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碑銘)
고려국 충성 수의 동덕 논도 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곡성부원군 증시 충경공 염공신도비 병서 (高麗國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曲城府院君贈諡忠敬公廉公神道碑) (幷序)
이색(李穡)
지금 임금 9년 임술년 3월에 태평재상(太平宰相)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이 나이 79세로 병드니, 공경대부들이 날마다 문 앞에 와서 경과를 물었으며, 자손들이 마루에 가득하게 모여 탕약을 받들었고, 위와 아래에 기도하여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임금은 중관(中官)을 보내어 문병하고 약을 내리며 술을 내렸다. 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효험이 없었다. 아, 그것은 명인 것이다. 공은 평소에 건강하여서 오래 앓는 일이 없었으며 늙을수록 신기(神氣)와 풍채는 더욱 뛰어났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향년함이 더욱 높을 것이라고 기필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렀으니 명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공이 병이 들자 자제들에게 장사를 박(薄)하게 할 것을 훈계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죽은 뒤 3일 만에 매장하여 국가의 유사(有司)를 번거롭게 함이 없게 하여라.” 하였다. 부음이 알려지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였다. 재상이 말하기를, “곡성(曲城)이 3일장으로 하라고 유명하였으니 감히 어길 수는 없다. 그러나 담당 관사(官司)로서 본다면 국가에서 장가를 거행하는 것은 국법이다. 이것을 어긴다면 그 허물은 장차 누가 맡을 것인가. 또 공에게 국장을 베풀지 않는다면 국장의 예법을 어떤 사람에게 쓴단 말인가.” 하고, 특히 도당(都堂)에 모여서 담당 관사를 독려하여 한 가지도 빠뜨림이 없게 하였다. 아, 공의 사양한 것이나 재상의 거행한 것이 모두 예에 유래하여 나온 것이니 예라는 것은 국가가 아름답게 된 까닭이다. 신(臣)의 직책은 기록하고 편찬하는 데 있다. 하물며 신도(神道)에 비명을 새기라는 밝은 유시(諭示)가 있음이겠는가. 감히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 없다.
삼가 상고하여 보니, 곡성 부원군은 성은 염씨(廉氏)요, 이름은 제신(悌臣)이며 자는 개숙(愷叔)이고 아명은 불노(佛奴)이니 서원(瑞原)의 대족(大族)이다. 먼 조상인 휘 현(顯)은 문묘(文廟)를 도와 성균관에 선비를 시취(試取)하였으며 재상이 되었다. 휘 신약(信若)은 명종(明宗)을 도와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의 벼슬을 하였으며, 직위가 대사(大師)에 이르렀다. 증조의 휘는 순언(純彦)이니 졸할 때의 벼슬은 소부승(小府丞)이었다. 은청광록대부 문하시랑 평장사 판이부사(銀靑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를 추증하였다. 조의 휘는 승익(承益)이니 흥법 좌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감찰사사 시충정(興法佐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諡忠靖)이다. 충렬왕을 도와 허 시중(許侍中) 조 시중(趙侍中)과 더불어 서로 차례로 정권을 잡으니, 한 세대의 이름난 공경들이 감히 나란히 할 자가 없었다. 고(考)의 휘는 세충(世忠)이니 졸할 때의 벼슬은 중현대부 감문위대호군(中顯大夫監門衛大護軍)이었다. 비(?)는 가순택 주조씨(嘉順宅主趙氏)이니 주충보절 동덕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도첨의 평양부원군 시 정숙(推忠保節同德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判都僉議平壤府院君諡貞肅) 한인규(韓仁規)의 딸이다. 대덕(大德) 갑진년 10월 무신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내외시중(內外侍中)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이미 범상한 사람과 같지 않았으며 11세 때에 고모부인 원나라의 중서평장사 말길(末吉)이 불러다가 좌우에 두고 유생(儒生)을 초빙하여 수업함이 10년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덕망과 기량은 세상에 뛰어났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에 진저(晋邸)에 들어가 황제의 대통을 잊게 되었을 때 말길공이 공을 데리고 화림(和林)에 가서 수레를 영접하니, 황제가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겨 공에게 금중(禁中)에서 숙위(宿衛)하라고 명령하고 사랑해 돌봐줌이 상례와 같지 않았다. 말길은 대신(大臣)이었으며 황제가 또한 친신(親信)하였다. 그러나 병 때문에 조현(朝見)하지 못하였으나 황제가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공에게 명하여 그의 집에 가서 자문하게 하였다. 그가 아뢰는 것이 있으면 공이 모조리 전달하였다. 대부 첩실(大夫帖失)을 이미 베고 그의 여동생을 공에게 내려 주니, 공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아는 것은 없사오나 역적의 무리에게 가깝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니, 황제가 더욱더 소중히 여기었다. 임술년에 황제에게 주청하기를, “신이 어머니를 오래 못 보았습니다. 원컨대 휴가를 내려 주십시오.” 하였다. 황제가 그 말에 감동하여 금강산에 향(香)을 내리게 하고, 금자원패(金字圓牌)를 주었다. 그의 행차를 빛나게 하기 위한 것이며 그의 가는 길을 빠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는 사자(使者)들의 오고감이 빈번하였는데 다 원 나라 조정의 권위를 빙자하여 우리나라의 재상을 능욕하고 수령을 보기를 개나 말같이 하였다. 그런데 공은 재상에게는 공경하고 수령에게도 예모를 하였으며, 또 한 가지 일도 임금에게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아니하였다. 이미 돌아감에 상의사(尙衣使)를 제수하였다. 지순(至順) 신미년에 또 향을 내려 주었는데 더욱더 근신하니 부로들이 말하기를, “나이는 비록 젊으나 노성한 사람에 부끄럽지 않다. 이야말로 참 내외시중(內外侍中)의 손자로구나.” 하였다. 지순(至順) 계유년에 공은 자시하(慈侍下)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조정에 청하여 나와서 정동성낭중(征東省郞中)이 되었다. 그때 동료들이 자못 황제의 위복(威福)을 농간하므로 공이 극력 다투어서 억제한 바가 많았으며, 토지와 노비에 관계된 소송은 모조리 담당 관사에게 돌렸으므로 충숙왕(忠肅王)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염낭중(廉郞中)은 청렴하고 간결하다.” 하였다. 좌우의 관원들이 공문서의 결재를 청하면 임금은, “우리 낭중이 서명하였느냐.” 묻고, 염낭중의 서명의 있으면 결재하고 서명이 없으면 중지하였다. 그를 우리 낭중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친근하게 말한 것이다. 공이 머문 지 9년이 되어서 왕이 훙(薨)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오래 머무를 수 없다.” 하였다. 그때 마침 중국 조정에서 익정사승(翊正司丞)으로 부르니 위계는 봉훈대부(奉訓大夫)였다. 지정(至正) 계미년에 강절성(江淅省)에 봉명 사신으로 나가서 중정원(中政院)의 돈과 재화를 회계 감사하게 되니, 관리들이 뇌물을 보내고 아첨하는 자가 많았다. 공이 일절 물리치니 승상(丞相) 별가 불화공(別哥不花公)이 특별한 예로써 대우하였다. 그가 들어가 정승이 되었을 때, 공을 황제에게 천거하여 말하기를, “노신(老臣)이 강절(江淅)에 있을 때에 염불노(廉佛奴)의 청백함이 남보다 뛰어남을 알았습니다.” 하고, 그 사실을 갖추어 황제에게 아뢰어 장차 공을 등용하려 하였는데, 그때 마침 대부인이 병이 들었으므로 돌아가 근친하기를 힘껏 청하였으므로 등용되지 못하였다. 병술년 6월 17일에 충목왕[明陵]이 말하기를, “염모(廉某)는 원 나라의 황제를 섬기어 조신(朝臣)이 되었고, 나의 대부(大父) 충숙왕을 도와 막관(幕官)이 되어 함께 국정을 꾀하였으니, 나의 오늘에 비록 본국에서는 일찍이 벼슬하지 않았으나 상례(常例)로써 논할 수는 없다.” 하고, 이에 광정대부 삼사우사상호군(匡靖大夫三司右使上護軍)을 제배하였다. 이듬해 가을에는 중대광(重大匡)을 가자하고 수성 익대공신(輸誠翊戴功臣)의 호를 내리었으며 곧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에 옮기었다. 겨울 12월에는 찬성사에 올리었다. 정동성(征東省)의 재속(宰屬)이 대신(臺臣)의 장단점을 문책하고자 하니, 대부 이수(李遂) 공을 지목한 것이다. 공이 말하기를, “대강(臺綱)은 마땅히 흔들 바가 아니다. 더구나 이대부는 한 시대의 인걸이다. 그를 욕되게 해서야 옳겠는가. 내가 말하지 않는다면 나의 배운 것을 저버리는 일이 된다.” 하고, 중국 조정에 들어가 고하여 일이 멈추게 되었다. 무자년에는 판관도사사(判版圖司事)에 승진하였다. 다음 해에 국상이 있어서 정승 왕후(王煦)가 천자에게 조현(朝見)하러 가면서 서정(庶政)을 공에게 위임하니, 공의 재결함이 공평하고 마땅하여 안팎이 편안하였다. 기축년에 충정왕[?陵]이 즉위하여 공을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판판도(重大匡都僉議贊成事判版圖)로 제배하였다. 경인년에는 나라의 표전(表箋)을 받들고 원 나라의 서울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다. 신묘년에는 공민왕이 즉위하여 공을 등용하고자 하니, 조일신(趙日新)이라는 자는 공의 외가 사람인데, 사사로운 감정을 가지고 저해하였다. 일신이 패한 뒤의 다음해에 임금이 말하기를, “염모(廉某)의 어진 것은 내가 아는 바이나 일신이 미워하기를 극심하게 하므로, 내가 그들이 서로 용납할 수 없음을 두려워한 까닭에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늦출 수 있겠느냐.” 하고, 찬성사로 복직시켰다. 갑오년 정월 11일에는 공에게 단성수의 동덕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 판군부사사 상호군 영경령전사(端誠守義同德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都僉議左政丞判軍簿司事上護軍領景靈殿事)를 제배하였다. 2월 16일에는 우정승 판전리 영효사관(右政丞判典理領孝思觀)에 승진하고 나머지는 모두 전과 같게 하였다. 공이 바야흐로 예의(銳意)하여 여러 가지 정사를 새롭게 하려고 하는데, 그 여름에 정승 채하중(蔡河中)이 탈탈대사(脫脫大師)의 세력으로써 왕에게 청병(請兵)하고 복직(復職)하기를 꾀하였다. 공이 그것을 알고 퇴직하기를 비니, 임금도 또한 그의 핍박한 바 되어 채하중(蔡河中)을 쓰고, 공은 곡성(曲城)에 봉하였다. 탈탈대사가 부른 것은 다 재상과 용맹한 사람들이었다. 공도 또한 일행 중에 끼어 있었다. 평양에 이르러서 그 용맹한 무리들이 모의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친족을 떠나고 조상의 분묘를 버린 채 사지에 나아가면 어느 날에나 돌아오겠는가.” 하고, 드디어 공에게 고하고 가지 않으려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 임금이 하늘과 같다. 하늘을 도피할 수 있겠는가. 또 충신 의사라면 어찌 두 가지 마음을 가지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유 정승(柳政丞) 탁(濯)과 더불어 샛길로 빨리 갔다. 이미 제도(帝都)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사람을 달려 보내어 공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염모(廉某)는 고려의 대신이며 또 대족(大族)이다. 예로 대접하여 보내라.” 하고, 휘정원(徽政院)에서 연회를 베풀어 총애하였다. 병신년에 기씨(奇氏)를 베고 공에게 명하여 북쪽 지방에 군사를 주둔하게 하였더니, 대장 인당(印?)이 제 마음대로 함부로 그의 부장(副將) 강중경(姜仲卿)을 죽였다. 국가에서 그가 달아날까 두려워하여 즉시 토죄하지 아니하고 공에게 명령하여 계략을 써서 베이니, 군사들이 변란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중국 조정에서 사자를 보내어 경계에 와서 변란이 일어난 까닭을 물으므로, 공이 기씨(奇氏)가 나라를 뒤엎으려고 한 것을 갖추어 자세히 진술하여 먼저 처리하고 뒤에 알린 뜻을 명확하게 증언하였더니, 과연 천자의 성냄을 돌이키게 하여 간곡히 일방(一方)에 사전(赦典)을 내리게 되었으니 모두 공이 응대를 잘한 힘이었다. 그해 겨울에 도원수(都元帥)로서 북쪽의 변경을 진압하게 하였다. 임금이 절월(節鉞)을 주고 또 말하기를, “공이 간 뒤에는 나는 북쪽을 돌아보지 않겠다.”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신도 또한 쌀이나 소금에 관계되는 일을 가지고 상청(上聽)에 간구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염공(廉公)은 나의 만리장성이다.” 하였다. 그가 군정(軍政)을 다스릴 때에는 마초(馬草)와 군량을 먼저 하고, 성곽과 보루를 그 다음으로 하고, 병기와 기계를 또 그 다음으로 하였다. 공이 비록 처음부터 마음 속에 정하고 있는 일일지라도 반드시 최 부사(崔副使)에게 문의하였다. 최 부사는 지금의 영삼사공(領三司公)이다. 공이 사람을 아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해 겨울에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수문하시중 상장군 판병부사 영경령전사(開府儀同三司上柱國守門下侍中上將軍判兵部事領景靈殿事)에 제배되었다. 다음해에는 판이부사 영효사관사(判吏部事領孝思觀事)에 승진하였다. 신축년 겨울에 공이 이미 임기가 찼다고 하여 직위를 사퇴하였다. 선비들의 여론이 모두 말하기를, “염공은 전선(詮選)을 맡은 것이 다섯 번이나 되건만 일찍이 사사로운 은혜나 혐원(嫌怨)으로써 등용하였거나 내보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종족(宗族)이 비록 많으나 영화스럽고 추요(樞要)한 관직에 있는 자가 없다. 대체로 담담하여 욕심이 적은 것이다.” 하였다.
공이 봉후(封侯)되어 본제(本第)에 간 뒤, 월여 만에 홍건적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임인년에는 벽상 삼한 삼중대광곡성후(壁上三韓三重大匡曲城侯)로 개임(改任)되었다. 임금의 수레에 호종하여 상주(尙州)로 옮겨 가고 또 청주(淸州)로 옮겨 갔을 때, 공은 시중(侍中) 윤환(尹桓) 공과 이암(李巖) 공과 더불어 수종하였다. 다음해 3월에 또 공을 시중(侍中)으로 기용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을사년에 임금이 신돈(辛旽)의 말을 들어 관원을 내쫓고 올려 쓰게 하였다. 신돈이 공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임금에게 참소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아니하였다. 기유년에 특진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삼고, 인하여 곡성백(曲城伯)을 봉하니 돈(旽)이 또 임금에게 참소하였다. 임금이 공의 아들과 사위에게 명하여 신돈을 끊을 수 없는 뜻을 타일렀다. 그러나 공은 더욱 자기의 지키는 바를 굳게 하니 임금이 여기에서 더욱 공을 신임하였다. 올라성(兀羅城)의 전역(戰役)에서 여러 장수들은 공의 절제(節制)를 받아 감히 사람을 많이 죽이지 못하였다. 신돈이 패하니 임금이 더욱더 공을 무겁게 여겼다. 공에게 보국(輔國)이라는 두 글자를 더하고 전과 같이 봉읍(封邑)하였다. 임금이 친히 얼굴을 그려 하사하였으며, 공의 딸을 궁중에 들이어 신비(愼妃)라고 하였다. 부인 권씨(權氏)를 봉하여 진한국 대부인(辰韓國大夫人)이라고 하였으니,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므로 부인에게 봉록을 준 것이니 그전의 일이었고, 그 뒤 중자(仲子) 문하 평리(門下評理) 공이 두 번이나 지공거(知貢擧 고려 때의 과거 시험관)가 되니 당시의 세상에서 부러워하였다. 계축년에 공을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기용하였다. 위계와 겸직은 전과 같다. 판개성 겸감춘추관사 곡성부원군(判開城兼監春秋館事曲城府院君)으로 가자하였다. 대개 총애함이 지극한 것이었다.
행신(幸臣) 김흥경(金興慶)은 청탁하는 바가 많았으나 공이 용납하지 아니하였다. 흥경이 원망하는 말을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염 시중은 중국에서 배웠으며 성품이 또 높고 깨끗하여 조정의 다른 신하들에게 비교할 수 없다. 또 대신의 마음 쓰는 것은 네가 알 바 아니다.” 하였다. 흥경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지금 임금이 즉위하여서는 공을 영문하사(領門下事)로 삼았으며 또 영서연(領書筵)으로 삼았다. 5세에 걸쳐 원로였기 때문이다. 을묘년 정월 초닷샛날 임금이 상을 마치고 정전(正殿)에 납시니, 재신(宰臣)들이 송수(頌壽)하였는데 공이 첫머리에서, “임금되기 어려우며, 신하 노릇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진 이를 친근하게 하고 망령된 자를 멀리하시옵소서.” 하는 등의 말을 아뢰어, 말뜻이 명료하고 간결하니 임금이 얼굴빛을 바르게 하였다. 공을 충성 수의 동덕 논도 보리 공신 영삼사사(忠誠守義同德論道輔理功臣領三司事)에 제배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전과 같게 하였다. 병진년 10월에 원 나라 조정의 예부상서 적흠(翟欽)이 와서 선명(宣命 조칙)을 내리고, 자덕대부 장작원사(資德大夫將作院使)를 명하였다. 공이 절하고 받은 뒤에 사신에게 말하기를, “신은 늙었습니다. 이제 성은을 입고 보답을 도모할 길이 없사와 구구한 심정은 천지같이 큰 것이 있사옵니다.” 하였다. 정사년에 도총도감(都摠都監)을 설치하고 오부(五部) 병마를 훈련시켰는데 공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기미년에는 판문하사(判門下事)가 되고, 경신년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이임(移任)되었으며, 그해 겨울에는 다시 부원군이 되었다. 공은 이미 늙었으나 나라에 크게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재상이 반드시 공과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환(尹桓) 공을 청하여 회의하였다. 공은 단연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반드시 할 말을 다하였다. 공은 거처하는 집을 다스리는데 사치하지도 아니하고 누추하지도 않게 하였으며, 비록 여러 번 이사하였으나 반드시 별원(別院)을 두고 꽃과 나무를 심어 산림과 같게 하였다. 매헌(梅軒)이라고 현액을 걸었다. 향을 피우고 단정하게 앉아 있어서 담담하였다. 손이 오면 술자리를 마련하고 안주와 반찬을 극히 깨끗하게 하여 흐뭇이 취한 뒤에 그쳤다. 풍류가 소쇄(蕭?)하여서 바라보면 신선 같았다. 금년 정월에 기로(耆老)들과 함께 공민왕을 배알하고 느낀 바가 있어서 물러나와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재주 없는 몸으로 공민왕의 지나친 등용을 입어 벼슬이 시중(侍中)에 있은 지 29년이나 되고 나이도 또 79세나 되었다. 내게 병이 자주 나니 반드시 나는 세상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고는, 곧 장사를 박(薄)하게 지내라는 명이 있었다. 3월 2일에 병이 들고 18일 정묘에 정침에서 졸하여, 20일 기사에 임강현(臨江縣)의 대곡(大谷)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그것은 공이 잡아 놓은 터이다. 아, 공은 유감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임금이 일찍이 중관 판후덕사(中官判厚德事) 김실(金實)을 보내 공의 문병을 하게 하였을 때, 공은 의관을 갖추고 어약(御藥)과 궁온(宮?)을 받은 뒤에 김실에게 말하기를, “공은 이 늙은 신하를 위하여 임금께 잘 말씀 아뢰어 주시오. 임금께서 노신(老臣)에게 생각을 마치시는 까닭은 한갓 신이 일찍이 선왕(先王)을 좌우에서 모셨기 때문입니다. 신은 지금 위태롭습니다. 원하건대 임금께서는 날마다 삼가심을 하루같이 하여 오직 끝을 영원하게 하기를 도모하심이 신의 소입니다.” 하였다. 이날에 근비(謹妃)와 의비(毅妃)의 하인이 와서 궁온을 내리었다. 아, 공은 유감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공은 무릇 두 번 장가들었다. 완산군부인(完山君夫人) 배씨(裴氏)는 중대 광완산군(重大匡完山君) 정(挺)의 딸이다. 일찍 사망하였으며 아들이 없다.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권씨(權氏)는 원조(元朝)의 조열대부 태자좌찬선 추성동덕 협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예천부원군 영예문관사(朝列大夫太子左贊善推誠同德協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醴泉府院君領藝文館事)시(諡) 문탄(文坦) 휘 한공(漢功)의 딸이다. 성질이 근검하고 자제를 교육함이 엄하였다. 평상시에는 몸에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선공(先公)이 병들어 수 년이 되었으나. 공을 치료 하고 약 쓰는 일을 더욱 부지런하게 하였다. 3남 5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이름을 국보(國寶)라 하였으며 추충보리공신 중대광 서성군 예문관대제학(推忠輔理功臣重大匡瑞城君藝文館大提學)이다. 다음은 이름을 흥방(興邦)이라 하였으며 충근 익대 섭리찬화공신 전광정 대부문하평리 겸 성균 대사성 예문관 대제학 상호군(忠勤翊戴燮理贊化功臣前匡靖大夫門下評理兼成均大司成藝文館大提學上護軍)이다. 다음은 이름을 정수(廷秀)라 하였으며, 정순대부 밀직사지신사 겸 판전의시사 우문관제학 지제교 충 춘추관수찬관 지전리내시 다방사(正順大夫密直司知申事兼判典儀寺事右文館提學知制敎充春秋館修撰官 知典理內侍茶房事)이다. 맏딸은 봉익대부 밀직부사(奉翊大夫密直副使) 홍징(洪徵)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봉익대부 판내부시사 진현관 제학(奉翊大夫判內府寺事進賢冠提學) 임헌(任獻)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추성좌리공신 봉익대부 밀직사 상호군(推誠佐理功臣奉翊大夫密直使上護軍) 정희계(鄭熙啓)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바로 신비(愼妃)이다. 다음은 중정대부 삼사우윤(中正大夫三司右尹) 이송(李悚)에게 시집갔다. 그 밖에 아들 혜주(惠珠)는 통제원(通濟院) 주지(住持)인데 김씨(金氏)가 낳았다. 광원(廣元)은 봉순대부 판사복시사(奉順大夫判司僕寺事)인데 이씨(李氏)가 낳았다. 딸은 중랑장(中郞將) 홍문필(洪文弼)에게 시집갔으며 김씨(金氏)가 낳았다. 손자와 손녀 몇이 있다. 서성군(瑞城君) 국보(國寶)가 현복군(玄福君) 권공(權公) 휘 염(廉)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을 치중(致中)이라 하였다. 친어군호군(親禦軍護軍)이다. 차자는 치용(致庸)인데 전의부령(典儀副令)이다. 딸은 사헌지평 안조동(安祖同)에게 시집갔다. 문하평리(門下評理) 흥방(興邦)은 종부부령(宗簿副令) 조문경(趙文慶)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는데, 맏은 위위소윤(衛尉少尹) 임치(林?)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어리다. 지신사(知申事) 정수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조득주(趙得珠)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나 어리다. 외손에 남녀 몇이 있다. 밀직부사 홍징의 아들은 이름을 상빈(尙賓)이라 하였는데 성균학유(成均學諭)이다. 다음은 상부(尙溥)인데 산원(散員)이다. 다음은 상연(尙淵)인데 권무(權務)이다. 모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다. 딸은 모두 어리다. 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 임헌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공위(公緯)라 하였으며 낭장이다. 다음은 공진(公縝)인데 별장이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며 딸들도 모두 어리다. 밀직사(密直使) 정희계(鄭熙啓)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으며 중랑장(中郞將)이다. 딸은 어리다. 우윤(右尹) 이송(李悚)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길(佶)이라 하였으며 권무(權務)이다. 다음은 일(佾)인데 어리다. 판사복시사 광원(廣元)이 아들을 낳았으나 어리다. 중랑장 홍문필(洪文弼)이 딸을 낳았으나 어리다. 증손으로도 남녀 몇이 있다. 호군(護軍)이 전법판서(典法判書) 박사신(朴思愼)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怡)라 하였으며 권무이다. 부령이 밀직제학 윤방안(尹邦晏)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순(恂)이라 하였으며 권무이다. 지평이 아들을 낳았는데 금강(金剛)이라 하였으며 권무이다. 딸은 어리다. 아, 공이 오복(五福)을 갖추어서 자손이 길한 것을 만남이 이와 같다.
하늘이 공에게 후하게 한 것은 거기에 반드시 그렇게 하는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대대로 신하인 구가(舊家)의 여경(餘慶)인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남에게 은택을 입힌 밝은 징험인가. 신은 여기에서 실로 감동되어 일어나게 하는 바가 있다. 공과 같은 사람이 묘당(廟堂) 위에 계속 이어진다면 태평의 기대가 어찌 오늘보다 더 낫지 않겠는가. 아, 공은 이제 가고 없구나. 아, 공은 없구나. 신 색(穡)은 삼가 손을 마주잡고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올린다. 명에 이르기를,
공의 나이 젊었을 때 / 公在妙齡
황제의 조정에서 높이 뛰어났고 / 敭翹帝庭
돌아와 정동성의 막료 중에 장이 되니 / 歸長省幕
다스림은 평온하고 백성들은 편안하였다 / 理靜民寧
다섯 임금의 조정을 차례로 섬기면서 / 歷事五朝
국가의 위령을 드높였다 / 敭國威靈
진정하면 무거움이 산악과 같고 / 鎭之山嶽
움직이면 뇌성처럼 위엄이 떨쳤네 / 動以雷霆
어려운 그때를 / 時之艱矣
공이 마침 만났는데 / 公乃適丁
삼군은 목숨을 바치고 / 三軍效命
온갖 법은 바로 섰다 / 百度惟貞
생민들은 양육하고 / 生民是育
종사는 호위하여 / 宗社是屛
바르게 하고 곧게 하며 / 以匡以直
기르고 편하게 하니 / 以毒以亭
여러 사람들의 병은 낫게 하고 / 衆病以?
취한 자는 깨게 했네 / 群醉以醒
태평하게 된 것은 / 大平之目
신명이 들어준 것이네 / 神明所聽
착하신 공민왕이 / 於穆玄陵
그의 모습 친히 그리니 / 親圖其形
풍부한 공훈이며, 성대한 덕행이 / ?功盛德
단청에 밝게 빛이 난다 / 煥乎丹靑
공은 진실로 원로이며 / 展也元老
온 나라의 모범이로다 / 一國儀刑
어찌하여 백세 향수 못하셨는가 / 胡不期?
하늘과 땅이 아득하고 어둡구나 / 天地杳冥
높은 산과 낮은 늪은 끊은 듯 구획지고 / 有截原?
냇물은 서늘하네 / 川流??
산은 멈춰 서고 정기는 쌓여 있어 / 山止氣畜
분묘의 터전은 아름답구나 / 有美泉?
비석이 우뚝 솟아 / 有突?碑
위로 별에 이르네 / 上磨于星
천추에 와전 없이 / 千載勿訛
우리 동토에 비쳐 주리라 / 照我東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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