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계림부원군 시 문충 이공 묘지명 병서 (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 幷書
이색(李穡)
지정(至正) 27년 정미 7월에 추성 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계림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鷄林府院君領藝文春秋館事) 익재선생(益齋先生) 이공(李公)의 병으로 본댁에서 돌아가니 나이 81세였다. 태상(太常)에서 문충공(文忠公)이라 시호를 정하였고, 10월에는 유사에 명하여 의장(儀仗)과 위사(衛士)를 갖추어서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에 있는 선영 아래에 장사하였으며, 병진년 10월에는 공민왕(恭愍王) 묘정(廟庭)에 배향하였다.
공의 이름은 제현(齊賢)이요, 자는 중사(仲思)이니 아버지의 성은 이(李)씨이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奕居世)의 창업을 보좌한 대신에 이알평(李謁平)이라는 분이 있었다. 그 뒤에 소판(蘇判) 거명(居明)이 병부령(兵部令) 김현(金現)을 낳았고, 병부령이 삼한공신 태수(三韓功臣太守) 금서(金書)를 낳았는데, 신라왕 김부(金溥)가 이미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에 들어와서 조회하고 태조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금서(金書)의 아내로 삼게 하여 윤홍(潤弘)를 낳았다. 윤홍이 승훈(承訓)을 낳았고, 승훈이 주복(周復)을 낳았고, 주복이 이(?)를 낳았고, 이가 치련(侈連)을 낳았고, 치련이 총섬(寵暹)을 낳았고, 총섬이 춘정(春貞)을 낳았고, 춘정이 현복(玄福)을 낳았고, 현복이 선용(宣用)을 낳았고, 선용은 승고(升高)를 낳았다. 승고가 문림랑 상의직장동정(文林郞尙衣直長同正) 득견(得堅)을 낳았고, 상의직장이 증좌복야(贈左僕射) 핵(?)을 낳았고, 복야는 검교정승 문정(檢校政丞文定) 진(?)을 낳아 대릉직(戴陵直) 박인육(朴仁育)의 딸과 결혼하니, 즉 진한국 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다.
지원(至元) 정해 12월 경진일에 공을 낳으니, 공은 어릴 때부터 의젓한 기상이 어른 같았고 글을 지을 줄 알게 되면서부터 이미 작자(作者)의 기풍이 있었다. 대덕(大德) 신축년 공의 나이 15세였다. 시선(侍?) 정상(鄭常)이 성균관에서 시험을 보였는데, 응시하러 온 사람들이 자기의 재능을 자부하고서 서로 기염을 토하며 견주다가 공이 지은 글을 듣고서는 일시에 기운을 잃고 위축되어 감히 앞을 다투는 자가 없더니, 공이 과연 장원하였다. 이 해에 국재(菊齋) 권부(權溥)공과 열헌(悅軒) 조간(趙簡)공이 시관이 되어 과거를 보였는데, 공이 또 병과(丙科)에 급제하자 권공(權公)이 그의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 과거란 것은 조그마한 기능이다. 나의 덕을 크게 축적할 수는 없는 것이니 옛 경전을 토론하여 널리 관통하고 정밀히 연구하여 다시 이를 절충 함으써 지당한 결론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하니, 문정공(文定公)이 이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혹 우리의 문호를 더욱 키워주시려는 것인가.” 하였다.
계묘년에 권무 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가 되었고, 무신년에는 예문춘추관에 뽑혀 들어가니, 관중에 있던 선비들은 모두 공에게 자리를 사양하고 감히 글을 논하지 못했으며, 그 후 오랜 뒤에 제안부 직강으로 옮겨갔다. 기유년에 사헌 규정에 발탁되었고, 경술년에 선부 산랑으로 옮겼다가 신해년에 재차 전교시승 삼사판관으로 천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황경(皇慶) 임자년에 서해도 안렴사가 되어 부월을 잡은 옛사람의 풍모가 있었고, 다시 성균 악정(成均樂正)에 승진, 그 해 겨울에는 제거풍저창사(提擧豊儲倉事)가 되었으며, 계축년에는 내부(內府)에 부령(副令)이 되었다. 풍저창은 말질하는 것을 감시하고 내부에서는 저울눈의 근량과 잣 수를 따지는 것인데, 공은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조금도 난색을 짓는 일이 없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무슨 일이고 할 수 있는 군자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원 나라 인종(仁宗)을 도와서 내란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맞아 세웠기 때문에, 원 나라 두 조정에서의 은총과 예우는 비길 데가 없었다. 드디어 왕위를 충숙왕(忠肅王)에게 전할 것을 청하고 자기는 태위(太尉)가 되어 원 나라 서울의 저택에 머물고 있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지어 서적을 쌓아놓고 연구하며 스스로 즐기고, 인하여 이르기를, “원 나라 서울에서 문학하는 선비는 모두 천하에서 선발한 명사들인데 우리 관부 중에는 그러한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나의 수치이다.” 하고, 공을 원 나라 서울을 불러들이니, 바로 연우(延祐) 갑인년 정월이었다. 그때에 중국의 유명한 학자인 요목암(姚牧菴)ㆍ염자경(閻子靜)ㆍ원복초(元復初)ㆍ조자앙(趙子昴)등이 다 왕의 문하에 와서 놀았는데, 공이 그 사이에 서로 추축(追逐)하여 학식이 더욱 진취되었고, 여러 석학들도 공을 칭찬하기를 마지않았다. 을묘년에 선부 의랑으로 전직되고 가을에는 성균 좨주에 임명되어 이내 의랑직을 겸임하였으며, 병진년에 서촉(西蜀) 지방으로 사명을 받들고 가니, 이르는 곳마다 읊은 시와 글이 세상 사람들 입에 전파되어 많은 찬사를 받았다. 이 해에 판전교시사가 되고, 정사년에 선부전서에 임명되었으며, 기미년에 왕이 강남지방에 향을 보내려 내려갔을 때 누대의 풍물을 구경하며 흥취가 나며 시를 읊어 회포를 풀었는데, 매양 조용히 말하기를, “이런 곳에 이생(李生)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경신년에 지밀직사에 임명되고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여 당시에 좋은 선비를 많이 얻었다는 칭송이 있었으니, 이때 공의 나이 34세였다. 문정공(文定公)과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과 장인 장모와 세 좌주(座主)가 모두 건강히 있었으므로, 공이 잔치를 벌이고서 술잔을 들어 헌수하니 온 세상에서 다 이를 찬미하고 부러워하였다. 이 해에 상주하여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에 임명되었고 지치(至治) 임술년 겨울에 원 나라 서울로 갔다. 그러나 아직 도착하기 전에 충선왕(忠宣王)의 참소를 맞나 서번(西蕃)으로 귀양길을 떠나갔던 것이다. 다음해에 공이 서번으로 가서 왕을 뵈었는데, 도중에서 읊은 시문에는 그 충성과 의분이 가득히 담겨 있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에 광정대부밀직사사(匡靖大夫密直司事)에 승진되고 을축년에는 다시 공신의 호를 추성양절(推誠亮節)이라 고쳐 내렸으며, 다시 첨의평리 정당문학에 두 번 전직되고 병인년에는 삼사사(三司使)로 옮겼다. 천력(天曆) 경오년에 충혜왕(忠惠王)이 국권을 잡고 공을 다시 정당문학으로 삼았으나 얼마 안 가서 파면되었고, 뒤에 지원(至元) 병자년에 이르러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김해군(金海君)에 봉하고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에 임명되었다.
기묘년 2월에 충숙왕이 돌아가고 그 해 가을에 정승 조적(曹?)이 백관을 위협하여 영안궁(永安宮)에 군병을 주둔하게 하고 선언하기를, “임금 곁에 있는 간악한 소인들을 축출해 버리겠다.” 하였으나, 은밀히 심왕(瀋王) 고(暠)를 위하여 한 것이므로 충혜왕이 정예의 기병을 인솔하고 공격해 죽였다. 그러나 그 일당이 도성에 있는 자가 심히 많았으며 또 반드시 왕을 죄에 밀어 넣으려고 하므로 인심이 불안과 공포 속에 싸여 있고 몹시 위태하여 앞날에 있을 환란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있었다. 공이 분연히 일어나 자기 일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우리 임금의 아드님을 알 뿐이다.” 하고, 따라서 원 나라 서울로 가서 말을 대신하여 글을 올려 그 일의 해명함을 얻으니, 그의 공로가 가장 컸던 것이다. 그리고 돌아오니 뭇 소인들이 더욱 선동 비방하므로 공이 곧 물러나 자취를 감추고 일체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 사이에 《역옹패설(?翁稗說)》을 저술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 겨울에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자 공을 부원군(府院君)에 승진시키고, 영효사관사(領孝思觀事)에 임명하고 서연(書筵)에서 공을 사부(師傅)로 삼았다. 병술년에 《충렬왕실록(忠烈王實錄)》을 편수하였고, 문자년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신묘년 겨울에 공민왕이 왕위에 올랐는데 아직 본국에 이르기 전에, 공을 우정승으로 삼아 정동성사(征東省事)를 임시로 맡게 하였다. 이때 수개 월 동안이나 나라가 공허한 상태에 있었는데, 공이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인민들이 이에 힘입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임진년에 추성양절 동덕협의찬화공신(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의 호를 내리니, 원종공신(元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공의 벼슬자리가 그 위에 있는 것을 시기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이를 알고서 세 번이나 사표를 올려 굳이 사양하였다. 그 해 10월에 조일신이 여러 불평분자들을 취합하여 밤중에 왕궁에 들어가서 자기가 꺼리던 자를 모조리 죽이고, 군병을 놓아 마구 살해하였으나 공은 그때 벼슬을 사퇴한 후였으므로 그 화를 면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일신이 잡혀 죽고 다시 공을 기용하여 우정승에 임명하였는데, 계사년 정월에 또 사퇴하였다.
5월 다시 부원군으로 지공거가 되어 고시를 주재하였고, 갑오년 12월에는 다시 우정승을 삼았으나 다음해에 또 사퇴하니 공의 나이 70세였다. 김해후(金海侯)에 봉하고 12월에 문하시중을 삼았다. 정유 5월에 본직(本職)으로 치사하기를 빌어서 왕이 이를 윤허하였다. 국가 제도에 군으로 봉하고서 치사하면 반사(頒賜)하는 녹봉이 다른 관원과 차이가 있는 법인데, 공은 이미 늙고서도 많은 녹을 받는 것이 분의에 편하지 못하다 하여 본직으로서 치사를 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의 공론이 본직으로 치사하게 하는 것은 대신을 공경히 대우하는 바가 아니라 하여 임인년에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였다.
공이 15세에 과거에 올라 이름이 일세를 덮었고, 조정에 벼슬한 뒤로는 오로지 문서(文書)만을 받들어서 예문관과 춘추관에서는 지제교를 역임하여, 속관(屬官)을 거쳐 벼슬이 양부(兩府)에 봉군(封君)하기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그 관직에서 떠난 일이 없었는데, 다만 충정왕(忠定王)이 왕위에 있던 3년간만 참여하지 않았으니, 이는 공이 일찍이 원 나라에 표문(表文)을 올려 공민왕(恭愍王)을 세우자고 청하였던 까닭이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두텁고 무거운데다가 학문으로 보익하여 고명정대 하였기 때문에 그가 발의하는 언론이나 시행하는 사업들이 정대하고 찬연하여 모두가 볼만하였다. 처음에 공이 《사기(史記)》를 읽을 때에 필삭(筆削)한 대의를 반드시 《춘추》에서 법 받았는데, 당(唐)나라 〈칙천기(則天紀)〉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어찌 주(周) 나라의 남은 것을 가져다가 우리 당 나라의 일월(日月)에 붙이랴.” 하더니, 뒤에 주자(朱子)의 《자치 통감강목》을 얻어 보고 스스로 그 지식이 정확함을 징험하였다.
남이 조그마한 착한 일이라도 있으면 반드시 들어서 칭찬해 주고 혹시라도 이런 좋은 일을 듣지 못할까 두려워하였고, 선배의 남긴 일은 비록 미세한 일이라도 미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였으며, 평생에 조급한 말과 장황한 낯빛으로 추잡한 말에 언급한 일이 없었고, 손과 대하여 술을 나누면서 고금의 일을 논란 검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최졸옹(崔拙翁)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선비가 3일만 보지 않아도 눈을 닦고서 보게 된다 하더니, 나는 익재(益齋)에게서 옳은 말임을 보았다.” 하였다. 공은 옛 법을 준수하려고 힘썼고 급히 장(更張)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 어찌 옛날 사람만 같지 못할 가만은 다만 나의 재주가 옛날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까닭이다.” 하였다.
공의 손자가 기(奇)씨와 혼인 관계로 연관되므로 공이 그의 너무 성만(盛滿)한 것을 꺼려하였고, 그가 평장사에 임명됨에 미처서 공민왕이 두 대제(待制)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이를 하례하게 하고, 또 공에게 명하여 사실을 서술하라 하니 공이 이를 사양하고 스스로 익재라고 호하였다. 신돈(辛旽)이 실각한 뒤에 공민왕이 이르기를, “익재의 선견지명은 미칠 수 없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신돈은 단정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니, 이제 와서 과연 징험하였다.” 하였다.
공이 젊을 때부터 나이가 같은 제배(?輩)들이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익재라 하였고, 재상이 된 뒤에는 사람의 귀천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익재라고 호칭하였으니, 세상에 중망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공의 저술한 바와 문집 몇 권이 세상에 간행되어 있다.
공은 모두 세 번 결혼하였는데, 길창국부인(吉昌國夫人) 권(權)씨는 2남 3녀를 낳았으니, 장남 서종(瑞種)은 봉상대부 종부부령이요, 다음 달존(達尊)은 봉상대부 전리총랑 보문각 직제학 지제교이며, 장녀는 정순대부 판사 복시사 임덕수(任德壽)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정대부 전농정 이계손(李係孫)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원사 한림원태학사 김희조(金希祖)에게 시집가서 의화택주(義和宅主)에 봉하였다.
수춘국부인(壽春國夫人) 박(朴)씨는 선수 서경등처 만호부부만호 중현대부 사복정(宣授西京等處萬戶府副萬戶中顯大夫司僕正) 거실(居室)의 딸로 1남 3녀를 낳았으니, 아들 창로(彰路)는 봉익대부 개성윤이요, 장녀는 정순대부 판전농시사 박동생(朴東生)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봉순대부 판전교지사 송무(宋懋)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혜비(惠妃)인데 지금 여승이 되었다.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 서(徐)씨는 통직랑 지서주사 중린(仲麟)의 딸로 2녀를 낳았으니, 장녀는 중정대부 삼사우윤 김남우(金南雨)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봉선대부 전의부정 이유방(李有芳)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 소실)이 2녀를 낳았는데 장녀는 중랑장 임부양(林富陽)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은 아직 어리다.
장남 종부(宗簿)는 밀직사겸 감찰대부 홍유(洪侑)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 보림(寶林)은 광정대부 정당문학 상의회의 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상호군이요, 장녀는 통헌대부 판위위시사 조무(趙茂)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현대부 순흥부사 이원적(李元)에게 시집갔다. 또 검교 중랑장 김송주(金松柱)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내유(乃猷)인데 조계중 광도사(廣度寺)의 주지이다.
총랑(摠郞)은 상당군(上黨君) 백이정(自?正)의 딸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덕림(德林)은 조봉랑 여흥군사(朝奉郞驪興郡事)요, 다음 수림(壽林)은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이며, 원 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한림학사 자선대부가 되니, 이 때문에 공에게 태상경(大常卿)이 중직 되고 훈(勳)ㆍ계(階)ㆍ작(爵)을 갖추어 내렸다. 그 다음 학림(學林)은 중현대부 소부윤(中顯大夫小府尹)이요, 딸은 봉익대부 개성윤 광록대부 동지추밀원사 기인걸(奇仁傑)에게 시집갔다.
개성 윤(開城尹)은 중대광 청성군(重大匡淸城君) 시호 평간(平簡) 휘 공의(公義)의 딸인 한(韓)씨와 결혼하여 1녀를 낳았는데 춘추관 검열 원서(元序)에게 시집갔고, 계실은 정순대부 판전객시사 김묘(金昴)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반(蟠)은 산정도감 판관이요, 다음 곤(袞)은 경선점 녹사(慶仙店錄事)이며, 딸은 아직 어리다.
외손으로는 사복(司僕)이 2남 4녀를 낳았으니, 장남 순의(純義)는 봉선대부 군기소윤이요, 다음 순례(純禮)는 중랑장이며, 장녀는 통직랑 기거랑 지제교 신혼(申渾)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정대부 친어군 대호군 박영충(朴永忠)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봉선대부 소부윤 황간(黃侃)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중랑장 김추(金錘)에게로 시집갔다. 전농정(典農正)이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즐(?)은 낭장이요, 다음 양(亮)은 중랑장이며, 딸은 통헌대부 판선공시사 안익(安翊)에게 시집갔다.
판전농(判典農)이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경(經)은 봉선대부 군기소윤이요, 다음은 위(緯)는 장이요, 다음 수문(殊文)도 별장이며, 딸은 아직 어리다. 전교(典校)가 1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좌윤(左尹)이 2남을 낳았으니 장남은 이름이 상좌(上佐)이고, 다음은 광대(廣大)이며, 딸은 다 어리다.
증손에 남녀 약간명이 있으니, 조위위(趙衛尉)가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종선(從善)은 중랑장이요, 다음 천선(遷善)은 권무(權務)이며, 딸은 다 어리다. 이순흥(李順興)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유희(有喜)는 숭은전직(崇恩殿直)이고 딸은 다 어리다. 여흥(驪興)이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신(伸)은 승봉랑 공조서령이요, 다음은 밀(密)이며, 장녀는 정순대부 판위위시사 이승원(李承源)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선덕랑 통례문지후 곽유례(郭遊禮)에게 시집갔다. 밀직(密直)이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숭의(崇義)요, 그 다음 숭도(崇道)는 전객녹사이며, 딸은 다 어리다. 소부(小府)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아직 어리고, 장녀는 사헌지평 김만구(金萬具)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어리다. 기개성(奇開城)이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신(愼)이요, 순의(純義)가 1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순례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자(滋)이고 딸은 아직 어리다. 신혼(申渾)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호(浩)이니 대전지유 중랑장이요, 장녀는 낭장 황윤기(黃允奇)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대호군이 3남 3녀를 낳았는데 장남 용수(龍壽)는 별장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며, 황소부(黃小府)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약로(藥奴)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며, 즐(?)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효로(孝奴)이고 딸은 어리다. 양(亮)이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백공(伯恭)이요, 다음은 백겸(伯謙)이며 나머지는 다 어리다. 명(銘)하기를,
하늘과 땅이 정기를 쌓으매 / 天地儲精
공이 이에 태어났고 / 公?挺生
규벽성이 광채를 발하자 / 奎璧耀芒
공이 이에 드러났네 / 公?發揚
이름은 온 천하에 넘쳐 흘렀으나 / 名溢域中
몸은 바다 동쪽에 있도다 / 身居海東
도덕의 원수요 / 道德之首
문장의 정종으로 / 文章之宗
태산북두 같기는 / 北斗泰山
창려땅의 한퇴지요 / 昌黎之韓
광풍제월 같기는 / 光風霽月
용릉의 주렴계라 / ?陵茂叔
네 번 국정을 잡았고 / 四秉國鈞
나이는 80을 넘었다 / 年踰八旬
기린과 봉황의 상서요 / 麟鳳其瑞
시초와 거북의 신명이었으니 / 蓍龜其神
공훈은 사직을 남겨놓았고 / 功在社稷
은택은 생민에 미쳤도다 / 澤流生民
종묘에 올려 배향하니 / ?宮升配
슬프고 영광스러움이 짝이 없도다 / 哀榮無對
부디 너희 자손들아 / 惟爾子孫
그 충과 효를 따르라 / 忠孝是遵
알지 못한다 이르지 말라 / 勿謂無知
공이 구천에 계시니라 / 公在九原
하였다.
[주D-001]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 : 고려 충선왕(忠宣王)이 무슨 일로 원 나라 정부에 미움을 사서 토번(지금의 서장 근처)으로 귀양 가게 되었으므로, 잠시 섭정격인 단사관을 원나라에서 두었던 것이다.
[주D-002]필삭(筆削) : 필주(筆誅)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죄 있는 자를 실제로 죽일 권한이 없는 사람으로서 그 죄상을 명백하게 기록하여 세상에 발표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D-003]주(周) 나라의……붙이랴 : 당 나라 고종황제의 황후인 무측천(武則天)이란 여자가 고종을 독살하고 자기가 정권을 잡아, 당 나라의 나라 이름까지 고쳐서 주(周)라고 한 것이 22년간이었다. 그것을 송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을 편찬할 때 정식 황제로 대우하였으나 여기에서는 그것이 부당하다고 한 말이다. 그 후에 주자가 《통감강목》을 편찬할 때에는 그 무측천을 당 나라의 역적으로 지적하였다.
'▒ 목은선생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묘지(墓誌) 중대광 현복군 권공 묘지명 병서 (重大匡玄福君權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0) | 2007.05.01 |
---|---|
묘지(墓誌) 언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 (彦陽郡夫人金氏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0) | 2007.05.01 |
묘지(墓誌) 중대광 청성군 한시평간공 묘지명 병서 (重大匡淸城君韓謚平簡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0) | 2007.05.01 |
묘지(墓誌) 한문경공 묘지명 병서 (韓文敬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0) | 2007.05.01 |
묘지(墓誌) 고려국 대광 완산군 시 문진 최공 묘지명 병서 (高麗國大匡完山君謚文眞崔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0) | 2007.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