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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철성부원군 이문정공 묘지명 병서 (鐵城府院君李文貞公墓誌銘 幷序 )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3:30

묘지(墓誌)
 
 
철성부원군 이문정공 묘지명 병서 (鐵城府院君李文貞公墓誌銘 幷序 )
 

지정(至正) 갑진년 5월 초 5일에, 추성수의 동덕찬화 익조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철성부원군(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鐵城府院君) 이공(李公)이 향년 68세로 병으로 인하여 자택에서 세상을 마치니, 태상(太常)에서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내리고, 소관 관아에서는 장례식에 따른 설비의 제공을 법전에서 정한 대로 하였으며, 6월 초 9일에 대덕산(大德山)에 있는 부인 홍(洪)씨의 영역(塋域) 속에 합폄(合?)하였다. 다음해에 임금이 공을 생각하고 친히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공의 모습을 비슷하게 그리고 술을 내려 제사지내게 하니, 막내아들 강(岡)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사례하고, 물러와서는 나에게 명(銘)을 청하기를, “분묘의 묘비명을 일찍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명(銘)할 수 있다.” 하였다. 나는 강과 친밀한 벗이기 때문에 공을 아버지같이 섬겼으니 아, 어찌 차마 명(銘)하겠는가. 공의 처음 이름은 해(?)요, 자(字)는 익지(翼之)였는데, 뒤에 흉악한 자와의 동명(同名)을 피하여 이름을 암(?)이라 고치고, 자를 고운(古雲)이라 고쳤으며, 진주의 속현 고성(固城)은 공의 본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진(瑨)인데 급제하고는 벼슬하지 않았고, 조부의 이름은 존비(尊庇)인데 유가의 도로써 충렬왕을 섬겨 30여 년간을 인물의 전선(銓選)을 맡았었으며, 성균관에서 선비를 고시 선발하였고 또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는데, 마지막 벼슬은 판밀직사사 감찰대부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우(瑀)인데, 재능을 인정받아 회양(淮陽)과 김해의 부사와, 전주와 진주의 목사를 역임하였으며, 이르는 곳마다 인애(仁愛)의 덕을 남겼고 철원군(鐵原君)에 봉하였다. 어머니 박씨는 함양군부인(咸陽郡夫人)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지량(之亮)이며, 판삼사사(判三司事)인데, 지원(至元) 연간에 공로가 있어 천자가 금부(金符)를 하사하고 만부장(萬夫長)의 작호를 주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보통 아이와 달랐고, 소학에 입학하였을 때 벌써 글씨를 잘 쓴다고 일컬어졌다. 나이 17세 때에 계축년 과거에 급제하니, 당시 지공거였던 권 정승(權政丞)과 최 찬성(崔贊成)이 크게 칭찬하고, 또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이는 재상의 그릇이다.” 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이 크게 진보하고 명성이 날로 전파되니, 의릉(毅陵 충숙왕)이 공의 능력을 사랑하여 명하여 부인(符印)을 맡기고, 비성(?省)의 관직을 제수하니 교감(校勘)을 거쳐 재차 벼슬을 옮겨 낭관ㆍ주부(注簿)와 단양부좌도관(丹陽府佐都官)이 되었다가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영릉(永陵 충혜왕) 초기에 전의령(典儀令)으로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발탁되어 감찰집의(監察執儀)를 겸하였으며, 신미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에 임명되고, 지원(至元) 경진년에는 다시 지신사(知申事)로 복직되었다가 곧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경질되고 봉익계(奉翊階)에 승급되었다.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성균관은 스승의 도(道)가 존재하는 곳이며, 임무 또한 중하다. 그러나 나의 정치를 돕는 양부(兩府)에서 실상 그 직무를 담당하고 있으니, 그 추밀동지(樞密同知)를 주라.” 하였다. 명이 내리자 조정 위의 선비들이 서로 경하하며 말하기를, “착한 사람이 정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바로 정당문학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옮기고, 신사년의 공거(貢擧)를 주관하였는데, 이때에 권세를 잡은 자가 우리의 유가(儒家)를 비방하고 비웃으니, 공이 완전 고립무원의 입장이 되어 그 뜻을 마침내 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잡아 구제한 일도 많았다. 명릉(明陵)이 왕위에 서고 신임과 은총이 더욱 높아 찬성사(贊成事)에 승진시켰고, 총릉(聰陵)이 즉위하고 이르기를, “선왕의 옛 신하 중에 덕과 공로가 있는 자로 오직 이모(李某)가 나의 정사를 보좌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좌정승(左政丞)에 임명하더니, 얼마 안 되어 파면되고 말았다. 금상이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공을 등용하려다가 행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봉작을 습작하고 개부(開府)를 설치하게 하여 공경히 대우를 다하였다. 3년 계사에 공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 나이가 장차 60이 되고 지위도 극에 달하였으니, 이때에 치사(致仕)하여 물러가지 않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랴.” 하고, 벼슬을 버리고 청평산(淸平山)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려는 마음이 매우 급하여 나이와 덕이 높은 옛 신하들을 예로써 부르고, 공도 도로 유시하여 머물러 있게 하고, 때때로 불러 입대(入對)하더니, 드디어 공을 쓸 것을 결심하고 8년 무술에 다시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았다. 기해년 겨울에 모적(毛賊) 이 북방 변경을 침범하므로, 공을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삼아서 가서 모든 군사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군사가 다 집합하기 전에 적이 벌써 가까이 접근하였다. 서경(西京 평양)을 지키던 신하가 주장하기를, “서경을 지키려는 계책은 불가하다.” 하고, 또 창고의 양곡을 불사르려고 하는 것을 공이 말하기를, “그것은 계책이 될 수 없다. 적이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예봉(銳鋒)을 당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중간에서 막지 못하면 그 형세가 반드시 우리 국도(國都)를 진동시킬 것이니, 적을 막으려면 이 성을 미끼로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 우리 백성에게 늙은이와 노약자를 데리고 동쪽으로 피하게 하고, 창고와 가옥을 단단히 잠그고 파괴하지 않으면, 적이 이를 보고 반드시 우리가 겁내고 있다고 하여 또한 잠시 주둔할 것이니, 우리가 겁낸다고 알면 마음이 교만해질 것이요, 잠시 주둔한다면 예봉이 쇠약해질 것이다. 그 동안에 우리는 군사의 집합을 기다렸다가 하루아침에 공격하여 탈취할 수 있을 것이니, 오늘 불살라서 없애려고 하는 것을 다른 날에 우리가 다시 쓰게 될지 어찌 보장할 수 있는가.” 하니, 달이 넘지 않아서 공의 예견처럼 과연 적이 패배하였고, 창고와 가옥도 처음처럼 완전하였다. 신축년 겨울에 안동(安東)까지 임금의 행차를 호종한 공이 제일 컸기 때문에, 다음해에 적을 평정하고 상을 내리니, 공이 면전에서 아뢰기를, “지금 불행히 어려운 때를 당하여 장상(將相)은 반드시 인재를 써야 할 것이온데, 신이 조금도 장점이 없는 자로서 오랫동안 좌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니, 청하건대, 자리를 피하여 어진 이를 쓰도록 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더욱 공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공신의 호를 더하여 내리고 봉조청(奉朝淸)에 봉군(封君)하였다. 공이 관직에 있을 때에는 부지런하여 근신하여 법도를 지켜 한 터럭만큼의 용서도 없었으며, 집에서는 비용의 유무를 묻지 않고 도서(圖書)로써 스스로 즐기니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선원사(禪源寺)의 식영암(息影菴) 노승과 방외(方外)의 벗이 되어 절간에 당(堂)을 짓고 해운(海雲)이라 편액해 달고는, 조각배로 왕래하면서도 가기만 하면 집에 돌아갈 줄을 몰랐으니, 대개 공의 아담한 도량이 이와 같았으며 행촌(杏村)은 스스로 붙인 별호였다. 일찍이 몸소 《서경》의 〈태갑편(太甲篇)〉을 써서 임금에게 바치고, 그 아들 강(岡)에게 말하기를, “너는 마음 속에 명심하라. 나는 이미 늙어 책임질 직임도 말할 책임도 없으나, 너는 마땅히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공이 비서(?書)로부터 재상직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인물을 전선(銓選)에 하는 데 참여하였지만 벼슬을 주고 빼앗는 데 있어 조금도 사사로운 정실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몸을 마치도록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전후의 문생(門生) 중에 고관에 오른 자와 명성있는 자가 많았고, 여러 아들도 모두 업적을 세웠으니 아,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을 이에 증험하겠도다.
부인은 시중(侍中) 충정공(忠正公) 자번(子藩)의 증손이요, 우대언(右代言) 승서(承緖)의 딸로 공보다 27년을 앞서 죽었는데, 며느리로서 집의 복록을 이었고 아내로서 군자의 덕에 짝하였으며, 어머니로서 자녀를 많이 두었다. 아들 네 명을 두었으니 인(寅)은 중정대부 종부령(中正大夫宗簿令)이요, 다음 종(宗)은 정순대부 판전객시사(正順大夫判典客寺事)이며, 다음 음(蔭)은 모적(毛賊)의 평정에 참여하여 그 공으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는데, 신축년 겨울에 안주(安州)에서 전몰하였고, 그 다음이 강(岡)으로 지금 바야흐로 밀직사지신사 예문관제학 지제교 지전리사사(密直司知申事藝文館提學知製敎知典理司事)로 있다. 딸이 둘이니, 하나는 판사(判事) 김광병(金光丙)에게 출가했고, 또 하나는 회양 부사(淮陽府使) 조신(趙愼)에게로 시집갔다.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 목(牧)은 낭장이다. 손자 모(某)는 모 관직에 있고, 또 모와 모가 있으며, 손녀 몇 명이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높도다 문정공이여 / 巍巍文貞
철성에 개부하였도다 / 開府鐵城
처음 좌정승에 오르자 / 初宅左揆
아! 넘침을 경계하여 / 曰噫戒盈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서 / 奉身而退
푸른 물 밝은 산에서 / 水綠山明
구름이 말리고 펴듯이 / 如雲卷舒
아무 매임이 없이 무심하다가 / 杳乎無情
다시 묘당에 들어왔으나 / 還居廟堂
좋아하는 기색이 없었네 / 不動色聲
긴 뱀과 큰 돼지 같은 무리 / 長蛇封豕
서경에서 죽을 때 / 就戮西京
하늘이 공의 마음을 열어 / 天啓公衷
조용히 계책을 세워 / 從容策成
적에게 교만하게 하여 전복시키니 / ?驕以覆
9묘의 혼령이 놀라지 않았도다 / 九廟不驚
사람들이 비로소 탄복하니 / 人始歎服
시서로 용병하도다 / 詩書用兵
큰 공로 이미 세상을 덮었으니 / 大已蓋世
그 작은 것을 논평해 무엇하리 / 其細奚評
임금이 이르기를 원로여 / 王曰元老
몸은 비록 죽었으나 공로는 오히려 살았구나 / 雖死猶生
내가 헤아려 보건대 / 我儀圖之
높은 관원에게 모범이 되리 / 以風列卿
이미 초상화를 이루고 / 旣成旣肖
이어 관원을 보내어 재계하여 제사하니 / 明?繼?
경대부와 사대부에게 권면하고 / 列卿用勸
자손에겐 영광이로다 / 子孫與榮
예로부터 / 自古在昔
임금과 신하가 뜻을 모아 / 君臣聚精
그 망할 것을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은 / 不亡其亡
다름이 아니라 정성이로세 / 匪他曰誠
저 태사에게 고하노니 / 詔爾太史
이 명에 증험하리라 / 尙徵斯銘


[주D-001]아버지의 봉작을 습작하고 개부(開府)를 설치 : 부는 관청이라는 말인데, 여기는 아버지의 원 나라 벼슬 만부장(萬部長)을 습작하고, 그 만부장의 사무소를 차렸다는 말이 된다.
[주D-002]모적(毛賊) : 중국 하남성(河南省)에서 일어난 홍건적(紅巾賊)의 대장인 모거경(毛居敬)이란 자가 이해 12월 말에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온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