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당성부원군 홍강경공 묘지명 (唐城府院君洪康敬公墓誌銘)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삼한의 명문으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였으나 그 자취가 국경에 나가지 않았고, 그 중 중국에서 현달한 자로 더러는 도리어 반역한 자도 있었다.
중국에 벼슬을 하면서도 뛰어난 절개로 칭찬을 받고, 본국에 벼슬하여 지위가 총재(?宰)에 이르고, 공훈이 사직에 남은 자는 강경공(康敬公) 한 분이 있을 뿐이다. 공(公)의 휘(諱)는 빈(彬)이요, 자는 문야(文野)이다. 공의 선대가 연경(燕京)에 들어가 살았고, 공은 지원(至元) 무자년에 태어났는데 부모가 몹시 사랑하였다. 조금 성장하여 내정(內庭)에 숙위하여 그 공로를 쌓았다. 황경(皇慶) 임자년에 장관의 추천으로 종사랑 대도로 패주동지(從事郞大都路覇州同知)가 되어 감절혁공(監折革功) □ 다시 초지방제령(抄紙房提領)에 전임되어 승무랑(承務郞)에 오르니 일을 처리하는 재주에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천력(天曆) 기사년에 승직랑 송강부판관(承直郞松江府判官)이 되니 아전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고, 도수감경력(都水監經歷)으로 소환되어 승덕랑(承德郞)에 오르니, 도수(都水)의 정사를 맡아서도 조금도 위세에 흔들리지 않았다. 또 봉훈대부 태상례의원경력(奉訓大夫太常禮儀院經歷)에 전임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입어 연경에 머문 지 5년이나 되었을 때, 공이 왕을 위해서 항상 사력을 다하여 왕의 억울함을 밝혔더니, 그 작위가 회복되어 우리 나라로 돌아왔으니, 후지원(後至元) 정축년이었다. 왕이 공의 돈독한 공로를 생각하여 머물러 정사를 돕게 하려고 원나라에 청했더니, 공에게 정동성리문소관(征東省理問所官)을 내리고, 또 이르기를, “송사와 같은 일로 공을 번거롭게 말라. 어찌 국사로써 유임하지 않았는가.” 하니, 드디어 도첨의(都僉議) 찬성사(贊成事)로 중대광대상호군(重大匡大上護軍)의 품계가 올랐다. 얼마 안 되어 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에 승진되니 사람들은 이상(二相)이라 일컬었다. 기묘년 봄 3월에 충숙왕의 유명(遺命)을 따라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가 되고, 가을 8월에 정승(政丞) 조적(曺?)이 심왕(瀋王)을 은밀히 협력하여 장차 충혜왕(忠惠王)을 폐위하려고 임금 주위의 소인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영안궁(永安宮)을 에워쌌으니, 충숙왕 공주의 거처였다. 조적이 이미 백관을 위협하였으나, 다만 공을 꺼려 온갖 방도로 공을 움직여 그 꾀를 고하였더니, 공이 말하기를, “그러면 실책이 더욱 심한 것이다. 그 형이 방종하게 무도한 일을 행하더라도 그 아우가 있으니, 심왕이 무슨 상관이냐.” 하여, 더욱 굳게 거절하였다. 조적이 비록 백관을 위협하여 왕의 죄를 소(疏)로 올리려 하였으나, 공이 마침내 중지시켜 사자가 가지 못하였다. 충혜왕이 날쌔고 용맹스럽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여 정예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에워쌌던 적을 무너뜨리고 길에 달려가서, “역적은 조적이요, 나머지 사람은 그의 위협을 당하였을 뿐이다. 내가 모두 잘 알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고 고함을 치고 도적을 죽인 뒤에는 또 “늙은 역적이 죄에 죽었으니, 남은 사람들은 안심을 하라.” 하였다. 충혜왕이 비록 에워싼 상황 중에 있었으나, 공이 의리를 지키고 또 공이 조적의 음모를 저지하였음을 알고는 매우 고맙게 여겼다. 임금이 연경으로 가서 중서성 추밀원 어사대 종정부(中書省樞密院御史臺宗正府) 한림원에 통지하여 여러 방면으로 물었으나 충혜왕이 스스로 밝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태가 위태하였을 때 공이 말하기를, “조적은 왕의 종이거늘,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해치고자 하였으니, 왕법(王法)에서 놓아 줄 수 없었고, 또 이미 병기가 접전될 때에 누가 다시 조적을 잠깐 동안 살려주기를 빌겠는가. 그렇다면 왕의 죄는 마땅히 말소되어야 할 것이요, 빈(彬)이 선왕의 유명으로 성(省)의 일을 권행(權行)하되 일 중에 국궁(國宮)에 관계된 것은 빈이 실로 담당하였던 만큼 왕은 죄에 걸릴 것이 없다.”하여 그 말소리가 강개하였으므로, 공을 아는 자는 모두 공을 위해서 위태롭게 생각하였더니, 공은 “우리 임금의 아들에 관한 일을 내가 바로잡지 않으면 내가 어찌 지하에 가서 선왕을 뵙겠는가.” 말하였다. 왕이 작위가 회복된 뒤에 나라로 돌아오자 철권공(鐵券功) 등을 내리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승진시켜 당성군(唐城君)에 봉하여 부(府)를 열거하고, 또 이르기를, “무릇 천자를 섬기는 일은 행성(行省)에서 실로 주관하는 것인 만큼 좌우사(左右司)가 적임자가 아니어서 일이 혹시 태만하고 실례됨이 있은 뒤에야 책망 한들 늦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공을 추천하여 난중 조산대부(難中朝散大夫)를 삼았다. 명릉(明陵)께서 왕위를 이은 뒤에 허정(許政)이란 자가 있었으니, 중원 사람이었다. 공이 천자를 배격한 일이 있다고 참소를 하고 채정승(蔡政丞)이 증거를 하였는데 그 일이 중서성에 알려지자 성으로부터 관원을 파견하여 국문하였더니, 두 사람의 말이 마침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도리어 죄를 받게 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 오래도록 이곳에 있을 수 없겠다.” 하고, 곧 서울로 가니 공을 아는 이는 모두 기뻐하여, “문야(文野)가 오는구나.” 하고, 조정에 추천하여 높이 발탁하려는데 공이 또 외직으로 나가기를 원하였으므로 흥국로 총관(興國路摠官)으로 정의대부(正議大夫)가 되었다. 공이 백성에게 선정으로 다스리고 아전에게는 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덕화에 감격하는 백성이 남아 있다. 신묘년에 현릉(玄陵)이 즉위하여 공신을 책록할 때, “홍빈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심히 나에게 충성하였고, 또 현재한 선왕의 대신 중에 홍빈 만한 이가 없으니, 의당 재상의 지위에서 나의 다스림을 도와라.” 하고, 추성익대동덕협의보리(推誠翊戴同德協義輔理) 열 글자의 공신호를 내리어 벽상삼한 삼중대광 판전리사사 당성부원군(壁上三韓三重大匡判典理司事唐城府院君)에 봉하였으니, 이는 옛날 승상으로서 봉후(封侯)하는 일은 대신을 매우 총애하는 것이었다.
지정(至正) 계사년 겨울 12월 17일에 병으로 본집에서 졸하니, 나이가 66세였다. 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애도하여 부의를 중히 하고 시호를 강경공(康敬公)이라 하였다. 관에서 장사를 돌봐주어 다음해 1월 초 8일에 성남(城南)에 장사하니, 공의 사후 영예가 유감이 없다고 하겠다. 중조 휘 충(沖)은 본국에서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銀靑光祿大夫樞密院副使上將軍)을 증직하였고, 조부 휘 세(世)는 삼중대광 도첨의정승 판전리사 상호군(都僉議政丞判典理事上護軍)을 중직하였고, 아버지 휘 윤심(允深)은 추성익대좌리공신남양군(推誠翊戴佐理功臣南陽君)을 증직하였으며, 원나라에서 통의대부 집현직학사(集賢直學士)를 주었고, 어머니 김씨는 돈황군부인(燉煌郡夫人)을 봉하였으니, 정의대부 판성공시사(判繕工寺事) 휘 지(祉)의 딸이다. 고씨(高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돈황군 부인을 봉하였으니, 중봉대부 예부상서(中奉大夫禮部尙書) 극인(克人)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이름은 수산(壽山)이고, 통의군(通儀君) 왕연(王珩)의 딸로서 계실(繼室)을 삼았으니, 경화옹주(敬和翁主)이다. 왕씨는 소생이 있었고, 수산은 원나라에 벼슬하여 내장고부사 고주동지 비서낭중 상경력육운제거관(內藏庫副使高州同知秘書郞中尙經歷陸運提擧官)을 역임하고 봉훈대부(奉訓大夫)에 이르렀으며, 본국에서는 봉상대부 통례문부사(奉常大夫通禮門副使)였으며, 손자는 남녀 각기 하나씩이 있었는데, 귀(貴)는 지금 봉선대부 흥위위보승호군(奉善大夫興威衛保勝護軍)이요, 손녀는 중의대부 좌우위보승장군(左右衛保勝將軍) 백순(白絢)에게 출가하였고, 증손 강(康)은 어리고, 백씨 두 사람도 모두 어리다.
공이 제거(提擧)에게 글을 가르칠 때 절동(浙東) 호중연선생(胡仲淵先生)이 공의 집에서 머물렀고, 나의 선군(先君) 가정공(稼亭公)이 동성(東省) 좌막(佐幕)이 되었을 때, 공과 동료이며 또 서로 좋게 지냈기 때문에 나와 같이 수업을 하게 되었으니, 날이 저물어 돌아가려 하면 공이 만류한지가 1달이 넘었고, 공이 나를 먹이고 묵게 한 그 은혜가 또한 깊었다. 아, 슬프다. 이 명(銘)을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공의 도덕과 정사(政事)가 국사(國史)에 실려 있고 석실(石室)에 간직되었기 때문에 이를 본 사람이 드물었으니, 가전(家傳)을 지어서 성시(聲詩)로 전파하는 것은 나의 책임이었는데, 하물며 제거가 청하기를 지나칠까 보냐. 집을 다스림에는 엄격하고, 일에는 과단성이 있고, 어지러운 시기에 절개를 지키며 빼앗을 수 없었으니 비록 옛 열장부(烈丈夫)라도 공보다 뛰어난 자가 없을 것이다. 아, 슬프다. 공은 강명(剛明)함이 지극하다고 이를 것이다. 공이 늙은 뒤에 천하가 비로소 어지러웠으니, 공의 마음을 알겠다. 그 꿋꿋하고 과감한 기운이 장차 구원(九原) 밑에 맺혀있으리라. 봉과 기린처럼 태평을 기다려서 나오겠는가. 나로서는 이제 알 수 없도다. 아, 명을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아, 홍공이시여/嗚呼洪公
궁중에 숙위하고/宿衛中宮
자라나 등용되어/長?擢用
재주가 출중하였지/才出於衆
강의 남에/惟江之南
두 차례나 우리 사신 맞이하여/再騁我?
가는 곳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여/所居稱職
백성은 그 덕을 생각하오/人懷其德
의릉 그 옛날에/毅陵惟昔
뭇 소인이 날뛰거늘/群小轢凌
공이 미워하여/公憎于懷
숯과 얼음 같았네/如炭于氷
간사한 놈 틈을 타니/奸夫抵隙
영릉의 액운이라/永陵之?
오직 공이 말씀하고/惟公之舌
오직 공이 도왔소/惟公之掖
선왕께서 이르시길, 아,/先王曰?
내 젊었을 때/予少之時
공의 충성 알았기에/知公之忠
늘 공을 생각하였네/念玆在玆
이에 세워 정승 삼으니/爰立作相
백관의 어른이라/百察是長
태보인 석을 스승 삼으니/保奭是師
오직 덕을 숭상하였소/惟德之尙
아, 홍공이시여/嗚呼洪公
벼슬과 녹이 풍부하였소/爵祿則豊
자손이 얼마 없으니/子孫無幾
뉘라서 그 궁함을 구하려나/誰?其窮
뉘라서 그 궁함을 구하려나/誰?其窮
아, 홍공이시여/嗚呼洪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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