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계림부윤 시문경공 안선생 묘지명 병서 (鷄林府尹諡文敬公安先生墓誌銘) 幷序
순흥(順興) 안씨(安氏)는 문성공(文成公) 향(珦) 이하 고위 관원이 많았다. 문성공의 증손 정당문학 원숭(元崇)이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등과하였고, 문성공의 족자(族子) 급제 휘 석(碩)은 은둔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니, 근재선생(謹齋先生)의 아버지이다. 세 아들이 다 등과하였고, 근재의 아들과 지금 밀직공(密直公)의 세 아들이 또 등과하였으며, 근재의 백씨와 중씨는 모두 중국의 제과(制科)에 올라서 조정의 명을 받아 일세에 빛이 나서 문성공의 자손으로서는 미치지 못하였다. 원조(元朝)에서 과거를 보인 이래로 우리 동방 사람으로서 부자 형제가 대를 이어서 과거에 오른 자는 순흥 안씨와 우리 한산(韓山) 이씨(李氏)가 있을 뿐이었다.
가정(稼亭) 선생이 근재에게서 수업을 받아 그 무덤에 명(銘)을 지었고, 이색이 향시(鄕試)에 응하였을 때, 선생이 또 주문(主文)이 되었으니, 이색이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사양할 수 없고, 이어 명문(銘文)을 한다면 선생에 대하여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선생의 성품이 활달하고 한대(漢代)의 역사서 읽기를 좋아하고, 일처리에는 대체를 따르려고 힘써서 조금이라도 머뭇거리고 관망을 하지 않았으며, 술은 많이 마시지 못하였으나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취하면 그만 마셨다. 문장을 쓰는 데는 화려한 문체를 버리고 사실을 취하여 말이 통할 뿐이었다. 현릉(玄陵)께서 그가 어짊을 알고 크게 쓰려고 밀직제학으로 탁용하여 감찰대부 제조전선사를 겸하였다가 동지(同知)에 나아갔고, 을미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 안을기(安乙器) 등 33명을 뽑고, 정당문학에 올랐다. 선생은 자기를 알아주는 임금을 만났다고 스스로 말하고,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얼마 뒤에 임금이 그를 실정에 어둡다고 하자 선생은 어머니가 늙었다고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계림부윤이 되었다. 병신년 관제를 고칠 때에 선생은 부르기 전에 시골로 돌아가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때마침 병이 나자 탄식하기를, “어머니께서는 무양하시나, 아우가 죽고 백씨가 또 돌아가시고, 나 또한 이러하니 어찌할꼬.” 또, “천명이니, 어찌하리.” 하고는 얼마 안 되어 과연 서거하였으니, 아, 슬프다.
근재 선생의 아들 밀직재상(密直宰相) 종원(宗源)은 나와 동년 진사(同年進士)이다. 그의 매부 밀직재상 정양생(鄭良生)과 함께 와서 말하기를, “문경공(文敬公)이 나이 19세에 경신년 진사과에 합격하였을 때, 허(許) 판서는 그 시관(試官)이었고, 그 해에 또 수재과에 합격하였을 때, 문충공 이익재(李益齋)와 판서 박석재(朴石齋)가 그의 지공거였다. 문경공은 천품이 이미 아름답고 우리 선인(先人)께서 또 엄하게 가르쳤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문경공의 천품이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더욱 어진 부형이 있음을 중하게 여겼다. 처음 지낸 벼슬은 광주사록 권지전교교감 예문검열 춘추수찬 예문공봉 문하주서 감찰규정 군부좌랑 좌정언 우헌납 전리정랑 감찰장령 전의부령 전리총랑 위위윤 감찰집의 우대언 겸 집의 전법판서(廣州司錄權知典校校勘藝文檢閱春秋修撰藝文供奉門下注書監察糾正軍簿佐郞左正言右獻納典理正郞監察掌令典儀副令典理摠郞衛尉尹監察執義右代言兼執義典法判書)였고, 관직(館職)은 제학(提學)으로부터 대제학에 이르렀다. 그가 중국 진사과에 오른 것은 을유년이요, 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나간 것은 갑신년에 양광도 안렴사요, 을유년에 교주도 안렴사이며, 정유년 9월 4일에 순흥부(順興府)에서 졸하여 장사하였는데, 향년이 56세였다. 이제 22년 동안 무덤에 지(誌)를 못하였으니, 아, 슬프다. 문정공(文定公)의 자손 없음이 더욱 슬프도다. 부인 최씨가 아들이 없어 따를 곳이 없었고, 따를 곳이 없어 수절하기가 어려웠으며, 우리들은 직무에 분주하기에 또 그 사이에 뜻을 오로지 할 수 없어 지체하던 중 이에 이르렀으니, 아, 더욱 슬프도다. 그대는 명(銘)을 지어주오. 장차 돌에 새겨서 광중(壙中)에 넣는다면 아마 썩지 않을 것이요.” 하였다. 이색이 말하기를, “선생의 이름이 전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마오. 등과(登科)할 때 기록이 있고, 제명(題名)한 비(碑)가 있으며, 안탑(雁塔)에 꽃다움을 흘려 중국에 산재하였으니, 사람들이 보면 이르기를, ‘고려의 안씨 형제가 함께 과거에 올랐다’고 누가 말하지 않으리오. 그 풍모를 동해 밖에서 흠모하고 있으니, 선생 무덤의 돌엔 비록 새기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괜찮을 것이다. 더구나 그 행적이 국사(國史)에 실었으니, 다른 날 현릉실록(玄陵實錄)을 수찬한다면 선생의 열전이 또 사책(史冊)에 빛나서 반드시 전해질 것이다. 나는 다만 그 후손이 없음을 슬퍼하노라. 그러나 근세 명공(名公) 선인(善人)으로 남촌(南村) 이시중(李侍中), 우곡(愚谷) 정밀직(鄭密直), 급암(及菴) 민찬성(閔贊成)은 덕행과 문장이 우뚝이 당대의 종가가 되고, 또 털끝만큼의 과오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후손이 끊기는 큰일이겠는가. 그럼에도 다들 후손이 없으니, 이는 참으로 하늘의 뜻이 정하지 못함이 있도다.” 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전선(銓選)을 제조(提調)할 때에 이색이 붓을 잡고 그 뒤를 따랐더니, 어느 날 밤중에 선생을 불러들여 제수한 바가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이르기를,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고는 책력을 가져다 보고 이르기를, “창귀날이니, 잠시 그치려무나.” 하였다. 선생은 일찍부터 음양의 구기(拘忌)를 싫어하여, 꿇어 앉아 아뢰기를, “왕자(王者)가 천시(天時)를 받들어 행함에는 이런 것으로 구애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행하고자 하신다면 행하소서. 창귀날이 무엇이 해롭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얼굴빛을 바꿨다. 선생이 처음 과거에 올라 장사랑 요양등처 행중서성조마(將仕郞遼陽等處行中書省照磨)로서 승발가각고(承發架閣庫)를 겸하게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이미 명을 받고서 공직(供職)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불공(不恭)한 일인데, 더구나 조마(照磨)의 직책이 문서만 관장할 뿐 다른 사무가 없겠는가. 나는 성(省)으로 부임하련다.” 하고는 이미 부임하자 성관(省官)이 그 재주를 중하게 여기고 모두 대우하였더니,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이제 나의 직무를 이행하였으니, 어머니가 늙으셨는데도 돌아가 봉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효도가 아니다.” 하고는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어사(御史) 한중보(韓仲輔)가 말하기를, “이부(吏部) 관원 중에 선생을 아는 자가 있어서 한림국사원편수관(翰林國史院編修官)에 추천하였으나, 성신(省臣)이 아뢰지 않았다.” 하였다. 불초한 나도 오히려 선인 뒤를 이어 한림에 공봉(供奉)하였거늘, 선생은 마침내 이러고 말았으니, 참으로 운명이로다. 참으로 운명이로다.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아들이 없으니 문생(門生)이 곧 아들이다.” 하더니, 이제 그의 문생 이보림(李寶林)은 정당문학이요, 염국보(廉國寶) ㆍ 이인(李?) ㆍ 우현보(禹玄寶)는 모두 추밀재상 봉익대관(奉翊大官)이며, 또 그 나머지도 많이 현달하여 이름이 일시에 날렸으며, 불교를 물리쳐 유학을 붙들 자는 초계(草溪) 정습인(鄭習仁)이요, 원수를 피해서 거친 들에 은둔한 자는 광주(廣州) 이원령(李元齡)이었으니, 인재를 성하게 얻었다고 당대에서 칭찬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보(輔)요, 자는 원지(員之)이며, 조부 휘(諱) 아무와 증조 휘 아무는 모두 본부(本府)의 호장(戶長)이었으며, 외조는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안 아무개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오호라, 선생이시어 / 嗚呼先生
학문이 이룩되어 / 學底于成
조정에 대책을 올려 / 對策丹?
그 소리를 떨치셨소 / 克振厥聲
우리 선왕을 보필하여 / 相我先王
묘당에서 주선하고 / 周旋廟堂
문화를 널리 펴고 / 弘敷文化
과거를 열었으니 / ?闢春場
이야말로 우리 선비의 / 曰我儒生
지극한 영화였소 / 斯爲至榮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는다면 / 母老不養
어찌 마음 편하리요 / 我心胡乎
충효로 입신 양명 / 忠孝立揚
군자의 빛이라오 / 君子之光
더러는 그렇지 못하니 / 厥或不全
어리석지 않으면 미친 사람이라오 / 非癡則狂
이제 그 심정 진술하여 / ?陳其情
월성의 원이 되었소 / ?尹月城
어머니 무양하시더니 / 母則無恙
병에 걸리었고 / 而疾是?
구름이 흩어지니 / 雲?乎方
길이 길이 슬퍼했소 / 永矣其傷
덕 있으나 아들 없으니 / 有德無子
어인 일인가 저 하늘이여 / 云何彼蒼
아, 슬프도다.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
무덤 곁 나무가 무성히 자랐구료 / 木拱于塋
천년 뒤에 / 天載之下
전할 것은 이름이로다 / 可傳惟名
이름 드날렸으니 / 有名之彰
죽어도 없어지지 않은 것이라네 / 死猶不亡
죽계의 물이 근원 있으니 / 竹溪有源
그 흐름이 길겠지 / 其流之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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