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고려국 대광 완산군 시 문진 최공 묘지명 병서 (高麗國大匡完山君謚文眞崔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완산(完山) 최씨(崔氏)의 보계(譜系)에서 상고하여 볼 만한 이로 순작(純爵)이라는 이가 있는데, 벼슬이 검교 신호위 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에 이르렀다. 그가 숭(崇)을 낳았는데 중랑장이요, 중랑장이 남부(南敷)를 낳았는데, 벼슬은 통의대부 좌우위 대장군 지공부사(通議大夫左右衛大將軍知工部事)에 이르렀고, 공부(工部)가 전(佺)을 낳았는데, 좌우위 중랑장(左右衛中郞將)이요, 중랑장이 득평(得枰)을 낳았는데, 벼슬은 통헌대부 선부전서 상호군 치사(通憲大夫選部典書上護軍致仕)로, 청렴하고 정직하게 몸을 지켜 사람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하였으며, 충렬ㆍ충선ㆍ충숙 등 세 임금을 내리 섬겼는데, 그 중에서도 충선왕이 더욱 그를 나라의 그릇으로 알고 중히 여겼다. 충선왕은 비록 왕위를 전해 주었으나 나라의 정사에 반드시 참여하였기 때문에, 사대부의 승진과 파면이 충선왕에게서 오는 것이 많았는데, 득평이 대직(臺職)에 있으면 기강이 섰고, 형부(刑部)에 있으면 형벌이 맑았으며, 김해(金海)와 상주(尙州)의 수령으로 고을을 다스리자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잊지 못하였고, 두 번 전라도를 안찰하자 백성들은 그의 풍의(風儀)를 두려워하였고, 전토를 측량하여 세액을 조정할 때에는 재상(宰相) 채홍철(蔡洪哲)을 도와서 전라도 각 주현(州縣)의 전토를 나누어 처리하였는데, 법을 해이하게 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지도 아니하였으며, 75세의 수명을 누렸다.
선부가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감찰대부 문한학사 승지 세자원빈 곽예(郭預)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덕(大德) 계묘년 4월 계유일에 공을 낳았는데, 공의 이름은 재(宰)요 자는 재지(宰之)이다. 지치(至治) 원년에 동대비원 녹사(東大悲院錄事)에 보직되었고, 태정(泰定) 갑자년에 내시(內侍)로 들어갔고, 4년에 산원(散員)에 제수되었으며, 다음해에 별장으로 전직되었다. 천력(天歷) 경오년에 순흥군(順興君) 안문개(安文凱)공과 심악군(深岳君) 이담(李湛)공이 같이 고시(考試)를 관장하였는데 공은 그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6년이 지난 뒤에 단양 부주부(丹陽府注簿)로 임명되었고, 또 4년 후에 비로소 중부령(中部令)에 제수되어 승봉랑(丞奉郞) 관계(官階)를 받았다. 얼마 안 되어 지서주사(知瑞州事)가 되었으나, 모친의 상중(喪中)이라 하여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는 복제를 마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충숙왕이 필요 없는 관원을 도태할 때에 공을 천거하는 자가 있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본래 그 아비의 풍모와 법도가 있음을 알고 있으니, 이 사람을 가벼이 쓸 수는 없다.” 하고, 감찰지평(監察持平)에 제수하니 공은 사양하다 못하여 벼슬에 나갔으나, 공민왕(恭愍王)이 직위하자 그 관직에서 갈리었다. 고(高)씨의 난이 일어나자 무릇 임금이 설치한 것을 모두 개혁하려 하여, 도감을 설립하고 공을 판관으로 삼자, 공은 매우 즐거워하지 아니하여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아니하니, 상부(相府)에서 자못 독족 하고 또 협박도 하므로 공이 천천히 자리에 나아가서 그 판사(判事)의 재상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실로 덕을 잃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하로서 임금의 아름답지 못한 점을 들추어내는 것이 공의 마음에는 편하던가. 임금의 악한 일이란 임금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요, 그 좌우에 있는 자들이 임금에게 아첨하여 그 악을 맞아 들여서 하도록 한 것인데, 먼저는 맞아들여 하도록 해놓고, 뒤에 다시 그 일을 들추는 것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하니, 그 재상은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고 처음 정사에서 공에게 전법정랑을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 지흥주(知興州)가 되어 나갔는데, 모든 백성에게 편의를 도모하는 일이라면 시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전적(田籍)이 오래되고 해어져 있었으므로 공이 이것을 수정하여 구장본(舊藏本)과 서로 대질ㆍ교정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였다. 인정승(印政丞)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는 평소에 공을 꺼렸으므로 벼슬을 갈아버렸는데, 정해년에 정승 왕후(王煦)와 김영돈(金永暾)이 임금의 교지를 받들어 전민(田民)의 송사를 정리하게 되어, 공을 천거하여 판관으로 삼고 역마를 달려 보내어 급히 불렀다. 공이 이른즉 두 정승은 또 말하기를, “장흥부(長興府)는 지금 다스리기 어렵기로 이름난 곳이니, 최모가 아니면 안 된다.” 하고 다시 나가게 하였다. 공이 장차 임지로 부임하려 할 즈음에, 두 정승이 또 말하기를, “최모가 지난번 지평직에 있을 때에 위엄과 명망이 있었으니, 어찌 이런 사람을 풍헌(風憲)직에 머물어 재임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그때 마침 공의 외씨(外氏)인 곽영준(郭迎俊)이 그 관아의 대부로 있었으므로, 법제상 서로 피하게 되어 전법 정랑(典法正郞)으로 전임되었다.
무자년에 경상도 안찰사가 되고, 1년 만에 두 번 옮겨 전객 부령(典客副令)ㆍ자섬 사사(資贍司使)가 되어, 안팎의 비용과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겸하여 다스려서, 그것에서 남는 것을 모두 백성에게 돌려주니, 전에 있던 폐단이 근절되었다. 기축년에 지양주(知襄州)가 되어 나갔더니, 나라에서 향(香)을 내려 주는 것을 받들고 온 사자(使者)가 존무사(存撫使)를 능욕하는 것을 보고 공이 말하기를, “이는 예가 아니다. 장차 나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집정하던 이가 기뻐하여 임금에게 아뢰어서 감찰장령(監察掌令)을 제수하니, 대관의 강기가 다시 떨쳤으나 1년 만에 파직하고 말았다.
신묘년에 현능(玄陵 공민왕)이 즉위하고 대신(臺臣)을 선임하자 다시 장령이 되었고, 다음 해에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옮겨 갔다가 사직하고 청주(淸州)로 돌아갔다. 이때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일어났던 것이다. 갑오년에 다시 불러서 전법 총랑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판도(版圖)로 옮기고, 그 해 가을에는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나가서 민정을 살피고 약조를 지키더니, 공이 떠나던 날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마음 아파하였고, 그가 시설한 바를 지금까지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을미년 가을에 중현대부 감찰집의 직보문각(中顯大夫監察執義直寶文閣)으로 불렀는데, 그때 군사 선발을 토지에 의해 한 것은 그 법이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인데, 공에게 명하여 도감사(都監使)로 삼았다. 지금까지의 법을 보면 한 사람이 전토를 받으면, 그 자손이 있으면 자손에게 전하고, 없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받게 되며 그 받은 자가 죄가 있어야만 그 전토를 회수하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사람마다 토지를 얻으려 하게 되어 번잡한 사건이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재물을 서로 주고 빼앗도록 경쟁시키는 것이니,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이에 마땅히 받을 사람 한 사람에게만 주고 그치도록 하니, 송사도 조금 간단하게 되었다.
병신년에 대중대부 상서우승(大中大夫尙書右丞)에 임명되고, 정유년에는 정의대부 판대부시사(正議大夫判大府寺事)에 승진되니, 이때 공의 나이 55세였으나 의지가 조금도 쇠하지 않고 더욱 직무에 근실하여, 한 달 사이에 창고에 곡식이 차게 되었다. 공민왕이 이르기를, “판대부(判大府)로서 그 직책을 다한 이는 최모 뿐이다.” 하였다. 기해년에 공주목(公州牧)으로 나가니, 그의 행정과 백성들의 사모함이 앞서 복주목(福州牧)에 있을 때와 같았다. 신축년에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는데, 그 해 겨울에 온 국가가 병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겨 가고, 다음해 봄에 임금이 상주로 거둥하니, 모든 수요와 공급과 설비의 판출에 진력하면서도, 오직 털끝만치라도 백성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무엇을 요구하다가 얻지 못한 무리들은 이를 비방하기도 하였다. 3월에 봉익대부 전법판서(奉翊大夫典法判書)로서 본경(本京 개성)에 분사(分司)로 가게 되어 공이 하직하니, 공민왕이 인견하여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고 당부하였다.
갑진년에 감찰대부 진현관제학 동지춘추관사에 임명되고, 그 해 겨울에 중대광 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하였다. 다음해에 전리 판서로 옮기고, 또 다음해에 개성 윤(開城尹)으로 옮겼으며, 기유년에 새로운 관제(官制)가 시행됨으로써 영록대부(榮祿大夫)로 관제를 고쳐 받았다. 신해년에 안동(安東)의 수신(守臣)이 궐원이 되자 공민왕이 이르기를, “안동의 원은 내가 이미 그 적임을 얻었다.” 하고, 곧 비지(批旨)를 내리고는 위사(衛士)를 보내어 공의 부임을 독촉하였으니, 이는 공이 혹 사퇴하고 가지 않을까 하여 염려함이었다.
갑인년 봄에 나이 많음으로써 사퇴를 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 해 가을 9월에 공민왕의 승하하니 공은 곡반(哭班)에 나가 곡하고 애통의 정을 다하였다. 금상(今上)이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에 임명하자 공은 굳이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니, 완산군(完山君)에 봉하고 계급을 대광계(大匡階)로 올렸다. 다음해 봄에 수레를 준비하도록 명하여 강릉(江陵)에 있는 밀직 최안소(崔安沼)를 가서 보고 돌아왔으니, 이는 대개 이 세상에서의 최후 결별을 하기 위함이었다.
9월에 경미한 병환이 생겼는데 여러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이인(異人)이 날더러 말하기를, ‘오년(午年)에 이르면 죽는다.’고 하더라 금년이 무오년(戊午年)이고, 또 병이 이와 같으니, 내 필연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10월 기사일에 돌아가니 향년 76세였다. 12월 임인일에 그가 살던 집에서 동쪽에 있는 감방(坎方) 산기슭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평일의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다. 아, 공은 가히 유속(流俗)을 벗어나고 사물에 달관한 분이라고 이를 만하다.
공은 두 번 결혼하였는데, 영산군부인(靈山郡夫人) 신(辛)씨는 봉익대부 판밀직사사 예문관제학 치사(奉翊大夫判密直司事藝文館提學致仕) 천(?)의 딸이요, 다음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朴)씨는 군부 정랑(軍簿正郞) 윤류(允?)의 딸이다. 신씨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사미(思美)는 봉익대부 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이며, 차남 덕성(德成)은 급제하여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三司左尹)이요, 박씨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유경(有慶)은 중정대부 종부령 지전법사사(中正大夫宗簿令知典法司事)이며, 맏딸은 성근익대공신 광정대부 문하평리 상호군(誠勤翊戴功臣匡靖大夫門下評理上護軍) 우인열(禹仁烈)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선덕랑 선공시승(宣德郞繕工寺丞) 조영(趙寧)에게 시집갔다.
손자에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판서의 자녀가 5명인데, 장남 서(恕)는 호군(護軍)으로서 지금 전라도 안렴사이고, 다음은 원(原)이니 중랑장이며, 그 다음은 각(慤)이니 별장이요, 딸은 예의 총랑(禮儀摠郞)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했고 다음은 아직 어리다. 좌윤(左尹)은 자녀 4명을 두었는데, 장남 복창(復昌)은 별장이고 다음 세창(世昌)도 별장이며, 다음 사창(仕昌)은 아직 벼슬하지 않았고 딸은 어리다. 종부령은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장남 사위(士威)는 낭장(郞將)이고, 그 다음은 모두 어리며, 평리(評理)는 자녀 3명을 낳았는데, 아들 양선(良善)은 영명전직(英明殿直)이고 딸은 모두 어리며, 시승(寺丞)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좌윤 덕성(德成)은 나의 벗이다. 성격이 쾌활하여 술도 잘하고, 관직에 있으면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있었다. 그가 와서 명(銘)을 청하는 것이다. 명하기를,
오직 공은 곧았고 / 惟公之直
또 공은 맑았다 / 惟公之淸
오직 공은 덕이 있었으며 / 惟公之德
또 공은 이름이 높았다 / 惟公之名
그 이름과 그 덕은 / 惟名惟德
이 세상의 준칙이 될 것인데 / 惟世之則
어찌 크게 쓰여져 / 胡不大用
우리 왕국을 바로잡지 못하였던가 / 正我王國
이미 우리 임금을 도와 / 旣相我王
묘당에서 주선하였고 / 周旋廟堂
76세의 고령으로 / 年七十六
아직도 강강하였건만 / 尙爾康强
공은 결단코 물러났으니 / 公退則決
진실로 밝고 슬기로웠다 / 允矣明哲
아, 최공이여 / 嗚呼崔公
온 세상이 그 풍모를 흠모하리로다 / 世歆其風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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