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문경 이공 묘지명 병서 (文敬李公墓誌銘 幷序 )
선군(先君)이 가정공(稼亭公)이 일찍이 정해년의 공거(貢擧)를 주관하여 선발한 선비에 알려진 인물이 많았으니, 문경(文敬) 이공(李公)이 당년 15세로 신채(神采)가 뛰어나 당시에 이미 그 아버지의 풍모가 있다고 알려졌고, 그 뒤에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지식이 높아짐에 따라 명성이 날로 더욱 중해지니 당당한 재상이 될 인재였다. 공이 병에 걸리게 되자,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사람이 어찌 여기에서 그칠 리가 있겠는가.” 하였고, 사망하자 또한 말하기를, “때를 잘못 타고 태어났던가. 약물을 잘못 쓴 것이었던가. 어찌하여 이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단 말인가.” 하고, 사대부는 조정에서 서로 조상하고, 친척과 친구들은 신위(神位)에 가서 서로 곡하였으며, 길가는 사람들도 탄식하며 애석해하였다. 임금도 이 부고를 듣고 몹시 애도하여 후히 부의(賻儀)하도록 명하고, 태상(太常)에 시호를 논의하도록 명하여 이르기를, “추밀직(樞密職)은 시호를 내리지 않으나, 내가 특별히 이강(李岡)을 포상하는 것은 문신으로 오랫동안 노력해 온 사람은 정당문학 송수(松壽)였으므로 내가 이 때문에 그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그와 몸은 달라도 공이 같은 사람으로는 이제 강이 있을 뿐이다.” 하였고, 시호를 논의하여 올리자 또 이르기를, “문경(文敬)은 오직 이강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하였으니, 아, 공은 유감이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공의 벗 상당(上黨) 맹운(孟雲) 한수(韓脩)는 곡성(曲城)의 염흥방중창(廉興邦仲昌)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계획을 말하기를, “우리의 벗이 죽었으니 이 세상 사람이 어느 누가 슬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우리의 벗이 전할 만한 것을 전하고 죽었다면, 이는 우리 셋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그 슬픔을 자위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묘비명은 나에게 부탁하고 한수의 글씨와 염흥방의 전서(篆書)로 쓰며, 돌에 새기는 공역은 중창(仲昌 염흥방)과 맹운(孟雲 한수)이 주관하기로 하니, 아, 슬프다. 내 어찌 차마 내 벗의 묘에 명하겠는가. 공의 이름은 강(岡)이요, 자는 사비(思卑)이니, 처음의 이름이 강(綱)이었던 것을 같은 항렬의 이름을 피하여 드디어 지금 이름으로 고쳤던 것이요, 성은 이씨이니 고성(固城)은 본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존비(尊庇)이니 판밀직사사 겸 감찰대부로 경릉(慶陵) 왕조에 이름이 있었고, 조부의 휘는 우(瑀)이니 철성군(鐵城君)이며, 아버지의 휘는 암(?)이니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시호는 문정(文貞)이요, 서법이 일세에 절묘하였으니 호는 행촌(杏村)이다. 어머니 홍씨(洪氏)는 시중(侍中) 충정공(忠正公) 자번(子藩)의 손녀요, 우대언(右代言) 승서(承緖)의 딸이다. 처음에 가문의 공으로 복두점 녹사(?頭店錄事)에 임명되었고, 급제한 후에는 경순부(慶順府) 승(丞)이 되어 전의(典儀)에 있어서는 직장(直長)ㆍ주부(主簿)와 또 영(令)을 역임한 바 있고, 병부(兵部)의 원외(員外)와 문하성의 사간(司諫)과 이부(吏部)의 낭중과 호부(戶部)의 시랑을 지내고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서는 대언(代言)ㆍ지신사(知申事)ㆍ제학(提學)ㆍ부사(副使)를 역임하였으며, 내외제(內外制)의 관직(館職)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러서 벼슬이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렀다. 총릉(聰陵)이 서연(書筵)의 강의를 열고 있을 때에 시독(侍讀)에 선발 보충되어 손위(遜位)하게 되자 공이 따라가서 거하니 그 뜻을 세운 것이 구차하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금상이 즉위한 지 5년째인 을미년에 공을 불러보고 기특하게 여겨 즉시 주부(主簿)를 제수하여 부새(符璽 절부(節符)와 옥새)를 맡아보게 하였다. 이로부터 항상 임금의 좌우에 있으면서 오래될수록 더욱 근신하고 공경하였다. 이부에 있을 때에 관직을 옮기게 되자, 공이 아뢰기를, “신이 붓을 잡고 신의 이름을 주의(注擬)한다는 것은 진실로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더욱 중히 여겼다. 신축년 가을에 경상도 안렴사가 되었는데, 때마침 북방 변경의 침략을 당하여 온 나라가 남으로 옮기게 되어 그 경계에 들어가니 공급하는 일이 끝이 없었으나, 이르는 곳마다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같이 하여 사기를 다시 떨쳐 마침내 흉당을 섬멸하였으니, 이는 공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미 서울로 돌아와서 원문정(元文定)의 후임으로 전선(銓選)을 맡으니 때는 바야흐로 변경의 경보(警報)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하를 유지해 가면서 각기 소망을 채워 높은 공을 이룬 것은 공의 힘이 많았던 것이다. 시중이 죽으니 임금이 친히 명하여 그 모습을 그리게 하였으니, 이는 비록 임금이 큰 공신을 특별히 포상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흠모시키게 하였던 것이다. 그 덕도 매우 성대하나 또한 공의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던 것이요, 일에 임해서는 극히 조심하였고, 벗을 믿음으로 사귀며, 착한 일을 좋아하기를 간절히 하고 마음을 공평히 가지니 내가 바로 벗으로 하는 이유이다. 하늘이 혹시 나이를 더 주어 묘당에 앉아서 큰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하고 큰 정사를 행하기를 그의 뜻과 같지 않음이 없었던들 나는 장차 그를 스승으로 섬겼을 것인데, 이를 이루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 슬픔을 어찌 다하리요. 부인은 곽씨(郭氏)이니,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휘 연준(延俊)이 아버지이다. 딸 몇 명이 있는데 모두 어리고 아들 하나는 금년에 낳았다. 모월 모일에 서거하여 모월 모일에 성남쪽 남촌(藍村)에 장사하니 향년 36세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어찌하여 온전한 재주를 주고도 / 胡界其全
목숨을 주지 않았던고 / 而不予年
참으로 알 수 없다. 저 하늘의 정함이 없음이여 / 夢夢乎其天之未定也
내가 이 명을 새겨 / 我鐫斯銘
천년에 이름을 울릴 것을 / 千載而鳴
오히려 우리 문경공에게서 상고하리로다 / 尙有攷乎吾文敬也
'▒ 목은선생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묘지(墓誌) 파평군 윤공 묘지명 병서 (坡平君尹公墓誌銘 幷序 ) -이색(李穡)- (0) | 2007.05.01 |
---|---|
묘지(墓誌) 유원 자선대부 태상 예의원사 고려국 추충수의 동덕찬화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익산부원군 -이색(李穡)- (0) | 2007.05.01 |
묘지(墓誌) 유원 고려국 충근절의 찬화공신 중대광 서령군 시문희 유공 묘지명 병서 -이색(李穡)- (0) | 2007.05.01 |
묘지(墓誌) 해평군 시충간 윤공 묘지명 병서 (海平君諡忠簡尹公墓誌銘 幷序 ) -이색(李穡)- (0) | 2007.05.01 |
묘지(墓誌) 송당 선생 김공 묘지명 병서 (松堂先生金公墓誌銘 幷序 ) -이색(李穡)- (0) | 2007.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