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墓誌)
중대광 현복군 권공 묘지명 병서 (重大匡玄福君權公墓誌銘) 幷序
이색(李穡)
권(權)씨는 김행(金幸)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신라의 대성(大姓)이다. 복주(福州 안동)의 태수(太守)로 있었는데, 고려의 태조(太祖)가 이미 왕위에 오른 뒤에 신라를 공경하여 복주에 이르자, 행(幸)이 천명에 돌아간 바를 알고서 온 고을을 들어 항복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행은 가히 권도(權道)가 있다고 이를 만하다.” 하고, 인하여 권(權)이란 성(姓)을 내려 주었던 것이다.
후세에 내려오면서 이름난 사람이 많았으니 문청공(文淸公) 훤(?)이 무거운 명망이 있었고, 첨의찬성사 국재선생(僉議贊成事菊齋先生) 보(溥)는 벼슬이 총재(?宰)였으며, 문장과 도덕이 한때의 으뜸이었고, 송재선생(松齋先生) 준(準)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하고 막료를 두게 되었는데, 겸허하고 공손하여 절의를 지키고 집에 있기를 잘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을 기울여 향모하였는데, 이 3대가 잇달아 지공거(知貢擧)로 있었던 바 그 문생들 중에서 현달한 관원이 많이 나왔었다. 이로 인하여 부귀를 부러워하고 예법을 사모하는 자는 모두 권씨에게 돌아갔고, 의릉(懿陵)이 공의 딸을 수비(壽妃)로 삼았고 영릉(永陵)이 공의 누님의 딸 홍(洪)씨를 맞아 화비(和妃)로 삼았으니, 역시 권씨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공이 비록 문벌의 배경으로 인하여 영달함에 이르렀으나, 마음속으로는 매우 즐거워하지 않고 오직 절의를 중히 여기고 있었으므로, 세상에서 이로 말미암아 그를 훌륭하게 알았다.
공의 이름은 염(廉)이요, 자는 사렴(士廉)이니, 송재가 밀직사 오인영(吳仁永)의 딸과 결혼하여 대덕(大德) 임인년 10월 기사일에 공을 낳았다. 10세에 함경전녹사(含慶殿錄事)에 보직되어 연우(延祐) 갑인년에 별장(別將)으로 옮기고, 그 이듬해 보마배 행수(寶馬陪行首)에 선발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낭장으로 승진되었고, 정사년에는 원 나라 서울 북경에 갔다. 무오년에 삼사부사(三司副使)에 임명되어 봉상대부(奉常大夫)에 올랐고 그 해 여름에 본국으로 돌아왔다가 지치(至治) 계해년에 또 북경으로 가서 원 나라 황제가 있는 곳으로 나아가 받들었다. 태정(泰定) 갑자년에 중정대부사복정(中正大夫司僕正)을 더하였고, 이듬해 원 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부만호(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를 제수하니 이는 대개 세습으로 받던 관직이었다.
또 이듬해에 응양군대호군으로 고쳐 주고, 또 다음해에 선군별감이 되어 전토를 법도 있게 나누어주니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천력(天曆) 무진년에 북경으로 갔다가 지순(至順) 경오년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정순대부 좌상시(正順大夫左常侍)에 임명되고, 뒤에 지원(至元) 을해년에 현복군(玄福君)에 봉하니 공이 도량이 맑아 공무 다스리기를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축년에 숭교리(崇敎里)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운금루(雲錦樓)라 편액 해 붙이니 시중 익재(益齋)가 그 기문을 지었다. 꽃이 필 때마다 성찬을 베풀고서 귀빈을 맞이하여 존공(尊公)에게 헌수(獻壽)하고 자손들이 모두 모여서 즐기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다 흠모하였다. 무인년 3월에 의릉(毅陵)이 말하기를, “현복군은 더불어 정사를 의논할 만한 사람이다.” 하고, 공에게 광정대부 첨의찬성사(匡靖大夫僉議贊成事)를 더하였다. 그때 연남(燕南)의 양재(梁載)가 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공이 그의 사람됨을 하찮게 여겨 예(禮)로써 같이 사귀지 않으니, 양재가 깊은 원한을 품고 극력 왕의 명을 저지하였다. 이듬해에 다시 현복군에 봉하고 1년이 지나서 공이 병으로 자택에서 돌아가니, 때는 경진년 4월 7일이었다.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는 공의 숙부이다. 슬프게 울면서, “권씨의 자제에 만호(萬戶)보다 더 어진 사람이 없어서 나는 일찍이 그가 우리 종족을 보호하여 주기를 바랬 더니, 하늘이 어찌하여 우리 집의 어진 자제를 이렇게 급하게 빼앗아 갔단 말인가.” 하였다. 정헌공은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여 아부하지 않았으며, 또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鑑識)이 있었으니, 이것으로도 공이 착함을 가히 알 수 있다.
공은 부귀한 가문에서 자라났으되 아름다운 장식을 물리쳤고, 남의 경사나 조문 등에도 반드시 몸소 갔으며, 남의 장사를 치를 때에는 자기 친척이나 붕우를 불문하고 검은 갓과 흰 옷으로 조상하였고, 슬퍼하는 빛이 안면에 나타났으므로, 보는 사람이 그 정성에 심복하여 모두 따를 수 없다고 말하였다. 평생 남과의 교제를 잘하여 그들이 환란을 만나면 힘을 다하여 구원하여 주고 일이 해결된 뒤에라야 비로소 손을 떼었으며, 비록 잔치를 벌여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나 음악과 여색을 즐기지 않았고, 또 활 쏘고 말 달리기에 능하여 사냥하는 데 정도가 아닌 궤우(詭遇)의 법을 쓰지 않아도 얻는 것이 매우 많아서 무부(武夫)들도 모두 그의 능란함을 칭찬하였다. 그가 가장 즐겨하지 않는 것은 작록(爵祿)이었고, 어버이의 마음을 얻고 마음을 얻으려는 것이 그이 가장 큰 욕망이었다.
공이 섬기고 벗하던 자로는 익재(益齋) 이 시중(李侍中)ㆍ회안(准安) 장순공(莊順公)ㆍ양파(陽坡) 홍시중(洪侍中)ㆍ안상헌(安常軒)ㆍ안근재(安謹齋)ㆍ홍당성(洪唐城)ㆍ김언양(金彦陽)ㆍ민급암(閔及菴)ㆍ최졸옹(崔拙翁)ㆍ평리 이권(評理李權)ㆍ복야배천경(僕射裴天慶) 등인데 이는 모두 당대의 호걸로서, 문장이며 정치며 말달리기며 활쏘기에 있어 사람들이 지금까지 대종(大宗)으로 삼고 있는데, 공이 그 속에서 교유하는 사이에 익히고 보아서 자연히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또 작고한 시중 김일봉(金逸逢)을 초빙하여 몽고어(蒙古語)를 익혀서 통하는 것이 많았다. 그 타고난 재능의 아름다움이 이같이 많았는데, 하늘이 연수를 주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더란 말인가.
공이 죽을 때에 그 조부모와 부모가 무탈하였으니, 그 조부모와 부모의 마음은 어떠하였겠으며, 공의 목숨이 장차 끊어지려 할 때에 그 조부모와 부모에게 생각이 미쳤을 것이니, 그의 심정은 또 어떠하였겠는가, 아, 슬픈 일이로다. 부인 조(趙)씨는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 시호 충숙공(忠肅公) 조련(趙璉)의 딸로서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나 아들을 가르쳐 인도하는 데 법도가 있어 종족들이 이를 칭도하였다. 공이 돌아간 지도 이제 벌써 30여 년이다. 여러 아들이 모두 달관(達官)이 되어 능히 그 가문의 명성을 이었으니 구천지하에 있는 영혼인들 어찌 느껴 아는 바 없으리요.
공이 돌아 갈 때에 나의 나이 겨우 13세였으니, 당시 13세의 동자가 공의 유당(幽堂)의 명(銘)에 붓을 잡으리라고 누가 일렀겠는가. 아, 모두가 가히 감개로운 일이라 하겠다. 공의 여러 아들이 모두 나와 더불어 친한이 있는지라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므로 그 집의 세계(世系)와 벼슬의 경력을 서술하고 자손을 기록한다.
장남 용(鏞)은 선수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부만호 중대광 현성군(宣授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重大匡玄城君)이요, 차남 현(鉉)은 선수왕부단사관 봉익대부 판도판서 상호군(宣授王府斷事官奉翊大夫版圖判書上護軍)이요, 삼남 호(鎬)는 봉익대부 전법판서 상호군(奉翊大夫典法判書上護軍)이요, 사남 균(鈞)은 선수봉의 대부 융상제점소제점 봉익대부 전공판서 상호군(宣授奉議大夫隆祥提點所提點奉翊大夫典工判書上護軍)이요, 막내아들 주(鑄)는 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中正大夫三司左尹進賢館直提學知製敎)이다. 장녀는 수비(壽妃)요, 차녀는 원조 한림학사 승지 영록대부(元朝翰林學士承旨榮祿大夫) 보달실리(普達實理)에게 출가했고, 삼녀는 봉익대부 판전의사사(奉翊大夫判典儀寺事) 오중화(吳仲和)에게 출가했고, 사녀는 중정대부 전의령 보문각직제학 지제고(中正大夫典儀令寶文閣直提學知製敎) 염국보(廉國寶)에게 출가했고, 막내딸 선수정동행중서성 도진무사도진무 충근찬화공신 광정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宣授征東行中書省都鎭撫司都鎭撫忠勤贊化功臣匡靖大夫政堂文學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 원송수(元松壽)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로 남녀 약간 명이 있으니 현성군(玄城君)이 2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 준(濬)은 행수 별장(行首別將)이요, 차남 연(演)은 산원(散員)이며, 맏딸은 별장(別將) 민양(閔亮)공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중랑장 송인수(宋仁壽)에게 출가했으며, 다음은 집에 있다. 단사관(斷事官)이 1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 수안(壽安)은 성균 학생(成均學生)이요, 장녀는 도제고 판관(都祭庫判官) 김균(金?)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보마배행수별장(寶馬陪行首別將) 박자안(朴子安)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별장(別將) 김을부(金乙富)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판서(判書)가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징(澄)은 행수 낭장(行首郞將)이요, 차남 환(澣)은 성균 진사(成均進士)요, 삼남 담(湛)은 전보도감 녹사(典寶都監錄事)이며, 맏딸은 좌우위록사(左古衛錄事) 홍희충(洪希忠)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별장(別將) 한휴(韓烋)에게 시집갔다. 제점(提點)이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홍(弘)은 성균 학생(成均學生)이요, 딸은 모두 어리다. 좌윤(左尹)이 2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훈(壎)이요, 차남은 식(埴)인데, 모두 어리고 딸도 또한 어리다.
외손 약간 명이 있으니, 승지(承旨)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습득려(拾得驢)이며 딸은 어리다. 오(吳)씨가 1남 4녀로 장남 제보(齊甫)는 흥복도감 녹사(興福都監錄事)요, 딸은 모두 어리다. 염(廉)씨가 2남 1녀를 두어 장남 치중(致中)은 목릉직(穆陵直)이요, 차남 치화(致和)는 창릉직(昌陵直)이며 딸은 어리다. 원(元)씨가 2남을 두었으니, 장남 서(序)는 박두점 녹사(?頭店錄事)요, 차남은 상(庠)이니 사경원 판관(寫經院判官)이다. 공을 장사한 묘소는 개성현대평원(開城縣大平院) 서쪽 산에 있다. 명(銘)하기를,
이미 어버이에 효도하고 / 旣孝于親
또 사람에게 믿음을 받았으며 / 而信於人
벼슬 또한 군에 봉해졌으니 / 位又封君
그 몸이 현달하도다 / 顯矣其身
천자께서 탄식하시고 / 天子曰?
호부를 내리시니 / 錫之虎符
가문을 잘 이어 / 善繼家門
그 빛이 해동에까지 넘쳤도다 / 光溢海隅
아들 많이 두고 장수하는 사람이 / 多男而壽
세상에 많기도 하건만 / 世則多有
한스럽게도 공에겐 부족하였으니 / 獨慊於公
그 누가 방해하였던고 / 誰其??
오직 일시의 은총은 / 惟時之寵
사람이 어질지 않으면 중하지 않을 것이나 / 匪賢不重
저 무덤이 황무할 지라도 / 公名不磨
공의 이름은 민멸되지 않으리라 / 有荒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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