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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중대광 청성군 한시평간공 묘지명 병서 (重大匡淸城君韓謚平簡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3:23

묘지(墓誌)
 
 
중대광 청성군 한시평간공 묘지명 병서 (重大匡淸城君韓謚平簡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금상(今上)이 즉위한 지 14년에 평간공(平簡公)이 비로소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그 해 겨울에 장차 이듬해 정조(正朝)를 하례하기 위하여 원 나라 서울로 사절(使節)을 보내려고 재신(宰臣)들이 입대(入對)하여 말하기를, “지금 원 나라 승상이 궁전 뜰을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하고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 조근(朝覲)에 회동하는 것이 다른 날에 비할 바 아닙니다. 신 등은 실로 이에 보낼 사절의 적격자를 선정하기 곤란하오니,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옵니다.” 하니, 그날로 전지가 내리기를, “한모(韓某)가 아니면 안 될 것이다.” 하고는, 공을 불러들여 친히 보고 유시하기를, “정유년에 성절(聖節)을 하례하러 갔을 때 갈 때도 무난히 잘 갔고 오는 데도 잘못되었다는 말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대를 가상히 여겨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또 가되 공경히 할지어다.” 하니, 공이 두 번 절하여 사례하면서 말하기를, “신과 같이 불초한 자가 추부(樞府)의 자리만 갖추고 있사옵고, 다른 아무런 재능이 없사와 성은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고 있는 터인즉 어찌 감히 사명으로 가는 것을 피하오리까.” 하고 갔다가 돌아왔는데, 과연 왕의 뜻에 부합한 바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봉군(封君)되고 집으로 돌아갔으나, 오래지 않아서 다시 기용되기를 아직도 바라고 있었더니, 아 슬프다.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공은 성은 한(韓)씨이니, 대대로 청주(淸州)가 본향이었다. 먼 조상에 난(蘭)이란 분이 있었으니, 개국 초에 공이 있어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내렸다. 그 뒤에 가장 장한 이름이 있는 강(康)이니, 원종(元宗) 때에 성균관의 시험을 관장하였고, 충렬왕(忠烈王)을 도와서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로 국가의 고시를 관장하였으며, 중찬(中贊)으로 치사하였는데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문혜공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사기(謝奇)를 낳았고 간의공이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악(渥)을 낳으니, 시호는 사숙(思肅)이며, 충숙왕(忠肅王)이 원 나라에 참소당하여 욕보고 있는 것을 일찍이 기발한 계책으로 무사히 탈출하게 하였고, 또 충혜왕(忠惠王)을 도와서 두 번이나 총재가 되어 대묘(大廟)에 배향되었다. 사숙공이 동지밀직 전리판서 원경(元卿)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 사람을 낳았고 맏아들 대순(大淳)은 죽었는데 벼슬이 지도첨의사사였고, 중례(仲禮)와 방신(方信)은 다 정당문학이었으니, 공은 차서에 있어 그 둘째였다. 형은 아우를 우애하고 동생들은 형에게 공손하여 한때 사람들이 모두 이를 흠모하였고, 또 불법(佛法)을 배운 자는 각성(覺星)이라 이르니, 역시 조계종(曹溪宗)의 시(詩)하는 승려이다. 공의 이름은 공의(公義)요, 자는 의지(宜之)이니 향년이 59세였다.
처음에 선조의 음덕으로 녹남 부사(錄南部事)가 되었더니, 일찍이 충혜왕의 알아줌을 받아 계급을 초월하여 호군에 제수되고, 여러 번 승지 하여 대호군 삼사 우윤이 되었다. 그때에 안정하고 망동하지 않으므로 세상을 좌우하는 자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전주목(全州牧)으로 나아가 백성에게 은혜로운 베푼 바 있고 충목왕(忠穆王) 때에 소부(小府)ㆍ위위(衛尉)ㆍ선공(繕工)의 세 판사를 역임하였으며, 충정왕(忠定王) 때에 대언(代言)에 발탁되었는데, 왕이 손위(遜位)하던 날에 백마산(白馬山) 아래로 달려가서 음식물을 바치고 사사로 사람에게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는 모름지기 시종(始終)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금상(今上)이 공을 충성이 있다 하여 그 재능을 시험하고자 한 것이 오래였다. 관제(官制)를 개정하여 시행하면서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고 오래지 않아서 호부 상서로 옮기고, 2년이 지나서 형부로 옮겼다. 토지에 대한 송사가 법대로 처결되지 않는다고 여러 사람의 의론이 분분하였는데 공이 들어가서 일에 따라 재량 처결하니, 사람들의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그가 정부에 있을 때에 관리가 성안(成案)을 가지고 와서 결재를 청하면 그 중에 옳지 못한 것을 보았을 경우 반복하여 그 뜻을 보인 뒤에야 서명하였으니,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부인 경(慶)씨는 우대언(右代言) 사만(斯萬)의 딸이요, 찬성사 정해(鄭?)의 외손인데 주부가 되어서는 남편에게 화순하였고, 어머니가 되어서는 자녀에게 본보기기 되었다. 아들이 3명인데, 수(脩)는 옛 것을 좋아하고 문학에 능하여 급제를 거쳐 관직을 역임하고 현재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있으며, 다음 이(理)도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이 있으며 현직 개성 판관(開城判官)이요, 그 다음 제(齊)는 별장으로서 과거를 보려고 학업을 닦고 있고, 딸 3명은 모두 먼저 죽었는데, 종부령 김사겸(金士謙)과 삼사 우윤(三司右尹) 이창로(李彰路)와 군부판서 염흥방(廉興邦)은 그의 사위들이다. 손자에 남자가 4명인데 우복(祐復)은 별장이요, 다음이 선복(善復)이고 그 다음은 다 어리며, 손녀가 5명이다. 외손인 남자 김우(金禑)는 권무(權務)이며, 손녀 2명이 있다.
장차 11월 갑신일에 임진현(臨津縣) 서곡(瑞谷) 남쪽 산기슭에 장사하려 하는데, 수(脩)와 흥방(興邦)이 와서 묘명을 나에게 구하니 공의 아들과 사위는 다 나의 벗이다. 벗의 아버지의 묘에 명하는 것을 어찌 차마 사양하겠는가.
공은 자상 근검하였고, 일체의 행동을 예법에 따라 하였으며, 마음속에 온축한 포부를 펴지 못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구(才具)로서 하루도 국정을 전담하지 못한 것은 역시 하늘의 뜻인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몸에는 버릴 만한 행실을 가려낼 수 없고, 아들을 가르쳐서 모두 출세시켰으며 죽은 뒤에는 아름다운 시호를 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후세에 전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또한 가히 유감(遺憾)이 없을 것이다. 명에 이르기를,

문혜공의 손자요 / 文惠之孫
사숙공의 아들로서 / 思肅之子
어질고 후한 형제들이 / 振振弟兄
능히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었도다 / 克世其美
공이 총릉을 섬겨 / 公事聰陵
시종 한결같음이 있으매 / 旣有終始
금상은 그의 충성을 묻지도 않고 / 不問其忠
그 재능을 시험하셨다 / 其能可使
두 번 원 나라 조정에 조근하였는데 / 再覲天庭
돌아와서는 반드시 마음에 들게 하였다고 칭찬하시었다 / 還必稱旨
이에 여러 사람들은 때가 왔다고 하였으나 / 衆曰時哉
공은 물러가고 말았다 / 公則退矣
이때의 높은 공은 누구도 / 維時巍巍
이보다 더할 리 없었거늘 / 莫或尙此
필경 이에 그치고 말았으니 / 而止於斯
누가 저 하늘의 이치를 징험할 것인가 / 孰徵其理
내 여기에 시를 지어 / 我庸詩之
이것을 오는 세상에 물으리라 / 以訊來世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