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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碑銘) 보제존자 시선각 탑명 병서 (普濟尊者諡禪覺塔銘) (幷序)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5. 1. 03:04

비명(碑銘)
 
 
보제존자 시선각 탑명 병서 (普濟尊者諡禪覺塔銘) (幷序) 
 

이색(李穡)

공민왕 현릉(玄陵) 재위 20년, 경술년 가을 9월 10일에 사(師)를 불러 서울에 들어오게 하였다. 16일에 사가 우거하고 있는 광명사(廣明寺)에서 크게 양종(兩宗) 오교(五敎)의 각 사찰의 승려들을 모아 그들의 스스로 얻은 바를 시험하여 공부선(功夫選)이라 이름하고, 임금이 친히 거둥하여 관람하였다. 사가 소향(燒香)을 마치고 법좌에 올라서 말하기를, “고금의 습속을 버리고 범인과 성인의 종적과 유래도 다 쓸어버리고, 납자(衲子 승려)의 명근(命根)도 베어 버리며, 중생의 의심의 그물도 깨끗이 벗어 버리면, 놓아주고 다그치는 것은 손아귀에 있고, 변화하고 융통하는 것은 기틀에 있는 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와 역대의 조사(祖師)들이 그 법은 하나인 것이다. 모여 있는 여러 스님들은 청하건대 실지대로 대답하라.” 하였다. 이에 차례로 들어와 대답하게 하니, 몸을 굽히고 땀을 흘리며 다 알지 못하겠다고 말하였다. 어떤 이는 이치에는 통하였으나 사물에 구애하고, 어떤 이는 열광함이 지나쳐서 말에 실수하는 이도 있었다. 한 구절의 문답만으로 문득 퇴각시키니 임금이 즐겨하지 않는 듯하였다. 환암수선사(幻菴脩禪師)가 뒤에 오니 사가 차례로 세 구절을 물었다. 삼문(三門)의 모임이 끝나니 회암사(檜巖寺)로 돌아갔다. 신해년 8월 26일에 공부상서 장자온(張子溫)을 보내 조서를 내리고 인장(印章)과 법복(法服)과 발우(鉢盂)를 내렸으며, 모두 갖추고 봉(封)하여 왕사(王師)ㆍ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ㆍ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ㆍ근수 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로 삼고, 송광사(松廣寺)가 우리 나라의 첫째 가는 도량이라고 하여 거기에 살도록 명하였다. 임자년 가을에 우연히 지공(指空)의 삼산우수지기(三山雨水之記)를 생각하고, 회암사(檜巖寺)에 옮기려고 하는데, 때마침 부름을 받고 이 절의 법회에 오게 되었으므로 여기에 살기를 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사가 말하기를, “선사(先師) 지공(指空)이 일찍이 중수하기를 계획하였는데, 병화에 불타 버렸으니 감히 그 뜻을 계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곧 여러 사람과 모의하여 전우(殿宇)를 증축하고 넓히도록 하였다. 공사를 이미 마치었으므로 병진년 4월에 크게 낙성회를 열었다. 대론(臺論)이, “회암사는 경읍(京邑)과 매우 가까워서 선비와 여인들의 왕래가 밤낮으로 잇달게 되어 혹은 생업을 폐지하기에 이르니 금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영원사(瑩源寺)에 이주(移住)하라는 왕명으로 길 떠나게 되어 핍박하였다. 사가 병이 나 있었는데, 수레에 태워 삼문(三門)을 나가서 못가에 이르러니 스스로 수레 메는 자를 지도하여 열반문(涅槃門)으로 나가게 하므로 군중들이 모두 의심하여 목이 쉬도록 울부짖으니 사가 돌아보며 말하기를, “노력, 노력, 나 때문에 중단하는 일이 없게 하라. 내가 가는 길은 마땅히 여흥(驪興)에서 그칠 것이다.” 하였다. 한강에 이르러서 호송관(護送官) 탁첨(卓詹)에게 말하기를, “내 병이 위중하니 빌건대 배로 가게 합시다.” 하였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기 7일만에 바야흐로 여흥에 이르렀다. 또 탁(卓)에게 말하기를, “조금 머물렀다가 병이 조금 덜한 때를 기다려서 갑시다.” 하니 탁이 마지못하여 복종하였다. 신륵사(神勒寺)에 우거하는데, 5월 15일에 탁(卓)이 또 가기를 독촉함이 급박하니, 사가 말하기를, “이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마땅히 갈 것이다.” 하고, 이날 진시(辰時)에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고을 사람이 바라보니 5색의 채색 구름이 산정을 덮었다고 한다. 이미 화장하여 유골을 씻는데, 구름도 없이 비가 온 것이 사방 수백 보가 되었다. 사리 1백 55개를 얻었다. 기도하고 나누어 5백 58개를 만들었다. 사부제자(四部弟子)들이 재 속에서 찾아내어 각자가 몰래 가진 것은 그 수를 이루 다 알 수 없었다. 신령한 광채가 3일 동안을 비쳐 빛이 나더니 그치었다. 중 달여(達如)가 꿈에 용이 화장대(化葬臺) 아래에 서리고 있는데, 그 형상이 말과 같은 것을 보았다. 유골을 실은 배가 회암사로 돌아 올 때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물이 불어 있었다. 모두들 흑룡(黑龍)이 배의 항행(航行)을 도운 것이라고 말하였다. 8월 15일에 절의 북쪽 벼랑 위에 부도(浮圖)를 세웠다. 정수리 뼈에서 나온 사리는 신륵사에 안치함은 그의 마지막을 표시한 것이요, 석종(石鐘)으로 덮은 것은 감히 와전됨이 없도록 경계함이다. 일이 조종에 알려지니 시호를 선각(禪覺)이라고 하고, 신 색(穡)에게 글짓기를, 신 중화(仲和)에게는 붉은 전자(篆字)의 액을 쓰기를 명령하였다.
신은 삼가 상고하여 보니, 사(師)의 휘는 혜근(惠勤) 호는 나옹(懶翁)이니, 처음 이름은 원혜(元惠)이다. 향년 57세이고, 법랍(法臘)은 38세이다. 영해부(寧海府) 사람이니 속성은 아씨(牙氏)이다. 고의 휘는 서(瑞)니 구선관령(具膳官令)이다. 모는 정씨(鄭氏)니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정씨가 꿈에서 금빛 나는 새가 날아와서 그의 머리를 쪼며 갑자기 알을 떨어뜨리니, 오색의 광채가 찬란한 것이 품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인하여 임신하고 연우(延祐) 경신년 정월 15일에 공을 낳았다. 겨우 갓쓸 나이가 되었을 때 이웃의 벗이 죽었다. 여러 부로들에게 묻기를,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하니, 모두 모른다고 말하였다. 마음으로 매우 슬퍼하고 달아나 공덕산(功德山)에 들어가서 요연사(了然師)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요연사가 말하기를, “네가 무슨 일로 출가하였느냐.” 하였다. 대답하기를, “삼계(三界)를 초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합니다.” 하고, 또 길을 열어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요연사가 말하기를, “여기에 온 너라는 것은 무슨 물건이냐.” 하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도 있는 자가 능히 온 것입니다. 다만 닦아 나아갈 방법을 모를 뿐입니다.” 고 말하니, 요연사가 말하기를 , “나도 또한 너와 같이 아직 알지 못한다. 가서 스스로 구하면 여사(餘師)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에 이르러 회암사에 와서 밤낮을 홀로 좌선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중국에 가서 스승을 찾겠다는 뜻을 결정하고 무자년 3월에 연경에 이르러 지공에게 참례(參禮)하니, 묻고 대답하는 것이 서로 계합하였다. 지정 10년 경인년 정월에 지공이 여러 제자들을 모아 놓고 하어(下語)하니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사가 여러 사람들이 앞에 나가서 두어 마디 말하고 세 번 절하고는 왔다. 지공은 서천(西天)의 1백 8대의 조사(祖師)이다. 이해 봄에 남쪽으로 강소성ㆍ절강성을 유람하고 가을 8월에 평산(平山)에게 참례하니, 평산이 묻기를, “일찍이 어떤 사람을 보았는가.” 하였다. 사(師)가 말하기를, “서천의 지공이 날마다 일천의 칼을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니, 평산이 말하기를, “지공의 일천 칼은 잠깐 두고 너의 한 칼을 갖고 오라.” 하였다. 사가 좌구(坐具 앉을 때 까는 방석)로써 평산을 끌어 당기니 평산이 선상(禪床)에 거꾸러져 있으면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고 부르짖었다. 사가 말하기를, “나는 칼입니다. 능히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능히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하고, 곧 붙들어 일으키니 평산이 설암(雪巖)의 전한 바인 급암(及庵)의 옷과 불자(拂子)로써 신의(信義)를 표시하였다. 신묘년 봄에 보타락가산(寶?洛迦山)에 닿아 관음상을 참배하였다. 임진년에는 복룡산(伏龍山)에 이르러 천암(千巖)에게 참례하였다. 때마침 강호의 천여 명을 모아 놓고 입실할 자를 뽑고 있었다. 천암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고 사가 대답하니 암이 말하기를, “부모가 낳기 전에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하였다. 사가 말하기를, “오늘 아침은 4월 초이틀입니다.” 하니, 천암(千巖)이 허락하였다. 이해에 북쪽으로 돌아와 거듭 지공에게 참례하니 지공이 법의(法衣)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주었다. 이에 연대(燕代)의 산천을 돌아다니며 유람하니 소연하여 한가한 한 사람의 도인이었다. 이름이 궁궐 안에 들려서, 을미년 가을에는 성지(聖旨)를 받들고 수도(首都)의 광제사(廣濟寺)에 머물렀다. 병신년 10월 보름날 강당을 여는 법회를 개설하였다. 황제가 원사(院使)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를 보내어 금란가사(金?袈裟)와 폐백을 하사하고, 황태자는 금관가사와 상아의 불자를 보내 주었다. 사가 가사를 받고 여러 사람들에게 묻기를, “고요하게 텅 비고 적막하여 본래 한 가지 물건도 없는 것인데, 이 찬란한 것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니 여러 사람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천천히 말하기를, “구중궁(九重宮)의 금구(金口) 속에서 나왔다.” 하였다. 곧 향(香)을 피워서 성수(聖壽)를 축하하고 좌석에 올라 가서 주장(柱杖)을 가로 어루만지며 두어 마디 말을 하고 곧 좌석에서 내려왔다. 무술년 봄에 지공(指空)을 하직하고 수기(授記)를 얻어 동쪽으로 돌아오는데, 가기도 하고 또 멈추기도 하면서 근기에 따라 법을 강설하였다. 경자년에는 대산(臺山)에 들어가 있었다. 신축년 겨울에는 임금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어 서울로 맞아 들이고 심요(心要)를 강설하기를 청하였다. 만수가사(滿繡袈裟)와 수정불자(水精拂子)를 내리었으며, 공주는 마노불자(瑪瑙拂子)를 바치고, 태후는 친히 보시를 베풀며,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기를 청하였으나 곧 사양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법(法)에서 나도 또한 물러가야 한다.” 하였다. 부득이 즉시 신광사로 갔다. 11월에 홍건적이 경기를 유린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남쪽으로 옮겼다. 중의 무리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적을 피해 옮겨 가기를 청하니 사가 말하기를, “오직 명을 보전할 뿐이다. 적이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두어 날 만에 청하는 것이 더욱 급하였다. 이날 밤에 꿈을 꾸니 낯에 검은 점이 있는 한 신인(神人)이 의관을 갖추고 절하며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흩어지면 적이 반드시 절을 없애 버릴 것입니다. 원컨대 스님은 뜻을 굳게 가지십시오.” 하였다. 다음 날 토지신좌(土地神座)에 가서 그의 얼굴을 보니 꿈에 보던 얼굴이었다. 과연 적이 오지 아니하였다. 계묘년에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더니 내시 김중손(金仲孫)을 보내어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을사년 3월에 대궐에 나아가서 물러가기를 빌어, 비로소 일찍부터 원하던 바를 허가받을 수 있었다. 용문(龍門)ㆍ원적(元寂) 등 여러 절을 유람하고 병오년에는 금강산에 들어갔다. 정미년 가을에는 청평사(淸平詞)에 머물렀다. 그해 겨울에 예보암(猊寶岩)이 지공(指空)의 가사와 손수 쓴 편지를 갖고 와서 사에게 주고 말하기를, “지공 선사의 치명(治命 죽기 전 맑은 정신으로 한 유언)이다.” 하였다. 기유년에 거듭 대산(臺山)에 들어갔다. 경술년 봄에 사도(司徒) 달예(達睿)가 지공의 영골을 받들고 와서 회암사에 보안하였다. 사가 스승의 유골을 예배하고 인하여 임금의 부름에 달려가 광명사(廣明寺)에서 여름을 지내고 첫 가을에 회암사에 돌아왔다. 9월은 곧 공부선(功夫選)이 있는 달이다. 사가 거처하는 방을 강월헌(江月軒)이라고 하였는데, 평생에 일찍이 세속의 문자를 익히지 아니하였으나 시짓기를 청하는 이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붓을 잡고 쓰는 것이 마치 생각을 거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이치와 뜻이 심원하였다. 만년에는 묵화(墨畵)를 좋아하여 그가 그린 산수(山水)는 정도(正道)와 권도(權道)에 핍근하였다. 아, 도가 이미 통하였으니 다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 색은 삼가 손으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쓴다. 명에 이르기를,

진실로 선각 스님은 / 展也禪覺
기린의 뿔처럼 드물게 있는 존귀한 인물이다 / 惟麟之角
왕자의 스승이며 / 王者之師
인천의 안목이었다 / 人天眼目
모든 중들이 그를 종장으로 섬겨 / 滿衲宗之
물이 구렁으로 달리듯 모여 들었으나 / 如水赴壑
충분히 아는 이는 드물었다 / 而鮮克知
사의 세운 비가 우뚝히 높은 것을 / 所立之卓
새의 꿈이 신령하게 빛이 났네 / ?夢赫靈
그가 처음 나실 때 / 在厥初生
용신이 상주를 호송하여 / 龍神護喪
마지막이 진실로 아름다웠네 / 終然允藏
더구나 사리가 있어 / ?曰舍利
영이함을 나타내었다 / 表其靈異
광활한 강물 속에 / 江之闊矣
희고 흰 밝은 달은 / 皎皎明月
공안가 색인가 / 空耶色耶
위도 아래도 시원하게 트였네 / 上下洞徹
아득히 멀리 있는 높으신 풍격은 / 邈在高風
영구히 사라지지 않겠네 / 終古不滅

하였다.


[주D-001]인천(人天)의 안목(眼目) : 지극히 큰 지혜를 지닌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