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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원암연집 창화 시 서(元巖?集唱和詩序)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1:11

서(序)
 
 
원암연집 창화 시 서(元巖?集唱和詩序)
 

옛날의 군자는 그 임금을 보좌할 때에 그 의를 다하므로 그 임금이 예로 대해주는 것도 극진하여 풍부하였다. 예모가 풍부하고 의가 극진하며 뜻이 같고 기미가 합하여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은 구름이 용(龍)을 따르고, 유유한 것은 고기가 물에 있는 것과 같다. 그 늙음에 미쳐서도 휴퇴(休退)와 등용이 계속 반복되어 실컷 노닐고 한없이 편안하며, 황발(黃髮)을 드리우고 흰 머리를 얹은 나이에도 직위를 떠났다 해서 하루도 국가를 잊은 적이 없고, 의논이 있으면 결단하며, 어려움이 있으면 붙다르니, 군신의 사이가 어찌 그리도 서로 양해가 깊었던가. 나는 원암(元巖)에 모인 여러 늙은이의 연집시(?集詩)를 보고서 대개 세 번이나 감탄하였다.
주상의 남방 거둥에 있어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공(廉公),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공(李公),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공(尹公),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황공(黃公),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 홍공(洪公), 수춘군(壽春君) 이공(李公), 계성군(啓城君) 왕공(王公)이 실로 따라가게 되니, 주상께서도 심히 가상히 여기어 그 대우하는 것도 또한 예를 다하였다. 8월 병술일에 행차가 원암에 머무르고 정해일에 속리사(俗離寺)에 거둥하였는데, 이튿날에 큰비가 와서 원암으로 되돌아와 하루를 머물렀다. 여러 늙은이가 이미 편안한 몸으로 자처하고, 또 도성(都城)에 돌아가는 길이 가까워짐을 즐거워하여, 이에 술을 들고 서로 권하며 노래로 흥을 돋구는데, 대장군 김하적(金何赤)이 젓대를 불고, 장군 김사혁(金斯革)이 쟁(箏)을 타고, 창안(蒼顔) 백발이 웃음과 말로 수작하여 바라보기에 신선과 같았다.
아, 신음(呻吟)하고 상처를 입은 지가 얼마 되지 않는데 승평의 문채가 이러할 줄을 어느 뉘라 일렀으랴. 여러분이 이미 늙었으나 상(上)이 부소(扶蘇)의 양지쪽 법궁(法宮)의 안에 계시지 못함을 쓰라리게 여기어, 몸소 무기를 거느리고 번갈아서 야차(野次)에 숙직하며, 풍우(風雨)와 한서(寒暑)에도 그만두지 아니하니, 여러 관료들이 이를 본받아서 각기 제 직무를 닦아 감히 결하는 일이 없었다. 그 조석으로 주선하는 사이에 인심을 감동하게 하고 국가에 이익되게 한 것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렇다면 묘당(廟堂)에 앉아서 호령을 내는 자와 비해서 어느 것을 취택하겠는가. 저 시상(柴桑)의 도연명(陶淵明)이나 죽림(竹林)의 칠현(七賢)은 명교(名敎)의 죄인이건만, 일 좋아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림 그리고 노래하였는데, 하물며 원암의 성한 집회는 국가의 원기(元氣)가 됨에 있어서랴.
다만 모르겠다. 지금 세상에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누구이며, 노래를 잘하는 자가 누구인가. 만약 그림을 그리게 된다면 자제의 예를 갖추어 쟁 타고 젓대 부는 열에 끼이고 싶어도 이미 될 수 없는 일이거니와, 가영(歌?)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나같은 불초가 제창하지 않으면 누가 하리오. 시험삼아 보건대, 속리산이 장엄하고 숭고하여 하늘에 닿았으니 우리 후생은 마땅히 우러러볼 바가 아니랴. 여러 늙은이의 풍류와 문채가 비록 더불어 높이를 경쟁해도 가할 것인데, 어찌 노래나 그림이 있어야만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