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한문경공 묘지명 병서 (韓文敬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내 나이 16ㆍ7세에 시승(詩僧)을 따라 놀기를 좋아하여, 한 번은 묘련사(妙蓮寺)에 이르러서 선비와 중들이 섞여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연구(聯句)의 시를 지었는데, 그때에 문경공(文敬公)이 아직 12ㆍ3세의 동자로서 매양 척척 대구(對句)가 되는 연구시를 불러서 좌중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으며, 비록 문묵(文墨)에 늙은 자라도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감히 같은 서열에 낄 생각을 못하므로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 보통 사람과는 달리 알고 있었다.
정해년에 나의 선군(先君)이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관장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이 과연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였으니, 그때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낙제한 자들도 그의 재주에 굴복하여 이르기를, “한생(韓生)은 요행으로 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벌에 의한 음직(蔭職)으로 두 번이나 진전직(眞殿直)과 별장이 되었기 때문에 벼슬을 구하지 않고, 고서(古書)의 토론을 좋아하였고 또 익재선생(益齋先生)에게 가서 《좌전(左傳)》과 《사기(史記)》ㆍ《한서(漢書)》 등을 읽었으며, 글씨 쓰기를 익혀서 진서(眞書)와 초서(草書)가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었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고 공을 덕녕부 주부(德寧府注簿)에 보직하고, 정방(政房)에 불러다 두고서 비도적(秘?赤)으로 삼았다. 신묘년에 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화도로 가서 공이 따라가 있었는데, 공민왕이 불러서 돌아왔으나 즉시 쓰지 않았다. 계사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전의 주부(典儀注簿)에 제수되고 또 비도적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전리좌랑 지제교가 되고, 또 다음해에 두 번 계급을 올려서 통직랑 성균직강 봉선대부 성균사예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예문응교를 겸임하게 하였다. 병신년에 관제(官制)를 고쳐서 중산대부 비서소감 지제고가 되고, 다음해에 병부시랑 한림대제로 옮겼으며, 가을에는 직학사(直學士)에 승진하였고, 또 그 다음해에 중정대부 국자좨주 지제고에 올랐다.
신축년에 왕이 사적(沙賊)을 피하여 안동으로 가니 따라가서 전의령과 전교령에 두 번 전직되었는데, 다 중정의 품계였으며, 다음해 가을에 서울로 돌아와서 봉순대부 판사복시사 우문관직제학에 승진되었다. 겨울에 밀직사좌부대언 보문각직제학 지공부사에 임명하니, 이는 대개 공을 등용하여 인사의 전선(銓選)을 맡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우부대언에 오르고, 또 좌대언에 올랐다.
을사년 봄에 신돈(辛旽)이 왕의 총애를 받아 그의 행동이 아주 은밀한 것이 있었다. 공이 이를 알고 비밀리에 왕에 고하기를,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아닙니다. 아마도 어지러운 일이 있지 않을까 염려되오니,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옵소서. 신이 아니면 누가 감히 말하오리까.” 하였으나, 왕이 듣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바야흐로 신돈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 해 여름에는 판서 예의(判書禮儀)에 임명하고 가을에는 군부(軍簿)직에 제수해 보내니, 이것은 대개 공을 소외한 것이다.
10월에 부친의 상사를 당하고 3년의 상제를 마쳤으나, 왕은 전일 직언의 노여움으로 인하여 오히려 쓰려고 하지 않았다. 신해년 가을에 신돈의 죄상이 드러나자, 왕이 이르기를, “한 모(韓某)는 선견지명이 있으니 급히 불러오라.” 하고, 곧 영록대부 이부상서 수문전학사(榮祿大夫理部尙書修文殿學士)를 제수하고 수일이 지나서 왕이 이르기를, “전선(銓選)은 중요한 일이다. 총명 민첩하고 정밀한 자가 아니면 그 권한을 줄 수 없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오직 한모(韓某)가 그에 적격한 사람이다.” 하고, 이에 공을 정의대부(正議大夫)로서 우승선(右承宣)에 임명하고, 겨울에는 좌승선에 승진시켜 전선(銓選)을 맡게 하였다.
을묘년 여름에 밀직제학 동지서연에 임명되고 가을에는 첨서로 승진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가서 부사(副使)로 고쳐 제수되고 조금 뒤에 동지로 올랐으며, 5월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지금 판서에 재직 중인 정총(鄭摠) 등 33명을 뽑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좋은 선비를 선발해 얻었다고 일컬었다. 그 해 가을에 지사(知司)에 오르고, 무오년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하였고 대광(大匡)의 품계에 오르니 관직은 진현(進賢)으로 고쳐주고, 수충찬화공신(輸忠化功臣)의 호를 내려 주었다.
기미년 겨울에 광암비(光巖碑)를 쓴 공로로 다시 첨서가 되고 다음해 봄에는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 중대광(重大匡)의 계급에 올랐으며, 임술년에는 왕을 호종하여 남경(南京)에 갔다오니, 다음해 가을에 그 공으로 광정대부 판후덕부사 우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을 임명하고 공신의 호는 전과 같이 하였다.
갑자년 2월 28일에 병으로 자택에서 세상을 마치니 나라 사람들이 다 탄식하고 애도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나이 겨우 52세에 사망하니 천도의 어그러짐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다. 날을 택하여 임진현(臨津縣) 서곡(瑞谷) 남쪽 기슭에 있는 선산 아래에 장사하니 예로써 한 것이다.
한(韓)씨는 상당(上黨)의 대가(大家)이니, 난(?)은 삼한공신(三韓功臣)이고, 사기(謝奇)는 첨의부 우간의대부 보문각제학 지제교이니, 공의 증조가 되며, 악(渥)은 벼슬이 선력 좌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상당부원군이며, 시호는 사숙(思肅)으로 충숙왕을 도와서 관위가 총재에 이르고 공로가 국가에 있었으니, 이는 공의 조부이다. 사숙공이 5명의 아들을 두어 모두 명철한 재상이 되었는데, 그 이름을 공의(公義)라 하는 분이 밀직 의 관직을 거쳐 중대광 청성군(重大匡淸城君)에 봉하였고, 시호를 평간공(平簡公)이라 하여 밀직사좌대언 겸 감찰집의 경사만(慶斯萬)의 딸과 혼인하였으니, 공의 고비(考?)인 것이다.
공이 검교문하시중 길창부원군(檢校門下侍中吉昌府院君) 권적(權適)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6녀를 낳았다. 장남 상환(尙桓)은 전 삼사우윤(前三司右尹)이요, 다음 상질(尙質)은 서북면 도관찰출척사 겸 평양윤이요, 다음 상경(尙敬)은 공조총랑 지제교 겸 상서소윤이요, 그 다음 상덕(尙德)은 종부시승이다. 손자로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우윤(右尹)은 문하평리 윤승순(尹承順)의 딸과 결혼하여 2녀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출척사(黜陟使)는 문하 시중 이성림(李成林)의 딸과 결혼하여 1녀를 낳았는데 전 종부시승 강책(姜策)에게 시집갔고, 다시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 송신의(宋臣義)의 딸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총랑(摠郞)은 전 판도판서 오준량(吳俊良)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아직 어리고, 시승(寺丞)은 전대언(前代言) 이귀생(李貴生)의 딸과 결혼하였다. 6녀 중에 맏딸은 삼사우윤(三司右尹) 안경검(安景儉)에 시집가서 5녀 1남을 낳았고, 다음 딸은 성균직강 이작(李作)에게 시집가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직 다 어리고, 다음 딸은 대호군 권방위(權邦緯)에게 시집갔고, 다음 딸은 전호군 임중선(任中善)에게 시집가서 4남을 낳았으며, 그 다음은 의덕부승(懿德府丞) 박등(朴登)에 시집갔고, 다음은 중랑장 전보(田甫)에 시집갔다.
큰 아들 우윤 상환은 총명 민첩하고 독서를 좋아하였으나 병으로 과거 공부를 폐지하였고, 둘째 아들 출척 상질은 경신년 과거에 제3위로 급제하였으며, 총랑 상경은 임술년 과거에 제3위이며, 막내아들 시승 상덕은 을축년 과거에 제9위로 급제하였는데, 우리나라 제도에 세 아들이 과거에 오르면 어머니에게는 종신토록 나라 창고의 곡식을 주도록 되어 있어 지금 권씨 부인이 그 영광스러운 효양(孝養)을 받고 있으니, 공도 지하에서 웃음을 머금고 있을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공이 선화(仙化)하여 가신 지도 벌써 9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 성음과 용모가 언제나 나의 마음속과 눈앞을 떠나지 않고 있으니, 어느 날인들 잊겠는가. 출척공(黜陟公)이 그 여러 형제와 더불어 묘소에 명을 묻으려는 뜻이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하여, 나를 찾아 명(銘)을 청하는 것이다. 아, 슬프다. 내가 문경공(文敬公)의 청으로 일찍이 그의 아버지 평간공(平簡公)의 묘소에 명한 바 있었는데 이제 또 문경공의 묘소에 명하게 되다니, 그 역시 슬픈 일이로다. 명에 이르기를,
옥병 속에 얼음을 담아둠과 같은 것은 / 玉壺置?
오직 공의 맑은 지조요 / 惟公之淸
티끌 갑 속에서 거울을 연 것과 같은 것이 / 塵匣開鏡
오직 공의 밝은 마음 이외다 / 惟公之明
부귀 속에서 자라났건만 / 長于紈綺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일이 없었으며 / 無華靡事
시문과 서예에 노닐고 / 游於詩書
털끝만큼의 재리를 추구한 바 없었습니다 / 絶絲毫利
효도하고 우애하며 충성하고 신의 있었고 / 孝友忠信
또 청렴하고 고요하며 너그럽고 화평하셨으니 / 廉靜寬和
장수를 누리셔야 마땅하거늘 / 宜至眉壽
하늘이 빼앗아 가는데 어찌 하오리까 / 天奪奈何
오직 자녀를 많이 두시어 / 惟其多子
재주 있고 아름다우니 / 有才有美
공의 명성이 전함은 / 公名之傳
생시와 같을 것입니다 / 如在于世
내가 공의 부자의 분묘에 명을 지으니 / 我銘父子
이 마음 어찌 상하지 않으오리까 / 心胡不傷
바라옵건대 많은 복을 내리시어 / 庶其垂裕
자손들을 창성하게 하시옵소서 / 子孫其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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