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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윤모 최부인 묘지 병서(尹母崔夫人墓誌) 幷書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3:54

 묘지(墓誌)  
 
             윤모 최부인 묘지 병서 (尹母崔夫人墓誌)  幷書 
 

율정(栗亭) 윤문정공(尹文貞公)이 그의 아들 지금 삼사부사(三司副使) 구생(龜生)을 위하여 며느리를 택할 때, 부인이 어질어 여공(女工)을 행하되 추운 겨울이나 더운 여름에도 쉬지 않고 또 그 아우에게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라 한다는 소문을 듣고 문정공이 말하기를, “이 규수가 내 며느리감이다.” 하고는 예로써 맞이하였다. 시집온 뒤에 시부모 섬김에 며느리의 직분을 다하고 시누이를 시집보내며, 그 딸을 기르되 마치 자신의 자식과 같이 돌보았으며, 일가 중에 혹시 굶주리고 춥다면 부인이 의식을 주고 스스로는 주리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문정공 조상의 분묘가 금(錦)에 있는 것이 일곱 군데였는데, 삼사(三司)가 세시로 제사하며 부인이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전물(典物)을 예식대로 장만하였으니, 어버이를 잘 섬기고 조상에게 공경함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부인의 장자 소종(紹宗)은 나의 문생이니, 을사년 과거에서 장원하였으며 지금 전의부령(典儀副令) 예문관응교이다.
문정공이 금(錦)에서 늙을 때, 매양 부인을 보고는, “나의 어진 며느리여, 나의 어진 며느리여, 우리 집에서 장원을 낳았구나.” 하였다. 문정공이 졸하여 장사지낼 때, 부인이 몹시 슬퍼하며 상례(喪禮)를 다하였다. 홍무(洪武) 신유년 겨울 10월 임술일에 병으로 마치니, 나이 65세였다. 금의 남산(南山) 문정공 묘소 오른편에 장사하였는데 조정의 사대부로서 만사(輓詞)로 곡한 자가 많았다. 그의 아우 성균박사(成均博士) 회종(會宗)을 보내어 명(銘)을 청하니, 회종이 상복을 입고 눈과 서리를 밟으니 내 슬피 여겨 차마 사양을 하지 못하고, 이에 그 가세(家世)와 자손을 쓰고는 명(銘)을 이었다.
부인은 최씨(崔氏)요, 본관은 고죽(孤竹)이다. 경덕재생(經德齋生) 휘 치(峙)는 증조인데, 삼별초가 반란을 일으킬 때 어부 중에 도피하여 더럽히지 않았고, 예빈승동정(禮賓丞同正) 휘 신목(臣牧)은 조부인데, 은둔하여 벼슬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처사(處士)라고 지목하였고, 진사 휘 영수(英粹)는 아버지로 시명(詩名)이 있었으나 일찍 돌아가고, 주계사심관 쌍부감무(朱溪事審官雙阜監務) 배군(裵君) 휘 종연(宗衍)은 그 외조로 공평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다. 손자와 손녀가 약간 명이 있는데, 전의(典儀)는 우윤(右尹) 강창수(姜昌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고, 판서 박경(朴瓊)의 딸을 계실(繼室)로 삼아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은 회(匯)이며, 박사는 판사(判事) 정인언(鄭仁彦)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니, 이름은 강(江)과 하(河)인데 모두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딸이 되어 덕을 잡고/爲女執德
며느리로서는 법도가 있었네/爲婦蹈則
어머니가 되어 위의가 있으니/爲母有儀
그 위의 그르지 않았소/其儀不?
의당 아름다운 아들/宜有其子
영화와 녹으로 봉양하네/榮以祿食
살아서는 문정을 섬기더니/生事文貞
죽어서는 그 곁에 장사하네/死藏其側
얽힌 산과 긴 물/山密水長
이곳이 실로 현택이요/實惟玄宅
거의 잘못되지 않아/庶其勿訛
이 새긴 돌이 보전되리/保玆石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