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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跋) 근사재일고 발(近思齋逸藁跋)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2:49

발(跋)
 
 
근사재일고 발(近思齋逸藁跋)
 

이색(李穡)

원조(元朝) 북정(北庭)의 진사로서 고문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자에 마조상 백용(馬祖常伯庸)과 여궐 정심(余闕 廷心)은 더욱 그 뛰어난 자였다. 을유년 을과(乙科)인 설백료손(?伯遼遜) 공원(公遠)이 남방에서 배워 나이 20이 넘지 않아서 과거 공부를 다 통달하고, 사이 사이로 고문을 닦으니, 이름을 크게 떨쳤다. 이미 급제하고 한림(翰林)의 직임을 받들어 단본당정자(端本堂正字)에 선발되어 한참 만에 숭문감(崇文監)에 승진되어 바야흐로 크게 신임 기용하는 방향으로 나가더니, 정권을 잡은 자가 그의 아버지 회남(淮南) 좌승공(左丞公)과 더불어 숙원이있었던 관계로 지방으로 나와 단주(單州)를 다스리니, 유능하다는 성명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임시 우거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적들이 이미 상도(上都)를 격파하고, 요서(遼西)를 향하고 있었다. 공원이 자제들을 이끌고 단 한 필의 말로 요수(遼水)를 건너 고려로 들어왔는데, 이미 떠난 지 수일 만에 적이 대령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임금이 단본당(端本堂)에서 좇아 놀았던 까닭으로 해서 영접과 위로가 서로 있었고, 접견함에 이르러서는 예로써 대우함이 극진하여 전(田)을 부원(富原)에 하사하고, 개부(開府)의 군(君)으로 봉하였더니, 수년 동안 살다가 병으로 죽었다. 아우 되는 공문(公文)공이 평소에 그 문고(文藁)가 흐터져 유실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그 시의 기록할 만한 것을 자필로 써서 두 질을 만들었더니, 신축년에 병란을 피하다가 또 잃었던 것을 현 진주 판관 김군 자빈(子贇)이 그 한 질을 잿더미 속에서 얻어 설씨에게 돌려주었던 것이다. 설씨는 회골(回?)의 대족(大族)으로 중국에 들어와 명문이 되었던 것이니, 급제한 자가 아홉이나 되었다. 시서와 예의가 여러 대에 걸쳐 배고 젖었던 바 공원이 그 정화(精華)를 쌓아서 밖으로 발표하여 떨치고 빛내니, 그의 문장이 광명 찬란하여 곧장 백용(伯庸)ㆍ정심(廷心)과 더불어 서로 상하를 다투니, 가히 후세에 전할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신이 죽기도 전에 이미 잃었고, 잃고 또 잃어서 몇 개 없는데 이르렀으니, 그 역시 슬픈 일이로다. 이제 이 문고를 보니, 모두 소년 시절의 작품이로되, 창연(蒼然)하게 노성한 기운이 있으니, 장년의 저술한 바를 대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아들 도관총랑(都官摠郞) 천우(天佑)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 문고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김후(金侯)의 힘이다. 나의 형님 천민(天民)이 다행히도 그의 상관이 되어 장차 판에 새기어 이를 진주 향교에 장치하려 한다.” 하고, 그 연유를 서문해 주기를 청하는지라, 내 간략히 공의 나가고 물러앉은 경력의 대개와 이 편질이 다행히 있게된 것을 편말에 서술하여 다른 날에 문장을 분류하여 속편(續篇)하는 자의 고증하는 바로 삼고저 한다. 청룡(靑龍) 임자년 중추(仲秋).


[주D-001]설백료손(?伯遼遜) 공원(公遠) : 고려 공민왕 때 위구르에서 귀화한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백료손이며, 공원은 그의 자(字)이다. 《고려사》설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