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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碑銘) 서천 제납박타존자 부도명 병서 (西天提納薄?尊者浮圖銘) (幷序)-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5. 1. 03:02

비명(碑銘)
 
 
서천 제납박타존자 부도명 병서 (西天提納薄?尊者浮圖銘) (幷序) 
 

이색(李穡)

가섭백팔전(迦葉百八傳)에 의하면 제납박타존자(提納薄?尊者) 선현(禪賢)의 호는 지공(指空)이다. 태정(泰定) 연간에 난수(難水)가에서 천자를 뵙고, 불법을 논하여 천자의 뜻에 맞았다. 관계 관사[有司]에 명하여 해마다 옷과 양식을 주니, 사(師)가 말하기를, “내가 이것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고, 떠나가서 동쪽으로 고구려에 노닐어,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참례하였더니, 황제(중국)가 연경(燕京)으로 돌아오기를 재촉하였다. 천력(天曆)의 처음에 조서를 내려, 사랑하는 여러 중들과 더불어 내정(內庭)에서 불법을 강설하게 하고, 천자가 친히 임석하여 설법을 들었다. 여러 스님들이 은총을 믿고 오만한 기세를 부리며, 그가 자기네의 은총을 앗아갈 것을 미워하여, 막아서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여러 중들 중에서 어떤 자는 베임을 당하고 어떤 자는 쫓겨났으며, 사의 명성은 중외에 떨치어 드러났다. 지정황후(至正皇后)와 황태자가 연화각(蓮花刻)에 맞아들여 불법을 물으니, 사가 아뢰기를, “불법은 스스로 배우는 자가 따로 있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다스리는 데에만 전심하심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만물과 만복의 만 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없어도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바치는 주옥(珠玉)을 사양하고 받지 아니하였다. 천력 연간 이후로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은 지 10여 년이나 되었다. 이미 말을 하게 되었을 때에는 가끔 스스로, “나는 천하의 주인이다.” 하고, 또 후비(后妃)를 가리켜 말하기를, “모두 나의 시녀(侍女)들이다.” 하였다. 듣는 자가 괴이하게 여기었으나 감히 그 까닭을 묻지 못하더니, 오랜 뒤에 임금에게 알려지자 임금이 이르기를, “저는 법중왕(法中王)이니 마땅히 그 자부함이 이러할 것이다. 우리 집일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하였다. 중원병(中原兵)이 장차 일어나려 할 때, 사가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병마(兵馬)가 많은 것을 아는가. 어디에 몇 만 명이 주둔하고, 어디에서 몇 만 명이 주둔하고 있다.” 하였다. 사가 살고 있는 절에는 다 고려의 중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말하기를, “네가 무슨 까닭으로 배반하느냐.” 하고, 고취(鼓吹)를 울리려고 하다가 중지하였다. 수일 뒤에 요양성(遼陽省)에서 달려와 고려의 군사가 국경을 침범하였다고 아뢰었다. 경사(京師 서울)라는 곳은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사가 매양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빨리 떠나가라.” 하더니, 얼마 뒤에 천자가 북쪽으로 순수하고 중원병(中原兵)이 입성하여, 부(府)를 세우고 북평(北平)이라고 하였으니 사의 말한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의 증조의 휘(諱)는 사자협(師子脇)이고 나의 조(祖)의 휘는 곡반(斛飯)이며 모두 가비라국(伽毗羅國)의 왕이다. 나의 아버지의 휘는 만(滿)이며 마갈제국(摩竭提國)의 왕이다. 나의 어머니는 향지국공주(香志國公主)이며, 나의 두 형은 실리가라파(悉利伽羅婆)와 실리마니(悉利摩尼)이다. 나의 부모가 동방(東方)의 대위덕신(大威德神)에게 기도하여 나를 낳았다. 나는 어릴 때에 성질이 맑고 깨끗한 것을 즐기고 술과 마늘을 먹지 아니하였다. 다섯 살 때에 스승에게 가서 나라의 글과 외국의 학문을 배웠으며, 대강 그 대의(大義)만을 깨닫고는 버리었다.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의약(醫藥)의 효력이 없었다.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적자(嫡子)가 중이 되면 임금이 병이 완쾌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아버지가 세 아들에게 물었다. 내가 즉시 응낙하니 아버지가 크게 기뻐하여, 나의 아명(兒名)을 불러 말하기를, “누달라치파(婁???婆)야 네가 능히 할 수 있느냐.” 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막내아들이라 하여 처음에는 매우 난처하게 여겼으나, 마침내 아쉬움을 참고 중으로 내주기를 원하게 되어서 아버지의 병이 금방 나았다. 8세에 삼의(三衣 비구가 입는 세 가지 옷, 즉 승가리(僧伽梨)ㆍ중의(重衣)ㆍ대의(大衣))를 잦추고, 나란타사(那蘭?寺)의 강사(講師) 율현(律賢)의 문하에 보내어 머리를 깎고 오계(五戒)를 받게 하였다.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密多經)》을 배우다가 얻음이 있는 것 같아서 제불(諸佛)과 중생의 허(虛)와 공(空) 두 경계를 물으니 강사가 말하기를,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것이 참 반야(盤若)인 것이다. 남인도(南印度)의 능가국(?伽國) 길상산(吉祥山) 보명(菩明)에게 가면 심오한 뜻을 궁극히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 때 나의 나이는 19세였다. 분발하여 홀로 찾아가서 우리 스승을 정음암(頂音菴)에서 배알하니, 스승이 말하기를, “중축(中竺)으로부터 여기에 닿기까지의 보수(步數)를 셀 수 있는가.” 하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하였다. 물러나와 암석(岩石)의 동굴에 앉아서 6개월을 지냈다. 내가 깨닫고 일어나려고 하니 두 다리가 서로 붙어서 떨어지지 않아서 그곳 임금이 의원을 불러 약으로 치료하니 곧 나았다. 나는 스승에게 고하기를, “두 다리가 한 걸음입니다[兩脚是步].” 하였다. 나의 스승이 의발을 내게 붙였다. 〈마정기(摩頂記)〉에 말하기를, “산을 한 걸음에 내려오니 이는 사자아(獅子兒)로구나. 나의 문하에서 법을 얻어 출신한 자가 2백 43명이나 되지만, 중생에게 다 인연이 적다. 네가 나의 교화를 넓혀라. 가서 힘쓰라.” 하고, 소나적사야(蘇那的沙野)라고 호를 지어 주었다. 중국말로는 공(空)을 가리킨다. 나는 게(偈)를 지어 스승의 은혜를 사례하였다.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아가면 허공이 텅 비어 환하게 틔여 있고, 물러나면 1만 가지 법이 함께 잠겨버린다.” 하고 한마디 크게 소리쳤다. 처음에 내가 나의 스승을 찾아갈 때에, 나라허국(??許國)을 지나는데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게를 설명하여 그 의문을 풀어 주었다. 단치국(旦?國)은 남녀가 섞여 살며 벌거벗고 있으므로 내가 큰 도를 주었다. 향지국(香至國)에서는 임금이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의 생질이다.” 하였다. □ 머루르기를 즐기지 아니하였다. 화엄사(華嚴師)가 널리 20가지의 보리심(菩提心)을 강설하고 있으므로, 내가 하나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가릉가국(迦陵伽國)의 바닷가 귀봉산(龜峰山)에 범지(梵志) 가 살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천길 만 길 되는 가파른 벼랑에 몸을 던져 죽는다면, 마땅히 인간계와 천상계의 왕(王)의 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수행하는 것은 마음에 있는 것인데, 육신에 무슨 관여가 있는가.” 하고 육도(六度 보살 수행의 여섯 가지 덕목)ㆍ 십지(十地) 등의 법을 닦게 하였다. 하안거(夏安居)의 결제일(結制日 음력 4월 16일)에 마리지산(摩利支山)에서 드디어 능가국(?伽國)에 도착하였다.
이미 나의 스승을 하직하고 산에서 내려오니 무봉탑주(無縫塔主)인 노승이 반 길을 마중 나와 맞아 주었다. 내가 얻은 바가 있음을 알고 나에게 법을 강연하라고 하였다. 나는 탑을 칭송하고, 우지국(于地國)으로 갔다. 그곳은 군주(君主)가 외도(外道 불교 이외 모든 교)를 믿어서 나에게 살생ㆍ도둑질ㆍ사음(邪淫)의 계(戒)가 있다고 하여 기녀를 불러서 같이 목욕하게 하였다. 내가 태연하기가 죽은 사람과 같으니, 임금이 찬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기필코 이인(異人)이다.” 하였다. 그 외도는 나무와 돌로 수미산(須彌山)을 만들고, 사람의 머리ㆍ가슴ㆍ넓적다리에 산 하나를 고요히 세운 뒤에, 술과 음식으로써 산에 제사지내고 남녀가 그 앞에서 교합하는데, 이름을 음양공양(陰陽供養)이라고 하였다. 내가 인간계와 천상계, 미(迷)와 오(悟)의 이치를 들어 사교를 타파하고, 국왕을 도와서 불도를 믿게 하였다. 내가 게(偈)로써 사뢰니 임금이 게로써 답하였다. 내가 다시 게로써 아뢰니, 임금이 진기한 구슬 두어 개로써 시주하였다. 모임 가운데 여승이 있었는데, 여러 사람들을 젖혀 놓고 묻기를, “저 스승과 이 제자 중간은 누구입니까.” 하였다. 내가 한 게를 지어 보이니 여승이 크게 깨닫고, “바늘눈 속에 상왕(象王)이 지나감[針眼中象王過之]”이라는 게송(偈頌)을 지은 것이 있다. 사자국(獅子國)에는 여래발(如來鉢)과 부처님의 발자국이 있는데, 바리때는 그 한 바리때의 밥을 가지고 1만 명의 중을 능히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부처님의 발자국은 때때로 빛을 말한다고 한다. 내가 다 우러러 구경하고 절하였다. 마리야라국(??耶?國)에서는 범지(梵志)를 신앙하였으므로 나는 들리지 아니하였다. 차라박국(??縛國)에서는 정도(正道)와 사교(邪敎)를 함께 믿고 있었다. 내가 좌석에 기대앉아서 말을 하니 여승 중에 말없이 뜻이 서로 통하는 자가 있었다. 가라나국(迦羅那國)도 또한 외도를 신앙하였다. 그곳 왕이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내가 《대장엄공덕보왕경(大莊嚴功德寶王經)》 마혜사라왕인지품(摩醯莎羅王因地品)을 보여 주었더니 왕이 말하기를, “법 밖에 또 바른 법이 있구나.” 하였다. 외도의 신도들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내가 즉시성을 나와 버렸다. 해는 이미 깜깜하게 어두워졌으며 범이 오고 있었다. 시자(侍者)가 까마귀의 소리를 알아듣고 나무에 올라가 범을 피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네가 이미 새소리를 알아들으니 내가 설법하는 것을 능히 알 수 있느냐.” 하니, 시자가 말이 없었다, 삼삼봉(三三棒)을 크게 행하였더니 드디어 깨달았다. 신두국(神頭國)은 사막이 아득하고 멀어서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 나무가 있는데 그 열매가 복숭아 같았다. 굶주림이 심하여 두개를 따서 다 먹기도 전에 공신구도공거광전노인(空神句到空居廣殿老人)이 자리를 바로하여 말하기를, “도적은 어찌 절하지 않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나는 불교도이다. 어찌 너에게 절할 수 있겠느냐.” 하니, 노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미 불교도라고 말하면서 어찌 과일을 훔쳤느냐.”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굶주림과 목마름이 핍박하였기 때문이다.” 하였다. 노인이 말하기를,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은 도둑이다. 이제 너를 놓아 주겠으니 불계(佛戒)를 잘 수호하라.” 하였다. 눈을 감게 하고 잠깐 사이에 이미 저쪽 언덕에 이르렀다. 누워 있는 나무 위에서 물을 끊이는데 그 나무는 바로 큰 뱀이었다. 적리라아국(的??兒國)의 여인이 교합(交合)하기를 요구하였다. 굶주렸기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고자 하여 장차 응할 것 같이 하면서 그의 말[馬] 중 어느 것이 좋은 것인가 물으니 실지대로 일러 주거늘, 내가 곧 그 말을 타고 달리니 나는 듯하여 문득 다른 나라의 지경에 이르렀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를 묶어 가더니 그의 양(羊)을 먹이라고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왔는데, 동굴에 들어가서 선정에 들어갔더니 7일째인 밤에 흰 빛 광채가 동굴에서 뻗쳐 나왔다. 그 사람이 눈을 헤치고 들어와서 나의 가부좌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옷과 보물을 시주하였지만 받지 아니하였다. 남녀가 함께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나에게 바른길을 알려 주었다. 가기를 오래하여도 사람을 볼 수 없더니 뜻밖에 길에서 만나게 되어 마음으로 매우 기뻐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붙잡아서 왕이 계신 곳에 데리고 가서 면전에 꿇어앉히고 말하기를, “하늘이 가문 것은 반드시 이 요괴 때문입니다. 청하건대 죽이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직 놓아 주어라. 3일 동안 비가 오지 않거든 그때에 죽인들 무엇이 늦겠느냐.” 하거늘, 내가 향을 피우고 한번 비니 큰 비가 사흘 동안이나 내리었다. 차릉타국(嵯楞?國)에 미친 중이 있었다.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우두(牛頭) 세 개를 땅에 벌여 놓고 부들방석을 그 위에 깔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한번 보고 불태워 버리니 그가 부르짖기를, “산하(山河)와 대지가 한 조각이 되었구나.” 하였다. 아누지(阿?池)에는 중 도암(道巖)이 그 곁에 살면서 풀로 작은 암자를 짓고 있다가 사람이 오면, 불태우면서 “불을 끄라. 불을 끄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내가 도착하자 역시 불을 끄라고 부르짖었다. 정병(淨甁 깨끗한 손을 씻는 물을 담는 병)을 발로 차서 엎지르니 도암(道巖)이 말하기를, “아깝다. 오는 것이 왜 그리 늦었는가.” 하였다. 말라사국(末羅娑國)은 부처님을 섬기기를 매우 삼갔으나 사교(邪敎)와 정도(正道)가 섞여 있었다. 내가 설법하여 사론(邪論)을 타파하니 외도(外道)가 바른 길로 돌아왔다. 성동(城東)에서는 보화상(寶和尙)이 그가 살고 있는 곳의 사방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고 채소의 씨앗 한 그릇을 놓아두고 사람이 오면, 자신은 밭을 다스릴 뿐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내가 채소의 씨앗을 가지고 좇아다니며 뿌리니, 중이 부르짖기를, “나물이 났다. 나물이 났다.” 하였다. 그 성 안에 비단을 짜는 이가 있었는데, 사람이 와도 말을 하지 않고 비단만 짰다. 내가 칼로 끊어버리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의 짜던 일이 끝났다.” 하였다. 아누달국(阿?達國)에서는 중 성일(省一)이 기와 굽는 아궁이 속에서 살면서 사람이 오는 것을 보면 그을음을 낯에 바르고 나와서 춤을 추고는 다시 돌아가곤 하였다. 내가 계(偈)로써 그 잘못을 꾸짖었다. 조사국(早娑國)에서는 중 납달(納達)이 두어 해 동안을 길가에서 살면서 오는 사람을 보면 “잘 오셨소.” 하고, 가는 이를 보고는 “잘 가십시오.” 하였다. 내가 문득 세 번 몽둥이로 치니 그가 한 번 주먹으로 반격하였다. 적리후(的?侯)의 나라에는 바라문교(婆羅門敎)가 성행하므로 나는 손을 대지 않고 지나갔다. 정거리국(???國)에서는 진종(眞宗)과 사교(邪敎)가 같이 퍼져 있었다. 도적을 만나서 옷을 빼앗기고 알몸이 되었다. 미가라국(?伽羅國)에서는 왕이 나를 안으로 맞아들여 설법을 청하였다. 보봉(寶峰)이라고 하는 자가 있어서 불경을 강설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더불어 현상(玄相)을 선양하여 강설하였다. 동쪽으로 수일 동안을 가니 높은 산이 있는데 철산(鐵山 쇠로된 산)이라고 하였다. 흙도 돌도 풀도 나무도 없으며, 해가 비추면 아침볕은 그 형세가 불과 같았다. 다른 이름은 화염산(火焰山)이며, 7,8일 동안을 가야 산정(山頂)에 도달할 수 있다. 무릇 17,8개의 국가가 있으며, 가로 하늘 북쪽과 연접하여 있는데, □ 그것이 몇 천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그 동쪽에서 하수(河水)가 나온다. 양쪽 언덕이 높이 솟아 있어 □ 다리로 건너는데, 얼음과 눈이 녹지 아니하므로 설산(雪山)이라고 부른다. 외로운 몸으로 굶주림이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들 과일을 씹으면서 서번(西蕃)의 국경에 도달하였다. 내가 중국에 교화를 펼 때, 북인도(北印度)의 마가반특달(摩訶班特達)을 서번(西蕃)에서 만나 함께 연경에 도착하였다.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서쪽으로 안서왕(安西王)이 부중(府中)에 노닐었다. 왕 전가제(傳可題)와 만나니 제(提)가 나에게 머물기를 청하여 불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나의 뜻이 두루 돌아다니는 데 있었으므로,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불도는 자비한 생각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대가 이것을 배우려는 마음이 더욱 더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제가 말하기를, “중생들이 태초부터 악업(惡業)을 이루 셈할 수 없이 쌓았으므로, 내가 진언(眞言) 한 귀로 저들을 제도하여 초월한 삶을 얻어 하늘의 즐거움을 받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네 말이 망녕되다. 사람을 죽인 자는 남이 또한 너를 죽이는 것이다. 생과 사가 서로 대응하는 그것이 고(苦)의 근본인 것이다.” 하니 제(提)가 말하기를, “그것은 외도(外道)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자비라는 것은 진정 불자의 도리인 것이다. 이것에 위반한다면 그야말로 외도인 것이다.” 하였다. 왕이 바치는 선물이 있었으나 받지 아니하였다. 서번(西蕃) 마제야성(摩提耶城)은 그곳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었으나 주사(呪師)가 나를 미워하여 차[茶] 물에 독을 넣어 마시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사신(使臣)이 왕도(王都)에서 와서 나에게 청하여 함께 돌아갔다. 반특달(班特達)의 스승으로 하여 서로 협력하여서 교화를 밝히고자 하였는데, 뜻이 서로 맞지 않아서 또 떠나갔다. 가단(伽單)의 주사(呪師)가 나를 죽이려고 하므로 나는 곧 하성(蝦城)으로 갔다. 성주(城主)가 나를 보고 크게 기뻐하니, 외도(外道)가 나를 질투하여 나의 치아 한 개를 부러뜨렸다. 장차 떠나가려고 하는데, 그가 길에서 기다려 반드시 죽이려고 하므로 그의 성주가 나를 호송하여 주었다. 촉(蜀)에 이르러서 보현(普賢)의 거대한 불상에 예배하고, 3년을 좌선하였다. 대독하(大毒河)에서는 도적을 만나서 또 발가벗고 달아났다. 나라사(羅羅斯) 땅의 경계에서 한 중이 승복 한 벌을 주었으며, 어떤 여인이 작은 옷 한 가지를 주었다. 그리고 단가(檀家)의 공양(供養)에 응하였는데, 같이 공양을 받는 중이 내놓은 산 거위를 붙잡아서 삶아 먹으려고 하므로 내가 그의 아내를 때렸다. 아내가 우니 중이 성을 내어 나는 쫓겨났다. 내가 들으니 그곳의 관원이 나의 상(像)을 만들어 놓고 수재나 한재나 전염병이 있을 때에 기도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다고 한다. 금사하(金沙河) 관소(關所)의 아전이 내가 부인옷을 입고 머리털이 또 긴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기 어디에서 오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아니하므로 인도의 글자로 써 보였으나, 또 알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억류되었는데, 늦게 돌 틈에 구부리고 누웠더니 깨닫지 못한 잠깐 사이에 피안(彼岸)에 도착하였다. 진도(津渡)의 사람이 나를 기이하게 여겨 예배하였다. 운남성(雲南城)의 서쪽에 절이 있었다.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선정에 들어갔더니 거기 사는 중이 성안에 들어오기를 청하여 조변사(祖變寺)에 이르러 오동나무 아래에 앉았다. 이날 밤에 비가 왔으나 밝은 다음에 보니 옷이 젖지 아니하였다. 성(省)에 가서 날이 개기를 빌었더니 당장에 감응하였다. 여름에 용천사(龍泉寺)에 앉아서 범자반야경(梵字般若經)을 서사(書寫)하였는데, 여러 사람이 모여서 물이 부족하였으므로, 내가 용(龍)에게 명하여 샘물을 끌어다가 여러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대리국(大理國)에서 나는 여러 가지 음식을 물리치고 다만 호도(胡桃) 아홉 개만 먹고 날을 넘기었다. 금치오(金齒烏)는 철오몽(撤烏蒙)의 한 부락이다. 나를 예배하여 스승으로 삼고 상(像)을 빚어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 내가 들으니 무뢰배가 나의 소상(塑像)의 선봉(禪棒)을 땅에 던졌다가 들 수가 없었다. 뉘우쳐 사과하고 잡으니 쉽기가 전과 같았다고 한다. 안녕주(安寧州)의 중이 묻기를, “옛날 삼장법사(三藏法師) 진체(眞諦)가 당 나라에 들어왔을 때에는 벽지(僻地)에서도 어음(語音)을 알았다는데.” 하였다. 그때 나는 이미 운남의 말을 알고 있었으므로 응답하기를,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고, 성인과 범인은 길이 다른 것이다.” 하였다. 계경(戒經)을 설법하기를 청하여 정수리에 불이 타고 팔이 불타는 것처럼 급하고 열렬하게 하였다. 관민(官民)이 다 그러하였다. 중경로(中慶路)의 여러 절에서 설법을 청한 것이 무려 다섯 번이나 되었다. 태자가 나에게 예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나라(羅羅)의 사람들은 원래 부처도 중도 알지 못하였는데, 내가 도착한 뒤에는 모두 발심하였으며 나는 새도 또한 염불하는 소리를 하였다. 귀주(貴州)에서는 원수부(元帥府)의 관원들이 모두 수계(受戒)하였다. 묘만(猫蠻)ㆍ요동(??)ㆍ청홍(靑紅)ㆍ화죽(花竹)ㆍ타아(打牙)ㆍ갈로(??) 등 여러 동네의 오랑캐들이 모두 진기한 채소를 가지고 와서 수계하기를 청하였다. 진원부(鎭遠府)에 마왕신묘(馬王神廟)가 있는데, 배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고기를 제수(祭需)로 하여 제사를 지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가 파손된다고 하였다. 내가 한번 큰소리로 꾸짖고 배를 출범시켰다. 상덕로(常德路)로 가서 금강(金剛)ㆍ백록(白?) 두 조사(祖師)와 관음의 자소상(自塑像)에 예배하였다. 동정호에서는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자못 많았다. 능히 바람과 비를 멈추게 하였는데, 내가 갔을 때 마침 바람이 일어나고 물결이 끓어올랐으므로 내가 삼귀오계(三歸五戒)를 설법하여 중국말과 인도말로 번갈아 선설(宣設)하였다. 그리하여 풍랑을 멈추게 한 것이다. 전에는 제사지내는 자가 밤에 실로 짠 신을 제물로 바치고 날이 밝으신 신을 다 부수는 것이었는데, 내가 간 뒤에는 그 바치는 제물을 다 물리치고 소제(素祭)로 지내게 하였다. 호광성참정(湖廣省?政)이 나를 쫓아 보내려고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빈도(貧道)는 인도(印度) 사람이다. 멀리 와서 황제를 뵈옵고 바른 법을 선양하도록 도우려 하는데, 너는 황제의 수(壽)를 축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가.” 하였다. 여산(盧山)의 동림사(東林寺)를 지나다가 전신탑(前身塔)이 우뚝 솟은 것을 보았다. 뼈가 아직도 썩지 않았었다. 회서관(淮西寬)이 반야(盤若)의 의미를 물었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삼심(三心)은 얻을 수 없다.” 하였다. 양주태자(楊州太子)가 배로 나를 보내어 수도에 이르게 하였다. 대순승상(大順丞相)의 아내 위씨(韋氏)는 고려 사람이었다. 숭인사(崇仁寺)에 나를 청하여 시계(施戒)하였다. 조금 뒤에 난경(?京)에 이르렀으니 태정(泰定) 연간에 지우(知遇)를 받았다는 것이 이때였다.” 하였다.
아, 사(師)의 유력(遊歷)이 이러하니 진실로 남들과는 다르다. 사는 천력(天曆) 연간부터 승의(僧衣)를 벗고 귀인의 옷을 입었다. 대부대감(大府大監) 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의 아내 김씨도 역시 고려 사람이었다. 사를 좇아 중이 되어 증청리(澄淸里)에 집을 사서 절을 마련하고 사를 맞아다가 살게 하였다. 사가 그 절의 편액(扁額)을 법원(法源)이라고 제목하였으니, 대체로 천하의 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므로 그 뜻을 취하여 스스로 비유한 것이다. 사는 변발(?髮)과 흰 수염으로 용태는 검고 빛이 나며, 의복과 음식은 더할 수 없이 사치하였다. 평소에 의젓하고 엄숙하여 사람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하였다. 지정(至正) 22년 겨울에 내시가 오니 사가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너의 임금에게 내가 생일을 지난 뒤에 갈 것이지, 생일 전에 갈 것인지를 아뢰어 보라.” 하였다. 장패향(章佩鄕)이 속히 첩목아(帖木兒)의 회지(回旨)를 부쳐 와서 사에게 한겨울만 조금 더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다. 사가 또 말하기를, “천수사(天壽寺)는 나의 영당(影堂)이다.” 하였다. 이해 12월 20일에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입적하였다. 귀화방장이란 사가 집을 세우고 사가 명명한 곳이다. 황제의 명령이 있어서 성(省)ㆍ원(院)ㆍ대(臺)의 모든 관사(官司)에서 의식을 갖추고 호위하여 천수사의 감실(龕室)에 안치하였다. 다음 해에 어사대부 도견첩목아(圖堅帖木兒)ㆍ평장백(平章伯) 첩목아가 향을 싸 가지고 와서 사의 시체를 배알하고 향과 □를 바른 베[布]와 매화나무와 계수나무와 빙단(氷團)을 사용하여 육신(肉身)을 빚어 상(像)을 만들고, 무신년 가을에 병임성(兵臨城)에서 화장하고 유골을 4분하여 달현(達玄)ㆍ청혜(淸慧)ㆍ법명(法明)과 내정(內正) 장록길(張祿吉)이 각각 가지고 갔다. 그의 무리 달현이 바다를 건너오는데, 사도 달독(司徒達督)은 청혜(淸慧)에게서 얻어가지고 함께 우리 나라로 돌아왔다. □임자년 9월 16일에 왕명으로 회암사(檜巖寺)에 부도를 세우고 장차 탑 안에 넣으려고 유골을 물에 씻다가 사리 몇 개를 찾아내었다. 사가 인도(印度)에서 문수사리(文殊師利)의 《무생계경(無生戒經)》 2권을 가지고 왔다. 참정(參政) 위대박(偉大朴)이 그 첫머리에 서문을 쓰고, 손수 《원각경(圓覺經)》이라고 썼으며, 구양승지(歐陽承旨)가 그 말미에 발문을 썼다. 사의 계송(偈頌)은 매우 많아 따로 기록되어 있어서 다 세상에 퍼져 있다. 운남(雲南)의 오무견능언(悟無見能言)이 7세에 사를 의탁하고 출가하였을 때에 이미 말하기를, “스승의 나이는 육십갑자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하였는데, 오(悟)가 75세 때에 사가 입적하였다. 길문강(吉文江) 중 인걸(仁杰)이 말하였다. 문인(門人) 전 임관사(林觀寺) 주지 달온(達蘊)은 사의 도행을 기록할 것을 꾀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더 부지런하게 하며, 사도 달독은 험하고 어려운 수천 리를 사의 뼈를 받들어 산 사람을 섬기 듯하여 죽음을 보내는 데 유감이 없게 하였고, 나옹(懶翁)의 제자 모(某)가 말하기를, “우리 스승도 또한 일찍이 사를 스승으로 하였으니, 사는 곧 우리의 조(祖)입니다.” 하고, 사의 제자인 정업원 주지(淨業院住持) 묘장비구니(妙藏比丘尼)와 더불어 연석(燕石)을 사서 장차 회암서의 언덕에 세우기로 하였으니, 천륜으로써 비유해 본다면 효자ㆍ순손(順孫)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 일을 듣고 천자가 명하여 신 색이 명을 짓고, 신 수(脩)가 써서 신 중화(仲和)가 전자(篆字)로 편액(扁額)을 쓰라고 하였다. 신 색은 말하기를, “사의 육신은 이미 화장하여 넷으로 나누어졌는데, 그 나머지의 유골은 어느 곳에 탑을 세우게 하며, 명을 구하여 그것이 전하여지기를 꾀하는 자는 누구이며, 그 붓을 잡는 자는 누구일지 알지 못하겠노라. 또 알지 못하겠다. 지공선사가 여기에 계시는지, 저기에 계시는지, 또한 선세(蟬? 해탈)하여 다시 돌아보거나 소중히 여김이 없는 것을 그의 문도된 자들이 그의 은혜를 갚으려고 억지로 하는 것인가. 신은 여기에서 느낌이 없을 수 없다. 삼가고 두려워하여 명을 받들고 이어서 명을 쓴다.” 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스님의 발자취는 / 維師之迹
서역에서 시작되었다 / 發?西域
만왕의 아들이요 / 滿王之子
보명의 적통이다 / 普明之嫡
난경에서 지우를 만나니 / ?京遇知
좋은 때로다 / 允也其時
연화를 방문함이 / 延華之訪
왜 그리 늦었던가 / 云何其遲
나의 자취 돌아보니 / 回視我轍
가지 않은 나라 없으니 / 靡國不歷
지붕 위에서 병의 물을 쏟은 듯하고 / 屋建之?
물에 던진 돌처럼 거침이 없네 / 水投之石
천력(문종)이 승려를 사랑하였으나 / 天曆幸僧
나만은 부처인양 사랑 더욱 더하였다 / 拂我以增
지금 옷 입으니 / 服今之服
도예는 더욱 높다 / 道譽愈騰
미친 말 농지거리 / 狂言戱謔
남이 알 바 아니지만 / 匪人攸測
사전에 병화 말해 / 談兵未?
분명히 밝혀내니 / 如析白黑
먼저 봄이 밝은 것은 / 先見之明
도에 정한 때문이다 / 乃道之精
어떤 이는 의심하고 어떤 이는 비방하나 / 或疑或謗
스님의 마음이야 편하기만 하였다 / 師心則平
사리 이미 빛이 나니 / 舍利旣赫
송구하지 않음이 없다 / 罔不?息
누가 사람의 성품이 / 孰謂人性
극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가 / 不協于極
여기 회암사에 / 胥斯檜巖
돌 세우고 명을 새긴 것을 보아 / 樹石以?
조금도 와전됨이 없게 하여 / 無敢或訛
길이 보게 하노라 / 于永厥監

하였다.


[주D-001]범지(梵志) : 바라문의 생활 가운데 제 1기에 해당한 동안의 사람 범사(梵士).
[주D-002]십지(十地) : 보살 수행의 계위(階位)인 52위 중 제 41위로부터 제50위까지의 1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