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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해평군 시충간 윤공 묘지명 병서 (海平君諡忠簡尹公墓誌銘 幷序 )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3:35

묘지(墓誌)
 
 
해평군 시충간 윤공 묘지명 병서 (海平君諡忠簡尹公墓誌銘 幷序 )
 

선산(善山)의 속현 해평(海平)의 명망 있는 대족(大族)은 윤(尹)씨이다. 휘(諱)가 군정(君正)인 분은 고왕(高王)과 원왕(元王)을 내리 섬겨,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상서좌복야 판공부사(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判工部事)에 이르렀고, 휘 만비(萬庇)는 충렬왕을 섬겨 기사년에 일등공신이 되어 최종 벼슬이 봉익대부 부지 밀직사사 상호군이었다. 휘 석(碩)은 정승공(政丞公)으로 전에 원 나라의 사자가 왔는데, 정승공이 당시 별장으로 있으면서 잔인(盞人 술잔을 전하는 사람)으로 임금 앞에 모시고 섰더니, 사자는 두 왕자(王子)가 원 나라 조정에 입시하라는 천자의 교지를 전하였다. 정승이 이를 듣고 홀로 ‘나는 마땅히 아우를 따르리라.’ 하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고하였더니, 아버지가 말하기를, “너의 계책은 잘못인 것 같다. 왕자를 쫓는다는 것은 뒷날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형이 있는데 아우가 나라를 소유하는 법이 있느냐.” 하였다. 공은 다시 고하기를, “저도 그런 줄은 압니다. 그러나 저는 그 아우를 보면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나 그 형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가 계책을 결정한 까닭입니다.” 하니, 아버지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형은 원자(元子)로 일찍이 사망하였고 아우는 바로 충숙왕(忠肅王)인 것이다. 공이 왕자를 따라 원 나라 서울에 가니, 요좌(僚佐)로서 공보다 높은 자가 없었고, 그 뒤에 벼슬이 도첨의 우정승 판전리사사(都僉議右政丞判典理司事)에 이르러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하고, 자급은 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충근절의 동덕찬화 보정공신(忠勤節義同德贊化保定功臣)의 호를 하사받아 또한 공보다 나은 자가 없었으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는 일로 어찌 천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천자가 공의 이름을 듣고서 특별히 진국상장군 고려도원수(鎭國上將軍高麗都元帥)를 제수하여 특별히 총애하였다. 해평부원군이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 이백년(李百年)의 딸과 결혼하여, 지대(至大) 경술년 4월 계해일에 공을 낳았다. 연우(延祐) 경신년에 공의 나이 11세로 태운사 진전직(泰雲寺眞殿直)에 보직되고, 15세에 사설직장(司設直長)에 보직되었으며, 16세에 낭장에 제수되고, 19세에 호군에 임명되니, 영릉(永陵 충혜왕)을 따라 원 나라에 있던 다음해였다. 이때 진저(晉邸)가 죽고 문종(文宗)이 강남으로부터 먼저 궁에 들어와서, 지위를 정하고서 명종(明宗)을 북방으로부터 맞아들이는데, 문종이 교외로 나아가서 위로할 때에 승상 연첩목아(燕帖木兒)가 독약 넣은 술을 바쳐 명종이 한밤중에 붕(崩)하니, 육군(六軍)이 소란하였다. 공이 재상 조익청(曹益淸) 이군해(李君?) 등 관원 등과 더불어 충혜왕을 도우니, 임금이 이에 의지하여 두려워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공신의 철권(鐵卷)을 하사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에 대호군에 오르니 공의 나이 21세였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승진되고, 명릉(明陵 충목왕)이 즉위하던 5월에 상호군에 임명되었고, 겨울에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랐다. 다음해 4월에 전리판서(典理判書)로 옮기니, 왕 정승(王政丞)이 조정의 권한을 잡고 옛법을 써서 문관의 선임은 전리(典理)로 돌려보내고, 무관의 선임은 군부로 돌려보내니, 공이 정승을 보좌함에 조금도 사정이 없었다. 다음해 평양윤(平壤尹)으로 나갔는데, 공이 백성을 다스리는 재능을 시험한 것으로, 겨우 1년 만에 치적을 이루어 다시 지밀직(知密直)으로 부르니, 이때 공의 나이 38세였다. 현릉(玄陵) 5년에 두 번 지밀직사사가 되었고, 그해 겨울에 표문을 받들고 북경으로 갔는데, 이는 원 나라에서 의복을 하사한 사은(謝恩)의 사절이었다. 18년에 세 번 지밀직사사를 역임하였고, 홍무(洪武) 경술년에 밀직사에 승진되고, 다음해 지문하성사 상의회의 도감사(知門下省事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으며, 또 다음해에 평리(評理)로 승진하고, 겨울에는 중대광 해평군(重大匡海平君)에 봉하였다. 염곡성(廉曲城) 윤칠원(尹漆原) 등 여러 기로(耆老)들과 결사(結社)하여, 조용히 논 지 10여 년, 임술 9월에 병을 얻어 10월 9일에 단정하게 앉아서 서거하니, 공의 나이 73세였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남과 간격이 없었으며, 몽고어(蒙古語)에 대략 통하였고, 공의 행동도 북방사람과 흡사하였다. 정사에 있어서는 대체를 따르려고 힘쓰고, 너무 각박하지 않은 장자(長者)였다. 공이 무릇 두 번 장가갔으니, 평양군부인(平壤郡夫人) 조(趙)씨는 대광첨의찬성사 상의보문각대제학시 문극공(大匡僉議贊成事商議寶文閣大提學諡文克公) 연수(延壽)의 딸이요, 이(李)씨는 대광 월성군(大匡月城郡) 휘 천(?)의 딸이다. 조씨가 아들 둘을 낳으니, 장남 보(寶)는 벼슬이 응양대호군에 이르렀는데, 공보다 먼저 죽었고, 다음이 진(珍)인데, 중대광 해평군(重大匡海平君)이다. 손자 손녀 몇 명이 있으니, 응양대호군의 아들 가관(可觀)은 지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으로 경상도 부원수로 나가 있고, 딸 하나는 위위주부(尉衛主簿) 이지(李持)에게로 출가하였다. 해평군의 아들 창(彰)은 지금 전리좌랑(典理佐郞)이며, 다음 신(莘)은 지금 덕창부 사인(德昌府舍人)이며, 다음 수(須)는 지금 춘추 검열(春秋檢閱)이고, 큰 딸은 판사(判事) 김구용(金九容)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낭장 홍윤복(洪潤福)에게로 갔으며, 그 다음은 사설서령(司設暑令) 성보(成溥)에게로 시집갔다. 이씨 부인은 자녀가 없었다. 증손과 증손녀 몇 명이 있으니 누구 누구이다.
공이 표문을 받들고 사은사로 갈 때에 나는 서장관으로 따라갔으며, 공의 큰 아들은 나와 동갑이다. 그러므로 공을 아버지와 같이 섬겼던 것이다. 내가 요행이 추부(樞府)로 들어가니 공이 다시 복직하여 나와 동료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예전처럼 공을 섬겼고, 공도 또한 아들같이 나를 대하였으니, 내가 공의 분묘에 명을 써야 마땅하고, 공의 막내아들 정당공(政堂公)이 이제 습봉(襲封)되었고 그가 지공거로 있을 때에 또 내 아들 종선(種善)을 선발하여 문생으로 삼았으니, 또 어찌 명을 사양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한다.
해평의 윤씨가 / 海平之尹
고왕과 원왕을 도우니 / 左右高元
군자의 은택으로 / 君子之澤
흐르는 경사가 끊임이 없도다 / 流慶源源
원수공이 / 惟元帥公
우뚝히 시중이 되었고 / 蔚爲侍中
충간공이 뒤를 이으니 / 忠簡承之
장자의 풍모가 있어 / 有長者風
젊어서는 재덕이 뛰어났고 / 少而翹英
늙어서는 영화를 누렸네 / 老而享榮
막내가 뒤이어 정승 되고 / 季子繼相
또 문형을 맡았네 / 而典文衡
손자는 중추에 제수되고 / 孫拜中樞
바닷가를 절충하였네 / 折衝海隅
공의 가문은 / 惟公之門
중도에 맞아 / 弛張攸俱
무릇 하늘이 상서를 내림은 / 凡厥降祥
오직 착함을 표창함이리라 / 惟善是彰
공에게 아부함이 아니로다 / 我非諛公
공은 길이 이 무덤에 편안하시리 / 公永于藏


[주D-001]진저(晉邸) : 원 나라 황족으로 후에 황제가 될 사람 진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