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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언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 (彦陽郡夫人金氏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3:26

묘지(墓誌)
 
 
언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 (彦陽郡夫人金氏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부인의 성은 김씨이며, 언양군(彦陽郡)이 본향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위려(就礪)이니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위열(威烈)이요, 증조(曾祖)의 이름은 전(佺)이니 태부 문하시랑(太傅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익대(翊戴)요, 조부의 휘는 변(?)이니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로서 시호는 문신(文愼)이요, 아버지의 휘는 윤(倫)이니 수성수의 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언양부원군(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彦陽府院君)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崔)씨이니, 대유(大儒)인 중서령(中書令) 문헌공(文憲公) 충(沖)의 13세손이요, 부지밀직사사 서(瑞)의 딸이다.
13세에 민(閔)씨의 집으로 시집와서 며느리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천성이 엄하여 자제를 교도하는 데도 반드시 예로써 하여 친척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도한다. 딸 하나를 낳아서 판군기시사 김묘(金昴)에게 출가시키니, 김묘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의 18세손이다. 김씨의 자녀로 아들은 제민(齊閔)ㆍ제안(齊顔)ㆍ구덕(九德)이 있고, 딸은 밀직부사 김사안(金士安)과, 전 개성 윤 이창로(李彰路)와, 전 종부령 최유경(崔有慶), 전 낭장 허호(許顥)와, 전 전객부령 허의(許誼)와, 낭장 겸 박사 이존사(李存斯)와 문하 주서 김섬(金贍)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제민이 이름을 구용(九容)이라 고치고 그 아들 흥위위 녹사(興威衛錄事) 명선(明善)을 보내어 행장에 의하여 명(銘)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외조부 급암공(及菴公)은 천성이 순진하고 솔직하여 장벽을 세우지 않고 날로 시와 술로서 스스로 즐겼으며, 집안의 살림살이는 묻지 않고 오직 부인에게만 맡겼는데, 부인께서는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외조부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서도 오직 날짜를 부족하게 여겼다. 또 외손녀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남편을 섬기는 예는 처음부터 늙을 때까지 오직 공경하는 마음 한 가지만 지킬 것이며, 의복과 음식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정결하게 하되, 오직 그때에 맞도록 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민공이 성정에 맡겨 술 마시고 마음껏 자적하는 것은 그 부인이 안에서 집안일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하였던 것이다. 언양백(彦陽伯) 경직(敬直)이 비록 부인보다 연치가 많았으나 또한 부인을 꺼려하여 감히 조금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첨서밀직(簽書密直) 희조(希祖)와 여러 아우들이 모두 어머니와 같이 섬겼다. 기해년에 급암공이 돌아가고 겨우 3년 상을 마치자 신축년에 홍건적을 피하여 영남으로 갔다가 다시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일찍이 스스로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 손자 제안(齊顔)이 옳은 죽음을 얻지 못하였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겠느냐.’ 하였으니, 그 강렬(剛烈)함이 그 아버지의 풍도에 있었다 한다. 갑인년 9월 19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그 해 12월 15일에 고을 남방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급암(及菴)의 장사 때에 시로써 만사(挽詞)를 도운 바 있었으니 부인의 묘명(墓銘)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나는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여강의 서쪽 / 驪江之西
발산 양지에 / 鉢山之陽
급암의 부인 / 及菴之室
김씨를 장사하였다 / 金氏攸藏
위열공의 가풍이 / 威烈之風
정렬공에 이르러 더욱 떨쳤으니 / 振于貞烈
규문이 엄숙하여 / 閨門肅然
문채도 있고 절조도 있었다 / 有文有節
오직 너희 자손들은 / 惟爾子孫
그이 마음을 잘 간직하고 / 惟心之存
또 부도를 실추하지 말아서 / 無墜婦則
구천의 여령을 위로하도록 하라 / 以慰九原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