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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碑銘) 고려국 증 순성 경절 동덕 보조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5. 1. 03:05

비명(碑銘)
 
 
고려국 증 순성 경절 동덕 보조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문하시중 판전리사사 완산부원군 삭방도만호 겸병마사 영록대부판장작감사이공신도 비명 병서 (高麗國贈純誠勁節同德輔祚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判典理司事完山府院君朔方道萬戶兼兵馬使榮祿大夫判將作監事李公神道碑銘) 幷序 
 

이색(李穡)

전주(全州) 이씨(李氏)는 대성(大姓)이다. 신라의 아간(阿干) 휘 광희(光禧)가 사도삼중대광 입전(司徒三重大匡立全)을 낳고, 사도가 긍휴(兢休)를 낳고, 긍휴가 염순(廉順)을 낳고, 염순이 승삭(承朔)을 낳았으며, 승삭이 충경(充慶)을 낳고, 충경이 경영(景榮)을 낳고, 경영이 충민(忠敏)을 낳고, 충민이 화(華)를 낳고, 화가 진유(珍有)를 낳고, 진유가 궁진(宮進)을 낳고 궁진이 대장군(大將軍) 용부(勇夫)를 낳았다. 대장군이 내시집주(內侍執奏) 인(隣)을 낳으니, 집주는 시중(侍中) 문공(文公) 휘 극겸(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將軍) 양무(陽茂)를 낳았다. 장군 양무는 상장군(上將軍) 이공(李公) 휘 강제(康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사(安社)를 낳으니 안사는 성품이 호방하여 뜻이 천하에 있었다. 일찍이 의주(宜州)의 수령이 되어서 어진 정사를 하였다. 인척 관계로 강릉부(江陵府)의 삼척현(三陟縣)에 이거(移居)하였으니, 대개 그곳의 풍속을 즐겨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으로써 지현(知縣)의 뜻에 거슬리게 되었다. 지현이 해치려고 꾀하는 것을 어떤 사람이 공에게 알리니, 공이 가족을 이끌고 몽고씨(豪古氏)에게 달아났다. 몽고씨가 그를 남경(南京)에 살게 하고 5천 호소(戶所)의 다루가치를 삼았다. 다루하치가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이공(李公) 휘 공숙(公肅)의 딸에게 장가들어 천호 행리(千戶行里)를 낳았으니 그의 관직을 승습(承襲)하였다. 원 나라의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하게 되어 천하의 병선(兵船)들이 우리 나라에 모였다. 우리 충렬왕(忠烈王)이 중신(重臣)을 보내어 큰 군함(軍艦)을 짓게 하고, 명장을 선택하여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함께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남경천호(南京千戶)도 또한 원나라 조정의 명령으로 와서 모였다. 충렬왕을 만나 보는 일이 두 번 세 번 거듭될수록 더욱 공경하고 더욱 삼가며, 매양 사죄하여 말하기를, “전하의 신하인 저의 선인(先人)이 북쪽으로 달아난 것은 실로 호랑이의 입 같은 위험을 빗어나려고 하였을 뿐이며, 감히 군부(君父)를 배반한 것은 아닙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요.”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은 본래 사족(仕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겠는가. 이제 경의 하는 일을 보니 마음에 있는 바를 넉넉히 알 수 있다.” 하였다. 천호(千戶)가 등주호장(登州戶長) 최공(崔公) 휘 기열(基烈)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증 찬성사 춘(椿)을 낳았다. 춘이 어버이의 뜻을 이어 우리 나라에 오니, 충숙왕이 상품을 하사함이 더욱 풍성하였다. 그의 충성함을 권장하는 까닭이다. 찬성사가 증 문하시중(門下侍中) 박공 휘 광(光)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공에게 고(考)이며 비(?)이다. 공(公)의 휘는 자춘이며 자(字)도 자춘이다. 이[齒] 갈 만한 나이에 범상한 아이들과는 다른 바 있더니 차츰 자라면서 말 타는 일 활 쏘는 일을 잘하여, 아버지의 벼슬을 계승하니 사졸들이 즐겨 따랐다. 지정(至正) 을미년에 선왕께 조현(朝見)하니 선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조부와 아버지가 몸은 비록 외국에 있었으나 마음은 우리 고려의 왕실에 있었으므로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실로 총애하고 칭찬하였다. 이제 네가 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욕되게 함이 없으니, 내가 장차 네게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 하였다. 쌍성(雙城)은 변방이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관리의 다스림이 소략하고 땅이 비옥하며 인구가 번식하니, 우리의 동쪽과 남쪽의 항산(恒産)이 없는 백성들이 많이 살러 갔다. 국가가 원 나라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리니, 황제의 명령을 받고 차관(差官)이 왔으며 요양성(遼陽省)에서도 또한 차관이 왔다. 선왕은 성낭중(省郞中) 이수산(李壽山)을 달려 보내 모이게 하여 새 호적(戶籍)의 백성과 옛 호적의 백성을 가려 구분하여 삼성조감호계(三省照堪戶計 세 성(省)이 호적의 수를 대조하여 감정(勘定)함)라고 하였더니, 그 뒤에 위무(慰撫)하고 안정시키는 일이 마땅한 바를 잃어 차츰차츰 유리해 옮겨 가고 있었으므로, 곧 공에게 명하여 여기를 맡아 다스리게 하였으니, 여러 대(代)의 충성을 가상(嘉賞)한 때문이다. 백성들이 이때로부터 각자의 생업에 안정함을 얻어 지금에 이르고 있었다. 병시년 봄에 공이 내조(來朝)하니 선왕이 맞아들여 말하기를, “완악한 백성들을 위무하고 안정하게 하는데 노고스럽지 않은가.” 하였다. 그때에 기씨(奇氏)가 반란을 도모한다고 밀고하는 자가 있었는데 쌍성의 관리가 이에 관련되었다고 하였다. 선왕이 공에게 말하기를, “경은 장차 진(鎭)으로 돌아가라. 우리 백성에게 만일 변란이 있거든 마땅히 나의 명령과 같이 하라.” 하였다. 5월에 기씨를 평정하였다. 재신 유인우(柳仁雨)에게 명령하여 가서 잔당을 토벌하고 또 평민에게 두려워하지 말 것을 타이르게 하였다. 유인우가 이미 그 접경에 이르러서는 머뭇거리며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공에게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니, 위계가 중현대부(中顯大夫)였다. 병마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로써 공에게 내응(內應)하라는 전지를 내렸다. 공이 명령을 듣고 즉각 함매(含枚)하고 행군하여 유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하여 소생도경(小生都景)을 쫓으니, 송생도경이 처자를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이에 임금이 명령하기를, “쫓아야 할 자는 갔다. 죽이거나 학대하는 일이 없게 하라.” 하니, 백성들이 즐거워하여 음식물을 갖고 와서 우리 군사를 환영하였다. 주현(州縣)의 이름도 모두 그 옛 이름을 회복하니, 고주(高州)ㆍ요덕(耀德)ㆍ장평(長平)ㆍ원흥(元興)ㆍ정주(定州)ㆍ함주(咸州)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9월에 공의 위계를 대중대부(大中大夫)로 올리고 사복경(司僕卿)에 이임(移任)하였다. 개경(開京)에 제택(第宅)을 하사하여 머물러 살게 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천우위상장군(千牛衛上將軍)에 승진되고 통의(通儀) 정순(正順)의 두 대부에 가자되었다. 이해에 색(穡)이 간대부(諫大夫)가 되어 조정 안에 있다가 공의 얼굴을 보니 낯은 주홍빛 같고 수염은 아름다웠다. 감히 지위의 순서를 넘어서 서로 더불어 대화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풍채는 지금도 오히려 나의 마음과 눈에 남아 있어서 잊을 수가 없다.

경자년 봄 3월에 영록대부 판장작감사(榮祿大夫判將作監事)로서 나가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가 되었다. 4월 갑술일에 병으로 돌아갔으니 나이 46세였다. 아깝다. 부음을 듣고 공민왕은 매우 슬퍼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조곡(弔哭)하고 예에 따라 치부(致賻)하였다. 사대부들은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이제는 동북 방면에는 사람이 없구나.” 하였다. 그해 8월 병신일에 함주의 동쪽 귀주(歸州)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은 무릇 세 번 장가들었다. 이씨(李氏)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원계(元桂)로서 지금 추충 절의 보리공신 중대광 완산군(推忠節義輔理功臣重大匡完山君)이 되었다. 부인 최씨(崔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을 봉하였다. 증 문하시중 영흥부원군 휘 한기(閑奇)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성계(成桂)라고 한다. 지금 충성 양절 익찬 선위정 원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겸 판전농시사 상호군 완산부원군(忠誠亮節翊贊宣威定遠功臣三重大匡判三司事兼判典農寺事上護軍完山府院君)이 되었다. 김씨(金氏)는 정안택주(貞安宅主)를 봉하였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화(和)라고 하며 지금 성근보조공신 봉익대부 동지밀직사사 상호군(誠勤輔祚功臣奉翊大夫同知密直司事上護軍)이 되었다. 딸은 순성 익위 협찬 보리공신 삼중대광 용원부원군(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三重大匡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 공에게 시집갔다. 지금은 진화택주(眞和宅主)로 봉하니 최씨가 낳았다. 손자와 손녀 몇이 있다. 완산군(完山君)이 재취(再娶)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양우(良祐)라 하며 전 사복정(前司僕正)이요, 다음은 천우(天祐)라 하며 전 호군이다. 딸은 전 중랑장 이인우(李仁雨)에게 시집갔다. 부인 김씨(金氏)는 찬성사 휘 용(鏞)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조(朝)라 하며 진사이다. 다음은 서(曙)라 하며 전 랑장이다. 딸은 생원 노신(盧愼)에게 시집갔다. 다음 두 아이는 모두 어리다. 판삼사공(判三司公)은 재취한 부인 한씨(韓氏)를 원신택주(元信宅主)로 봉하였다. 밀직부사로 치사한 휘 경(卿)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방우(芳雨)라 하며 전 예의판서(前禮儀判書)다. 다음은 방과(芳果)라 하며 추충 여절 익위공신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겸 군부판서 응양군 상호군(推忠礪節翊衛功臣奉翊大夫知密直司事兼軍簿判書鷹敭軍上護軍)이다. 다음은 방의(芳毅)라 하며 중정대부 신호위 대호군(中正大夫神虎衛大護軍)이다. 다음은 방간(芳幹)이라 하며 전 군기소윤이다. 다음은 방원(芳遠)이니 통직랑 예의정랑지제교(通直郞禮儀正郞知製敎)이다 딸 둘이 있으나 어리다. 경실(京室) 강씨(康氏)는 보녕택주(保寧宅主)를 봉하였다. 판삼사사 휘 윤성(允成)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방번(芳蕃)이라 하며 승봉랑 고공좌랑(承奉郞考工佐郞)이다. 다음은 방석(芳碩)이라 하며 군기록사(軍器錄事)이다. 딸은 중현대부(中顯大夫) 흥위위 대호군(興威衛大護軍) 이제(李濟)에게 시집갔다. 동지(同知)공의 재취한 부인 안씨(安氏)는 영동정(令同正) 종기(宗奇)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지숭(之崇)이며 전 연경궁부사(前延慶宮副使)이다. 부인 노씨(盧氏)는 경원군(慶原君) 휘 은(?)의 딸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숙(淑)이며 진사이다. 다음은 징(澄)이며 별장이다. 다음은 담(湛)ㆍ청(淸)ㆍ철(澈)이라 하며 모두 어리다. 딸 하나가 있으나 어리다. 외손은 남녀 몇이 있다. 용원부원군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경(卿)이라 하며 진사이다. 다음은 후(侯)라 하며 액정내알자(掖庭內謁者)이다. 사(師)ㆍ부(傅)ㆍ보(保)ㆍ백(伯)은 모두 어리다. 맏딸은 집에 있고, 차녀는 내부부령(內府副令) 임맹양(林孟陽)에게 시집갔다. 증손(曾孫)이 남녀 약간인이 있다. 판서(判書)가 찬성사 지공(池公) 휘 윤(奫)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복근(福根)이라고 한다. 딸 셋은 모두 어리다. 대호군이 지간성(知杆城) 최인두(催仁?)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석근(石根)이라고 한다. 딸 하나는 어리다. 소윤(小尹)이 판도판서(版圖判書) 민공(閔公) 휘 선(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맹중(孟衆)이라고 한다. 딸 둘은 다 어리다. 정랑(正郞)이 판전교(判典校) 민공(閔公) 휘 제(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나 어리다.
색(穡)이 계묘년에 밀직제학으로 승핍(承乏 인재가 부족하여 재능 없는 자가 벼슬을 함)하였더니, 이듬해에 판삼사공이 와서 추밀원 부사가 되었으며, 신해년에는 판삼사공이 지문하(知門下)에 임용되었을 때에 나는 사공(司空)으로서 정당(政堂)에 개임(改任)되었다. 공민왕이 근신들에게 묻기를, “문신 색(穡)과 무신 성계(成桂)가 같은 날 입성(入省)하였는데 조정이 여론들은 어떻다고 하느냐.” 하였으니, 대체로 스스로 자랑하는 말이다. 그 후 수십 년 동안에 동렬(同列)에 있다는 자가 적고 나와 공(公)은 그 사귐이 물처럼 담담하여 한결같을 뿐이었다. 오래도록 서로 공경하는 풍모를 사람들은 간혹 우리들을 사모하였으니, 감히 공의 아버지 보기를 나의 아버지 보는 것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의 신도(新道)에 명(銘)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내가 이씨의 계보를 상고하여 보니 / 我考李氏譜
신라의 대아간은 / 新羅大阿干
인물이 뛰어나고 슬기로워 이미 임금의 제정을 도왔네 / 膚敏旣?將
후한 봉록으로 벼슬하는 고관이 대대로 많았네 / ?仕多高官
오마로 삭방에 노닐으니 / 五馬游朔方
위임과 은혜가 아울러 드러났다 / 威惠??彰
그곳의 풍속을 즐겨 머물러 살았으니 / 留居樂土風
삼척은 고향과 같도다 / 三陟如故鄕
수령이 원망하는 말이 있으므로 / 守臣有怨言
몸을 빼쳐 원 나라에 들어갔네 / 脫身歸大元
천부장의 임명을 받았으니 / 授命長千夫
대대로 덕망이 있어 백성들이 은혜를 품었으며 / 世德民懷恩
온화하고 공손하게 옛 임금을 섬기니 / 溫恭事舊君
조빙은 어이 그리 부지런하였던고 / 朝聘何勤勤
근본을 보답하고 또 처음에 돌아가서 / 報本又返始
세속을 깨우치고 따라 공훈도 이루었네 / 警俗仍樹勳
더구나 우리의 시중공은 / ?我侍中公
공민왕이 그 충성을 크게 칭찬하였네 / 玄陵大賞忠
하늘은 어찌하여 그를 빼앗음이 급하였는가 / 天胡奪之?
백성들의 궁과 통은 누가 맡아 다스릴까 / 孰司人窮通
판삼사인 아들이 있어서 / 有嗣判三司
공훈과 명망이 한 세상에 으뜸이며 / 功名冠一時
자손들이 모두 귀현하였으니 / 子孫盡貴顯
천도가 무지함은 아니로구나 / 天道非無知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는 반드시 무성하며 / 本固枝必茂
근원이 멀면 흐름은 길다 / 源遠流斯長
명시는 나의 졸렬한 것이 부끄러우나 / 銘詩愧我拙
천년으로 밝은 빛을 끼치리라 / 千載垂耿光

하였다.


[주D-001]함매(含枚) : 행군할 때 떠들지 못하도록 가는 막대기를 입에 물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