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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유원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 고려국 단성좌리공신 삼중대광 흥안부원군-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3:19

묘지(墓誌) 
 
 
유원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 고려국 단성좌리공신 삼중대광 흥안부원군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시 문충공 초은선생 이공 묘지명 병서 (有元奉議大夫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高麗國端誠佐理功臣三重大匡興安府院君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諡文忠公樵隱先生李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원 나라가 일어난 지 백여 년이 되었으나 진사로서 벼슬이 재상에 이른 자는 아주 드물었고, 고려의 선비로서 과거에 급제한 이는 한 사람이고, 벼슬을 거듭하여 대부에 이른 이는 오직 초은 선생(樵隱先生)과 우리 부자(父子)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벼슬이 다 동성 낭중(東省郞中)에 그쳤고, 왕의 수레가 북쪽으로 파천한 지 7년이 되었는데,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고, 내가 병으로 누워 일어나지 못한 것이 또 6년이 되었다. 내가 처음 병에 걸렸을 때에, 증세가 매우 급하였는데, 선생이 내 집 문을 지나다가 찾으시고 슬피 울고 오래 있다가 가셨다. 그리고 두어 달 만에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던 것이니, 나는 지금까지도 이를 슬퍼한다.
선생의 장손(長孫) 밀직대원 존성(存性)이 와서 말하기를, “선생은 우리 할아버지와 같이 문필을 가지고 의논하기를 가장 오래한 분이었으니, 우리 할아버지를 아는 분은 이 세상에서 공 만한 분이 없을 것입니다. 공은 마땅히 우리 할아버지의 묘에 명(銘)하여 주셔야 할 것입니다.” 한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다. 죽고 사는 것은 타고난 명이 있는 것이나, 나의 죽음이 선생보다 앞섰거나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나도 잇달아 죽었다면 역시 그만이었겠는데, 지금은 나의 병도 조금 낳았는데, 선생의 묘에 명이 안 되어 있다면 내가 어찌 사양하랴.” 하였다.
선생의 성은 이(李)씨이요, 이름은 인복(仁復)이며, 자는 극례(克禮)인데, 경산부(京山府)가 본향이다. 증조의 이름은 장경(長庚)인데, 공검하고 위엄이 있어 고을 사람들이 다들 엄하다고 두려워하였으며, 비록 벼슬아치로 다닌 자들도 혹 어떤 일이 있을 때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 이공이 이를 듣는다면 그 뜻이 옳지 못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하였고, 또 그들이 참으로 허물이 있을 때에는 공이 반드시 글을 보내어 꾸짖어 주었다. 늙은 뒤에 집에 있을 때에도 고을 관원들이 그가 지나가는 벽제성이 들리면, 반드시 상(床)에서 내려 땅에 엎드렸다가 그 소리가 들리지 아니할 때를 기다려서 일어나 앉았다는 것이다.
아들 4명이 있었는데, 백년(百年)은 모관(某官)을 지나고 천년(千年)은 모관(某官)을 지났으며, 요양성(遼陽城) 참지정사(參知政事) 승경(承慶)을 낳아서 손자의 영귀(榮貴)로 모관에 증직되었고, 셋째 아들 만년(萬年)은 모관을 지나고, 끝에 아들은 조년(兆年)인데, 이 분이 곧 선생이 조부로 벼슬은 정당문학이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선생이 평소에 한가로이 있으면서 말할 때마다 그의 증조부 호장공(戶長公)이 대단한 분이라고 칭송하였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부는 악한 것이면 원수같이 미워하셨고, 남의 급한 일에는 물이 아래로 흘러가듯이 달려가 구하셨으니, 나는 일생을 두고 이를 사모하고 배우려 하여도 되지 않는다.” 하였다.
문열공은 아직 어른이 되기 전에 풍신(風神)과 정채(精彩)가 준수하고 영발하여 초계(草溪) 정윤의(鄭允宜)가 그 고을에 부사로 왔다가 한 번 보고 범인과 다름을 알고서 그의 딸을 처로 삼게 하였던 것이다. 얼마 안 되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에 임명되니, 이름이 나날이 무거워 갔으며, 충혜왕(忠惠王)을 섬겨 엄한 것으로 임금에게 두려움을 받아 매양 공이 들어갈 때 마다 임금이 신발 소리만 듣고서도, “이조년이 오나보다.”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용모를 정제하고 기다렸다 한다.
기묘년 사변[己卯之變 심왕 고(瀋王暠)의 사건을 말함]에 문열공은 임금을 따라 원 나라 서울로 가서 이익재(李益齋)에게 청하여 대신 글을 써 가지고 장차 승상부에 올리려 하였더니, 마침 승상 백안(伯顔)이 실각하였으므로 그 글도 올리지 못하였으나, 이 사실을 듣는 이는 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또 이르기를, “담(膽)이 몸보다도 더 크다 함은 이공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 그 후 본국에 돌아와서 공신록(功臣錄)에 오르게 되자 마땅히 추밀(樞密)의 관직이 돌아갔어야 할 것인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모는 나이는 늙었으나 뜻이 아름답다.” 하고서 정당 문학(政堂文學)을 제수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동쪽 언덕에서 참새 잡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공이 곧장 앞으로 들어가서 아뢰기를, “전하께서 벌써 명이(明夷) 의 시절의 일을 잊으셨나이까. 소인이 무리와 친압하여 극히 하찮은 놀이나 즐기시는 것이 종묘를 받드는 도리가 아니옵니다.” 하니, 그 말이 매우 절실하였다. 임금이 속으로는 크게 성이 났으나 그 뜻을 밖으로 감히 내지 못하고 부드러운 말로 치사하고 보냈다. 공이 집에 돌아와서 탄식하기를, “임금의 나이 바야흐로 강장한데다가 하고자 하는 바를 기탄없이 하고 있고, 나도 이미 늙어 또한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지금 물러가지 아니하면 반드시 화가 돌아올 것이요. 또 자주 간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견책이 돌아가는 곳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이미 그 아름다운 일을 받들어 드릴 수 없을 뿐더러, 도리어 그의 잘못만을 더하게 될 것이니, 이는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바가 못 된다. 떠나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다음날 필마단동(匹馬單童)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서 몸이 마치도록 벼슬길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선생의 아버지의 이름은 포(褒)인데, 순박하고 돈후한 군자로 성재(省宰)의 지위에 이르고 매사에 순서를 좇고 예법을 따랐다. 아들 5명을 두었는데, 맏아들이 곧 선생이고, 다음이 지금 시중(侍中) 벼슬에 있는 인임(仁任)이며, 그 다음은 아무인데 병으로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고, 그 다음은 아무 아무인데 다 벼슬이 추밀(樞密)에 이르렀다. 선생의 우애의 정은 천성에서 우러나왔고, 여러 아우들도 선생을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여 세상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였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건장하였으며 점점 자라면서 글을 읽으려고 할 줄 알았으며, 행동거지가 노성한 사람과 같은지라, 문열공이 매양 공의 등을 어루만지며, “우리의 문호를 크게 빛낼 자는 너의 백중(伯仲) 형제일 것이다.” 하였으니, 형은 선생이고 아우는 시중공(侍中公)을 말한 것이다. 태정(泰定) 병인년에 선생의 나이 19세에 판서 신천(辛?)이 감시(監試)를 보이고, 길창군(吉昌君) 권준공(權準公)과 밀직 박원공(朴遠公)이 지공거로 있었는데, 선생이 일거에 연달아 급제하여 다음해 3월에 복주 사록(福州司錄)에 선발되었고, 기사년에 교감 전교를 거쳐 다음해에는 또 전의 직장에 전직되었다.
선생이 말하기를, “문장을 하는 데는 정밀히 연구하고 널리 공부하지 아니하면 그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붓을 잡을 때는 지극히 고심하여 가다듬었다. 그 득의(得意)한 데 이르러서 사람들에게 보이면 그 말과 뜻이 엄중하고도 심오하여 일세에 우뚝하였으며, 사물을 서술하거나 음영하는 데는 왕왕 풍자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원(至元) 무인년에 이르러 사관(史官)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직장(李直長)의 문학이 높고 세속에 붙 쫓지 아니하니, 어찌 사관에 추천하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예문 수찬에 제수되었고, 기묘년에 춘추 공봉에 승진되었으며, 경진년에 첨의주서에 옮겼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승봉랑 감찰 규정에 승진되어 5월에는 좌정언 지제교에 임명되었으며, 조금 뒤에는 통직랑 전의시승 지제교에 올랐다. 그 해 가을에 정동향시(征東鄕試)에 가서 제 2위로 합격하였고, 겨울에는 기거 사인(起居舍人)으로 전직하였다. 임오년에 원 나라 서울에서 실시하는 회시(會試)에 응시, 이에 선발 급제하여 장사랑 대령로 금주판관(將仕郞大寧路錦州判官)에 제수되었는데, 원 나라 서울에 있을 때에 본국에서는 우헌납(右獻納)에로 옮겼으며, 계미년에 다시 기거랑 기거주(起居郞起居注)로 옮겼다.
갑신년에 명릉(明陵 충목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유신(儒臣)들을 예로써 부르고, 또 이르기를, “이모(李某)가 원 나라 과거에 급제한 것이 이미 3년이 되었는데, 이를 발탁하지 아니하면 나의 문학을 숭상하는 본의이랴.” 하고 전리 총랑ㆍ사복정ㆍ좌사의 대부 등 세 번 관직을 제수하였는데, 모두 관직과 지제교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게 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이르러 임금이 이르기를, “내가 이인복을 대접한 것이 아직도 다하지 못하였다.” 하고 그의 본 관직에다가 밀직사 우부대언을 더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서 군부(判書軍簿)가 되었으며, 또 다음해에는 전리(典理)로 옮겼다. 이해 10월에 이르러 임금이 또 이르기를, “이모(李某)를 지금부터는 크게 써야 하겠다.” 하고, 밀직제학에 승진 임명하고, 또 선생에게 서연(書筵)에 나와 강의할 것을 명하였는데, 선생의 용모가 엄숙하고 말이 간략하면서 입이 무거우므로, 충목왕이 매양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이 숙연하여진다.” 하였다.
이 해에 나의 선군(先君) 가정공(稼亭公)이 건의하여서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 등 세 임금의 실록을 편수하기로 하여, 시중 이익재(李益齋)와 찬성 안근재(安謹齋)가 해 수(數)를 나누어서 집필하게 되었는데, 공도 또한 이에 참여하였다. 다음해 봄에 밀직부사에 오르고, 그 해 가을에 다시 지사(知司)에 올랐으며 겨울에 또 좌사(左使)에 올랐다. 기축년에 정동행성도사(征東行省都事)에 제수됨으로써 본국의 벼슬은 파면되었다.
신묘년에 공민왕(恭愍王)이 왕위에 오르고, 임진년 가을에 이르러 조일신(趙日新)이 여러 불평분자의 무리들을 모아서 한밤중에 기황후(奇皇后)의 형인 기원(奇轅)을 죽이고, 또 왕궁으로 들어와서 숙위하고 있는 근신들을 죽이고서 스스로 정승이 되어 내외 호령하니, 조정의 신하들이 불안과 공포에 싸여 모두 입을 다물고 한 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임금이 가만히 선생을 불러서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선생은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감히 이러한 난동을 일으켰으니, 마땅히 고유한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하물며 원 나라 조정이 당당히 있고 그 법령이 밝게 서 있사온데, 만약 이를 유예한다면 신은 그 허물이 아마도 전하께 까지 미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자, 임금은 드디어 조일신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일이 진정되고 나서 선생에게 명하여 이에 대한 글을 지어 원 나라에 보고하게 하였던 것이니, 임금이 본래 공을 중하게 여겨서 장차 크게 쓰려 하던 차에 이러한 대답을 듣고서는 더욱 소중히 대하였다.
계사년에 다시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서 판사 재사(判司宰事)가 되고, 가을에는 광정대부 정당문학 진현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政堂文學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에 승진되었으며, 다음해에는 감찰대부를 겸임하였다. 을미년 봄에 선생이 정부의 관직에서 사퇴하니 성산군(星山君)에 봉하였고, 가을에 다시 정당문학으로 돌아갔으며, 겨울에는 정동성 원외랑(征東省員外郞)에 제수되어 또 감찰 대부를 겸하였으며, 병신년에 관제(官制)가 새로 시행됨에 따라 금자대부(金紫大夫)의 직첩을 받고, 여전히 정당문학 보문각 태학사 동수국사 판한림원사(政堂文學寶文閣太學士同修國史判翰林院事)의 직책을 띠고, 또 어사대부(御史大夫)를 겸임하였다.
그때 원 나라에서 특사(特赦)를 반포하기 위하여 온 사사(赦使)가 돌아가게 되자, 우리나라에서 마땅히 표문을 올려 은혜에 사례하여야 될 터인데, 사절로 보낼 사람의 인선을 어려워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 재상들 중에서 대체를 알고 절의를 지킬 이를 구한다면 이 모와 같은 사람이 없다.” 하고, 드디어 사절의 일을 명하니, 선생은 조금도 사양하지 아니하였으며, 갔다 돌아오자 또한 사명을 능히 완수하였던 것이다. 정유년에 감수국사(監修國史)와 지공거가 되어, 지금의 정당문학 염흥방(廉興邦) 등 33명을 선발하니, 당시의 공론이 많은 선비를 얻었다고 일컬었고, 기해년에 상서좌복야로 고쳐 임명되어 어사대부를 겸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외람되게도 아무 재능 없는 사람으로 대관(臺官)의 일을 섭행한 것이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일찍이 기강을 진작한 바 없었으니, 스스로 생각하건대 세세한 일은 위에 번거롭게 주달할 것이 못 되고, 큰일은 또 정부가 있으니 중간에서 흔들고 간섭할 것이 못 되므로, 나는 한 가지의 일도 말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대관직에 들어가면서부터 백관의 강기가 숙연하였으니, 선생의 겸손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경자년에 참지 중서정사에 임명되었고, 신축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다. 그해 겨울에 홍건적이 국경을 침입하여 국가가 남쪽으로 옮겨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하기로 하였다. 선생이 지금의 시중공(侍中公)과 같이 충주 행궁(忠州行宮)으로 임금을 맞아 뵈니, 임금은 몹시 기뻐하고 따라서 같이 가기를 명하였다. 다음해 2월에 우리 군사가 크게 집결하여 서울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큰 병란을 치른 뒤인지라 모든 일에 마땅히 적응한 조치가 있어야 하겠으므로, 임금이 선생으로써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삼았다. 그리고 바로 첨의평리가 되었으며, 겨울에는 중대광 삼사좌사(重大匡三司左使)에 올랐다. 계묘년 봄에도 도첨의찬성사에 임명되고, 여름에는 우문관 대제학감 춘추관사에 오르고, 또 단성좌리(端誠佐理)의 공신호를 받았다. 갑진년에 흥안군(興安君)에 봉하고, 판예문관 춘추관사가 되었으며, 그 해 겨울에 삼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판판도사사(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에 올랐다.
패라첩목아(?剌帖木兒)가 군병을 인솔하고 조정으로 돌아와서 승상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대신하여 앉으니, 원 나라에 들어가서 그 사실을 황제에게 주달하여야 할 터인데 그의 인선이 곤란하였다. 공민왕이 또 이르기를, “이아무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다. 선생이 들어가서 승상을 면대하여 보는데, 언사가 간단명료하고 용모가 단정 엄중하자 승상이 여러 번 주목하였고, 선생이 물러나가자 시종하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앞에 나와서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다고 한 말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임금이 천자에게 막속(幕屬)으로 천거하고, 또 선생을 좌우사(左右司)의 장(長)으로 삼으니 드디어 봉의대부(奉議大夫)에 진급하였다.
을사년에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하고, 바로 뒤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었다. 윤 10월에 내가 선생과 같이 공원(貢院)에 있었는데, 선생에게 봉군(封君)하는 명이 또 내렸으며, 지금의 전교시승으로 있는 윤소종(尹紹宗) 등 28명을 선발하였으며, 기유년에는 선생이 지공거가 되고 내가 부지공거가 되어, 지금 좌헌납(左獻納)으로 있는 유백유(柳伯濡) 등 33명을 뽑았다. 경술년에 검교 시중이 되고 신해년에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가 되었는데, 관계와 작위가 옛 과 다름이 없었다.
갑인년 선생의 나이 67세였다. 3월에 등에 종기가 생기니, 선생은 스스로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서, 옷을 갖추어 입고 북향하여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사퇴ㆍ하직하는 형상을 짓고, 시중공(侍中公)에 말하기를, “재신(宰臣)이 죽으면 관에서 장례를 치러 주는 것은 국가의 두터운 은혜이다. 돌아보건대 나는 평일에 실오라기나 털끝만한 도움도 국가에 드린 바 없었으니, 이대로 죽는 것만도 부끄러움이 있다. 공은 나를 위하여 잘 말하여 그런 은전을 내리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말을 마치자 원복(元服)을 몸에 더 입고서 조용히 돌아갔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애도하여 소찬을 행하고, 조회를 정지하고는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를 드리고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서거한 지 3일 만에 도성 남쪽 속촌(粟村)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이는 선생의 평일의 유명이었다. 다음해에 충정왕묘(忠定王廟)에 배향하였다.
증조부에게 벼슬을 증직(贈職)하였고, 조부 관함을 갖추어 씀 는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으며, 공민왕 21년에 공로를 평론하여 성산후(星山侯)에 추증하고, 충혜왕묘(忠惠王廟)에 배식(配食)하였고, 고(考) 관함을 갖추어 씀 의 시호는 경원(敬元)이요, 증조모 모(某)씨는 모 군부인(某君夫人)에 봉하였고, 조모 정(鄭)씨도 모군 부인에 봉하였으며, 모친 설(薛)씨는 성균관 대사성 문우(文遇)의 딸로 모 군부인에 봉하였다.
선생은 모두 세 번 장가들어 아들 2명을 낳았다. 첫째 부인은 판사 강거정(姜居正)의 딸로서 아들 향(向)을 낳았는데 벼슬은 낭장이며, 강씨가 죽고 계실 이(李)씨를 맞으니, 모관 아무의 딸로 아들 용(容)을 낳았는데 벼슬이 봉상대부 전법총랑(奉常夫夫典法摠郞)이었는데, 두 아들이 다 선생보다 먼저 죽었다. 또 하(河)씨에게 장가드니 모관 아무의 딸로서 아들이 없었다. 손자 한 사람은 낭장이 낳았는데 벼슬은 대언(代言)이요, 증손녀 두 사람이 있었다. 대언이 먼저 모관(某官) 윤모(尹某)의 딸에게 장가들었더니, 딸만 낳고 죽었으므로 지금 다시 판개성부사 성림공(成林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내가 이미 선생의 뒤를 따랐으므로 일찍이 보니, 선생은 남의 착한 일을 들으면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반드시 기뻐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잘못된 것을 보면 반드시 얼굴에 노기를 띄었으나, 입 밖에 내어 그 잘못을 말하는 법이 없어,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선생은 입이 둔한 모양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 성품이 편벽되고 조급하여 혹시 말하다가 실수할까 두려워서 인(認)으로 몸가짐을 삼았는데, 지금 늙었으나 아직도 마음이 움직임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이것은 나의 수양이 아직도 다 이르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아, 선생의 학문의 정밀함과 몸가짐의 돈독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타고난 기질을 변화시켰으니, 그 행사에 앞서 삼가고 살핌을 다른 사람이 미처 따르지 못한 것은 의당한 일이로다. 이로 명(銘)하려 한다. 명하기를,

성산의 영화로서 / 星山之英
천자 뜰에 과거하니 / 入貢天庭
동해에 빛이 흘러 / 流光東海
문성이 찬란하다 / 有爛文星
행실을 극히 삼가고 / 有行斯愼
말을 어려워하니 / 有言斯認
오직 옛날의 인재요 / 惟古之才
금세의 준걸이었다 / 惟今之儁
오직 어려운 때를 만나거나 / 惟時之艱
어려운 사명이 있을 때면 / 惟使之難
공의 몸이 비록 파리하여도 / 公躬雖?
공은 반드시 관문을 나갔다네 / 公必出關
황친을 죽이고 황명을 거역함은 / 誅親拒命
모두 왕정을 범한 것이라 / 悉干王政
만인의 눈이 두려워하였으나 / 萬目瞿瞿
공은 조금도 근심하지 않았네 / 公不少病
공이 서쪽에서 돌아올 때 / 公歸自西
횐 말 타고 오시니 / 有馬之斯
집집마다 서로 경축하였네 / 室家相慶
우리 공이 돌아오셨다고 / 我公歸兮
우리 나라가 / 惟是我國
뼈만 남았더니 공이 와서 살을 붙였네 / 如骨而肉
우리 공이 안 오셨다면 / 匪我公歸
우리 추위 뉘라서 데워 줄까 / 子寒誰?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은 / 人言我公
문장의 정종이라 일컬었다 / 文章之宗
오직 나라뿐이요 한 몸과 집을 잊었으며 / 國而忘家
전대에 또한 능하였다 / 專對是工
열렬한 그 행실 / 烈烈行實
태묘에 배향하셨네 / 升配大室
뒤를 열어 상서 내리니 / 迪后降祥
자손이 길하고 창성하리라 / 子孫其吉
속촌의 양지와 / 粟村之陽
선산의 산마루에 / 星山之岡
영혼은 가지 않는 곳이 없으리니 / 魂無不之
조손이 서로 바라보리 / 祖孫相望
아, 흥안부원군이여 / 嗚呼興安
길이길이 잊지 못하리로다 / 求世不忘

하였다.


[주D-001]명이(明夷) : 원래는 《주역》의 괘(赴) 이름이다. 착한 사람이 뜻을 얻지 못하고 참소를 만나 고난 한 형편에 있음을 말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