구별하되,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니 사신이 크게 노하여 갔다. 충숙왕이 이르기를, “대신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하고는 드디어 집의(執義)에 승진시켜서 그 곧음을 칭찬하니, 당세에서 영광으로 여겼다. 공의 나이 19세 때인 신축년에 정상시(鄭常侍) 희(僖)가 성균관에 선비를 뽑을 때, 이익재(李益齋) 시중이 나이가 15세에 장원에 뽑히고, 공은 그 다음이었다. 이 해에 국재(菊齋) 권공(權公) 보(溥)와 열헌(悅軒) 조공(趙公) 간(簡)이 예조(禮曹)에서 고시를 주관할 때 공이 또 합격하였다.
전주 사록(全州司錄)으로 서기(書記)를 겸임하였다. 그 경내에 호환(虎患)이 발생하였는데, 목사와 판관이 잡지 못하여 마침내 공에게 위임하니 공이 곧 기병을 요해지에 배치하여 화살 하나로 쏘아 죽였다.
연우(延祐) 병진년에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다가, 정사년 가을에 성균학정(成均學正)에 옮겼고, 그 해 겨울에 예문관에 들어와 검열이 되어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갔는데 붓을 들고 곁에서 떠나지 않고 삼가고 부지런히 하여 과실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애중함을 입었다. 무오년 겨울에 가안부승(嘉安府丞)에 옮겼고, 기미년 겨울에 승봉랑(承奉郞) 중문지후(中門祗候)가 되었고, 경신년 여름에 도관산랑(都官散郞)이 되었다. 태정(泰定) 갑자년 여름에 개성소윤(開城少尹)으로서 보성군사(寶城郡事)를 겸하여 선정이 있었고, 지순(至順) 임신년 가을에 통례문 판관(通禮門判官)이 되었으며, 원통(元統) 을해년 봄에 봉상대부 감찰장령(奉常大夫監察掌令)이 되어 기강이 크게 떨치고 반열이 엄숙하였더니, 그 다음해에 궁문(宮門)에 일이 있어 중승(中承)에 진급되었고, 지원(至元) 정축년 종묘부령(宗廟簿令) 지제교에 옮겼다. 무인년 봄에 소부시판사 봉순대부 보문각제학(小府寺判事奉順大夫寶文閣提學)으로 지제교를 겸하다가, 강릉도 존무사(江陵道存撫使)에 뽑혔다. 가을에 돌아올 때 재신(宰臣)이 말하기를, “강릉 사람들이 박존무(朴存撫)를 편하게 여긴다.” 하여, 곧 사자를 보내 제사를 맡아 머무르게 하였고, 다음해 봄에도 역시 그러하였으며, 가을에도 또한 그러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이 지금까지 공을 생각하고 잊지 않는다. 경진년에 충혜왕(忠惠王)이 왕위에 오르자 편민조례추변도감(便民條例推辨都監)을 두고 공을 사자로 삼았는데, 2년 만에 결재가 공평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칭도하였다. 충정왕(忠定王)이 처음 정사를 할 때 인재를 크게 등용하였으나 전형하는 자가 법사(法司)를 중하게 여겨 드디어 공을 써서 봉익대부에 승진시키고, 관직(館職)으로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을 겸하였는데, 조정에서 모두 말하기를, “법을 맡은 판서 자리에 인재를 얻었다.”하였다. 이 해에 공의 나이가 67세였는데, 여름 4월 12일에 병을 얻어 23일에 졸하여 모월 모일에 동성(童城) 양족산(兩足山) 마전곡(馬田谷)에 장사하니, 지정(至正) 9년 기축일이었다.
을미년 정월 초2일에 부인 오씨(吳氏)가 나이가 □세에 병으로 졸하니, 같은 영역에 장사하였다. 부인의 본관은 두원(豆原)이요, 예빈경 휘 의(誼)의 딸이었으며, 집을 다스리고 자식을 가르침이 모두 법도가 있었다. 아들 둘을 낳았는데, 보생(寶生)은 벼슬이 봉순대부 판위위시사(奉順大夫判衛尉寺事)이고, 동생(童生)은 지금 봉익대부 전공판서(典工判書)이며, 딸은 하나인데, 검교 성균관 대사성 김대경(金臺卿)에게 출가하였고, 손자와 손녀도 약간 명이 있다. 위위(衛尉)는 나의 매부인데, 아들이 없고, 판서의 전부인은 시중(侍中) 이익재(李益齋)의 딸로, 아들 경(經)은 봉상대부 삼사부사(奉常大夫三司副使)요, 위(緯)는 전교시 교감(典校寺校勘)이요, 수문(秀門)은 별장(別將)이요, 딸은 출가하지 않았으며, 계실(繼室)은 종부시판사(宗簿寺判事) 치사(致仕) 채자(蔡滋)의 딸인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나 아직 어리고 증손 남녀 약간 명이 있다. 부사(副使)가 찬성사 기유걸(奇有傑)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았고, 교감은 판사 이사의(李思義)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외손 남녀 약간 명이 있다. 가구(可久)는 중현대부 전교령이요, 딸은 정순대부(正順大夫) 전교시 판사 김희(金禧)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봉선대부 사재부령(奉善大夫司宰副令) 정지(鄭漬)에게 출가하였는데, 외증손 약간 명이 있다. 전교령은 선공령(繕工令) 권승구(權承矩)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딸을 두었다고 한다. 판전교는 아들이 없고, 부령은 2남 2녀를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내가 이미 15세가 되었을 때에 판서공이 우리 집을 왕래하였는데, 그분의 얼굴이 풍후하고 말을 들으면 자상하여 두려움을 알지 못하였는데, 조금 자라났을 때 그 분이 대신(臺臣) 헌사(憲使)가 되었음을 알고 비로소 기강을 지닌 열장부(烈丈夫)임을 알았다. 죽은 뒤에 직접 오랫동안 배우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여기고, 노성(老成)이 없음을 슬퍼한 지가 오래였다. 더구나 전공(典工)이 진사과에 합격되어 이 시대의 통재(通才)가 되어 의기양양하게 이 부(府)에 들어오고, 지방관이 되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선정을 남겼기 때문에 그가 이 명(銘)을 청하였을 때,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그 세계(世系)를 쓰고 명을 하였다. 증조 휘 득주(得珠)는 좌복야(左僕射)요, 조부 휘 문규(文圭)는 예빈경이요, 아버지 휘 관(琯)은 중현대부 전객령(典客令)이요, 외조는 통례문 지후 대령(大寧) 최서(崔壻)이다.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동녘 바다 한 모퉁이 / 東海之隅
우리 공이 나셨네 / 我公出焉
단양 그 지경에서 / 丹陽之區
큰 길가에 드날렸소 / 蜚英通衢
우리 충선왕을 섬겨 / 事我忠宣
붓 잡고 연경에 갔소 / 珥筆燕都
광명한 충숙왕이 / 烈文忠肅
지척에 군림하고 / 威臨咫尺
궁문에서 송사 판결 / 決訟宮門
흑에서 백을 골랐었소 / 析白于黑
이에 중승에 뽑혔으니 / ?擢中丞
나라의 사직이오 / 邦之司直
강릉 존무사가 되어 / 存撫江陵
바닷가에 가고 산에 올랐소 / 海循山登
한 지방이 고요하니 / 一方靜謐
나의 능력이 아닌가 / 非我之能
오직 오래도록 맡으시니 / 惟久於任
교화가 계속되었소 / 風化其承
송사 없음을 숭상하니 / 無訟是尙
사헌부의 우두머리로다 / 秋官之長
그 혜택이 끝나지 않아 / 弗竟厥施
누런 흙에 풀이 얽혔소 / 蔓草黃壤
나의 묘비명이 사사로움이 아니라 / 我銘匪私
태사의 일이라오 / 太史攸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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