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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증 김경숙 비서 시 서(贈金敬叔?書詩序)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5. 1. 01:09

서(序)
 
 
증 김경숙 비서 시 서(贈金敬叔?書詩序)
 

근세에 조군(趙郡) 소대참(蘇大?) 백수보(伯修父)가 국조(國朝)의 명신사략(名臣事略)을 편찬하고 또 문류(文類)를 편찬하니, 규재 선생(圭齋先生)의 말이, “백수는 배움에 여가가 있고 필찰(筆札)이 또 풍부하므로 능히 이것을 성취했다.” 하였는데, 색(穡)은 말하기를, “소공(蘇公)이 태평의 전성기에 태어나서 사방의 문학하는 선비와 교우하고, 역대의 전칙(典則)에 익숙하며 또 정민한 재주가 있으니, 유독 필찰이 풍부할 뿐 아니다. 이에 반해 궁벽한 곳에 처하고, 한직에 거하여 이미 금전이 없어서 구입하기도 어렵고, 또 책을 파는 저자가 없어서 관람할 길도 어려운데 모아 놓은 것이 하도 많아서, 수백 권에 달한 것은 유독 우리 김경숙(金敬叔)이 있을 따름이다. 김경숙은 임인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뜻이 문학에 돈독하고, 해서를 잘 쓰므로 뽑혀서 일찍이 표장(表章)을 썼는데 공민왕이 보고서 아주 칭찬하였다. 나는 대개 그를 흠모한 적이 오래였으나 수년래에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이와 같은 기특한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그 두 가지 책의 이름을 청함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뻐서 전고(典故)의 머리에는 《주관육익(周官六翼)》이라 쓰고, 문장의 머리에는 《선수집(選粹集)》이라 쓰고, 또 각각 그 이름을 정하게 된 의의를 서술하였었다. 진양(鎭陽) 임희민(林希閔)이 진신(搢紳)들에게 시를 얻어서, 김경숙에게 주려고 또 나에게 서(序)를 청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동방의 교화의 근원이 대개 기자(箕子)가 봉해진 데서 발단되었는데, 교조(敎條)가 간편하여 번문(繁文)과 말절(末節)의 번잡함이 없으므로, 후세에 인습되어 지금까지 순박하고 간략한 풍속이 남아 있다. 삼국을 차지하고라도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운 이래로, 광종(光宗)이 과거의 제도를 만들어서 선비를 취택하여 문학의 융성함이 중국에서 칭찬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 성서(成書)에 대해서는 많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김경숙이 발분해서 만들게 된 것이었던가. 그의 좋아하는 바가 이와 같을진대 그 속에 지닌 바는 짐작할 만하다. 고금을 통해서 책을 저술한 자가 많으나, 우리 삼한의 근세에는 유독 쾌헌(快軒) 문정공(文正公)이 제일이요, 그 문인 계림(鷄林) 최졸옹(崔拙翁)이 또 그 다음이다. 편집이 풍부한 것은 쾌헌을 칭하고 간택이 정한 것은 최졸옹을 칭하지만, 그러나 세상에 성행하지 못하는 것은 공장(工匠)이 옹졸하고 권질이 무겁기 때문이니, 은대집(銀臺集)ㆍ상국집(相國集)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 문장에 그칠 따름이니, 전하고 전하지 못하는 것이 급한 바는 아니다.
그러나 《주관육익(周官六翼)》은 직위에 있는 자의 좌우명(座右銘)이니, 만약 전하지 못한다면 지치(至治)의 혜택이 내리지 않을 것이니, 그 세도에 관계된 것이 어찌 중하지 아니하랴. 김경숙은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한다. 만약, ‘내가 목판에 새겨서 명산(名山)에 간직하여 후세의 군자를 기다리노니 전해짐의 넓고 넓지 않은 것은 나의 알 바 아니다.’ 한다면, 내가 김경숙에 대한 소망이나 여러 사대부가 시를 지어 찬미하게 된 것이 모두 허문(虛文)이 되고 마는 것이니, 김경숙은 아무쪼록 힘쓸지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