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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유원 고려국 충근절의 찬화공신 중대광 서령군 시문희 유공 묘지명 병서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3:38

묘지(墓誌) 
 
 
유원 고려국 충근절의 찬화공신 중대광 서령군 시문희 유공 묘지명 병서 (有元高麗國忠勤節義贊化功臣重大匡瑞寧君諡文僖柳公墓誌銘 幷序 )
 

현릉(玄陵) 공신에 문희공(文僖公)이 있으니 성은 유(柳)씨요, 이름은 숙(淑)이며, 자는 순부(純夫)이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시학(侍學)으로 현릉을 따라 북경에 가서 머물렀고 11년 만에 새 책력을 받아가지고 동국으로 돌아와서 정사의 기밀(機密)에 15년 동안 참여하여 관장하였고, 벼슬에서 사퇴하고 고향으로 물러가 취성(鷲城)의 화란을 피한 지가 4년 동안이었다. 이미 졸한 지 4년 만에 취성이 복주(伏誅)되었고, 또 6년을 지나서 태실(太室)에 배향되었으며, 또 3년을 지나서 한산(韓山) 이색(李穡)이 그 무덤에 명(銘)하니, 아들 밀직공(密直公)의 요청으로 된 것이다. 아, 어찌 차마 명하겠는가. 지정 병술년에 선군 가정공(稼亭公)이 동방에 새 책력을 반포하려고 올 때에 문희공이 따라왔기 때문에 내가 비로소 직접 사귈 수 있었다. 그 뒤에 같이 현릉을 섬겨 내가 혹시 말을 망발하여 임금의 노여움에 부딪치면 공이 매양 이를 구제하였으니, 그 묘에 명을 쓰는 것은 의리상 사양하지 못할 점이 있다. 그 사위 이행(李行)이 지은 공의 행장을 상고하건대, 유씨는 서주(瑞州) 사람이다. 공기(公器)라는 분은 승봉랑 합문지후(承奉郞閤門祗候)요, 굉(宏)은 증 첨의평리 상호군이며, 성계(成桂)는 통의대부 태상경 지다방사(通議大夫太常卿知茶房事)이니, 공의 증조ㆍ조부ㆍ부친의 3대이다. 어머니는 강(姜)씨이니, 증 도첨의찬성사(贈都僉議贊成事) 문세(文世)가 공의 외조부이다. 부인으로는 양(楊)씨와 오(吳)씨가 있었다. 아들 실(實)은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商議會議都監上護軍)이요, 후(厚)는 봉상대부 군부총랑(奉常大夫軍簿摠郞)이며, 딸이 셋이 있었으니, 큰 딸은 중현대부 선공령(中顯大夫繕工令) 김자충(金子?)과 승봉랑 판도좌랑 최정유(崔正濡)에게 출가하니, 이는 양씨의 소생이고, 하나는 선덕랑 의영고부사(宣德郞義盈庫副使) 이행(李行)에게 출가하였으니, 이는 오씨의 소생이다. 손자 몇 명이 있으니, 밀직부사의 아들 혜강(惠剛)은 별장(別將)이요, 혜남(惠南)은 부도(浮圖 불교)의 법을 배웠고, 혜화(惠和)는 산원(散員)이며 딸은 정사년 과거에 장원(狀元)하여 승봉랑 전의주부(承奉郞典儀注簿)인 성석인(成石?)에게 출가하였다. 총랑(摠郞)은 아들 기(沂)와 한(漢), 딸 하나가 있다. 외손 몇 명이 있으니 선공령의 아들은 분(扮)과 담(潭)이요, 부사의 아들은 적(?)과 적(迹)이며 딸 하나가 있다. 좌랑은 딸 하나뿐이다. 공이 처음 입학할 때에 정사(精舍)의 주인이 꿈에 원우(院宇)를 깨끗이 소제함을 보고, “어째서 이렇게 소제하느냐?” 물으니, 대답하기를, “유승지(柳承旨)가 온다.” 하더니, 다음날 공이 도착하는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나이 16세에 신미년 진사과에 합격하니, 간의대부 김우유(金右?)가 시관(試官)이었고, 25세에 경진년 급제과(及第科)에 합격하니 정승 균헌(筠軒) 김영돈(金永暾)과 찬성사 근재(謹齋) 안축(安軸)이 공의 좌주(座主)였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안동사록(安東司錄)에 선발 임명되었는데, 때마침 현릉(玄陵)이 왕대제(王大弟) 강릉부원군(江陵府院君)으로 원 나라 황제에게 입시하게 되니, 공은 벼슬을 버리고 따라갔다. 4년이 지나 갑신년에 명릉(明陵)이 즉위하자, 강릉부원군을 따르던 요좌(僚佐)들 가운데 절의를 지키지 않은 자가 많았으나 공만이 홀로 변하지 않으니, 명릉이 이를 의롭게 여겨 겨울에 길창부 전첨(吉昌府典籤)에 제수하였고, 다음해 개성참군(開城參軍)에 올랐으나 공은 더욱 굳게 의리를 지키고 딴 마음이 없었다. 일찍이 한 번 어버이를 뵙기 위해 나라에 오니, 사관과 한림원에서 서로 소를 올려 공을 천거하여 춘추관 수찬관에 보직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유림은 중요하게 선발되었다. 내 비록 재주가 없으나 또한 나의 어버이를 위로하여 드리게 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자리에 나가니, 이는 바로 책력을 반포하던 해였다. 다음해 정해년에 충렬(忠烈)ㆍ충선(忠宣)ㆍ충숙(忠肅)의 실록을 편수해 완성하자, 공에게 명하여 역마로 달려가서 해인사고(海印史庫)에 간직해 두도록 하였다. 가을에 삼사도사(三司都事)로 옮기고, 즉시 벼슬을 버리고 북경으로 갔다. 이때 전선(銓選)을 맡은 관원이 말하기를, “유사관(柳史官)은 사직(史職)에 있으면서 이미 공로가 있었으니, 마땅히 기록하여 등용해야 합니다.” 하여, 6품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명릉(明陵)이 돌아가시자, 왕 정승(王政丞)이 창의(倡議)하여 황제에게 표문을 올려 현릉(玄陵)으로 왕위를 잇게 하기를 청하고, 또 기로(耆老)와 여러 관원의 글을 중서성에 진달하니, 실로 가정공(稼亭公)이 그 붓을 잡았던 것이다. 조석 사이에 명이 곧 내리게 되었는데, 공은 모친이 병환 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청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를 말리니, 공은 말하기를, “충(忠)과 효(孝)가 명칭은 다르나 실상은 같은 것이요 본말에 있어서만 차례가 있을 뿐이다. 효도를 폐한다면 충성이 장차 어디서 나오겠는가. 또 더욱이 충성을 바칠 날은 길어도 효도할 날은 짧소. 만일에 돌아가시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후회한들 무엇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갔다. 모친은 공을 보고는 너무 기뻐서 질병이 즉시 나았다고 한다. 또 나의 선인(先人) 가정공(稼亭公)을 좇아 금강산에 유람하여 동해 해변을 두루 보고 공이 말하기를, “지금 북경의 왕저(王邸)가 또 전날과 같으니, 내가 여기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북경으로 가니, 이때가 총릉(聰陵) 원년인 기축년이었다. 신묘년 9월에 현릉이 즉위하고 돌아오던 도중에 요양성(遼陽省)에 이르러 밀직사좌부대언 군부총랑(密直司左副代言軍簿摠郞)에 제수되고, 봉상대부(奉常大夫)의 자급에 올라 예문관직제학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 지삼사사(藝文館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編脩官知三司事)가 되어 군국의 중요한 직무를 참여하여 결정하라는 왕지가 있었다. 그러나 소명(召命)이 아니면 일찍이 대내(大內)에 나아간 적이 없었다. 다음해 우대언 좌사의대부(右代言左司議大夫)에 승진되었으나 재상 조일신(趙日新)이 공을 싫어하기 때문에 공은 관직의 해면을 빌고 덕수장(德水莊)으로 물러가서 있었다. 그러나 바로 부친상을 당하였고 조일신은 불만을 품은 자들을 모아서 그들이 시기하던 사람들을 죽이더니 얼마 안 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계사년 4월에 기복(起復)되어 대언(代言)에 봉직하였고, 갑오년 2월에 좌대언 지군부사사(左代言知軍簿司事)로 옮기고, 을미년 정월에는 성균시(成均試)를 주재하여 전익(全翊) 등 99명을 뽑았으며, 봉익대부 판전교시사 예문관제학 동지춘추관사 상호군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가을에 판도판서(版圖判書)ㆍ전리판서(典理判書)로 두 번 전직되었다. 병신년에 자정(資正) 강금강(姜金剛)이 금강산에 향(香)을 내리는데, 공에게 명하여 그를 호송해 가게 하였으며, 산에 도착해서 공이 말하기를, “내가 질병이 생겨 조금 이곳에 머무르고자 하니, 공은 잘 말해 달라.” 하고서, 청련사(靑蓮寺)에서 수개월을 거주하고 있던 중 왕이 공을 부르기에 할 수 없이 조정으로 돌아왔다. 5월에 기씨(奇氏)의 화란이 일어나고 밀직(密直)으로 들어가 제학(提學)이 되었다. 새 관제가 행함에 따라 은청영록대부 추밀원 직학사 한림학사승지 상장군(銀靑榮祿大夫樞密院直學士翰林學士承旨上將軍)이 되고, 난동이 진정되자 안사공신(安社功臣)의 철권(鐵券)을 하사받으니, 공이 여러 공에게 말하기를, “공신 녹권은 곧 죄안(罪案)과도 같은 것이다. 서로 면려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하기를 곽분양(郭汾陽 곽자의(郭子儀))과 같이 하기를 바란다.” 하고, 또, “군자는 편벽되지도 당파를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니, 나는 결코 남들과 붕당(朋黨)을 맺지 않을 것이다. 한마음으로 왕실을 받들어 사적인 무리가 없으면 다행이다.” 하였다. 바로 부사(副使)로 고쳐 제수되고, 정유년에 동지상의회의도감사(同知商議會議都監事)에 승진되고, 기해년에 다시 지원제점사 천대사(知院提點司天臺事)로 승진되었다. 신축년 겨울에 사적(沙賊)이 황주(黃州)를 침범하니, 그 상황이 몹시 급박하게 되어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는데, 공이 조용히 아뢰어 남행(南幸)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국가가 믿는 것은 성지(城池)와 양식입니다. 이제 성곽이 완전하지 못하고, 창고에 저축이 없으니, 만일 적이 사교(四郊)를 포위한다면 장차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하였던 것이다. 안동부(安東府)에 이르러서는 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동수국사(樞密院使翰林學士承旨同脩國史)가 되었다. 다음해에 적이 평정되자 세 원수(元帥)의 공로가 더욱 높아지더니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독단으로 살해하고 또 말하기를, “이제 총병관을 죽였으나, 유모(柳某)가 그 속에 있어 매양 기이한 묘략을 꾸미니 이 자가 두렵다. 제거해 버리는 것이 편하다.” 하였다. 공이 이를 알고서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범하기란 어려운 것인데 이제 여러 장수들이 신을 꺼려하는 것은 다만 신이 전하의 좌우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신을 축출하신다면 신은 한낱 포의(布衣)입니다. 누가 다시 신을 입에 올리겠습니까.” 하였다. 이리하여 동경 유수(東京留守)로 내보냈다. 동경부에 도착한 지 10여 일에 공의 조치가 벌써 백성의 소망에 찼던 것이다. 국가에서 이미 원수의 죄명(罪名)을 내려 단죄하고, 3월에 지도첨의(知都僉議)로 불러들이어 광정대부(匡靖大夫)의 자급에 오르고, 충근절의찬화(忠勤節義贊化) 여섯 자의 공신 칭호를 하사하니, 아전과 백성들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공을 수개월도 머물러 두지 않고 빼앗아 가기를 이같이 빨리한단 말인가.” 하고 한탄하였다. 그해 가을에 거가(車駕)를 청주(淸州)로 옮기고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박실(朴實) 등 33명을 선발하니, 당시에 여론이 선비를 많이 얻었다고 일컬었고, 겨울에 평리제점서운관사(評理提點書雲觀事)로 옮기게 되었다. 옹주(翁主)에 봉한 홍씨(洪氏)가 남양(南陽)에 있었는데, 빈곤하여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였다. 임금이 이를 불쌍히 여기고 안렴사 이지태(李之泰)에게 수교(手敎 친필로 쓴 편지)를 내려 쌀을 내리라고 하였다. 이지태가 말하기를, “무릇 임금의 명이란 반드시 양부(兩府)를 거쳐서 밖으로 반포하는 것인데, 이제 장차 어찌해야 옳단 말인가. 받지 않을 수도 없고, 열어 볼 수도 없다.” 하고 책상 위에 그대로 놓아두니, 그 사람(홍씨)이 이를 노여워하여 다시 내전으로 보냈다. 임금은 이지태가 불공(不恭)하다 여기고, 사자를 보내어 이지태에게 착고를 채워 잡아오게 하니 그 죄를 헤아릴 수 없었다. 공이 그 불가함을 견지하니, 임금이 몹시 노하여 이르기를, “나라의 일이 모두 경들을 거쳐야만 하는가.” 하고 공을 주시하고는, “나가라.” 하니, 공이 급히 나왔다. 임금이 곧 다시 공을 부르자 공이 앞에 나아가서 엎드리고 이지태의 말을 상세히 주달하고 또 아뢰기를, “만일 전하께옵서 계속 노하신다면 신은 후세에 이를 구실로 들고 나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이에 이지태의 일을 불문에 붙이고 말았다. 후일에 공을 부르니, 공이 사죄하기를, “신이 성상의 은혜를 받아온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티끌 만한 보답도 없이 도리어 입과 혀로써 망령되이 천위(天威)에 부딪쳤으니 그 죄가 용서받지 못할 지경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황금을 하사하여 이를 위로하시기를, “경의 곧은 말을 포상하는 것이다.” 하였다. 간간이 분에 넘치는 자리에 있기 어렵다고 치사(致仕)하여 여생을 보전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오랜 뒤에 이를 허락하고 서령군(瑞寧君)에 봉하였다. 이어 선산에 성묘도 하고 치전(致奠)을 드리기 위하여 서울에 갈 것을 청하니, 다음날 다시 불렀다. 계묘년에 임금이 서울로 돌아와서 흥왕사(興王寺)를 임시 행궁으로 삼았는데, 적이 밤중을 이용하여 몰래 안으로 들어와 숙직하던 관원을 살해하므로 임금이 밀실로 피신하고 적들이 서로 말하는 소리를 들으니, 한 적이 “무슨 까닭으로 늦게 왔느냐?” 하고 묻자, 또 다른 적이 대답하기를, “홍모(洪某)와 유모(柳某)를 죽이느라고 늦었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여러 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임금을 구원하고 공도 또한 따라 들어갔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은 이미 죽어 다시 못 보리라고 생각하였다가 경의 얼굴을 보니, 그 이루어진 일에 의혹이 들었다. 경의 말을 듣고 나니, 의혹이 비로소 풀린다.” 하였다. 당일로 성안에 들어가 정당문학에 임명되고 10월에는 감찰대부를 겸하였다. 갑진년에 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영서운관사(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上護軍領書雲觀事)에 승진되었고, 을사년 3월에 서령군(瑞寧君)에 봉하였으니, 신돈 때문이었다. 신돈이 대궐 안을 출입할 때에 밖으로는 승려를 가탁하고 안으로는 간사한 꾀를 품고 있으므로 공이 점점 억제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머리를 길러 관을 씀에 이르러서 영도첨의(領都僉議)가 되고 상벌의 권한을 잡고는 대신들을 모략 중상하니, 그 기염은 실로 무서울 만하였는데, 공은 매양 불러도 절대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해 가을에 이르러 전리(田里)로 돌아갈 것을 청하고 이산현(伊山縣) 가야산에 집을 짓고 한가로이 만년을 보내자 경산(京山)의 초은(樵隱)선생이 시를 보내기를,
전에 위태로울 때 사직을 안정시키고 / 已向危時安社稷
다시 평지에서 신선이 되었네 / 更從平地作神仙
한 시구(詩句)가 있었다. 무신년에 신돈이 참소의 공작을 편 지 이미 오래되어 그 계획이 시행되어 공을 영광군에서 목을 졸라 죽게 하니, 때는 12월 21일이었다. 공이 물러가 은거하고 있을 때에 국사가 평일과 다름을 듣고 일찍이 눈물을 흘렸다. 그 화를 당함에 이르러서는 가족들이 공의 평소의 말에 의하여 용뇌(龍腦)를 보내며 말하기를, “달아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에 좋은 말을 보내며 말하기를, “공 스스로 택하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생각해 보면, 임금과 아버지는 하늘과 같으니, 하늘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또 생사란 천명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순하게 받아야 할 것이다. 도망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죽음을 당할 때에 얼굴빛이 평상시와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 뒤에 신돈의 죄상이 탄로되고 실각됨에 이르러 임금이 비로소 깨닫고서 몹시 애도하며 전지를 내려 공의 원통함을 씻어 주고, 다시 시호를 문희공(文僖公)이라 내리고 임자년 정월 11일에 덕풍현(德豊縣) 가야동(加也洞)에 예법대로 장사하였고, 병진년 11월에 현릉(玄陵)을 부묘(?廟)할 때에 조정에서 공의 배향을 논의하여 공이 이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 이는 사후에 베풀어진 영전(榮典)의 대강이다. 그 계획의 치밀함과 조행(操行)의 자상함을 말한다면, 사람을 천거하여 쓰는 데 있어서는 일찍이 그 본인에게 말하는 법이 없었고, 사람을 죄주고 파출하는 데는 독단하여 결정하는 적이 없었으며, 큰 일을 당하거나 큰 의심을 결단하는 데 있어서도 일찍이 그 사이에 의심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대개 정명(精明)과 인서(仁恕)의 두 가지를 다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 맏아들이 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문희공의 자질은 / 文僖有質
정결한 아름다운 옥이요 / 美玉之潔
문희공의 행실은 / 文僖有行
훈훈한 바람이로다 / 薰風之發
일을 당하여는 정밀하고 강하게 처리하고 / 遇事精彊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서 / 存心惻?
우리 현릉을 도와 / 相我玄陵
평시나 위험할 때나 한결 같았네 / 夷險一節
늙음을 고하고 물러나자 / 告老懸車
왕명을 가탁하여 죽음을 내리니 / 矯命賜?
운명을 어찌하리 / 命也奈何
하지만 때가 와서 원한을 밝게 씻고 / 時哉昭雪
태실에 올라 배향하니 / 升于大室
진실되도다 그 공렬이여 / 允矣功烈
천도가 어김이 없어 / 天道不爽
밝게 대함이로다 / 赫如對越
무덤의 돌에 새겨 / 刻石幽室
훗날의 철인에게 고하노라 / 用告來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