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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碑銘) 광통보제선사비명 병서 (廣通普濟禪寺碑銘) 병서(幷序)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5. 1. 03:01

비명(碑銘)
 
 
광통보제선사비명 병서 (廣通普濟禪寺碑銘) 병서(幷序) 
 

이색(李穡)

금상(今上) 4년, 정사 겨울 10월 초하룻날 문하판사 칠원부원군(門下判事漆原府院君) 신(臣) 윤환(尹桓), 시중 청원부원군(侍中淸原府院君) 신 경부흥(慶復興), 수 시중 광평부원군(守侍中廣平府院君) 신 이인임(李仁任), 판삼사 철원부원군(判三事鐵原府院君) 신 최영(崔瑩), 찬성사 판판도사사(贊成事判版圖司事) 신 목인길(睦仁吉), 삼사좌사(三司左使) 신 이희필(李希泌), 찬성사 판례의사사(贊成事判禮儀司事) 신 양백연(梁伯淵), 상의(商議) 신 양백익(梁伯益), 찬성사 판전공사사(贊成事判典工司事) 신 이성계(李成桂), 상의 신 홍중선(洪仲宣), 평리(評理) 신 변안열(邊安烈)ㆍ신 임견미(林堅味), 상의 신 왕복명(王福命)ㆍ신 이자송(李子松), 평리 신 조민수(曹敏脩), 지부사(知府事) 신 왕안덕(王安德), 정당 문학 신 권중화(權仲和), 삼사 우사(三司右使) 신 최공철(崔公哲), 지부사 상의(知府事商議) 신 박보로(朴普老), 정당 문학 상의 신 이보림(李寶林), 밀직사 판사(密直司判事) 신 한방언(韓邦彦), 사신(使臣) 조인벽(趙仁璧), 상의 신 우인열(禹仁烈), 지사(知司) 신 조사민(趙思敏), 신 이림(李琳), 상의 신 홍인계(洪仁桂), 동지(同知) 신 심덕부(沈德符), 첨서(簽書) 신 강군보(姜君寶), 동지 상의 신 강영(康永), 동지 신 도길부(都吉敷), 상의 신 김용휘(金用輝)ㆍ신 김광부(金光富), 동지 신 안종원(安宗源), 첨서 상의 신 곽추(郭樞), 동지응양군 상호군(同知鷹揚軍上護軍) 신 박임종(朴林宗), 부사(副使) 신 이영(李榮), 상의 신 우현보(禹玄寶), 부사 신 배극렴(裴克廉), 상의 신 지용기(池湧奇)ㆍ신 설사덕(薛師德), 부사 신 유실(柳實), 상의 신 이인립(李仁立), 제학(提學) 신 윤방안(尹邦晏), 부사 신 유만수(柳曼殊), 상의 신 왕빈(王?), 부사 신 목충(睦忠), 제학 상의 신 윤진(尹珍), 부사 상의 신 박수경(朴脩敬), 부사 신 송광미(宋光美) 등이 소장(疏狀)에 서명(署名)하여 아뢰기를, “공손히 생각하건대, 주상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 장년기이며, 착하고 공경함이 날로 향상하여, 종묘를 받들고 국가를 다스림에 부모님이 낳아 길러 준 은혜와 부모님의 죽음을 슬퍼함과 그리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을 밤낮으로 간직하고 계셔서, 엄숙하고 공손하고 공경하며 두려워하시니, 비록 지극히 착한 덕(德)일지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습니다. 신 등은 직책을 봉행함에 어두움을 무릅쓰고 오직 선왕(先王)이 부탁하신 중책을 견디어 전하에게 보답하지 못할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선왕의 춘추 12세였는데, 중국의 서울에 입조(入朝)하니 황제의 총우(寵遇)가 비길 데 없었습니다. 기축년에 종친인 위왕(衛王)의 딸에게 장가들어 북정(北庭) 수천 리의 땅에 친영하였삽고, 기묘년에 황제의 명을 받고 우리 나라에 내려오실 때에 제서(制書)로 승의공주(承懿公主)를 봉하셨습니다. 을사년 2월 16일에 공주가 훙(薨)하니, 군신(群臣)들이 호(號)를 인덕공명 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라 올리고, 4월 임진일에 정릉(正陵)에 장사지냈습니다. 부고가 가니 황제가 제령(制令)으로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라는 호를 추증사셨사온데, 슬프게 생각하신 까닭으로 가등(加等)한 것입니다. 갑인년 9월 23일에 선왕이 훙하시자 군신(群臣)들이 경효대왕(敬孝大王)이라는 호를 올리었습니다. 10월 경신일에 현릉(玄陵)의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에 장사지냈사온데, 이것은 대체로 두 분의 명복을 추복(追福)하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적을 기재할 비석은 선왕께서 중국에서 구해 오신 것입니다. 돌이 도착하였으나 공역(工役)이 한창 많을 때였기 때문에 아직 새기지 못하였더니, 이제 공사 감독관인 척산군(陟山君) 신 박원경(朴元鏡)과, 밀양군(密陽君) 신 박성량(朴成亮) 등이 공사를 마쳤다고 말하고 비석에 글을 새기기를 청합니다. 신 등은 그윽히 말하기를, ‘신 색(穡)이 비문을 짓고 신 수(脩)가 쓰며, 신 중화(仲和)가 전자(篆字)를 쓰게 하면 마땅하겠다’고 하고,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청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네 색(穡)은 일찍이 문묵(文墨)으로써 우리 선고(先考)를 섬기었으니, 선고의 큰 덕을 드러내 밝혀서 끝없이 드리워 보이는 것은 너의 직책이다. 삼가 봉행하라’ 하셨습니다.” 하였다. 신 색은 간절하게 스스로 헤아려 보니 밝으신 명에 걸맞게 따르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감히 하교를 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삼가 상고하여 보니, 이 절은 옛날에는 시흥종(始興宗)에 예속되었는데, 여러 번 그 현판을 고쳐서 광암사(光巖寺)니, 운암사(雲巖寺)니 하였다는 것이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의 기록에 기재되어 있다. 산봉우리의 이름을 무선(舞仙)이라 하고, 물 이름을 주지(酒池)라고 한 것은 모두 가리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선왕(先王)께서 불전(佛典)에 능통하였으며 선종(禪宗)을 숭상하였다. 드디어 말하기를, “불법은 본래 둘이 없다. 하물며 사원(寺院)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조계종(曹溪宗)의 천화사(天和寺)를 시흥종(始興宗)에 예속시키고 말하기를, “감히 다시 광암사를 돌아보지 말라.” 하였고, 광암사는 조계종에 예속시키고 말하기를, “감히 다시 천화사(天和寺)를 바라지 말라.” 하였으니, 싸움의 실마리가 여기에서 끊어진 것이다. 십대사찰(十大寺刹)에 들어가니 차례로는 첫째가 된다. 곧 동(洞)을 광암동(光巖洞)이라 명명하고, 현판을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라고 제목하였으니, 광통보제란 말은 대체로 이(利)와 은택이 물(物)에 미쳐서 통하지 아니하는 것이 없고, 구제하지 않는 것이 없게 하고자 함이다. 처음에 공주가 훙하였을 때, 산릉의 터를 보기 위하여 사천대신(司天臺臣)이 그의 속료(屬僚) 경강(景岡)ㆍ서원(胥原)을 거느리고 안 간 곳이 없었는데, 광암동에 들어가서 좋은 곳을 복정(卜定)하였다. 장차 장사를 지내려고 할 때에, 임금이 사천(司天)인 신하 우필흥(于必興)에게 면대(面對)하여 타이르기를, “조금 동쪽으로 옮기고 그 한중간을 사용하지 말아라. 다른 날 나를 그 서쪽에 장사지내어 조금이라도 한쪽에 치우치는 일이 없게 하여라.”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선왕께서는, 해로하지 못하고 태어남은 반드시 죽음이 있다는 것을 더욱 느껴서, 그 관청에 명하여 자신의 능실(陵室)을 지으라고 명하여 날짜를 정해 공사를 일으키니, 여러 신하들은 감히 한마디의 말도 내지 못하였다. 해마다 봄ㆍ가을에 좋은 날을 가려서 현릉(顯陵)의 친묘(親廟)의 능실을 청소하여, 절하고 예(禮)를 마치면 정릉(正陵)에 거둥하여 서성거리며 둘러보곤 하다가 해가 다해서야 떠나가는 것이었다. 조신(朝臣)이 벼슬에 제배(除拜)되어, 삼가 각문(閣門 여기에서는 능실의 합문(閤門))에 나아가 사은하고, 출사(出使)하는 관원의 조사(朝辭)나 조참(朝參) 때에는 다 능(陵) 아래에 나아가 예를 행하고, 절사(節祠) 때에는 백관들이 성찬(盛饌)을 차려서 조전(助奠)하여 오래 갈수록 더욱 더 삼갔으니 아, 예가 변함이요 정(情)이 드러난 것이다. 정으로 인하여 예를 일으킴이 지극하다. 신축년에 병란을 피하여 남쪽으로 거둥하였다가 계묘년에 경도(京都)로 돌아와서, 성남(城南)의 흥왕사(興王寺)를 행궁으로 삼았더니, 적이 한밤중을 틈타서 내정(內庭)에 몰래 들어왔다. 임금이 그것을 알고 문예부(文睿府)의 밀실에 옮겨 갔는데, 노국대장공주가 그 문 곁에 앉게 되었더니, 적이 그 앞에 칼날을 드러내게 되어 매우 급급하고 위태하였으나, 감히 그 독수(毒手)를 함부로 하지는 못하므로 장수와 정승이 들어가 구제할 수 있었다. 지금 이른바 흥왕공신(興王功臣)이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 보우(保佑)한 공은 비록 제갑(提甲)에 비하더라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노국대장공주는 그윽하고 한아하며 정숙하고 고요한 덕성을 타고 나서, 옛날 주(周) 나라 문왕(文王)의 짝과 비기기에 넉넉하다. 15년 동안에 일찍이, 터럭만한 사사로운 청알(請謁)도 없었으며, 또 그의 공이 빛나기가 이와 같으니, 마땅히 그 영화를 누려서 그 보답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미월(彌月 임신 후 만 10개월)의 생산(生産)에서 마침내 그 몸이 죽어, 온 나라 신민들은 슬픔이 뼈에 사무치니, 비록 백천 년이 지난들 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이 절을 지은 까닭이도다. 더군다나 지금 선왕의 하늘에 계신 신령을 여러 신하들이 그 말소리를 듣고 그 밝은 빛을 친근할 수 없으니, 그의 몸과 혼백을 감춘 곳에 힘을 다할 것을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또 양부(兩府)의 대신들이 반드시 광암사에 비석을 새기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 절의 신구(新舊)의 토지와 노비와 보원(寶原), 고해(庫?), 전고(典庫)와 공응 공판도감(供應供瓣都監)의 토지와 노비와, 전물(錢物) 같은 것은 철권(鐵券)에 기록하고 황금의 인장(印章)을 찍어, 임금과 신하가 같이 맹세하고, 사책(史冊)에 기록하여 명산(名山)에 장치(藏置)하였다. 그 맹세한 말에 이르기를, “종묘와 사직의 여러 신(神)과 천(天)과 용(龍)으로부터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이것을 위에서 보고 계신다. 이 맹세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이고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면 돌에 새긴 뒤를 기다리지 않고도 그것의 보존은 무사할 것이다. 아, 그의 생각함이 원대하구나.
그 공정(工程)을 상고하여 보니, 임자년의 봄에 경영하여 정사년의 겨울에 준공하였다. 미륵전ㆍ관음전ㆍ해장의 집과, 천성(天星)의 위치, 안팎 선사(禪思)의 집에 일을 보는 이는 질서가 있고, 살고 있는 중들은 승사(僧舍)가 있다. 식당과 객실과 창고와 부엌과 욕실과 종고(鐘鼓)의 누각 등, 모두 집으로 된 것이 1백여 동이나 된다. 그 구조가 교착ㆍ치밀하고, 지붕과 처마는 새가 날개를 펼친 것 같고, 꿩이 높이 날아오른 것 같다. 부벽(浮碧)은 비늘처럼 즐비하고, 단청은 노을처럼 현란하다. 범패(梵唄)의 기구와 연등의 공구(供具) 등, 온갖 필요한 것은 하나도 완비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질서가 정연하고 빛남이 찬연하다. 크게 삼회(三會)를 열어 낙성식을 거행하니, 불사(佛寺)에서 할 일은 끝난 것이다.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의 마음이 거의 스스로 위로되고, 또한 유감이 없게 되었다.
신 색(穡)은 공손히 생각하니, 선왕이신 경효대왕(敬孝大王)께서는 총명하고 신성(神聖)하여 믿음을 주장하고 공순으로 행하셨다. 천지를 공경하여 교사(郊社)에 정성을 다하고, 조종(祖宗)을 공경하여 종묘의 가을 제사와 겨울 제사에 몸소 강신(降神)의 예를 행하셨다. 적전(籍田)을 몸소 경작하여 백성들보다 먼저 농사하시고, 여러 산릉을 수리하여 추원(追遠)의 도리를 다하셨으며, 임금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眞殿)을 모두 새롭게 하고 모두 완비하게 하였다. 중국을 높여 제후의 법도를 삼갔으니, 천하의 달통한 예절이요, 착하신 부왕을 섬겨 아들의 직분을 다하였으니 천하의 지극한 효도이며, 어진 원자(元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바로잡았으니 천하의 큰 계책이셨다. 외적의 침입을 막아 업신여김을 방어하였으니, 천하가 그의 지혜를 추중(推重)하고, 옥사를 의논하여 형법을 느슨하게 하니, 천하가 그의 용서함을 존중하였으며, 곤궁한 사람을 돌보고 우환 있는 사람을 구휼하여 주시니, 천하가 그의 은혜에 감격하고, 산 것을 놓아 주고 죽이기를 금하시니, 천하가 그의 인정(仁政)에 돌아갔다. 아악(雅樂)을 바로잡고 복장을 변별하며, 조정의 의절을 강구하고, 예속을 일으켜 높이시어 한 시대를 창성함이 고대를 능가함이 매우 많다. 다만 그 만난 때가 어려움이 많고 수(壽)를 받음이 길지 아니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보양(保養)의 은택을 입기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아, 슬프다. 아, 슬프다. 이 절에 사는 모든 자로 그 도(道)로써 자임하는 이는 반드시 말하기를, “내가 능히 국가를 복되게 할 수 있다. 내가 능히 귀신과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니, 거의 그 말을 실천한다면 다행한 일이겠다. 신 색(穡)은 삼가 손으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올린다.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밝고 밝고 빛나고 빛남은 / 明明赫赫
경효대왕의 덕이요 / 敬孝之德
엄숙하고 엄숙하며 온화하고 온화함은 / 肅肅雍雍
노국공주의 모습일세 / 魯國之容
금슬의 낙으로 벗 삼더니 / 友之琴瑟
장사에는 그 묘혈을 같이 했네 / 藏同其?
황지 신령하고 창성하여 / 黃紙靈昌
상서롭지 않은 것을 꾸짖네 / 訶禁不祥
절집을 이미 지으니 / ?林旣作
금빛과 푸른 빛이 빛나도나 / ?耀金碧
용과 코끼리가 차고 밟으니 / 龍象蹴踏
조석으로 종고 소리로다 / 鍾鼓朝夕
제사에는 풍성함이 있고 / 有祀其?
바람은 서늘하다 / 有冷其風
신이 뜰에 오르고 내리니 / 陟降庭只
향기가 발산하여 감통하도다 / 焄蒿感通
왕국에 복을 주시니 / 錫祚王國
자손이 천억이네 / 子孫千億
신민들은 살 곳을 정하여 / 臣民奠居
편안하고 즐거워하는 얼굴빛을 보겠도다 / 而康而色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은 / 而至於斯
부처의 위력에 유래한 것이다 / 繇佛之威
아득하고 먼 삼계 속에서 / 茫茫三界
부처님 아니면 어디에 귀의할 것인가 / 匪佛曷歸
강물은 끊어질지언정 / 江流可斷
산의 돌은 타서 없어질지언정 / 山石可爛
오직 이 불교의 도량만은 / 惟此覺場
나라와 더불어 끝이 없으리라 / 與國無疆
너희들 후세의 사람에게 고하노니 / 告?來者
이 새긴 글을 볼지어다 / 視此刻章


[주D-001]부모님의 죽음을 …… 마음 : 《예기(禮記)》 〈祭義〉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면 군자는 그것을 밟고 슬픈 마음을 두고, 봄에 비와 이슬이 내리면 그것을 밝고 놀라움 있어 장차 부모님을 뵈올 듯이 한다고 하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계절이 바뀜에 따라 그리워함을 말한다.
[주D-002]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 : 고려 신종(神宗) 원년에 설치한 관청으로, 국내의 산천의 쇠한 기운을 보익(補益)하여 기업(基業)을 연장하는 일을 맡아 봄.
[주D-003]천(天) …… 팔부신장(八部神將) :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덟 신장(神將)으로, 천(天)ㆍ용(龍)ㆍ야차(夜叉)ㆍ건달배(乾達婆)ㆍ아수라(阿修羅)ㆍ가루라(迦樓羅)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喉羅伽)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