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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오관산 성등암 중창기(五冠山聖燈庵重創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9:12

기(記)
 
 
오관산 성등암 중창기(五冠山聖燈庵重創記)
 

건문(建文) 원년 기묘년 겨울 11월 신미일에, 도승지 신 문화(文和)가 왕명으로써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 신(臣) 근(近)을 불러서 전지(傳旨)하기를, “관산 성등암은 고려 태조 왕씨가 처음 설치한 것이다. 내가 잠저(?邸)에 있을 때에 이 집을 신축할 것을 도모하여 이제야 완성하고 전지(田地)와 노비를 시주하였으니, 너는 이 사실을 글로 지어 영원히 전하도록 하라.” 하였다.
신(臣) 권근이 엎드려 영을 받고 물러가 삼가 암자의 옛 문헌을 상고하였다. 오관산 서쪽 봉우리에 창같이 날카롭게 우뚝하게 선 돌이 있는데 사람들이 창바위라 한다. 그 산등성이는 이리 꾸불 저리 꾸불하다가 서쪽으로 꺾여서 남쪽으로 송악산과 닿았다. 왕씨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왕도를 송악산 남쪽에 건설하였는데, 술사(術士)가 진언하기를, “창바위가 우뚝 선 곳은 지맥이 둘째 번 순룡(順龍)의 폐간에 해당되는데, 하늘을 찌르듯이 서 있으니 이것은 삼재(三災)가 일어날 곳으로, 만약 삼재를 없애려면 마땅히 석당(石憧 돌로 만된 깃대)을 세워야 한다.”고 하자, 양지쪽 벼랑의 큰 돌 위에다가 돌기둥을 사방에 벌여 세워 집모양 같이 하고,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여 창바위의 재앙을 누르고, 또 명군(明君)이 계승하고 충신이 끊임없기를 발원하였던 까닭에, 왕씨는 대대로 태부시(太府寺)에게 그 등유(燈油)를 공급하게 하였다.
치화(致和) 무진년에 시중 윤석(尹碩)은 충숙왕 당시의 정승이었고, 지순(至順) 경오년에 시중 한악(韓渥)은 충혜왕 당시의 정승이었는데, 모두 양부(兩府 문하부〈門下府〉와 밀직부〈密直府〉)의 제공(諸公)과 함게 그 기름값을 보탠 것이 시주판(施主板)에 열명(列名)하였다. 홍무(洪武) 계해년에 시중 조민수(曺敏修) 등이 또 양부(兩府)와 함께 쌀 또는 베를 내어서 그 비용을 대었는데 한산 이색(李穡)이 글을 지어 기록하였고, 첨서(簽書) 유순(柳珣) 등은 성등(聖燈)을 위해서 집을 지었다. 성등(聖燈)을 왕씨 대대로 이처럼 소중하게 취급하였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는 원량(元良)의 덕과 용지(勇智)의 자질을 갖추었으며, 오직 충성과 효도로 태상왕(太上王)을 보좌하여 어려움이 많았던 나라를 널리 구제하였고, 천명에 순응하여 조선 억만 년의 왕업을 열어놓았다. 일찍이 잠저에 있을 적에 어질면서도 형장(兄長 정종)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는데, 인심이 모두 돌아왔지만 더욱 겸손한 덕을 숭상하여 실행하는 데 법도를 넘지 아니하였다. 오직 국가에 이로움이 있으면 이것을 도모하고 힘쓰셨다. 이에 무인년 초봄에 이 암자를 신축하기 시작하였다. 가을 8월에 이르러 드디어 태상왕(정종)의 명을 받들어 보위(寶位)에 나아갔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나 정사와 교화를 다시 새롭게 하여 모든 치적이 다 빛나고 사방에 근심이 없었으니, 이 성등의 공효가 있었다는 것도 대개 거짓은 아니었다.
새로 지은 불당 세 칸에 새로 그린 석가 삼존(釋迦三尊)ㆍ16나한(羅漢)ㆍ십대 제자(十大弟子)ㆍ오백 성중(五百聖衆)이 모여드는 화상(?象)을 걸었고, 동쪽에 붙은 익랑(翼廊) 3칸은 중들이 우거(寓居)하고, 서쪽에 붙은 3칸은 부엌으로 사용한 곳이며, 밭 5백 결(結)과 노비 19명을 바친 것은 성등을 계속하여 영원토록 식륜(食輪)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 유신(維新)하는 조정을 만나 무릇 법사(法事)를 빛나게 하는 일이 더욱 원만하게 갖추어질 것이니, 그 국가에 이익됨은 더욱 크고 영구할 것이며, 성수(聖壽)의 장원함과 국운의 영구함이, 이 산과 이 성등과 함께 한없이 전해지고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신 권근은 공경히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아룁니다. 이달 기해일